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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모든 죄들과, 그들이 모독하는 어떠한 불경도 용서되지만,
29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정죄의 위험에 처하리라.”고 하시더라.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더러운 영을 지녔다.”고 함이더라.
위 본문을 23-27절의 그리스도의 대화와 분리시킨 것은 28-30절의 내용이 소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즉각 제기되는 의문(혹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누구라도 제기하게 되는 의문)은 그리스도께서 그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29절을 보라: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죄를 위해 죽지 않으셨는가?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있어서도….의롭게 된다”(행 13:39)는 것을 믿지 않는가?
그런데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보라: “영원한 정죄의 위험에 처하리라.” 이 죄를 짓는 사람이 단지 지옥에 갈 위험에 처하는 것이라면 그가 만회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인가? 여러분이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않는다면 어떤 혼란에 빠지는지 알겠는가?
이 본문에 대해 위대한 설교들을 남긴 훌륭한 설교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들을 제거하셨다는 것과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다는 것, 또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한 보장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 설교자들이 본문을 설교하여 죄인들이 구원받게 한 것과 본문을 교리적으로 건전하게 해석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침례교 근본주의자가 본문에 대해 해석하는 표준적인 방향은 그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죄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과는 무관한 해석이다. 나는 수백 번 복음을 거절한 후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을 알고 있다. 남침례교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 좋은 노인" 가운데는 어릴 때부터 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고 일년에 두번씩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수십 년을 지내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중에는 칠십대가 넘어서 구원받은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들은 이 죄가 그리스도를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죄라고 정의내리는데 그것도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이 본문 어디에도 피의 대속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은사주의자들은 본문을 전혀 해석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그들은 이 죄를 지을지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를 품고 산다. 누군가 그리스도께서 23-27절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 개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죄는 성령께서 하신 일을 사탄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올바로 나누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그들의 방언, "표적들", 그리고 신유 같은 같은 일들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연막에 불과하다. 여러분이 어떤 은사주의 치유자들에게 그들이 "양떼에게서 재물을 편취하는" 사기꾼들이라고 지적한다면 그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이다. 그런 말에 대해 우리가 해 줄 말은 "얼간이들 같으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사도의 표적을 흉내내지만 사도가 아닌 자들을 거짓말쟁이들로 규명한 것에 대해 칭찬하셨다(계 2:2).
훌륭한 구령자인 J. 해롤드 스미스가 한 설교 중에 "하나님의 세 가지 금지선"이라는 설교가 있다. 그 설교에서 그는 실제로 성령을 저주한 신성 모독의 사례를 제시했다. 그의 이야기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성령을 저주한지 48시간 내에 죽은 사례도 있었다. 그 설교는 훌륭한 복음 설교의 모범이 되겠으나 이런 옛말이 있다: "모든 훌륭한 설교가 다 훌륭한 교리는 아니지만 훌륭한 교리는 항상 훌륭한 설교를 만든다."
