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반공세력을 우익이라 보면 맞고 친공세력을 좌익이라 보면 맞다. 좌익을 성향으로 분류하면 친공좌익과 친북좌익이 있는데 친공좌익을 PD(민중민주계열) 친북좌익을 NL(민족해방계열)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친북좌익은 친공좌익에 포함된다고 볼수 있습니다.
또 좌익은 정도에 따라 극좌파(공산주의자)와 중도좌파로 나눌수 있는데 이들 모두 친공세력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극한적인 이념대결의 상황에서는 공산주의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중도좌파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91년 공산권이 붕괴된 이후 많은 극좌파들이 중도좌파로 전향을 했는데, 현재 중도좌파들이 과거 공산화운동권을 민주투사로 추모하고 동지로 생각하는 이유는 좌파의 뿌리가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도좌파는 반공세력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중도좌파는 한국의반공세력이 이룬 정치적, 경제적 성과가 다대함에도 불구하고 반공세력을 깍아 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2절 인혁당 발생 당시의 국제정세
공산주의의 원조 마르크스사상에 의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머지않아 망하고 공산주의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1991년) 약 140년동안 공산주의자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사상입니다. 이것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믿음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공산혁명 즉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형성된 사상인데 그 특징은 공산당 일당독재, 공산당 일당언론, 종교 말살, 자유 말살, 사유재산 부정, 상업행위 척결, 거주이전의 자유 말살, 직업선택의 자유 말살 등등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종교인,자유시민,반공인사 등)을 무차별 학살했는데 냉전기시절 중공,소련,북한 등에서 약 1억명 정도가 학살되고 굶겨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냉전기시절(1953~1991년) 한국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공산주의자들을 꾸준히 처벌했지만 공산주의는 종교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공산주의를 근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내심의 공산주의자들은 겉으로는 민주화( 혹은 사회민주주의)를 외치며 위장을 했기 때문에 근절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인혁당사건이 발생했던 1975년 당시는 지구의 절반이 공산주의국가였으므로 북한 및 공산권국가들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소련,중공,북한으로 이어진 공산권벨트는 막강했고 그에 따라 국내의 공산주의자들도 내심의 믿음은 단단했습니다. 반공법 때문에 그들은 주로 지하에서 활동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내심의 믿음은 철석같았던 것입니다.
1975년4월 월남은 공산화되어 자유시민 수백만이 학살당했는데 공산화되기전 월남에는 무수한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운동가로 위장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대통령선거에서 2위를 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공산간첩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위장하기 때문에 밝혀내기 힘든 것입니다. 북한이 그들의 체제를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60년대에 우리보다 잘살던 월남이 공산화된 것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주원인은 친공좌익과 공산간첩들의 지하활동 때문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월남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군 및 미군철수이지만 월남은 간첩과 남침땅굴 때문에 망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월맹의 남침땅굴이 월남 대통령궁 근처에까지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베트남 인혁당의 전신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인데 이들이 바로 베트콩(공산당)입니다. 베트남인혁당(인민혁명당, PRP)은 1962년1월 다음과 같은 강령을 가지고 창설되었습니다. 그것은 "월남정권 타도, 민족민주정부 수립,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소작료 경감과 토지개혁, 북베트남과의 관계 정상화..."등입니다. 강령을 보면 베트남 인혁당은 민주화운동 내지 통일운동을 하는 건전한 정당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공산당이었습니다.
도예종을 중심으로 하는 인혁당(1차인혁당)도 베트남인혁당을 본받아 1962년1월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1964년 체포될 때 강령 등 서류를 불태워 증거를 남기지 않았지만, 북한 노동당 강령을 토대로 "미군철수, 남북교류.." 등을 내세우며 친북운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공산권이 지구의 절반이었고 당시 한국은 월남보다 못살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공산화하자는 것이지요.
1974년4월 대규모 반정부시위인 민청학련사건이 발생했고 그 배후조종세력으로 2차인혁당 구성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 시기는 월남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여 월남공산화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기였습니다. 미군과 한국군이 1973년 월남에서 철수하자 당시 베트남의 인혁당은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던 것입니다. 월남은 1975년4월 공산화되었습니다.
