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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3, 처음 가본 밀양으로
“아녕하십니까? 저 부산에서 발령 받고 왔는데요?
“당신 어디 출신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느 학교 나왔느냐고?”
“부산사범학교 나왔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어요? 외투는 벗고, 그 우산인가 지팡이는 멀리 두고 사령장을 제시하고 다시 인사하시오”
밀양에서의 첫 부임 인사다. 앉아서 이야기 해보니 교육장인가 학무과장인지? 사람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에서 교장 교무가 써준 명암 탓인가? 교무가 써준 명함에는 이렇게 써져있다. ‘전기불 있는 시골 학교. 학교장이 인자한 학교. 너무 멀지 않는 학교.’
“선생님이 원하는 학교는 어려운데?”
“오늘 잘 때 있소? 내가 여관을 하나 알선 할테니 거기서 자고 내일 9시 까지 다시 오시오”
밀양이라고는 처음 오는 내게 S여관(그 후에 알고 보니 여자 사범 동기 K네 집이였다)까지 직접 안내해 주었다. J학교 교장이 찾아왔다. 선보러 온 셈이다. 교사로? 사윗감으로? 이튿날 제일 싫던 밀양 중심 학교인 밀양국민학교에 발령이 났다.
“선생 보내지 말라했는데!”
밀양초등학교 교감의 혼자서 하는 말.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1-3반 담임이 되었다.
역시 교직은 한직이였다. 학생 시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할 일이 없다. 동아대학 법대는 자동 제적이 되었다. 국가고시(행정4부)를 해불까 공부를 시작했다. 책은 친구 선배들께 알아봐서 20여권을 샀다. 대학 때 책도 있고 해서, 역시 나는 공부체질인 것 같다. 그런데, 공부만 시작하면 위장 장애가 온다. 좀 놀면 저절로 낫는다. 또 시작하면 설사가 난다. 화장실에서 다른 사람의 가레똥이 부러웠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준 “삽초(백출)” 가루를 가져와서 먹어도 공부만 하면 설사가 나고 눈이 쑥 들어가니 방법이 없다.
공부를 포기했다. 운동을 했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 여자들도 만났다. 여교사, 학생들의 누나, 하숙집 주변 여자, 태권도장 주변 여자. 등 등. 그런데,평소 나는 여자를 좀 깔보는 경향이 있다. 진짜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못봤나? 별 할 일이 없으니 온갖 짓을 다 했다. 태권도, 사교춤, 당구, 술(총각 모임: 뿔따구), 연애(?). 문학행사 참여, 등 등. 지금생각하면 허송세월이 였던 것 갈다.
4.19 이후 미루어 두었던 징집영장이 나왔다.(1961 .4 .7.)
4, 짧고도 긴 일년 (1961. 4. 7.-1962. 4. 11.)
사범학교 3학년 때 신체검사를 받은 후 3년 여만에 영장을 받았다. 군 입대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학교에 신고를 하고, 본적지 창원 대산면 면사무소에서 함께 입대하는 장정들을 대표하여 면장을 비롯한 이 지방 유지들에게 잘 다녀오겠노라고 인사를 했다. 당일로 신마산역에서 논산 훈련소행 군용열차에 올랐다. 이렇게 나의 길고도 짧은 일 년간의 군대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군에서 주는 식사를 받았다. 설익은 꽁보리밥에 짜디짠 김치다 모두들 밥을 차창에 버린다. 이번 징집된 장병들은 대부분이 SO(단기입영 교원. 학생)들로 4.19혁명으로 그 간 유보되었던 이들에게 내린 특별 징집인 것 같았다. 모두들 평소에 먹지 않던 음식이라 대부분이 다 버린다. 나는 버릴 수가 없었다. 열심히 먹고 건강한 몸으로 군 생활을 마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꼭꼭 씹어서 남김없이 다 먹었다.