스미스 형제가 한 설교는 은사주의자들의 가르침만큼이나 문제가 많았다. 그는 성경으로 경험을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말았다. 여러분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이런 빌어먹을 성령 같으니"라는 식으로 된다고 생각하는가? 교황처럼 "교황좌에 앉아" 하나님처럼 말하는 장면은 어떤가? 성령의 권위를 참칭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아닌가? 그렇다면 성경을 변개시킨 웨스트코트, 홀트, 샤프, 드라이버, 네슬, 알란드, 메쯔거, 테이어, 모펫, 굿스피드, 위글, 필립, 버클리, 테일러 등은 지옥에 가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성령"을 기만했으며 여러분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아닌지 임의로 취했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풍조 가운데 근년간에 "인터넷"을 통해 확산된 크리스찬 가정, 특히 목회자 가정의 십대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이 있다. 그 풍조는 불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이 성령을 저주하는 행위를 비디오로 녹화하여 게시하는 데서 기인한 것 같은데 그 청소년들이 그들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 하면서 촬영한 것이 분명하다. 온라인에 게시된 그 아이들의 "간증" 영상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와 성경을 최종적으로 완전히 거부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들이 돌아갈 다리를 불사른다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음행하고 변태 성욕에 빠지며, 주정뱅이가 되고 마약에 빠지거나 돌이킬 수 없는 지옥 같은 삶에 빠져들 수 있다. 그 청소년들이 결국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성령을 저주해서가 아니라 이 죄에 대해 단 두 구절 이상의 성구도 읽어보지 않은 이 나라의 무능한 성경 교사들과 설교자들 때문에 가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즉 그것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맞다면 여러분이 그 문제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을 얻고 사는 게 나을 것이란 말이다. 여러분의 영원한 미래가 거기에 달려 있다면 말이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그 해답을 얻기 위한 정말 복잡하고 미묘한, 고도의 지성적인 방법을 제시하겠다. 그 다음 구절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제대로 읽어보라! 즉, 성경은 신학 교육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이다. 그들이 무엇을 행했기에 "영원한 정죄의 위험"을 자기들에게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로 적용되게끔 만든 것인가?
30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예수 그리스도]가 더러운 영을 지녔다.”고 함이더라."
여러분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전혀 무의미하다! 이 구절의 시제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음을 놓치지 말라: 즉,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던 당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우리 시대에 적용될 수 없는데 지금은 예수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교회 시대에는 누구도, 구원받았던 아니던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알지 않는다(고후 5:16 주석을 보라). 주께서 예루살렘의 보좌에 앉아 계실 천년왕국 기간에는 이 구절이 사람들에게 적용되겠지만 이 시대에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은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처럼 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고(요일 3:2)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죽어서 지옥에 갔을 것이다(살후 2:11-12, 1:7-8).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들렸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나중에 성령에 의해 구원받았다(요 10:20 참고. 행 6:7, 26:9; 딤전 1:13).
들어보라, 여러분은 성경을 세심하게 살펴 읽어야 한다. 29절에서 예수께서는 율법 하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고 그들은 주님의 지상 사역기와 동시대에 살던 자들이다. 당시 주께서는 아직 누구의 죄를 위해서도 죽지 않으셨다. 만일 주께서 마귀들렸다고 비방한 그 유대인들 가운데 누구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죽었다면 지옥에 갔을 것이다. 왜 그렇겠는가? 구약 성경에는 성령을 거스른 모독에 대한 피의 대속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신약에는 그 죄에 대한 대속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분을 통하여 너희에게 죄들의 사함이 선포되었으며 너희가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였던 그 모든 일[예외 없이]에 있어서도 믿는 자는 모두[예외 없이] 그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이니라"(행 13:38-39).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7) - 예외 없이 모든 죄가 깨끗해진다!
31 그때에 주의 형제들과 모친이 와서 문 밖에 서서 주께 보내어 주를 부르니,
32 무리가 주를 에워싸고 앉아서, 주께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고 있나이다.”라고 하더라.
33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의 모친이며 또 형제들이냐?”고 하시고
34 자기를 에워싸고 앉은 그들을 둘러보신 후,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친과 나의 형제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은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시니라.
본문은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 있어 피하고 싶은 본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모친이 주목받게 하지 않으신다. 마리아는 아들에게서 전혀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주께서는 그녀를 자신의 모친이 아닌 듯이 말씀하고 계시다. 잘 보라!
"누가 나의 모친이며..."(33절). 마리아가 모친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말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의 모친이며..."(34절). 그렇다면 마리아는 해당되지 않는데 그녀가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32절).