또 한국에서는 1974년11월 고랑포에서 북괴의 제1 남침땅굴이 발견되어 온 국민들이 경악했고 75년4월에는 철원에서 제2 남침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남침땅굴은 원래 월맹공산당 그리고 베트남인혁당(베트콩)이 비밀리에 애용하던 수법이었는데 이것을 북한이 본받았던 것입니다. 국제공산당의 정보교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월맹공산당의 남침땅굴은 월남공산화로 전쟁이 끝난후(1976년이후)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제3절 인혁당 구성원들의 이념
2차인혁당 관련자들은 대부분 1971년 조직된 경락연구회 출신인데 이는 지하 전위조직으로 당시 사회변혁을 추구한 좌익단체였습니다.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게 지압연구회 비슷하게 이름을 붙여놓고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지하비밀조직의 보안을 위해 인혁당이라는 명칭 혹은 간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서클이 인혁당이라는 것을 모르는 공안검찰은 없었습니다.
인혁당의 뿌리는 1960년 4.19로 올라가는데, 1960년 4월19일 자유당 반공정권이 무너지자 좌익세력은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당시 유명했던 좌익단체는 암장(일명 마그마,1955년 설립), 민민청, 통민청, 민통련, 민자통 등인데 이런 좌익단체 출신들이 모여 1971년 경락연구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억눌렸던 좌익들은 전교조(한국교원노동조합 총연합회)와 한노총(한국노동조합 총연맹)을 재빠르게 결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권이 망한 지금도 전교조가 문제가 되고 있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1960년 당시는 어땠을까?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순수한 합법적 노동운동이라면 그렇게 나쁠 것이 없지만 문제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 내지 친북좌익,친공좌익이었다는 것입니다.
1960년 당시 한국은 월남,북한,필리핀보다 가난했던 상태라 국민들의 불만은 가득했고 따라서 공산주의자,급진적 통일론자,친북좌익들이 국내에 많았습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보다 잘살았고 따라서 이들에게 김일성은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4.19이후 5.16이전까지의 제2공화국 혼란의 시기는 "김일성 만세소리가 들려오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었다"는 평가가 맞는 말입니다.
공산체제의 모순으로 공산권이 붕괴된 후 15년이 지났고 남한이 북한보다 15배 잘살고 있는 지금에도 친북좌익이 많다고 야단인데 1960년 당시에는 오죽했으랴. 지금도 NL(민족해방계열, 친북좌익)과 PD(민중민주주의계열, 친공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이 반미친북 및 반미친공의 성향을 보이고 있지만 1960년 당시의 좌익들도 미국을 배척하고 북한과의 무조건적인 협력을주장했습니다. 좌익에게 공산당은 형제와 같은 존재입니다.
북한이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한다면 협력이 가능하지만 냉전기시절 북한은 오직 한반도공산화를 노렸는데 그들과 무슨 협력을 한단 말인가? 1960년 당시 민민청,통민청 등 좌익들은 북한노동당의 주장을 대변한 것이 맞습니다.
1960년 당시 좌익세력은 사회당(조직부장 최백근)을 비롯하여 민민청(민족민주청년동맹),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 민통련(민족통일학생연맹)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회당,민민청,통민청의 연합조직인 민자통(민족자주통일협의회)도 있었습니다.
2차인혁당(74년) 사건으로 유명한 도예종,서도원,하재완,이수병 등은 당시 민민청을 주도했는데 민민청의 서도원,도예종,하재완 그리고 통민청의 이재문,우동읍(우홍선),김배영은 급진적인 좌파였습니다. 이들은 1,2차인혁당(64년,74년)과 남민전(79년)으로 이어지는 좌익사건을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이재문은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사했고 도예종,서도원,우홍선,하재완,이수병 등은 2차인혁당사건(74년)으로 체포되어 죽었습니다. 최백근은 1961년 12월 체포되어 죽었고 이후 사회당은 해체되었습니다. 김배영은 1964년 1차인혁당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그후 북한으로 몰래 들어가 북의 지령을 받고 1967년 다시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971년 사형을 당했습니다.당시 그는 권총과 난수표(암호 해독표)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동읍은 인혁당 발기인으로 활동하였지만 1차인혁당 사건때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65년 반공법 위반으로 1년 복역한후 월북하여 북의 지령을 받고 다시 내려와 이름을 우홍선으로 사용하며 간첩활동을 하다 2차인혁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었습니다.
전향도 하지 않고 살아남은 좌익으로서 "해방전후사의인식" 저자로 유명한 박현채는 20대 이전에 이미 빨치산활동을 한 좌익인텔리였습니다. 그가 오래 살아 남은 이유는 그의 활동이 온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의 예를 보면 알수 있다.
