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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上齋宿。 命判三司事鄭道傳, 祭于皇天后土之神, 以告興役之事。 其文曰:
朝鮮國王臣【上諱。】率門下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三司事鄭道傳等, 一心齋沐, 敢明告于皇天后土。 伏以乾覆坤載, 遂萬物之生成; 革古鼎新, 作四方之都會。 竊念臣【上諱。】, 猥以庸愚之質, 獲荷陰騭之休, 値高麗將亡之時, 受朝鮮維新之命。 顧以付畀之甚重, 常懷危懼而未寧, 永圖厥終, 不得其要。 日官告曰: “松都之地, 氣久而向衰; 華山之陽, 形勝而協吉, 宜就是處, 庸建新都。” 臣【上諱。】詢諸臣僚, 請于宗廟, 乃以十月二十五日, 遷于漢陽。 有司又告曰: “寢廟, 所以奉祖考而安其神; 宮室, 所以莅臣民而聽其政。 皆非獲已, 在所當營。” 爰命有司, 於今月初四日起役, 恐大役之方興, 致斯民之攸困。 仰惟皇鑑, 俯亮臣心, 雨暘以時, 功役効力, 于以作大邑, 于以奠厥居, 上配天命於無窮, 下庇民生於有永, 則臣【上諱】謹當對越奔走, 將禋祀而益虔, 戒勑時幾, 修政事而不懈, 與諸臣庶, 共享太平。
又遣參贊門下府事金立堅, 告于山川之神。 其文曰:
王若曰, 咨爾白岳ㆍ木覓之神、諸山之神、漢江ㆍ楊津之神、諸水之神! 蓋聞古之定都者, 必封山以爲鎭, 表水以爲紀。 故名山大川之在境內者, 載諸常祀之典, 所以祈神佑而答靈貺也。 顧惟不穀, 迫於臣民推戴之心, 卽朝鮮國王位, 兢業圖理, 于今三年。 迺者, 用日官之言, 定都漢陽, 將營于宗廟、宮室, 已定日矣, 尙慮大役之興, 民力不無所傷, 雨暘燠寒, 或失其時, 有妨工作。 玆率門下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三司鄭道傳等, 齋沐一心, 以今月初三日, 遣參贊門下府事金立堅, 用禮幣奠物, 告爾諸神。 今玆興作, 非欲求一己之安, 其自是祀神, 人民以迓天命於無窮。 惟爾有神, 諒予至懷, 俾陰陽不愆, 疾疫不興, 變故不作, 以底成大役而定大業, 則予不穀, 亦不敢自暇自逸, 洎于後世, 以修時祀, 神亦永有所享食矣。 故玆敎示。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72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한양(漢陽)이란 지명도...
화산 서남부 한수(漢水)가 흐르는 한중(漢中)지명과...
양진(陽津)의 합성어란 얘기가 밑의 태조실록으로 입증돼기도 하며...
화산 남부의 한양이라 명기함은...원조 한양은 어쩜 청나라에 밀린 조선 중기이전엔...
근세까지 한양(漢陽)이라 지도에 명기됀 현 무안지역였다기 보단...그 서북의 한중(漢中)지역 아니였을까란 예측을 하게 합니다.
중화공산당들의 동북공정 사전류들엔 이를 어떻게 설명할지도 궁금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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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무진) | ||||
임금이 하루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은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신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옛 것을 개혁하고 새 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니, 신단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騭)의 도움을 받아,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 단(旦)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종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천도한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 ‘종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 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매,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신 단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은 이러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山)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水]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조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이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 이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원전】 1 집 72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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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반도로 작아진 비밀을 알게 합니다 허구 반도설이 이제는 사라져야지요 ,,,,,,
사서는 일기가 아닙니다... 사서를 쓴 사람은 뭔가 다른 문헌을 참고로 집필을 한 겁니다... 아무리 정확한 사서도 파고들면 허구가 반이상입니다... 사서보다 객관적인 증거가 유물과 유적입니다... 사서를 해득하는데는 당시인들의 한자 용도를 알아야 합니다... 고로 아무나 사서를 들먹이며 역사를 농단해서는 안됩니다.