물론 35절에 보면 마리아도 어떤 조건 하에서 주의 모친으로서의 자격이 인정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은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러나 이것은 마리아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또한 이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눅 8:2-3). 마가 요한의 모친(행 12:12), 타비다(행 9:36), 프리스킬라(행 18:2), 페베(롬 16:1-2), 로이스와 유니케(딤후 1:5), 그 외 의롭게 살고자 하는 어떤 크리스찬 숙녀도 이 자격을 갖게 된다(딤전 2장; 딛 2장; 벧전 3장). 교회 시대 동안 살았던 모든 크리스찬 여성들을 합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최소 수백만 명의 모친을 갖게 된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결코 자신의 육체적 어머니로 소개하지 않았다. 카톨릭 교도들이 예수께서 자기 모친의 중보 기도를 들으신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요 2:4에서 주께서는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마저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여인이여["어머니"가 아니다], 당신의 아들을 보소서!"(요 19:26)라고 하시면서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를 보라!"(요 19:27)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아는가? 주께서 십계명의 제5계명을 어기고 자기 모친을 멸시하신 것이 아니다. 이는 주께서 거의 십억 명의 이교 우상숭배자들이 주의 모친을 하늘의 여왕과 동일시하며(렘 7:18, 44:17-19, 25을 보라) 그녀를 "공동 중보자"로 삼고 여러분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 그 분에게서 떼어놓으려 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4장
1 주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 큰 무리가 그에게 모여들므로 주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에 접한 육지에 있더라.
2 주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고, 그의 교리로 말씀하시더라.
또다시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가르치신다. 3:9에서와 마찬가지로(해당 주석을 보라) 무리가 너무 밀집되었기에 주께서는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배에 앉아서 해변의 군중들에게 가르치셨다.
3:23에서 사역 초반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비유들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또 무리에게 "비유로" 가르치시고(2절)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10-12절에서 말씀하신다.
라디오와 TV에 설교를 내보내는 평균적인 설교자들과 성경교사들은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까닭이 무리에게 주의 교리를 좀더 쉽게 전달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부분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주께서 비유를 쓰신 이유는 주를 믿기를 거부하는 자기 의로 가득찬 교권주의자들이 주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되었느니라. 이는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어느 때라도 회심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죄들이 용서받지도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11-12절).
여러분, 성경은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히 4:12)하는 책인데 여러분이 그릇된 생각을 품고 이 책을 펼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혼동시키실 것이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겔 14:1-11을 펴서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마음에 품고 주께 나아오는 자, 진리가 그의 앞에 제시되었는데도 거부하는 자를 의도적으로 속이신다(살후 2:10-11).
2절에서 예수께서 비유들을 통해 자신의 "교리"를 가르치고 계심을 보라.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신학자들이 담합해서 비유들을 통해서는 교리를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현대 역본들은 2절의 "교리"를 "가르침"으로 변개시켰다.
교리는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 배우는 건전한 "교훈"과 다르다. 내가 여러분에게 차수리나 빵굽기에 대해 가르친다면 그것은 "교리"가 아니다. 교리는 문법이나 구구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교리라는 말은 성경의 용어이지만 가르침이라는 용어는 공립학교 시스템을 거치면서 그들의 돈을 대학 교육(기독교 대학과 세속 대학 둘다)에 허비하는 사람들의 무지에 호응하는 단어일 뿐인 것이다.
3 “경청하라, 보라,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니,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또 어떤 씨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즉시 싹이 나오나
6 해가 솟아오르자 시들었으며,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 버렸고
7 또 어떤 씨는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지니, 그 가시떨기가 자라서 기운을 막으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였느니라.
8 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지니 자라고 번성하여 열매를 맺되 어떤 것은 삼십 배로, 어떤 것은 육십 배로, 또 어떤 것은 일백 배로 맺었느니라.”고 하시더라.
이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 불리는 본문인데 예수님 자신이 마 13:18에서 이 비유를 그렇게 부르셨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흙의 비유"(Parable of the Soils)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이 비유에서 네 가지 다른 성질의 흙과 거기 뿌려지는 씨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 부르신 것은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이시기 때문이다(마 13:37). 네 가지 타입의 흙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인간들의 네 가지 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비유의 주인공은 주님 자신이지 우리가 아니다.
9 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더라.
10 주께서 혼자 계실 때, 열둘과 더불어 주를 에워싼 사람들이 그 비유에 관하여 주께 묻더라.