박현채와 이수병은 유신시절 좌익단체의 노선에 대해 서로 이견을 보였는데 급진적인 이수병은 조직을 갖추어 당장 싸우자는 입장이었고 박현채는 능력 없이 조직부터 만드는 것은 해롭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급진적이었던 이수병은 결국 2차인혁당사건에서 죽었다.
좌익서적을 탐독하며 공산주의이론을 익힌 암장(일명 마그마) 회원출신 이수병은 박현채와 나이가 서로 비슷했고 도예종은 이들보다 10년 선배였다. 박현채는 도예종을 은닉시켜주기도 했는데 도예종은 나이,사상 등에서 인혁당의 우두머리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975년 죽을 때에도 "적화통일 만세"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거물좌익다운 유언입니다.
1960년 4.19직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60년 이승만정권이 무너지자 좌익들은 쾌재를 부르며 본격적으로 좌익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반미친북의 목소리였다. 위기를 느낀 장면정부는 전교조의 합법성을 문제 삼으며 반공임시특례법(반공정책복구)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고 하였으나이에 격분한 좌익들은 대규모 횃불시위(1961년3월)로 맞섰다. 시위대는 난동으로 변했고 무질서상태가 지속되었다. 그것은 2공화국 최후의 대규모 시위였다. 결국 1961년 5.16 반공혁명이 발생하여 좌익들은 철퇴를 맞고 지하로 잠복하게 된다.
이승만대통령이 1948년12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헌법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반공체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더 굳히고 승공정책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박정희대통령입니다. 박정희의장은 1961년 7월 반공법을 만들어 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2차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그들은 거물좌익이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좌익단체 설립을 주도했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자주 구속된 경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인혁당 관련자들의 경력을 살펴보자.
도예종: 1948년 남로당 활동, 1960년10월 좌익단체 민민청 간사장, 1964년 인혁당 중앙상무위원장, 1차인혁당사건(64년)에서 반공법위반으로 징역3년 선고, 64년 한일회담 반대, 3선개헌 반대, 유신반대운동, 경락연구회, 남긴 유언 "적화통일 만세"
서도원: 4.19이후 도예종 등과 민민청 준비위 구성, 61년 혁명재판소로부터 특별법위반으로 징역 7년 선고, 67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69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3선개헌 반대, 전태일 추도사 작성, 경락연구회
여정남: 경북대 학생회장, 6.3사태로 제적, 민청학련 지도부, 하재완과 이재문으로부터 좌익사상 교육 받음, 전태일 추도사 작업, 반공법 위반
경력을 보면 인혁당관련자들은 골수좌익이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 그들은 죽을 때 유언에서도 "적화통일 만세" "일체의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등 공산주의자다운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의 고백에 의하면 "머리에서 적화통일의 생각을 지우기 무척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한반도 적화통일(공산화)은 공산주의자들의 소원인 것입니다. '설마 마지막 유언인데 적화통일이라는 말을 했을까?'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70년대중반은 공산주의가 붕괴되기 훨씬 전이라 공산주의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는 종교 내지 마약과 같은 것이었죠. 당시 좌익들은 한반도가 공산화되면 자기들이 영웅으로 대접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제4절 1차인혁당 사건 개요
1964년 1차인혁당 검거 경위는 이렇습니다. 공화당정부가 1964년 3월이후 6.3사태까지 학생데모의 구호, 결의문 등의 내용을 검토하여 배후를 내사하던 중 서울대 불꽃회(좌익단체)출신 김정강의 일지에서 인민혁명당 도예종의 조종을 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41명을 검거하고, 16명을 수배합니다.
1964년 3월 이후의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한 인민혁명당은 1962년 1월 우동읍(우홍선) 집에서 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하한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통민청 중앙위원장이던 우동읍과 동맹간사 김배영, 김영광, 민민청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작, 전 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출신 박현채 등이 참가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회를 갖고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 경제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북괴노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새 강령과 규약을 채택함으로써 발족하였습니다.
인혁당은 창당후 조직을 확대해오다가 1964년 4월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동당 중앙상임위원인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함과 동시에 학생데모를 4.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공화당정부를 타도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1964년 당시의 공화당정부가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한 이유는, 한국이 자유권선진국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반공전선을 공고히 하고 일본의 자본 및 기술을 도입하여 하루빨리 경제발전을 이루어 국력에서 북한을 앞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이 우리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습니다. 남북 이념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북한은 공화당정부의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의적으로 한일회담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간첩을 남파하고 친북좌익을 이용해 철없는 대학생들을 배후조종하여 전국적인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1964년 6.3사태입니다.
