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뱀
홍일표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그림자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그림자는 깨지지 않았다 비명도 통증도 없었다 그림자는 떨어지는 순간 마음을 지우고 몸을 닫았다 그림자는 부서지지 않아서 먹물처럼 흘러갔다 죽어서도 살아 꿈틀거렸다 그림자가 땅속으로 스미어 행방이 묘연해진 날 그림자를 놓친 세상이 두리번거리다 눈을 감는다 흘러넘쳐서 세상이 끌어안지 못한 그림자는 지워지고 깨끗하게 씻긴 바닥이 방긋 웃는다 어두컴컴한 땅속으로 이주한 그림자는 지하생활자가 된다 구근식물처럼 오래 눈감고 견디면서 조금씩 그림자를 벗는다 여기저기서 허물이 눈에 띄는 날 땅속에서 우글거리는 검은 뱀을 발견한다 운 좋게 흑장미로 몸을 바꾸는 그림자도 있지만 여러 마리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세상 속으로 잠입한다 악몽에 놀라 소스라치며 잠을 깨는 날들이 많아진다 돌아보면 망치로 내려쳐도 깨지지 않던 그림자였다 흑인 영가처럼 밤늦게 혼자 남아 부르던 검은 노래였다 ―계간 《문학청춘》 2024년 봄호 ------------------------ 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청소년 시집 『우리는 어딨지?』,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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