11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알도록 허락되었으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되었느니라.
12 이는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어느 때라도 회심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죄들이 용서받지도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
이 비유를 군중 전체에게 말씀하셨으나 예수께서는 비유의 의미를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으신다.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들은 자들은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와서 물어본 사람들이었다(10절). 여러분이 조용히 성경 읽기와 기도에 시간을 쓸때 홀로 터득할 수 있는 진리가 있다. 그 진리는 주석서나 "원어들"을 연구해서 얻을 수 없으며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요 16:13)실 때 얻을 수 있다. 내가 성경에서 얻은 지식들은 밥 존스 대학을 다니면서 배운 것이 아니다. 나는 집회들을 마치고 밤에 혼자 호텔방에서 성경을 상고하고 기도하곤 하면서 그 지식들을 얻었다.
10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렀던 무리가 "열둘"보다 더 많았음을 보라. 예수께서 사도들로 부르신 제자들은 열둘이었지만 그 외에 제자들이 더 있어서 그들도 신실하게 주를 계속 따랐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아는데 나중에 열두 사도들 중 유다가 빠지고 거기에 대체되어 들어갈 사도가 필요하게 될 것이었으며 그래서 베드로는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신 모든 기간 동안 즉 요한의 침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떠나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더불어 지냈던 이 사람들 중에서"(행 1:21-22)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제자들 중 이름이 언급된 두 명이 "유스토와 맛디아"였다. 어떤 여인들도 주를 따르면서 "그들의 물질로 주를 섬기더라"고 되어 있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막달라 마리아였고(눅 8:1-3), 따라서 여기서 주께서 개인적으로 비유를 설명해주신 제자들 중에는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과 다르게 초대 교회에서 여성들은 존중받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부분을 담당했었다.
11절: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알도록 허락되었으나." 주께서는 자신의 계시를 알려줄 대상과 차단할 대상을 구분하시는데 그 선택의 조건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나 그 외 칼빈주의의 궤변들과 무관하다. 그것은 9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경고와 상관이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23절에도 같은 경고가 나오는데 그 뒤에 한 가지 경고가 더 붙어 있다: "너희가 듣는 것에 주의하라"(24절). 문맥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뜻하는데(14절) 바울이 롬 10:17에서 한 말은 본문 막 4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적절한 참조가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
막 3:34-35과 쌍을 이루는 눅 8:21에서 예수께서는 "내 모친과 형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더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눅 11:28) 사람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께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고(막 4:24)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않은 자들은 단지 비유만을 들었을 뿐이다(막 4:25).
여기서 등장하는 화제가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라는 것을 보라. 그렇다면 이것은 마 13:11에 나오는 "천국의 신비들"과는 다른 성격의 신비이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실제적, 물리적 왕국을 다루고 있고 막 4장에서는 의와 화평, 기쁨의 영적 왕국을 다루고 있다(1:14-15 주석을 보라). 본문과 마 13장에 등장하는 왕국의 유사성 때문에 신학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본문의 비유가(21-22절의 촛대 비유와 31-32절의 겨자씨 비유가 그렇듯이) 물리적인 왕국이나 영적 왕국 양쪽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해서 두 왕국이 같은 것은 아니다. 26-27절에 묘사된 씨와 그 성장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본문 막 4장의 비유는 명백히 교회 시대에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물리적 천국의 왕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한 그 유대인들에게서 왕과 왕국은 감춰진 "신비"가 되었고 그들이 왕국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먼저 영적 왕국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이 본문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다. 유대인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대면하기 이전에 그분을 먼저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해야 한다.
12절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한 것이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신약에서 다섯 번이나 언급되었다. 마 13:14-15, 본문, 요 12:38-40, 행 28:26-27, 그리고 롬 11:8이다. 이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메시아와 구세주를 거절했기에 교회시대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한시적으로 버리시는 것과 관련한 비유이다. 이것은 영적인 눈멈이기에 영적인 치유가 필요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치유책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롬 11장 전체의 주제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 있지만 개별적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순간 그는 치유될 수 있다.
