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문예지 가을호들을 보겠다고 강남의 대형 서점에 들렀더니 창비니 문지니 하는 메이저 문예지들이 진열은 고사하고, 문의하니까
‘이런 책을 찾다니 별 꼴이야,’
라는 듯한 표정으로 직원이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높이에서 꺼내주는 시대에 IQ 150 이라는 내가 문학이라는 절체절명의 바보짓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엄습해 운명의 비협조성에 대해 찌릿찌릿한 두통을 느꼈다.
(IQ 150은 택시 기사 인성검사 때 나온 결과이니 상대평가였던 것임에 틀림없음 ㅋ)
하지만 운명 쪽에서
‘허걱, 내가 잠시 미쳐서 한눈을 팔았어요, 이제 열심히 당신 편을 들께요.’
하면서 갑자기 ‘협조’ 라는 걸 해 준다고 쳐서
세상에 각종 문학들이 대박을 내며 팔려나가고 파파라치들이 연예인보다 작가들이 화장실에 앉아있는 장면을 찍으러 다니고, BMW 매장에 가서 시 한 편 써 주면 Mini Cooper차 키를 받아올 수 있는 세상이 된다고 하면,
나는 글 같은 건 재미없어서 안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두통이 좀 가라 앉았다. 안 되는 것들이나 하기 어려운 것들이 알고 보면 가장 재미있는 것들이다.
가장 까다로운 투수가 던지는 공을 홈런으로 만들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최고의 팀과 골키퍼를 상대로 수비수 3명을 바보 만들고 슛을 때려 넣은 골이 그야말로 제대로인 것이다.
그래야 진짜의, 진정한, 생명력을 지닌 것들만 남아 발달해 간다, 고 나는 생각한다. 가짜들은 도태 되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
인류의 법칙은 어제보다 발전된 내일을 향해야 한다는 모든 보이지 않는 기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가 망해가는 속도를 생각하면 그 속도를 늦출만한 발달의 속도가 반드시 비례해 줘야 하는 거니까.
자, 이런 시시한 얘기를 왜 꺼냈느냐 하면,
아까 그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두나's 런던놀이> 라는 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오자마자 많이 팔려 어느 정도 베스트셀러에 진입하고 있는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대부분의 사진집이 그렇듯이 사진의 때깔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종이에 박혀 있는 품질이었지만, (런던의 서점에서 만났던 사진집들은 거의 인화지라고 해도 되는 종이에...) 낯설지 않은 런던의 거리들이 눈앞에 펼쳐져 몹시 반가웠다.
‘끼요오오오 런던이당!’
하면서 정신없이 책자를 넘겨가다, 순간 다시 두통이 시작되었다.
이건 뭐, 영국사랑의 준시기 님이나 내가 아는 런던의 J모양이 찍는 사진의 수준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잖아. 물론 배두나씨가 사진을 사랑하고 열심히 찍으려고 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이 묻어나 있었고
평소 배두나라는 배우에 대해, 가짜가 아닌 배우다, 라고 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버럭 화를 낼 수는 없었지만, 두통 기운과 조금 마음이 씁쓸해 지려는 걸 막을 정도는 안 되었다.
위에 언급한 준시기님의 밑줄 쫙, 핵심적인 사진들이나 J양의 마리아나 해구, 깊이 있는 사진들이 박모 15번진짜안와 따위의 글과 어울려 책자로 나왔다고 생각해 보면
베스트셀러는 커녕, 그런 책이 나왔나? 라는 홀대를 받거나 심지어 출판 자체가 가능하겠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박모군의 글 수준 때문에.)
다른 한 분야에서 유명인이 되었을 때 그 유명세가 다른 분야로 전이되어가서 만들어 내는 묘한 아우라를 한 분야에서 유명인도 되지 못한 자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내겐 이런 사진집이 잘 팔린다는 사실이 묘한 아쉬움을 준다.
런던을 그녀보다 잘 찍은 사진들이나 책자들이 한 두 권이겠냐 이 말이다. 잘 찍고 못 찍고는 어디나 주관적인 미적 판단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배두나가 원했든, 그렇지 않든
그 놈의 <시스템>에 의해 가동되어가는 <상품>들을 대중들은 너무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연기 면에서 보자면 배두나는 참으로 <시스템> 적이지 않은 여배우다.
