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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의 특권’이다.
갈릴리에서부터 드디어 본격적인 복음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때가 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하는 바로 ‘그 때’가 찼다는 것이다(막 1:15절).
이미 임하였고, 지금도 계속 임하고 있는 바로 ‘그 때’가 이제 예수님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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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은 그 선포 내용 중에 가장 먼저 ‘회개’를 언급하셨다(막 1:15절). 단순히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회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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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간의 어떠한 공로나 의로움으로 속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하는 곳이다. 그러니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 ‘완전한 영적 소독’인 ‘참된 회개’ 없이 허락될 수 없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인간의 열심으로는 1%도 가능성이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의롭고 정결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 살면서도 언제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그만큼 ‘회개’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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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구절을 앞세워 ‘회개가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오해하여서는 안된다. 물론 예수님은 ‘회개’를 ‘믿음’보다 순서상 먼저 언급하신 것은 맞다. 하지만 이것이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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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히 생각해보자.
‘회개’의 주체는 나에게 있을까?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의 원동력’은 하나님에게서부터 비롯된다.
‘회개’는 구원의 조건일까?
내가 회개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회개를 해야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먼저 회개해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얼핏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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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자신의 의지로 회개하고자 하여도 회개할 능력이 없다. 에덴 동산 범죄 이후, 완전히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스스로 먼저 다가갈 수가 없다. 하나님이 먼저 나에게 다가오셔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나아갈 수 없다. 용서받을 방법이 없다. 구원받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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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회개’란 무엇일까?
우선 ‘회개’는 시간상의 차이로 따질 차원의 것은 아니지만 굳이 본질상의 순서를 따지자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회개’보다 먼저 선행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회개’는 ‘죄사함’, 즉 ‘하나님의 용서’를 기본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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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간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간이 먼저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일까? 결코 아니다.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먼저 다가오셨다는 증거가 바로 ‘회개’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셨다는 증거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죄사함, 즉 용서를 해주셨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복음을 가진 자만이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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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성도에게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용서의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다.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반응’이고 ‘현상’이다(롬 3:24절; 엡 1:7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이 주어져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당연한 반응’으로써, ‘자연스러운 영적 현상’으로써 ‘회개’의 특권을 누린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에게 ‘회개’는 ‘선물’과 같고, ‘하나님의 은사’와 같은 것이다(딤후 2:25-26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에 ‘회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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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회개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금식하고 소리높여 통곡을 하는 것이 회개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것은 인간적인 후회나 감정적 한탄으로써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복음에는 회개의 삶이 수반된다. 그러나 회개의 삶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율법폐기론자들의 가르침은 가짜 복음이다. 다른 복음이다. 거짓 복음이다. 참된 복음을 가진 자는 회개의 특권을 누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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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어떤 존재일까?
매 순간 성령께서 조명해주시고, 알게하시는 성경의 지식을 자신의 삶 가운데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애쓰는 존재이다.
내 육체적 탐욕과 한계까지도 주님 앞에서 인식하는 존재이다. 이로 인해 죄 짓는 것을 미워하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복음으로 인해 늘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넘쳐나는 존재이다. 자책만 하지도, 변명만 하지도, 죄책감에만 빠져 있지도, 열등의식에만 빠져 있지도 않는 존재이다. 주님 주시는 평안과 위로를 힘입어 다시금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려고 애쓰는 존재이다.
이처럼 ‘회개의 삶이 수반된 복음’은 성도의 삶 속에 이중적 감정을 일으킨다. 육체로 인해서는 괴롭지만, 주님으로 인해서는 감사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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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회개’는 결코 일시적이지 않다. 물론 감정적인 것만 앞세우는 것도 아니다. 성도에게 ‘회개’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내 육체적인 탐욕과 잘못으로 인해 어느 순간 나의 삶이 어그러질 때도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범죄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떠넘기지 않는다. 환경 탓만을 하지도 않는다. 여러 가지 궁색한 변명으로 자신의 잘못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눈물만 흘리는 것으로, 금식하는 것으로 은근슬쩍 넘어가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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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인 뉘우침이나 후회를 가지고 ‘회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잠시 내 잘못을 인정하는 기도를 했다고 하여 ‘회개’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이 어떤 상황 속에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즉시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를 안했다고 하여 갑자기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거나 이미 허락받은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탐욕을 고집하며, 어떠한 유혹에 넘어져서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현상들은 성도에게 있어서 때로는 혹독한 시련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성도는 일반은총의 영역을 고려하며,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결코 가볍게 생각하면 안된다. 아울러 ‘회개’를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된다. 우습게 생각해서도 안된다. 무지하여서는 더더욱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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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목사님의 설교 시간을 통해 단지 재미있고, 즐거운 내용에만 집중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회개’에 대한 깊은 의미 때문이다.