유대인 전체가 그 눈멈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재림 때 있을 것이다(롬 11:25-27). 그 민족 전체가 회개할 것이고(슼 12장) 그들 전부가 새 언약의 적용을 받게 될 것이다(히 8:8-10). 그 일이 일어나고 나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살아남아 있는 유대인들 위에는 성령이 부어질 것이며 그들은 먼저 영적인 왕국에 들어온 후 물리적 왕국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행 2:16-21). 이스라엘은 하루만에 회심할 것이고 곧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다.
13 또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비유를 알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느니라.
15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니, 즉 말씀을 듣자, 곧 사탄이 와서 그들의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는 자들이요,
16 또 이와 같이 말씀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니, 그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들 안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만 견디다가, 후에 그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실족하는 자들이요,
18 또 가시떨기 사이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니, 말씀을 듣기는 하나,
19 이 세상 염려들과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일들에 대한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요,
20 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니, 즉 말씀을 듣고 받아서 어떤 사람은 삼십 배로, 어떤 사람은 육십 배로, 어떤 사람은 일백 배로 열매를 맺는 자들이니라.”고 하시니라.
"너희는 이 비유를 알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13절). 그렇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여타 비유들을 해석하는 원리적 근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는 비유의 해석이 등장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해석을 보면 우리는 주께서 하신 비유의 모든 세부 사항들이 다 고유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학자 연합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이야기인데 그들은 비유가 단지 "핵심 진리"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비유들을 해석할 수 없어서다. 이후에 우리는 겨자씨 비유를 보겠지만 그리스도의 비유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학자들이 합일"을 이루는 주된 해석 방식은 종종 자기들의 추측에 근거하여 희망 사항을 해석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들의 입에 있는 비유담"은 저는 자의 다리와 같다고 했고(잠 26:7) 그것은 술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처럼 자기 손을 찌른다고 했다(잠 26:9). 이번 경우에 있어 "어리석은 자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종교인들이다.
14절: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느니라." 그리스도께서 3-8절에서 말씀하신 비유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첫번째로 강조되는 점은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씨를 뿌리느냐이다. 뿌려지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눅 8:11)이다.
여기서 즉시 여러분은 본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가 마 13장의 천국 비유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두 비유가 같아 보인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다. 마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그리스도께서 해석하실 때 그는 그 씨가 "왕국의 말씀"(마 13:19)이라 정의내리셨다. 여러분은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 중 한 말씀은 물리적, 실제적, 가시적 지상 왕국에 대한 것이고(사 2:3) 다른 말씀은 믿는 자에게 중생을 가져오는 영적인 것이다(약 1:18; 벧전 1:2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씨 뿌리는 자이시고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네 가지 타입의 토양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15절 끝을 보라: "그들의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 첫번째 청취자는 부주의하거나 태만한 사람이다. 그들은 길가의 굳은 토양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밭의 가장자리에 길을 내는데 그곳의 흙은 사람이나 우마차가 지나다니기 때문에 단단하게 굳어 있다. 그곳에 씨를 뿌리면 씨가 흙 속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표면에 머무른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한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히 3:15, 4:7).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부주의한 청취자의 완악한 마음 속에 떨어지면 "곧 사탄이 와서" 말씀을 채어간다. 4절에서 사탄은 "공중의 새들"로 묘사되었는데, 마귀가 더러운 영들(복수)로 구성된 한 더러운 영(단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1:24 주석에서 다룬 바 있다. 여기서 또 한번 마귀들이 새들, 특별히 부정한 새들(계 18:2)로 비유되는 것을 본다. 따라서 레 11:13-19에 나열된 모든 부정한 새들은 불못에 거처를 잡게 될 불결한 영들을 예표하는 것이다(사 34:9-1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희는 주의 책에서 찾아 읽으라"고 명령하셨으므로(사 34:16) 성경을 읽으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 때 마귀는 거기서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귀는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그는 여러분이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데 그 때문에 모든 모슬렘 국가들, 사회주의 국가들, 그리고 공립학교 시스템에서 성경은 금서가 된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권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기를 원한다.
