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5일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한국 천주교회는 사도좌와 뜻을 같이하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에게 더욱 깊은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고자 2001년부터 ‘이민의 날’을 지내고 있다.
주교회의 202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는, 이 명칭을 보편 교회에 맞추어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World Day of Migrants and Refugees)로 변경하였다.
▦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고, 탐욕스러운 부자는 외면하시며, 무분별한 자들의 방종을 그치게 하시고, 짓눌리는 이들을 정의롭게 보살피십니다. 언제나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받아 주실 것을 굳게 믿읍시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제108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담화
“바다의 보화가 너에게로 흘러들고
민족들의 재물이 너에게로 들어온다”(이사 60,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108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 해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영향 아래 지냈습니다. 올 4월 주님 부활 대축일이 지난 뒤, 확진자가 감소하고 방역 지침이 완화되어 모두 일상으로 회복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확진자가 다시 빠르게 증가하여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제는 코로나19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가운데 올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과 이주민과 실향민들이 생겨났고, 전 세계가 경제적 정치적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러한 전쟁을 불러일으킨 자국 중심주의는 정치적 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적 관계를 악화시켜 서로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세계를 고통스럽게 분열시키는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멈출 수 있는지, 전쟁으로 곤경에 놓인 난민과 이주민과 실향민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자세가 무엇인지 스스로 묻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제108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교황 담화를 통하여 우리가 함께가 건설해야 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도록 권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고, 우리의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복음으로 회심한 이들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복음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며 그 누구도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동시에 가장 힘없는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온전한 시민이 되는 필수 조건임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곧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과 실향민을 모두 포용하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교회의 역사 안에서 교회가 참으로 풍요로웠던 시기는 다름과 다양성을 받아들였을 때였습니다. 초대 교회 때, 교회가 안팎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양한 세계의 각기 다른 민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였고, 비록 언어와 문화와 사고가 달랐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전 세계로 복음이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보편성’(Catholicity)은 이렇게 다름과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데서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특별히 가톨릭 신자 이주민과 난민의 유입은 그들을 환대하는 교회 공동체에 활기를 북돋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공동체에 다시 생기를 돌게 할 것이고, 우리가 하는 하느님 일에 살아 숨 쉬는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또한 다양성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의 풍요로움을 얻게 할 것입니다. 사실 이주민과 난민을 자신들과 조화롭게 통합하는 사회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주민과 난민의 존재는 때로 크나큰 어려움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이가 문화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각자가 지닌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서로 알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에게 열린 마음은, 우리가 희망과 문화를 교류하며, 그 만남의 자리를 풍요롭게 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고 하느님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도 자기 나라와 집을 떠나 고통 속에 있는 이주민과 난민과 실향민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합시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고 함께하겠다는 신앙인의 마음을 표현해 봅시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작은 마음과 실천 하나하나가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 위대한 미래의 건설을 앞당기는 행동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가 바로 우리 가운데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022년 9월 25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정 신 철 주교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계명을 지키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6,11ㄱㄷ-16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축일9월 25일 성 세르지오 (Sergius)
신분 : 신부, 수도원장, 설립자
활동 지역 : 라도네즈(Radonezh)
활동 연도 : 1314-1392년
같은 이름 : 세르게이, 세르기예프, 세르기오, 세르기우스, 세르지우스
러시아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세르기우스(또는 세르지오)는 로스토프(Rostov)에서 태어나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5세 때에 그는 모스크바 통치자들의 로스토프 침략을 피하여 정처 없이 온 가족이 떠나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모스크바(Moskva) 교외인 라도네즈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1335년 부모와 사별한 세르기우스와 그의 형 스테파누스(Stephanus)는 마코프카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세르기우스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은수생활을 계속하였으므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졌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몰려들자 세르기우스는 후에 유명해진 ‘삼위일체 수도원’을 세워 원장이 되었고, 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타타르족의 침략 이후 사라졌던 러시아에 수도 공동체를 재건한 것이다. 그 후 그는 헤르쟈크 강변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던 중 모스크바의 대주교 알렉시스(Alexis)를 계승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자신의 소명은 수도생활이라고 판단하고 강력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갖고 있었던 그는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조국 러시아의 일치를 위해 제후들의 통합과 일치를 요청하였고, 마침내 모스크바의 디미트리 돈스코이(Dimitri Donskoi) 왕자가 타타르족과 싸워서 러시아를 해방시킬 때 두 명의 수도자를 파견하였다. 이 승리 이후 그의 명성은 더욱 퍼져나갔고, 러시아 왕가의 협조는 매우 관대하여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짓게 되었다. 1378년 그는 모스크바 대주교 임명을 끝내 사양했고, 또 1392년에는 자기 수도원의 원장직도 사임한 후 6개월 만에 서거하였다.
성 세르기우스는 묵상을 즐겨 하고 항상 기도하는 영성적인 사람으로서 러시아 최초의 신비가로 불려지기도 한다. 1422년 7월 5일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노브고로트(Novgorod)에서 시성되었으며, 그 후 그를 주보성인으로 모신 성당이 세워졌고, 진정한 수도자의 소명을 실현한 성인으로 공경받으며 '천상의 사람'이라고 불렸다. 그가 세운 삼위일체 수도원은 아직까지도 러시아인들의 종교적 삶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축일9월 25일 성 클레오파스 (Cleophas)
신분 : 신약인물, 예수의 제자, 순교자
활동 연도 : +1세기
같은 이름 : 글레오파, 글레오파스, 글로파스, 클레오파, 클로파스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발현하셔서 함께 걸으시며 성경을 깨우치도록 말씀을 나누시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 식탁에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주실 때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24,13-35). 이때 주님의 발현을 목격한 두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성 클레오파스이다(24,18). 그는 예수님을 알아본 뒤 다른 제자와 함께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와 동료들 앞에서 자신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어 주실 때에 주님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내용 외에 신약성경 안에서 성 클레오파스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클레오파스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께서 머무셨던 그 집에서 주님을 증거한 이유로 유다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였다. 전통적으로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아래 서 있었던 성녀 마리아(Maria, 4월 24일)의 남편 클로파스(요한 19,25)와 동일 인물로 이해되었고, 그래서 사도 성 소 야고보(Jacobus, 5월 3일)의 아버지인 알패오(Alphaeus)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일부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의 성 클레오파스에 대한 설명에서 엠마오로 가는 중에 겪은 일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주님을 알아본 사실만을 언급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세르지오, 클레오파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