저녁때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에 도착했다. 내무반에 갔더니 머리를 빡빡 깎은 문어 같은 사람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선임자라고 고함치고 기압을 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몽둥이로 후려치기부터 한다. 군이란 이런 곳인가? 식사를 하고 식기를 씻어서 반납해야 하는 데 물이 없다. 막사 뒤에 고인 반 흙탕물에 씻어 반납했더니 불량이라는 것이다. 눈을 돌리니 걸레 조각이 눈에 띈다 빠른 동작으로 식기를 닦았다. 통과였다. 이튿날 신체검사를 했다. 중이염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빤츠 호주머니에 깊이 숨겨 둔 돈을 모두 꺼내 중대장에게 전해주고, 귀가 할 수 없으니 합격시켜 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을종합격!! 이로서 길고도 짧은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군번 00///21 권 정현. 같이 간 사범동기 군번 00///20 강00
1), 훈련병
논산 00연대. 00중대. 00소대. 수용연대부터 강일병을 내 앞에 세워 같이 다니며 같은 훈련소 같은 소대 내무반에서 지냈다. 그는 허리가 안좋아 고통스러워했으며, 나는 설사 때문에 바짝 말라서 M1소총을 겨우 들 정도였다. 00주간의 기본 훈련을 마치고 00후반 중화기 부대로 훈련은 받게 되었다. 나는 주로 상급자에게 노다지 얻어맞는 편이고, 강일병은 조용했다.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있었다. 박격포 사격 훈련을 받는 날이다. 박격포를 운반할 때는 3인 1조가 되어 박격포의 몸통. 다리. 포판.(무게 등 자세한 재원은 군 기밀)을 나누어 울러 메고 훈련장까지 행진이다. 훈련이 끝나자 갑자기 온 몸의 기가 빠지듯 맥을 쓸 수가 없다. 걷지도 못할 정도다. 멍청하게 있는데 강일병이 수통을 흔들며 어디에서 구했는지 탁주를 권한다. 목도 마르고 해서 좀 많이 마셨다 얼큰히 취한다. 그러고 난 후의 훈련은 거뜬하고 힘들지 않고 박격포를 울러 메고 훈련소 까지 왔고 그 다음 날도 개운했다.
“술이 약인가?!!!”
00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최전방 철원 동송 00포병대대 B중대로 배속을 명 받았다. 물론 강일병도 같이.
나는 중대본부 서무조수. 강일병은 전포대 지휘소로 배속되였다. 서무계 고참들은 낮에는 잔다. 일은 밤에 한다. 이유는 낮은 너무 더워 일하기 어렵고 밤에는 모기 때문에 잘 수가 없어 밤새워 일한다. 졸병인 내 입장은 다르다.
“각계 서착순 1명 집합”
전포대 주번 하사관의 호령에는 서무계 눈치도 볼 것 없이 나는 손살같이 달려가야 한다. 나무하기, 풀베기, 타부대 지원, 안하는 일이 없다. 낮에는 풀죽이 되도록 일하고 밤에는 서무 일을 도와야한다. 24시간 잠도 못자고 일해야 하는 것이다. 몇 번째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내 생일이었다. 선착순 집합이 늦었다고 공병 곡갱이로 엉덩이를 맞았다. 정신이 아찔하고 구토가 심하게 나오며 먹은 것도 없는데 막 토했다. 선임하사도 놀라서
“종일 편이 쉬어”
그러나 막사로 돌아오면 서무일을 도와야했다. 서무 책임자는 특무상사였으나 나를 직접 부리는 상관은 충청도 출신 김병장이었다. 부드러운 듯하지만 묘하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 기술(?)이 있다. 너무 힘들어 중대장을 직접 만나,
“우리부대에서 가장 힘든 부서로 보내 주십시오. 중대 본부 이외!” 그리고는 대충 애로사항을 말씀 드렸더니,
“전포대는 더 힘들텐데 그 아이들은 무지막지한데?”
이튿날 전포대 7번 사수로 명받았다. 105m 포다리를 돌리는 것은 힘센 장정이나 하는 일이다. 원했던 일이니 열심히 했다. 마음은 편했다. 갑자기 주보(간단한 생활용품, 음식, 술, 등을 파는 속친 P.X)로 전보되었다. 흔히 군에서는 특과 중의 특과였다. 예상외다.
“너 빽 쎄구나?” 강일병은 그냥 싱글벙글 하기만 한다. 주보에서는 그곳에서 자고, 먹고(바로 식당 옆), 집합도 없고, 자체훈련이나 교육은 모두 면제,
선착순 집합도 없다. 한밤에 소변보러 가기 싫어면 빈 맥주병 2병이면 해결 된다. 하루는 오줌이 든 맥주병을 들고 식당을 지나 화장실로 가다가.
“권일병 일루 와!!”
인사계 진상사다.
“걸렸구나!”
쏜살 같이 달려가 오물을 비우고 빈병 빡스에 넣고, 진상사 앞에 차렷 자세로 섰다. 증거가 없어 졌으니 별 말이 없다. 그 일 이후로 진상사는 나를 벼루고 있는 듯 했다. 한가지 어려움은 기생충 이가 너무 많아 2-3일 마다 속옷을 잔반통에 대고 손톱으로 긁어 내어야한다. 이가 수십 수백마리씩 떨어져 나온다, 모두가 과장이라고 할지 몰라도 아니다. 어릴 때 이는 얼어 죽지 않는다는 어머니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 설마 영하 20-25도에서는 얼어 죽겠지, 추운날 밤에 밖에 널어놓았더니 빨갛게 변해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며칠이 지나도 이는 꼼짝 않고 빨같게 속옷에 붙어 있었다. 죽은 것이다. 대단한 실험이요 성과였다.
