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캠프에서는 라면도, 컵라면도, 삼겹살도, 짜파게티도 한 번 먹어보지 못했다며 밤 11시
가 넘었는데 소영이가 라면 하나만 먹고 자면 안 되느냐고 그래. 자기 전에 음식 먹는 거
소화도 안 되고 좋을 거야 없겠지만 원래부터 좋아하던 것인데, 좋아해도 내가 여간해서는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 집에서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던 것인데 오죽이나 먹고 싶었을까 하
며 끓여주겠다고 했어. 반 개. 맛있게 먹더라. 아빠도 드실 거냐고, 좀 드시라고, 한 젓가락
이라도 드시라고, 아무리 싫다 해도 자꾸만 귀찮게 굴더니 다 먹고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모자란 눈치야. 소영이는 먹성이 좋아. 아무 거라도 잘 먹어. 햄버거, 피자는 물론이고 라면,
떡볶이, 오뎅도 좋다, 돈까스, 스테이크도, 김치, 된장찌개, 젓갈, 조림, 장아찌도 물론. 하지
만 제일 좋아하는 건 뭐니뭐니 해도 해물이야. 특히 회초밥하고 새우하고 게. 간장게장이나
게무침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생물 게를 사려고 해도 여기는 다 냉동 게만 팔더라. 나중에
서울 나갈 때 얼리지 않은 게를 꼭 사와야겠어.
8월 10일 일요일. 을묘乙卯. 종일 우중충하다가 밤을 노려 틈입한 비.
잡곡을 사다 놓은 게 오래되어서인지 바구미가 많이 생겼어. 찹쌀현미, 검정쌀, 알보리, 조를
섞어놓고 쓰거든. 많지 않아도 잡곡이야 원래 많이 넣는 게 아니니까 절로 오래 묵게 되었
지. 장마에 저희들 살판났는지 아니면 잡곡 통이 나 모르는 새 화수분 되었는지 새끼에 새
끼를 쳐서 종내에는 막 기어 나와. 안되겠다 싶어서 가지고 나가 돗자리를 펴고 널었어. 널
어 펴기 무섭게 기어 나와. 시커멓게 나와. 재어보지 않아서 긴가민가하지만 모르기는 몰라
도 하마 저것들이 반 넘어 먹어치웠겠어. 특히 보리쌀을 더 좋아하는지 유난히 구멍이 송송
났어. 거무죽죽한 배설물이 너무 많아서 그냥 너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나겠다 싶어 체를
가져다 일일이 다 까불렀어. 모처럼 별미밥을 하자. 저녁에 밤콩까지 불려 잡곡밥을 지었더
니 맛이 좋더라.
친구가 쓴 글을 보고 몇 마디 참견을 했어. 참견 끄트머리에 나는 잘 모르니까 알아서 해라,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보고 겁쟁이래. 할말 다 해놓고 물 타면서 쏙 빠져나가려고 한다면서.
그래, 나 겁쟁이야. 겁쟁이라서 늘 으르렁, 컹컹 짖어대는 거야. 겁 많은 개가 더 시끄러운
법. 일부러 겁쟁이인 척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거지, 뭐. 그렇지 않
으려면 일부러 경고등을 달아야 해. 위험 수위를 넘자마자 때르릉 울리도록. 하지만 자체 피
드백 구조를 만들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늘 새겨놓고 읽어야 하거든. 바이블처럼 옆
구리에 끼고 다니기 힘들잖아.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거야. 겁쟁이인 게 정 싫으면
대신 경고등이 되어달라고 했어. 하겠대. 잔소리가 여간 만만치 않은 친구인데 당분간 귀가
쟁쟁하겠군. 잔소리나마 해주는 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나는 칭찬보다 잔소리가 더
좋더라.