그러나 1964년 당시 신생 중앙정보부는 대공수사에 미숙했던 때였습니다. 중정으로부터 피의자와 조사자료를 넘겨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3명은 "인혁당사건의 피의자들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다" 라는 이유로 불기소 의견을 고집했습니다. 결국 당직검사의 기소로 도예종,양춘우,박현채 등을 기소하여 징역 1~3년을 선고하는데 그쳤습니다.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허구의 김영춘이라는 가공 인물과 인혁당이라는 가공정당을 조작하여 간첩사건을 만들었다. 한일회담반대 시위를 잠재우기 위한 공작이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미전향 장기수들의 증언에서 김영춘의 존재가 밝혀지죠. 김영춘 (본명 김세진)은 6.25때 월북하였다가 1960년 4.19때 남파된 사람으로 이후 1964년까지 영남일보(민족일보와 같은 성격)에 근무하였습니다. 이때 김봉춘이라는 가명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그는 1964년 1차 인혁당사건때 도피했다가 1970년 가족간첩단 혐의로 체포되어 1972년 대구교도소에서 사형되었습니다. 즉, 김영춘은 실제 인물이었으며 인혁당을 창당한 게 맞습니다.
또 당시 인혁당사건에 참가했던 김세원씨의 증언에 의하면 "인혁당은 김영춘에 의해 창당되었으며 사회당에서 민자통으로 이어지는 전위당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또 김정강씨(80년 전향, 현재 자유평론가로 활동) 회고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서울대 내에 불꽃회를 조직하고, 도예종의 지령에 의해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구성하기 시작했죠. 64년초까지 서울, 대구, 부산, 광주 지역의 각 대학에도 서울대와 같은 규모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검거되어 조사 받을 때 경찰은 전국학생동맹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인혁당사건은 확대되지 않고 나는 단지 북한찬양의 혐의만 받게 되죠." 라고 김정강은 증언했습니다.
1차인혁당 사건이후 좌익들은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고 일부는 일본으로 도피, 월북하여 재기를 노립니다. 1차인혁당사건이 지나고 남파된 간첩 김종태가 일으킨 사건이 통혁당사건(1968년)인데 이 시기는 북한이 남파한 무장공비가 많던 시기였습니다. 울진삼척 및 1.21 무장공비 사건도 이 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인근까지 다가와 총질을 했습니다.
김종태는 운수업으로 직업을 위장하고 남한의 좌익지식인들을 대량 포섭하여 정부전복을 노리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검거된 자들은 무려 158명인데 이들은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미화 3만달러 등을 숨겨 가지고 있었습니다.
간첩의 종류에는 무장간첩과 지식간첩이 있습니다. 지식간첩은 난수표 정도만 소지하고 겉으로는 보통직업인 내지 학자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알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하게 반체제운동 선동, 반공인사 비방, 김일성 찬양, 민주화운동을 가장한 반정부운동, 통일운동을 가장한 친북운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체포될 가능성이 있으면 난수표를 없애버립니다. 그러면 증거 확보가 어렵고 그래서 지식간첩은 대부분 무죄가 됩니다.
유신시절 인혁당구성원들은 북한방송을 조직적으로 청취하며 북한공산집단과의 행동공조를 모색했는데 특히 1972년 하재완,송상진은 조선노동당 사업보고 내용을 노트에 녹취해 놓고 그것을 서도원,여정남,이재문 등에게 주어 돌려보게 했습니다. 또 서도원은 그 노트를 이수병,김용원에게 전달,회람시켰습니다.
냉전기시절 북한방송은 국내간첩과의 접선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또 당시 북한방송은 반미운동 부채질, 반정부운동 부채질, 한국지도자 비방, 민중봉기 선동 등이 그 임무였습니다.
70년대 당시는 조총련간첩에 의한 박대통령 암살미수 및 육여사 암살 등으로 남북의 이념대결이 매우 심할 때라 북한방송 청취하면 모가지가 날라간다는 것을 일반 국민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북한방송을 그렇게 조직적으로 청취했다면 그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혁당은 북한방송을 청취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북한과 접선하여 반정부운동 유도의 시기를 저울질했던 것입니다.(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했던 것입니다. 인혁당은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오일쇼크, 유신헌법 개헌청원서명운동 등이 일어나자 제2의 4.19로 사회혼란을 조장,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판단, 지하전위조직(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했던 것입니다.