설교를 통해 성도 각자의 삶에 주어지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목사님의 설교는 잘 들었고, 은혜롭다고 느꼈는데, 정작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적용이 없는 ‘관람용 신앙’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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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연속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기에 각자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늘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는 거룩한 몸부림을 지속할 수 있고, 지속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삶이고, 경건 생활이며, 성도의 평생 특권이자, 능력있는 복음의 실제적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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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성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중간 중간 수없이 갈등하기도 하고, 방황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유혹들로 인해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갈 수 있다. 아니 평생에 걸쳐서 애써야 한다. 이것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평생 동안 누릴 수 있는 ‘회개의 삶’이다. 이러한 회개의 삶이 없다면 복음은 장식품에 불과하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세상에 집중할수록 복음은 더 재미가 없다. 별로 유익이 없어 보인다. 세상 처세술에 초점을 맞추면 복음의 가치를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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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지금 우리의 교회와 가정 공동체는 어떠한가?
은혜의 특권인 ‘회개’의 반응이 성도들 삶 가운데 풍성히 누려지고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목사인 나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되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목사이면서도 늘 가르치려고만 하고, 정답만 제시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정작 내 삶의 스텐스는 약하면서 정답과 기준만 소리 높이는 것은 아닌지 가슴졸이며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복음을 위해 산다고 말하면서, 정작 매 순간 우리 자신의 고집만을 앞세우는 것은 아닌가? 나의 육체적 탐욕 때문에 복음이 오히려 세상 가운데 가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죄하는 질문이 아니다. 주님 앞에 우리 스스로를 각자 진지하게 돌아보길 원하는 조심스러운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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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흘리는 것으로 떼울 수 없다.
목소리 높여 기도하는 것으로 퉁(?)칠 수 없다.
한숨 깊이 쉰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눈에 힘주며, 인상만 쓴다고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것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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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신앙 생활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내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할 수 있다. 외로울 때도 있다. 서운할 수도 있다.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다. 질투가 나서 소화가 안될 수도 있다. 나만 뒤쳐지는 것 같아서 괜히 열등의식에 빠지거나 우울할 수도 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어찌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9절). 복음이 능력이 없는가? 아니다.
그 복음의 능력을 아직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문제이다. 자존심 상할 것 없다. 겸허히 인정하자.
애써야 한다. 말은 쉽지만 분명 어렵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해서도 안되고, 포기 자체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이끄신다. 그래서 주저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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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투와 눈빛, 나의 행동과 결정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중심을 두고자 몸부림쳐야 한다. 어쩌다 한번이 아니다. 늘 계속 그래야 한다.
당연히 말처럼 쉽지 않다. 맞다. 때론 실패도 있고, 좌절도 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 회개의 특권을 누리는 성도는 복음 때문에 제한도 받지만, 복음 때문에 여유롭고 담대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답게 매순간 신앙의 초점을 재조정해야 한다. 땅의 것에만 집중하려는 시선을 자꾸 하늘의 것으로 재조정하려는 연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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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내 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오늘도. 내일도. 연습하자.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평생 특권으로 누려야 할 ‘회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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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정 가운데,
우리의 예배 가운데,
우리의 기도 가운데,
우리의 찬양 가운데,
오늘의 설교 가운데,
‘비난’과 ‘정죄’와 ‘시기’와 ‘질투’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허점’과 ‘나의 오물’과 ‘나의 잘못’을 먼저 들여다볼 수 있도록 기도하자.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다른 누군가의 들보’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들보’부터 먼저 돌아보고 진정으로 인정하며, 회개하는 성도만의 특권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도록 지금 간절히 기도하자.
#마가복음생각
#답이없는삶이어도
#지겨운복음앞에
천한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