아이들 다툼이 잦아. 사사건건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틈새만 보이면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
는 데다 설사 잡을 꼬투리가 없더라도 어떻게든 이유를 갖다 붙이며 만들어서 시비야. 하도
다투기에 소영이도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고 건희도 따로 불러서 이야기했어. 아빠가 부탁이
있어. 부탁이야. 아빠는 너희 둘이 싸우는 게 가장 싫어. 그 무엇보다 싫어. 너희 둘이 서로
사이좋게 놀고 이야기하고 또 위해주면서 사는 게 보고싶어. 왜 그렇게 일일이 다 트집이야.
그러지 마. 공부 잘하는 것보다, 나중에 훌륭한 사람되거나 돈 많이 버는 것보다 더 바라는
일이야. 화가 나도 아빠한테 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참고 또 신경질이 나도 참아. 아빠한테
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왜 그래? 너희가 화를 내고 싸우는 건 아빠한테 그러는 것하고 똑
같아. 아빠가 받아들이기에는 똑같아. 알았지? 그러지 않을 거지?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는
체 하다가 금새 또 다퉈. 애 엄마 만나서도 저렇게 싸우면 안 되는데. 걱정이네.
나 내일 양재역에 가. 내일 애들 엄마에게 데려다주기로 했어. 며칠 같이 지낼 거야. 원래는
모레부터 가기로 한 것인데 하루 더 이르게 데려가는 거야. 애들 데리고 여행을 가겠대. 며
칠 보내는데도 준비할 게 만만치 않게 일이야. 며칠 해방이야. 뭘 할까 고민이야. 아마도 공
황이 되지 싶어. 그래서 또 고민이야. 휘몰아쳐 덮치는 공황증을 어떻게 슬기롭게 때려눕히고
신나게 즐길지를 궁리하느라고. 나도 짐 싸들고 나가서 아이들 건네자마자 서울역으로 내달
아 바다나 만나러 갈까, 그런 궁리하고 있어. 갯벌로. 갯벌에 참 가보고 싶었는데 아직 제대
로 가보지 못했거든.
8월 11일 월요일 병진丙辰. 맑음.
아이들을 데리고 양재역으로 가는 길. 서둘러 밥을 먹이고 또 빠뜨린 물건이 없는지 일일이
들먹이며 잔소리처럼 중얼중얼 거리며 챙겨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물건은 용수철처럼 튀어
나와. 옷가지며 지우개며 로봇을 더 넣느라 시간은 바삐 가. 소영이는 엄마 줄 거라며 선물
을 포장해. 무엇인지 모르겠어. 가르쳐주지도 않아. 그걸 보더니 건희는 준비한 게 없으니
그냥 돈으로 주겠대. 만 원이면 선물하기에 모자라지 않느냐고 물어. 그럼! 괜찮아. 충분해.
무엇을 선물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 더 중요하니까 엄마도 좋아하실 거야. 그럼,
좋아하고 말고. 그 놈에게 만 원이면 전재산에 다름아닌데 좋아해야지, 그럼.
설악 터미널에서 12시 40분 발 청평행 버스표를 끊었어. 오줌을 누이고 타야지, 버스 타고
가는 도중에 마렵다고 하면 낭패니까. 소영이는 괜찮다고 하기에 그냥 두고 건희만 들여보
냈는데 다시 나와. 배낭을 벗고 하겠대. 배낭을 벗겨주는 사이 두 명이 들어와 먼저 새치기
를 해. 기다렸다가 쉬를 다 시키고 나와서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 38분이야. 안심이야.
그런데 이상해. 수상한 낌새. 아까 청평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 몇이 보이지 않아. 몇
이 빠져나갔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야 아직 더 있지만 다른 행선지 버스도 함께 기다
리니까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지는 않아. 버스가 가버린 것은 아닐까? 매표소에 가서 물으니
화장실에 간 사이 이미 버스는 갔대. 뭐 이러냐? 시간도 되기 전에 가는 게 어디 있어? 며
칠 전에는 삼십 분이나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이제는 약속한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갔다
고? 순 제 마음대로야. 오줌은 그냥 싸지 왜 배낭은 벗는다고 해서 차를 놓치게 하느냐, 소
영이는 버스가 오나 안 오나 좀 지켜보고 있어야지 그래, 어먼 데 쳐다보고 있다가 버스가
지나가도 모르고 뭐하느냐, 괜히 건희와 소영이를 닥달했어. 괜히.