2차인혁당 관련자 대부분은 수사과정에서 조직실체에 대해 진술했는데 이수병은 74년5월4일 자필진술서에서 서울지역 조직에 대해, 서도원을 정점으로 4인지도부,10여명의 구성원을 체계도를 직접 그려 설명하면서 비밀점조직 조직운영방침 등을 진술하였으며, 우홍선은 73년10월 혁신(좌익)세력의 재규합체인 비밀지하조직(4인지도부,10여명의 조직)에 가담한 것을 시인하였고 하재완도 그것을 시인하였던 것이다.
인혁당은 1974년4월 체포되어 75년4월에 죽었는데 당시의 사회상황을 보면, 74년 8월에는 북괴의 지령에 의한 박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있었고 74년 11월에는 고랑포에서 북한의 제1남침땅굴이 발견되었고 75년4월에는 철원에서 제2남침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월남은 1975년 4월30일 공산화되었습니다.
월남은 공산월맹의 남침땅굴을 발견하지 못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는데 만일 당시 한국정부가 북한의 남침땅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은 남침땅굴을 파면서 이런 전략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즉 "남한사회를 최대한 혼란케하여 한국정부가 남침땅굴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자" "남한사회를 더욱 혼란시켜라"...등등
북한의 남침땅굴 굴착시기가 대규모 반정부시위(민청학련사건,인혁당사건) 발생시기와 거의 동일하고 조총련출신 문세광의 박대통령 저격 시기와 거의 비슷한데 이것이 단지 우연일까? 1974~1975년 사이에 공산당들이 월남과 한국에서 동시에 대규모 소요, 땅굴작전을 펼쳤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보면 2차인혁당사건은 70년대 중반에 세계공산화를 노리던 국제공산당의 종합적 지령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소련,중공,일본,월맹,월남,북한,한국 등에 존재하던 국제공산당은 1974~1975년을 한반도공산화의 최적기회로 판단하고 연합작전을 펼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국내의 인혁당이 그 전위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민청학련출신 이철,유인태는 인혁당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는데 이는 거짓말일수도 있지만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남민전도 그랬지만 2차인혁당은 비밀점조직으로 운영되어 그 조직의 전모를 알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인혁당이라면 "내가 인혁당이다. 내가 지금부터 너희들을 조종할테니 너희들은 내말을 잘 들어라"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안하지요.
1973년12월경 서도원은 이수병에게 "대학생 이용방법을 연구하라"고 지시했고 74년 4월17일 검거된 여정남은 이수병,김용원으로부터 "민족적 연합전선 형성, 독재정부 타도, 노동자 농민을 위한 사회민주주의 정부수립" 등을 지도 받았으며 김용원으로부터 18만5천원을 지원받아 학생조직에 사용하였다고 진술하였던 것입니다.
서도원,하재완 등은 여정남을 이수병에게 보내 서울지역 학생운동과의 횡적인 연대를 시도했고 여정남은 이철,유인태와 자주 만나 학생데모계획을 협의했습니다. 서도원으로부터 이수병에게 그리고 이수병으로부터 여정남에게 그리고 여정남으로부터 유인태에게 흘러가는 지령의 흐름을 알수 있습니다.
당시 18만5천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계산하면 약 6백만원 정도 되는데, 과거사진실위는 이것을 지금의 18만원으로 단순히 생각하고 인혁당사건 판단을 하고 있으니 이처럼 한심한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18만원은 너무 적은 돈이므로 배후조종의 근거로 볼수 없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송상진도 여정남에게 11만3천원의 활동자금을 제공했습니다. 이것도 지금의 화폐가치로 계산하면 3백만원이 넘습니다. 밝혀진 것만 계산 해도 여정남은 9백만원이 넘는 돈을 활동비로 받았던 것입니다. 여정남은 대구에서 하재완집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골수좌익 하재완과 이재문의 사상 교양을 받았고 이들의 지시에 따라 학생데모를 전국화하는 등 "정부타도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고 진술하였던 것입니다.
지하당의 실제목적은 남한공산화인데 이것은 감추고 겉으로 그럴듯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지요. 당시 북한 김일성은 수백만을 학살하며 남한보다 수만배 더 심한 공산독재를 30년 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며 대학생들을 오도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월남에 침투했던 간첩들의 수법입니다.
배후조종은 이런 것입니다. 우선 특정대학의 간부를 포섭합니다. 그 다음 그를 사상적으로 세뇌시키고 조직활동방법을 교육시키고 활동자금을 제공해 줍니다.그러면 그 대학생 간부는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타 대학의 간부들과 어울리며 순수하게 행동하는 척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전문적인 사상교육을 받았고 활동자금도 많으므로 당연히 타 대학의 간부들을 리드하게 됩니다.