만일 마귀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는 여러분이 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마귀는 여러분이 들은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이라 믿게 유도할 것이며(참고. 살전 2:13) 성경은 여러 종교의 경전들 가운데 하나라 믿게 만들 것이다. 마귀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경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믿게 하거나 혹은 성경의 예언들이 실제로는 그 예언된 사건들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믿게 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가 창세기를 썼다고 하신 것이 거짓말이라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마귀는 모든 수단을 써서 여러분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마귀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면 그는 여러분을 혼동시켜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한번은 내가 헬스장에서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내 말을 회피하려고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쪽의 말이 맞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지요? 가만 보면 카톨릭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감리교도들은 또 다르게 말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들 중 누가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대학교를 다녔나요?" "네" 그가 말했다. "졸업도 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네." 내가 그 친구에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내게 말했으면서 누가 당신에게 성경에 대해 거짓말하는지 참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겁니까?"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마귀가 그의 마음 속에 너무나 많은 상충되는 것들을 집어넣어서 그를 우둔하게 만든 것이고 그는 "그 말들이 그런가 하여"(행 17:11) 성경을 상고할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사탄이 여러분으로 성경을 듣고 받아들이고 깨닫는 것까지 막는 데 실패한다면 그는 여러분이 말씀을 잊어버리게 만들 것이다. 마귀는 여러분이 점심 메뉴나 야구 게임, 혹은 TV 프로에 신경쓰게 만들면서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 속에 받았던 찔림을 잊게 할 것이다. 그 작업까지 실패하면 사탄은 여러분이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마귀의 사역이며 이것은 영적인 일이다. 사탄은 포르노물이나 낙태, 혹은 "성소수자"나 술, 혹은 "성생활"을 통해 이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육신의 일들이다. 창세기 3장 이후로 마귀가 주력하는 부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일이다. 사탄은 성경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돌밭"의 마음을 가진 듣는 자들은 꾸준함이 없기에 얕은 자들이다("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 5절). 그들은 말씀을 받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외견상으로 그들은 "크리스찬"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잃어버린 죄인들이다. 그들에게는 뿌리가 없고 열매도 없다(잠 12:12).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롬 15:12; 계 5:5, 22:16). 주 안에 뿌리내리지 않은 거짓 신앙 고백의 허울은 "그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시들어 버린다(17절).
이제 "가시떨기 사이"(18절)의 상태에 있는 자들은 다른 부류이다. 그들은 뿌리가 있는데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열매맺지 못하는 이유는 부주의하거나 완고한 마음이거나 혹은 얕고 변덕이 심한 기질을 가져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함에도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19절) 상태가 되고 마는데 이는 억눌리고 있어서다. 어떤 문제가 있어서인가? 그들의 생각이 세상적이기 때문이다.
데마가 가진 문제가 이것이었다.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출발했지만(빌레몬서 24절) 주의 사역에서 중도 이탈하고 말았는데 이는 그가 "이 현 세상을 사랑"(딤후 4:10)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스찬은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는 명령을 받는 것이다. 여러분이 거기로부터 구원받은 "이 악한 현 세상"(갈 1:4)을 사랑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구주께 내는 모든 열매들을 낙과시키고 말 것이다.
19절에서 세 가지에 대해서 보겠는데 세상이 성도로 하여금 맺게 만드는 것들이다. 하나는 "이 세상 염려들"인데 눅 21:34에서는 그것을 "이생의 염려"라 언급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여러분이 교회로 가는 길에 아내와 다툼을 벌이는 것, 아이들에게 치아 교정기가 필요한데 그 돈을 어떻게 지불할 것인가, 세탁기가 고장나서 빨래방에 세탁물을 맡겨야 하는 것, 정원 잔디를 깎아야 되고 자가용 타이어를 교체하는 일들, 아이들 운동 경기하는 데 차를 태워줘야 되고 친척들이 집을 방문하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세상 염려들"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이지만 그것들이 여러분의 관심사를 하나님의 말씀, 기도, 복음 전파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 일들을 하는 것이 꼭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 때문에 여러분의 정신이 분산된다.