그나저나 낭패일세. 다음 차는 1시 10분. 그 차를 타면 약속에 늦을 게 뻔한데. 더구나 휴가
철이라서 경춘가도가 엄청 막힐텐데. 별수 있나, 기다려야지, 뭐. 앉을 곳도 마땅치 않고 땡
볕에 서있자니 하나씩 둘러맨 배낭에 드는 가방 하나, 제 엄마 줄 선물상자 하나, 작은 물병
하나씩. 에라, 택시를 타자. 택시 승강장. 청평터미널까지 가주쇼, 청평터미널에 도착하니 동
서울터미널로 곧 떠나려는 버스가 있어. 기사 아저씨!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이들은 버스
옆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서둘러 표를 사서 오니 버스가 막 가. 매정한 버스. 몇 마디 툴툴거
렸더니 옆에 서있던 아가씨 말이 어차피 좌석이 없어서 앉아 갈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갔
다는 거야. 아, 그랬구나. 이 아가씨도 동서울 가나 보다, 그러니 그리 소상하게 알지.
또 기다렸어. 15분 후에 또 온대. 줄을 서서 기다렸어. 곧 오겠지. 무료해진 건희가 도대체
버스는 언제 오느냐하며 조급증을 내기 시작하고 소영이도 지치는 기색이야. 조그만 기다려.
곧 올거야. 금방 와. 온다, 와. 춘천 발 상봉동 행 버스. 청평에서 내리는 이들을 기다려 차
에 오르려고 하는데 아니래, 못 탄대. 표는 동서울로 끊어놓고 왜 상봉동 행 버스를 타느냬.
맞아, 오늘 왜 이러냐. 양재를 가려면 동서울로 가는 게 가까워서 동서울로 행선지를 잡아놓
고도 내가 이러네. 헤헤, 아빠가 제정신이 아니다, 야! 곧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어? 저
뒤에 서있는 저 차. 저거 동서울인가 보다. 가자, 얼른 와. 동서울 가는 버스야. 휴, 다행이
야. 버스에 올라 건희는 옆에 앉히고 소영이는 따로 앉았어. 소영아, 한참 가야하니까 좀 자.
모르긴 몰라도 두어 시간은 가야할 거야.
소영이는 바로 자는데 건희는 안 자겠대. 버티겠대. 버텨야한대. 잠을 자지 않고 버티면 레
벨이 올라가고 잠들면 제 레벨이 떨어진다나? 건히는 차만 타면 꼭 저래. 잠자지 않기로 버
텨. 차 타서 잔다고 무슨 레벨이 떨어지냐, 임마. 그러지 말고 제발 좀 자라, 응? 자라는 잠
은 자지 않고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려. 엄마랑 치킨집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양재역에 가
서 치킨 먹자. 조금만 참아. 건희는 엄마 만나면 뭐가 제일 하고 싶어? 대화요. 응, 무슨 대
화? 그냥 대화요. 말이요. 그래, 엄마랑 대화 많이 해. 엄마가 심심하지 않게. 엄마가 재미
있게. 자지 않겠다고 우겨대더니 한참을 버티다가 종내 자네. 잘 거면 좀 일찍 자기나 할
것이지 이제서야 자냐? 이미 올림픽대교 다 와 가는데 자니 오히려 더 피곤하기만 하지.
잠들자마자 깨워야만 했어. 어서 가자, 너무 늦었어. 엄마가 기다리느라고 힘들 거야.