내 뿌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한동안 생각을 많이 했던적이 있는데..... 내 뿌리를 찾는다는게 쉽지는 않더군요.... 어느정도 연세드신 분들은 느끼실건데, 본인 위로 5대 6대조 묘를 가지고 계신분이 없다라는 거지요...전 그것에 충격을 많이 먹었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에 6대조 이상 묘를 가지고 있는 집은 저희집 빼고 단 한가구도 없었습니다. 집성촌인데도 말이지요.... 주변에 지인들께 물어보아도 6대조 이상 묘는 없더군요....
이것도 증거로 대륙에서 양반들이 이주 해 왔기에 백년이상 가족사가 올라가고 싶어도 반도에서는 없고 대륙으로 대돌아가야 그 이상의 윗대조상을 만나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 반도가 꾸며쪘다는 사실이 입증 되는 것 입니다
ㅎㅎ대륙에서 양반들이 이주해 왔다구요? 뭐가 아쉬워서 떵떵거리고 살던 양반들이 전답과 세간을 버리고 낯설고 물설은 한반도로 들어왔답니까?ㅎㅎ
6대조묘는 몰라도 수백년된 조선시대 무덤은 한반도에 많이 있습니다. 미이라상태도 많고, 한글편지 들어있는 관도 있고 그러죠.
당연히 한반도도 고려요 조선의 일원입니다...
중원의 대륙조선 중조(中朝)개념에선...동국(東國)이겠고여...
그러나 동북삼성과 한반도의 직계는 이조라기 보단...삼국의 유민들과 특히,발해의 유민들이라 봅니다.
대조선 시대에 한반도는 변방의 조선땅 입니다 조선시대 무덤 미라 이상할것이 없조 대조선이 망국후 대륙은 살벌한 약탈이 선행 합니다 왜놈들도 임진왜란때 실패를 거울삼아 대조선 망국후 60 여년 이상을 통치할 요리를 안하고 미루어 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에 왕이 나라를 또 세운것이 대한제국도 나온는 것이조 임란때 의병에게 혼나 실패한 일을 상기하여 준비 한것이 의병활동의 핵심을 제거하자조 그래서 일단은 양반을 온갓 유혹하여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이주하게 만든것이 천만명이 넘어 이천만 까지도 본다고 합니다 서구열강과 나누어 먹기 시작하였지만 거기에 불만이 있는 일본이 전쟁을 이르킨 것이조 ,,,,,
ㅋㅋㅋ 태양해님.. 님은 어느나라 사람입니까? 님은 충정공 민영환 선생께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글도 보지 못했나요?... ㅋㅋ 중국에서 이천만명이 왔다면... 그 전에 한반도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거예요?ㅋㅋ
지명이 이동한 것은 많이 볼 수있지요! 그것은 그쪽에서 살다 이동한 사람이 지은 이름과 땅 이기에 그러하다는것이고 그것이 실제 살았던것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민족이동기 또는 이조시대에 모화사상이 강했던 것에서 지명이 이동된 것이 많지요. 또한 내고향이 성곡인데 성곡이란 이름이 남한에만 수십군데에 있다는것을 핑계로 내 고향이 어디다 고 이야기 하는것은 고향이란 조건을 알아보면 알 수 있지요. 떠돌이 생활을 많이한 씨족은 그런면이 있지만 내고향만 하드래도 3~4파로 갈려 묘를 관리 하지만 삶의 터가 자주 바뀌면 5~6대조의 묘를 모르는 경향이 많지요. 지금은 제사도 개독 형식으로 지내면 5~6대조상의 묘는 거의가 모르고
@미리내은하2 있더군요. 이런것은 족보를 보면 정확히 알 수있는데.....! 그것도 없으면... 할 말이 없지요.
우와 여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