둘째 - "재물의 속임수". 바울은 딤전 6:10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속임수이다. 부자가 되면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지만 재물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염려들을 가져올 뿐이다(전 5:10). 이런 옛말이 있다. "돈이 말을 하네, '잘 가게'라고"(잠 23:5). 복권 당첨자들을 조사해 봤더니 그들 중 대부분이 최소 2년 안에 파산하고 가정 파탄이 났다. 돈은 거짓말한다. 돈은 올무이며(딤전 6:9) 돈이 여러분을 믿음에서 떠나게 만든다(딤전 6:10).
셋째 - "다른 일들에 대한 욕심". 그것은 탐심이다(출 20:17). 어떤 사람이 반드시 재물 자체에 목을 매고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명성, 성, 음식, 스포츠, 권력, 땅, 안락 같은 "다른 일들"을 욕심낼 수 있다. 철학에서는 그것을 "쾌락주의"라 부르는데 그 사상을 실천한 자들이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고 바울은 행 17:18에서 그들을 마주쳤다. 솔로몬은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는데(왕상 3:12) 그는 모든 쾌락을 시험해 보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도 헛되도다"(전 2:1)였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시 사망을 낳는다(약 1:15). 여러분의 탐심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맺어야 할 열매들을 지난 달 해변에 밀려와 썩어가는 죽은 고등어보다 더 형편없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네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열매를 맺는 자들인데 그들은 "정직하고 선한 마음"(눅 8:15)을 가진 자들이다. 태생적으로 어떤 사람도 "선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지만(렘 17:9) 어떤 사람이 성령의 책망에 귀기울여 올바로 반응한다면(요 16:7-11) 주께서는 그것이 "정직하고 선한 마음"이라 간주해 주신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사람의 말로 받지 않는데(살전 2:13) 그는 또한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써(약 1:22) 그 말씀을 자신 안에 간직한다(계 3:8). 본문에서 이 사람은 구원과 관련해서 말씀을 믿고 행할 뿐 아니라 열매 맺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다(요 15:1-8; 갈 5:22-25).
20절에서 세 단계의 열매가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요 15장에서 하신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삼십 배" - "열매"(요 15:2), "육십 배" - "더 많은 열매"(요 15:2), "일백 배" - "많은 열매"(요 15:5, 8). 이것에 대한 좋은 예가 시리아 야자수이다. 그 나무는 세 가지 크기를 갖고 있는데 삼십 피트, 육십 피트, 그리고 일백 피트이다.
크리스찬 삶에 나타나는 세 가지 현상에 대한 말씀들은 신약 여러 곳에서 언급된다. 성도가 사탄에게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이렇다: 1) "어린양의 피", 2) "자기들이 증거한 말", 그리고 3)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계 12:11). 크리스찬의 세 가지 헌신은 이렇게 나타난다: 1) "부르심을 받았고", 2) "택함을 받았으며", 3) "신실한 자들" (계 17:14). 크리스찬의 영적 성장에 관해 요일 2:12-13은 이렇게 말씀한다: 1) "어린 자녀들", 2) "청년들", 3) "아비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학습함에 있어 세 가지 등급을 두었다: 랍(Rab), 랍비(Rabbi), 라반(Rabban). 21세기에 이르러 이 세 가지 등급은 이렇게 통용된다: 학사, 석사, 그리고 박사. 노동 조합에서는 이렇게 된다: 도제, 장인, 마스터. 교육 시스템에서는 이렇다: 유치원, 초중고등학교(grade school), 그리고 대학. 초중고등학교는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로 구성된다. 이런 식으로 세상 전부가 삼분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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