동서울터미널 바로 길 건너 강변역에서 전철을 타고 교대역까지, 교대 역에서 다시 3호선으
로 갈아타고 양재로 가려고 승강장에 서있는데 열차가 들어와. 타려는데 또 수상한 낌새. 아
차차! 구파발, 일산 지나 대화행 열차구나. 오늘 왜 이러냐, 나? 얼이 빠져도 제대로 빠졌어.
소영아, 오늘 아빠가 이상하니까 소영이가 좀 잘 봐. 아무래도 이상해. 수상해. 정작 수상한
건 나야. 아침부터 계속 어긋나는 게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내 의식 저 아래
에서는 나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교묘한 방식으로 길을 엇갈리게 만들고 싶은가 봐. 본래 생겨
먹은 게 좀 얼뜨기이기야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게 오늘 유난히 심하잖아. 아무래도 양재
역으로 가고 싶지 않은가 봐. 애들을 보내고 싶지 않은가 봐. 애들을 보내기가 두려운가 봐.
건너편에서 양재 가는 열차에 올랐어. 양재역 도착. 약속보다 조금 늦었어.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KFC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주차할만한 마땅한 곳이 없어서 그냥 농협 앞에 주차하고
기다린다네. 그럼 애들이 배가 고프다니까 치킨을 미리 사서 차에서 먹을 수 있게 해줘. 그래.
다 와 가. 금방 가.
전철 속에서 양재역이 가까워올수록 마음이 불안하고 그래. 소영이와 건희를 제각각 마주하
며 어깨를 안고 다시 한번 말했어. 절대 싸우지 마. 엄마가 오랜만에 너희 보는데 혹시라도
싸우는 모습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 그 무엇보다 꼭 지켜야할 일이야. 절대 싸우지
마. 며칠만 참아. 꾹 참아. 알았지? 그래줄 수 있지? 소영이는 누나니까 참고, 건희는 동생이
니까 참아. 당장 그때는 화가 나도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잖아. 그렇지? 알았지? 알아
들었지? 그리고 일기는 빠뜨리지 말고 날마다 써. 그 어떤 숙제보다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숙제가 바로 일기야. 일기는 날마다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절대로 벼락치기로 할 수 없는 숙
제라서 더욱 중요해.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 잘하고. 어깨, 목, 팔다리 안마도 해드리고. 약
드실 때 물도 떠다 드리고. 식사 전후에 꼭 인사하고. 어깨를 자꾸 비비면서,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부탁을 했어. 혹시라도 홀아비 혼자 애들 키우면서 엉망으로 망가졌다는 말 듣
기도 싫고 또 제 엄마가 그나마 마음 많이 아프지 않게.
양재역에 내려 5번 출구로 나가니 농협 앞에 우리 차가 서있네. 아니, 이제는 우리 차가 아
니라 그 사람 차구나. 다가가니 애들 외할머니가 차에서 나오셔. 인사를 여쭙고 치킨집으로
갔어. 애들 엄마가 주문을 하고있어. 애들만 안으로 들여보냈어. 이제 헤어진 후 1년이 넘었
어. 애초에는 2주일에 한 번씩 애들을 만나겠다고 했지만 그 사이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서너
시간 본 것 말고는 이번이 첫 만남이야. 1년만의 만남인데도 아이들은 전혀 어색해하지 않
아. 울먹이거나 그렇지도 않아. 걱정했던 것보다는 스스럼없이 만나게 되었어. 비록 나는 예
외이긴 했지만. 나는 그 사람 눈을 마주 보지 못했어. 아니 그럴 수 없었어. 내 마음을 보여
주기도 싫었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보기도 싫었어. 무서웠어. 그 사람 눈을 보면 내 마음이,
이 상황이, 또 내가 어떻게 변할지 도무지 자신할 수 없었고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어. 의
례 뻔한 인사말을 엉거주춤 길에 선 채 건네고 또 대꾸하며 헤어졌어.