그래도 주보는 편했다. 그러나, 오히려 육체적 고통이 심했던 전포대 시절이 그립다. 일제히 낫을 들고 억새를 베어 이영(초가지붕을 덮는 짚)을 엮어 막사 지붕을 덮고 나면, 지붕 위는 억새꽃이 만발했다. 누구도 즐길 수 없는 절경중의 절경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특식을 주고 무조건 휴무다. 강 일병과 나는 한고(전방 솥 겸 식기)에 삶은 소고기를 가득 넣고, 대성산, 백마고지, 낙타고지가 한눈에 보이는 포대 뒷산에서 만찬과 산행을 즐겼다. 잊지 못할 그리운 추억이다.
그래도 주보 생활은 한가해서 공부 병이 도져서 일본어, 영어, 수필 몇 편을 써서 동생(수현)의 여자 담임선생님께 보낼 여유도 있었다. 그 원고는 언제 없어 졌는지도 모른다.(‘목에 걸린 가시’. ‘산중에 핀 해당화’. 등)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랜만에(입영10개월) 휴가를 갔다. 강일병은 기혼이라 자주 특별휴가를 갔으나 나는 첫 휴가다. 20일이 잠시다.
“오빠는 군에 가더니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사진관에 가서 친한 친구 3사람이 사진을 찍은 것으로 기억된다.
시간이 빠르다. 무사히 귀대했다. 그런데 난리가 났다. 주보가 털린 것이다. 물론 부대 내의 소행이다. 무엇 때문일까? 잃어버린 것은 사소한데 외상 장부가 없어졌다. 주보의 모든 거래는 외상이다. 포대장과 전포대장에게 즉각 상황을 보고했다. 전중대가 연병장에 집합했다. 전포대장이 나무작대기를 들고 나를 나오라는데 간이 오그라드는 듯 했다.
“권 일병 앞으로 10보”
마구 때린다. 그런데 구령 소리보다는 강도가 약한 듯했다. ‘아! 봐 주는구나 엄살을 피자. 마구 구르며 소리소리 고함을 쳤다.
“아아야 잘 잩 잘못했 ..습 음..음니다...........”
5분 정도 연병장을 구른 것 같다.
“일어섯”
겨우 일어나듯 엉거주춤 한참 걸려 일어났다 엄살을 눈치채지 못하게....
연병장에 집합한 중대원들은 몰라도 전포대장은 엄살을 눈치 챘으리라 본다.
전포대장은 새 노트를 가져오란다. 전 중대 개별 면담이다. 오후에 상황실로 호출이다.
“이 정도면 됐어?”
새 외상 장부다 전부대원의 이름과 외상금액에 서명이 되어 있었다. 박00중위가 나를 너무 많이 봐주는구나. 그달 주보 수익이 많이 늘었다고 중대장께 칭찬을 받았다.
신임 상병이 4명 들어왔다.
“권일병님 잘 부탁합니다.”
“당신들 왜 이럽니까?”
알고 보니 신참 상병이라는 것이다. 나는 만기제대가 1년이다 제대 2-3개월 전에는 승진이 유보되어 일등병을 8-9개월인가 달았다. 군대 밥그릇이 내가 많았다. 그 뒤부터는 상병을 보고, 그냥 “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작업이나 훈련 할 때도 상병이 있어도 작업 반장은 나였다. 제대 말년이였다. 버들강아지가 피였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친구가 보낸 편지다. 주보도 인계 해주고, 타 사단에 장교와 동행 지휘 검열을 가라는 것이다. 검열장이 어마어마했다. 모든 군장비가 놀랄 정도로 정돈이 되어있고 장교, 하사관, 병장, 등이 경례하는 태도가 영 다르다.
“노00중위님 이게 뭡니까?
“모른 척 장비들을 검열하는 척 만져보고, 뒤집어보고 내 뒤만 따라다니면 된다.”
다른 사단도 비슷하다 화랑담배만 피우던 내게 ‘파고다’ 단배가 주머니 마다 들어온다. 잘 봐달라는 뇌물인 것 같다.
제대 말년이라 배짱도 생기는 것 같다. 밤중에 진상사로부터 탁주2되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 와라는 전화가 왔다.
“구울 불도 없고, 탁주가 얼었어요, 못갑니다.”
교육계 이병장이 왔다.
“진상사 화났으니 빨리 갖다 주라”
무슨 고집과 배짱이었는지 그냥 돌려 보냈다. 조금 있으니까 서무계와 교육계 덩치큰 병기 담당까지 와서 끌고 갈 기세다.