결국 최초에 포섭된 대학생 간부는 전국의 대학생조직을 리드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전국의 대학생들이 지하당(인혁당)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북한은 남한내 지하당에게 지령을 주고 지하당은 대학생들에게 지령을 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전국의 남한 대학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북한의 로보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쪽같은 배후조종의 수법입니다. 조종당하는 대학생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당시 지령의 흐름은 이랬을 것입니다. 북괴->도예종,서도원->하재완,우홍선,송상진->김용원,이수병,여정남->유인태,이철... 그런데 이렇게 몇다리 건너면 마지막 사람은 지령의 실체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인태는 일본공산당 출신 다치가와 마사키 기자로부터 5천엔과 20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게 전부인지 모르지만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2백만원 됩니다. 그런데 왜 하필 공산당출신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돈을 받았느냐 이겁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제공산당의 지하연락망이 움직였던 것이지요.
공산당원 다치가와는 취재를 핑계로 이철,유인태에게 접근해 일본으로부터 무기구입을 제안하는 등 학생들을 선동해 폭력공산혁명이 발생되도록 유도한 정황이 있습니다. 당시 민청학련의 구호 11개는 당시 북한의 대남비방과 거의 같았고 유인태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민주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북한이 자기들의 체제를 지칭하기 위해 쓰는 용어입니다. 친공좌익들은 자신의 사상을 위장하기 위해 이런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당시 이철은 다치가와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만큼 대가를 받는 사회"라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사회주의의 분배원칙을 표현하는 어구로 유명한 말입니다.
제6절 결어
2차인혁당사건은 물증과 정황증거 등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경력으로 볼 때에도 모두 골수좌익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북한을 드나든 사람이 있고, 유언도 공산주의자답게 했고, 당시 금기였던 북한방송을 조직적으로 청취했습니다.
2차인혁당 관련자 대부분은 경락연구회 출신인데 이는 당시 지하 전위조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한 단체였습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4.19직후 좌익단체 활동, 한일회담 반대, 3선개헌반대 등 화려한 친북좌익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현재 북한과 좌익단체가 이들을 높이고 추모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유신을 반대한 사람들을 좌익들이 높이던가요?
2차인혁당 사건의 중심인물은 도예종인데, 도예종을 중심으로 성립된 한국내 1차인혁당 설립 시기는 베트남 인혁당 설립시기(1962년1월)와 같습니다. 그리고 민청학련사건(1973년12월~74년4월) 등 2차인혁당 본격화 시기는 북한의 제1 남침땅굴 굴착시기(74년초), 조총련(친북좌익)의 박대통령 암살계획시기(74년초)와 비슷합니다. 이것이 우연일까?
공산월맹은 73년1월에 체결된 평화협정을 어기고 월남에 대해 다시 군사적으로 대규모공격을 가했는데 그 시기가 바로 1974년5월입니다. 인혁당 및 민청학련데모 극성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입니다. 이것이 우연일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2차인혁당사건은 당시 국제공산당(북괴,일본 조총련,베트남 인혁당)의 연합작전 및 지령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이들은 1974년4월을 한반도공산화의 최적시기로 판단하고 대규모 반정부시위 및 남침땅굴작전을 펼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행히 당시 박정희정부는 지하인혁당 구성원들을 체포하고 북괴의 남침땅굴을 발견하여 북괴군의 대규모 비밀침투를 저지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한반도공산화를 막아낸 것입니다. 만일 한국이 1970년대 중반에 공산화되었다면 당시의 한국국민들 1/3은 처형당했을 것입니다. 숫자로 치면 약 8백만명 정도 될 겁니다. 공산화후 월남,캄보디아에서 공산당에 의해 학살된 국민 비율이 그정도 됩니다.
공산당은 자유와 종교를 부정하는 유물론자들입니다. 월남이 공산화된후 민주운동가들이 대거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짠후탄신부는 월남민주화의 대부였지만 그도 공산당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공산간첩의 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칭찬하여 결국 월남공산화에 기여했지만 그런 것은 공산당에게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1953년에 미국에서 처형된 소련간첩 로젠버그가 40년후 미국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가 4년후 다시 진짜간첩으로 판명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의 70년대 대남공작 비밀이 드러나면 더 많은 사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과거사의 진실은 아직 진행중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