건희는 좋아라하며 따라서 가고 소영이는 자꾸만 안타까운 눈빛으로 뒤를 돌아다보며 따라
가. 어서 가. 잘 갔다와. 손을 들어 자꾸만 홰를 치며 안심하고 가라고 했어. 가네. 차에 타
네. 한참 바라보면서 별 생각이 다 들어. 아이들도 딱하고 애 엄마도 딱하고 애들 외할머니
도 그렇고 나도 그래. 아, 기분 더럽다. 몸에 물뿌리개 꼭지처럼 구멍이 난 듯 기운이 다 빠
져나가. 씨발.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어. 약속시간이 아직 한참 남았지만 혼자 기
다리기엔, 더구나 이런 기분으로 기다리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야. 야, 애들 갔어. 얼른 나와.
얼른. 어서 나와서 휘청거리는 나를 좀 붙들어줘.
친구와 함께 인사동으로, 아는 누나를 만나서 셋이 함께 '궁'이라는 식당에서 조랭이 떡국을
먹고 샤갈전을 보았어. 선화랑인가 어디인가 그래. 2층부터 4층까지였는데 우리는 엘리베이
터를 타고 4층부터 보았어. 그런데 4층은 인쇄된 판화를 걸어놓았더라고. 그것조차 크기마저
작게 줄인 채로. 무척 실망했어. 실망한 셋이서 창 밖으로 눈길을 주었어. 햇살이 밝아. 투명
해. 가벼운 햇살들이 건물 벽으로 지붕으로 창으로 꽂혔다가 튕겨. 차라리 샤갈 그림보다 창
밖 풍경이 더 좋다 야, 그지? 저 흰 벽 집 좀 봐라, 작품이야, 야! 저기가 너희 아는 오빠가
살던 집 아니냐? 농을 섞으며. 또 폐지 재활용하는 데 순서 바꿔 세워진 양철 칸막이에 쓰
인 글씨를 짜 맞추며 아이들처럼 시시덕거리며 놀았어.
그러다 내려가 보니 3층부터는 원화가 있더라. 기대보다 못하였지만 명화를 가까운 데서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아래에 깔려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색을 보는 재미나, 보일 듯 말 듯 하
는 흐리고 자잘한 붓 터치를 보는 즐거움은 인쇄된 그림에서는 즐길 수 없는 일이거든. 가
까이 또 멀찍이 떨어져서 보았어. 무엇을 보거나 간에 대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거리는
아주 중요한 요소야. 거리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보이는 재미. 그 재미를 장치했을 법한 작
가의 의도 읽어내기. 대상을 인식하는 데에 보는 사람의 거리에 따라 평면이 입체가 되기도
하잖아.
친구가 다른 친구들을 불러냈어. 나도 모르게. 애초 생각하기로는 아이들 보내고 나서 기분
이 막 헝클어지거나 아니면 공황에 빠지거나 두 극단 중 하나가 될 게 뻔하고 그래서 양재
역 근처에 사는 그 친구만 잠깐 만나고 돌아오려던 것인데 제 마음대로야. 한 명이, 또 한
명이, 줄줄이 사탕처럼 꼬리를 물고 누나도, 형도, 친구들도 나왔어. 나중에는 여덟이 되었
어. '인사동사람들'에서 커피와 팥빙수, 구운 옥수수, 고구마 크림빵과 단팥빵을 먹고 '지리
산'으로. 백반과 김치전을 시키고 오십세주를 마셨어. 좋아하는 감정을 그대로 말하기에는
그냥 입에 발린 말 같기만 하고 왠지 쑥스러워서 말을 반 바퀴쯤 살짝 꼬아가며 투닥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보기에 삼삼해. 좋아. 좋은 사람들이야. 하긴. 좋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
가 마는. 사람이건 짐승이건 잘 몰라서 그렇지 알고 나면 다 좋은 사람, 좋은 것들이잖아.
물론 전혀 알고싶지 않은 사람도 가끔 있기야 해. 알자고 들면 무척 피곤해지는 그런 사람.