물론 최고의 여배우들 만큼 예쁘지 않기 때문에 자동으로 정해진 길일 수도 있겠지만, 놀라운 건 그 배우의 취미생활이 살짝만 소꿉장난 수준을 벗어나면 포장해서 팔아 댈 줄 아는 그 놈의 <시스템>이 지겨운 것이다.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 <시스템>에 편승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다양한 아웃사이더가 강한 무공을 떨치는 발달된 사회란 21세기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는 꿈에 불과한 것인가.
사실 상업적인 여타 서적에 비하면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고 잠시나마 런던이라는 내 고질적인 추억병을 핥아준 고마운 책이고
배두나 역시 여배우로서 꽤 섹시하구나, 라는 +.+ 새로운 발견을 준 책이긴 하지만, 요렇게 악담을 퍼부어 대는 건
내가 쓰고 있는 런던에 대한 텍스트가 줄 수 있는 신선함이 이미지에 선수를 빼앗겼구나, 라는 옹졸한 자괴감과
그녀가 런던에서 내가 생전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을 먹고 있는 정황들에 대한 부러움과, 튜브 위주의 시각이 15번만 타고 다닌 -_-;; 내 초라했던 입지와 비교되고 말았기 때문이렸다.
근데 그녀가 런던의 뒷골목들만 찍고 집에서 양파나 볶아 먹는 생활을 찍어댔다면,
‘런던에 갈’ 계획이거나 ‘ 갔다 온 사람’ 이거나 ‘언젠가는 런던에 한 번 가봐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환타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출판되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게 된다는 환타지를 이룰 것인가.
게다가 나 같은 비협조주의자가 딴지 걸까봐 제목도 런던 <놀이> 아닌가. 빠져나갈 구멍은 정말 잘 만든다. 누가 사진집이래? 카메라 들고 런던에서 '논' 거야. 하면 할 말 없다.
어쨌거나 런던에선 이 책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즉각 알지도 못할 텐데 이런 덜 떨어진 얘기는 고만 하고, 결론적으로 모든 환타지는 참 지루한 이 세상의 박카스니까 남이 낸 책에 비판이나 쫑알대지 말고 빨리 내 환타지나 완성해서 이 두통에서 벗어나야겠다.
카페 게시글
영 국 일 기
두나's 런던놀이, 단상
15번진짜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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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9.01 01:03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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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배두나씨,, 가끔 그분이 찍었다는 사진들이 넷상에 떠돌아다녀도 별 감흥이 없지만은.. 런던이라니 나 또한 혹했을것 같군요; 그나저나 님 글 읽으니 런던에 가면 가장 아쉬울껀 우리나라 문예지를 볼 수 없다는걸까나.. 라는 생각이 우.
실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 만나러 영국왔다가(물론 영국온 이유야 하나 더 있지만요^^) 조금 늦장부리는 사이 그분이 그만 소천하시는 바람에 땅을 치고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원서한번 지대로(?) 읽어볼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아직도 수행이 부족하여 번역본만 ㅡ.ㅡ; 암튼 넘 걱정마세요. 작가는 좋은 글쓰기에 머리쓰고 마케팅은 출판사에게 맡기세요. 좋은 출판사랑 좋은 계약 이루실거라 믿습니다(혹시 벌써 계약하고 글쓰시는건...^^;)
출판 되었군요, 저번주에 서점 갔을때만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혹은 제가 워낙 "베스트셀러"쪽엔 관심이 없어서 못봤을수도 있겠네요) 저도 아직 책은 못봤지만 배두나씨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나 성실성은 다른 매체를 통해 익히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역시 15번...님의 말씀처럼 "인기배우 배두나"이기 때문에 책으로 나올 수 있다라는 말 또한 100%공감가네요. 얼마전에 같은 얘기를 누구한테 또 들었거든요^^ 그래도 London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는데 일등공신을 해주니 고맙네요.(난 영국관광청에서 일하지도 않는데 왜 고마워야 하지?ㅋ) 전 개인적으로 15번...님의 글이 하루빨리 책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당장 달려갈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