‘오늘 다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얼음이 서글서글 뜨는 탁주 2되와 취사실 탄불에서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 들고 중대 본부 진 상사에게 갔다. 사정없이 때리는데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죽은 척하자’
“엄살 피지 말고 일어나”
“ 절마 일바끼라”
또2-3차래 때린다 사람 때리는 데는 이골이 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확한 펀치다.
“권 일병 절마 얼마 전에 박 중사한테 빳따 맜고 기절 한 적이 있습니다.”
말리는 등치 큰 병기계다. 그때야 분이 좀 풀렸는지 손을 멈춘다.
‘제대 말기에 다치면 안된다 기절한 체 더 있자’
“절마 정말 기절 했나 깨베 봐라”
고참들이 막 흔들어 깨운다.
‘아직 일어나서는 안된다.’
물을 끼어 붓는다. 찬물에 정신이 버쩍 든다. 눈을 천천히 떴다. 모든 고참들이 걱정하는 얼굴이다. 엄살은 이제 부터다. 다시 눈을 감았다. 또 흔들어 댄다. 이제 눈을 바로 떴다. 진상사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인사계님 잘 못했습니다.”
“정신 드나 니 와 그래 고집이 세노? 이리와!”
한참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고참병들이 나를 일어켜 진 상사 옆자리에 안쳤다. 진상사는 고향이 경상도 마산이다.
“일어서! 앉어! 손들어! 허리 돌려! 목 앞 옆 뒤로 돌려! 몸통뻣쳐! 팔 굽혀 퍼기! 등 ........ ”
크게 다친데가 없는지 확인 하는 것 같다. 약간의 엄살은 부렸으니 병신 될 정도는 아니라는 행동을 취했다.
‘군은 요령이다’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요령이 필요했다.
“병신 안되겠나? 제대말기에, 이 미련한 새끼아! 여기 와서 술 한 잔 해라! 바보 새끼, 니거 집이 진영이라며? 못된 새끼! 못난 새끼!”
술을 거절했더니 작꾸만 권한다.
‘술이 옆구리로 샐까봐 확인 할라 카나?’
못이기는 척 조금 먹었다. 생각 같으면 벌떡 벌떡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가서 쉬어! 일수다 생각해라!”
고참병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안도의 한숨도 느꼈다. 고마웠다. 미련했다. 요령도 없었다.
“인사계님 고맙습니다. 병신은 면하고 제대 할 것 같습니다.”
다죽어가는 소리로 한 마디 했다.
이러고는 몇일 후 제대를 했다.
‘시원 섭섭하다는 말이 있던가?’
이렇게 적절한 말은 없는 듯했다. 대대장께 신고 하라는 박 전포대장(울산 출신) 전갈이다.
“건강해서 다행이다. 잘 가서 좋은 선생님이 되어라”
1년전 처음 입영할 때
“진영 중학교 졸업했어?, 아니 부선사범이라, 동 0균 알아?”
“예 중학교, 사범 학교 때 학도호국단 대대장님인 우리 선배입니다.”
대대장 성함이 동00로 동0균의 친형이었다. 강일병이 그제야 대대장이 우리 몰래 우리의 근무생활이나 태도를, 중대에서 보고 받고, 뒤를 봐 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덕을 본 것이로구나. 주보장 보직, 검열관 파견, 박전포대장의 배려, 진상사가 심하게 못한 사유, 내 어려움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던 중대장, 더 좋은 근무 조건인 O.P 등 많은 지시가 내려왔으나 전포대장이 그를 필요가 없다고 건의 했다고 강일병이 말해 주었다. 강일병은 전포대 상황실에서 박 전포대장과는 인간적인 교류가 있었다고 말했고 특히 나의 너무 고지식하고 요령 없음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일주일간의 예비사단(39)에서 영농및 사회 적응교육을 받고, 함안 강 일병과 하루 자고 귀가했다,
“권선생 저 사람 제대하는 첫날 장가 간 친구를 부인한테 보내지도 않고 둘이서 같이 잔 사람이다. 총각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나?”
종종 농담 삼아 강일병의 처남 박00선배 선생님은 이야기다. 공식 모임 비슷한 대서도 웃고자 자주 한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그런 배려는 몰랐다.
_계속_
첫댓글 남제 형님. 군번은 밝히지 않았지만 입대한 날이 있으니 만천하에 군대 후배라는 거 밝혀졌네요.
998 동행시에는 그게 내 큰 무기였는데요.
0020663. 자전적 수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처가가 밀양인 사연도 알게 되었고요. 사모님께 잘 하시지요. 그렇게 하는게 노년을 편하게 지내는 비결이니까요.
재미있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