굳이 내 기운 다 빼내며 알기 위해 애쓰고 싶지 않은 사람 말이야. 그것은 그 사람이 나빠
서가 아니라고 봐. 운영체계-소통방식-이 워낙 다르니까 그렇겠지.
중간, 중간, 형과 아이들, 또 시골 아버지한테서 전화. 시끄러울까 봐서 전화기를 들고 나가
서 받았더니 돌아가며 한 마디씩 흰소리를 건네. 너 애인 생겼니? 애들 없는 사이 여자들이
줄 서있는 거 아냐? 몇 시간 간격으로 예약되어있는데? 우리가 찾아가서 마당에 텐트 쳐놓
고 지킬까? 그래. 놀려라. 홀아비 놀리는 재미 적잖지. 9시쯤 그만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뜨
려고 했더니 다들 같이 일어서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어. 아차! 그냥 살그머니 빠져 나올걸.
또 분위기 망쳤네. 나오는 길에 한 친구가 선물을 주었어. 선물. 그래, 선물. 고마워, 선물.
잘 쓸게, 선물. 무리들은 노래방으로 간다네. 나도 노래 두 곡만 하고 가래. 그래, 좋지. 하
지, 뭐. 세 곡을 부르고 나서 눈인사를 나누고 살그머니 나왔어. 한참 걸어나오는데 전화.
야! 그러는 게 어디 있어? 남 노래하는데 듣지도 않고 나가는 게 어디 있어? 정말 그러기
야? 아, 미안. 노래하는데 인사하면 김 빼는 거 같아서. 그럼 노래 끝난 다음에 나가야지. 어
서 되돌아와. 나 지금 그 쪽으로 내려가니까 너도 돌아와. 인사하고 가. 나 지금 바빠. 그냥
갈래. 안 돼! 돌아와. 나도 한참 내려왔단 말이야. 너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런 거 아니야?
뭐? 이상한 짓은 무슨 이상한 짓? 아니야. 그래. 지금 되돌아 올라가고 있어. 그렇게 다시
만나서 인사. 잘 지내. 밥 잘 먹고. 알았어. 걱정하지 마. 어떡해도 다 살아. 그리고 일 좀 해
라.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애들이 보고싶어. 애들도 내가 보고싶을 거야. 아, 아니야. 애들 생각은 잊고 며칠 싸돌아다
녀야지. 며칠간 내게는 애들 없어. 없기로 작정했어. 며칠은 애 아빠가 아니야. 그냥 나인 채
로 살아야지.
8월 12일 화요일. 정사丁巳. 기억나지 않는 날씨.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오늘 하루, 우주의 기억을 능가할만한 많은 일과 말이 내 속
으로부터 난무한 것 같은데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기억은 무엇이지? 각색, 편집되지 않
는 기억이란 없으므로 기억을 믿지 않아. 기억하지도 않아.
8월 13일 수요일. 무오戊午. 오전에는 구름, 오후 들어 볕.
횡성인지 서산인지, 창리 거쳐 간월도. 아이들은 제 엄마에게 가고, 내 손발 묶던 사슬이 풀
리듯 얼마나 기다리던 일이냐 마는, 나는 그만 문 열린 새장 속 한 마리 작은 새처럼 고민
했다. 어지러웠다. 예정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수리에 번개를 맞은 듯 어제 잠
시 정전이 되었다. 다시 들어온 전기에 센서들이 부산스럽게 제 자리를 더듬거렸다. 날아가
도 될까, 밖으로 나가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가 몸을 덮치지는 않을까, 아니, 이렇게 머뭇
거리는 사이 새장 문이 닫힌다면, 또 얼마의 시간을 기다리며 후회할 것인가, 올 겨울방학이
되기 전에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아니, 장소를 조금 옮기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 수 있다는
말인가? 도무지 무엇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아
니, 아니. 가자. 옮겨보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 자리 앉아 뇌주름만 혹사시키는 것
보다야 몸 움직여 부딪혀보고 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렇다고 해서 늦는 법은 없다. 자위뜨
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전봇대, 전봇대, 전봇대를 잇는 전선이 지잉지잉 늘어져 흐르고 나도 전
선을 따라 길 위로 흘렀다. 멀리 낮은 산이 굼뜨게 지긋이 엎드렸다. 일어나지 않는다. 식당
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갯벌에 조개가 나느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있기야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캐어대니 많을 턱이 있느냐고 한다. 많이 캐려는 것이 아니니 관계없지. 슬리
퍼와 호미를 빌려 갯벌에 나갔다. 조개를 캤다. 캘 때는 그냥 까만 색이더니 웅덩이에 씻어
서 보니 바지락이다. 스무 개 정도 캐다가 다 살려주고 말았다. 뻘에는 게들이 제 살 집을
만들고, 또 수선하느라 바쁘다. 밀물이 되어 물이 차면 망가지고 말 걸 알까. 안다손 치더라
도 달리 방도가 없겠지. 어제도 또 내일도 그렇게 허구한날 집을 짓고, 고치고, 버리고, 또
짓고, 고치고, 버리기를 반복하겠지. 그 지루한 일상 속에서 분주하게 사는 게. 딱하기도 하
지.
바다 가생이에 서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갈매기도 파도도 섬도 뭍도 다 아무
런 관념 한 자락 걸치지 않고 그렇게 무심한 나신으로 떠있다. 짭짤히 맡아지는 냄새도 없
고 비릿한 갯내음도 없이, 갈매기 울음소리조차 없이 사진처럼 얇게 던져진 바다. 바람도 없
이 펄렁거리는 사진. 아니, 거기 그것들이 지금 내 앞에 있기는 있는 것일까? 그것들이 정말
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있다고 믿는 것인지 모를 바다 가생이에서, 세상의 거친 손길
이 서러워서 울었다.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그들
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다 내 문제일 뿐이다. 세상은 늘 나에게 친절하고 헌신적이었다. 과분
했다. 특별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나는 그렇게 두루뭉실하고 만만하지 않아. 그게 문
제지. 나는 지나치게 가탈스럽고 예민한 안테나를 가졌거든. 세상이 내게 보여준 관심이 주
제넘게도 오히려 나를 외롭게 하거든. 이상스럽기도 하지.
목을 놓아 울었다. 울음이 나오자 목으로 자꾸만 숨이 밀려들어가며 꺼억, 꺽 짐승 소리를
낸다. 이런 울음을 바란 것이 아닌데, 다 쏟아내고 싶었는데 강박된 소리가 터져 나오다가
자꾸만 도로 기어 들어간다. 엄마. 엄마를 생각하며 아이처럼 울었다. 무엇 때문일까, 이 이
유는. 사람들이 간혹 스치며 흘깃거리지만 보라지, 뭐. 대수롭지 않아. 보면 또 어때. 그래.
봐라, 보고 기억해라. 오늘 나의 이 처절함을.
환상을 다 깨고 왔다. 징그럽더라, 현실.-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야. 언제부터인가 꼭 한
번 목청 높여 울고싶었거든.
8월 14일 목요일. 기미己未. 맑으나 맑지 않은.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 하나를 이유로
사람 모두에 대해 절망하는 이가 없기를 바래.
8월 15일 금요일. 경신庚申. 조석으로 이는 찬바람에 소름이 돋다.
시퍼런 벼가 선 벌판에 구름 그림자가 흐른다.
미속촬영을 한 것만 같다.
때로는 논이 막 흘러가는 것만 같다.
첫댓글 나도 가끔 그렇게 얼이 빠진다. 천상, 팔자다.
가끔 빠지는 건 팔자 아니야. 내 얼은 옥자 같어.
천지간 나 하니인 것을...
얼이 나가서 좀 놀다 다시 오면 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