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卽吟(즉음)(즉흥적으로 읊다)
坐似枯禪反愧髥(좌사고선반괴염) 내 앉은 모습이 선승 같아 수염이 부끄러우니
風流今夜不多兼(풍류금야부다겸) 오늘 밤의 풍류도 다하지 못하겠구나
燈魂寂寞家千里(등혼적막가천리) 등불 적막하고 고향 집은 천리길인데
月事蕭條客一簷(월사소조객일첨) 달빛마저 쓸쓸하여 나그네 혼자 처마를 보네
紙貴淸詩歸板粉(지귀청시귀판분) 종이도 귀하여 분판에 시 한 수 써놓고
肴貧濁酒用盤鹽(효빈탁주용반염) 안주 없어 소반 위 소금에 막걸리 한 잔 마시네
瓊琚亦是黃金販(경거역시황금판) 요즘은 시도 돈으로 주고받는 세상이니
莫作於陵意太廉(막작오릉의태렴) 오릉에 살던 진중자도 청렴만을 내세우지는 않았으리라
*위 시는 “현대시의 감각으로 풀이한 김갓갓 시집(金笠詩選集)(정민호 역저)”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역저자는 “옛날에는 즉흥시를 잘 읊었지만 지금 시인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즉흥시를 읊고 종이가 없어 하얀 판자에다 올려 쓰니 술 생각이 난다. 그래서 소반에 있는 소금을 집어넣고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시를 생각하면 술이요, 술을 마시면 시가 생각난다는 당나라 때 이백이 생각난다. 시도 돈 받고 파는 세상이라니 지금으로 말하면 시 한 편에 원고료를 받는 것과 같으리라”라고 감상평을 하였습니다.
*김삿갓[1807 ~ 1863, 본명 김병연(金炳淵),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 부름,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은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멸족되어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도망가서 살다 그 다음에 집안이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장원급제하였는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조상에 대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머나먼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57세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정민호(鄭旼浩, 1939~, 본관 迎日, 아호 丁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조부 학강(鶴岡)으로부터 한문 수학, 1966년 ‘思想界’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문단 등단, 현역 문단인(시인)으로 활동, 경북문화상, 한국문학상, 한국pen문학상, 한국예총 예술대상 등, 포상으로는 녹조근정훈장(대통령), 예총경주지부장, 경북문인협회장 등 역임, 현재 경주향교 사회교육원 한문지도 강사, 경주문예대학 원장, 시집으로 “꿈의 耕作” 외 15권, 산문집 “시인과 잃어버린 팬티”등, 국역으로 “論語抄”, “鶴岡詩集”, “五言唐音”, “七言唐音”, “唐詩選集”, “교양 明心寶鑑”, “三國史記”, “三國遺事”, “唐詩의 이해와 감상”, “한국인의 한시(漢詩)” 등 다수.
*卽吟(즉음) : 즉흥시를 의미함
枯禪(고선) : 만사(萬事)를 버리고 고목처럼 좌선하다
髥(염) : 구레나룻 염, 1.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2. 수염이 많은 사람
蕭條(소조) : 쓸쓸한 모양, 고요하고 조용함
簷(첨) : 처마 첨
淸詩(청시) : 맑은 운치(韻致)를 느끼게 하는 시(詩)
肴(효) : 안주 효
貧(빈) : 1. 가난하다, 2.모자라다, 3.부족하다
瓊琚(경거) : 구슬 경瓊, 패옥 거琚, 패옥이나 훌륭한 선물이니, 여기서는 시를 의미함
於陵仲子(오릉중자) : 진중자(陳仲子)는 전국시대 제나라 오릉(於陵)에 살았던 청렴한 선비, 진중자는 제나라에서 대대로 큰 벼슬을 한 집안사람으로 그의 형 대(戴)는 蓋땅에서 받는 녹(祿)만 만종(萬鍾)이었는데, 형의 녹을 의롭지 못한 녹이라 하여 먹지 않으며, 형의 집을 의롭지 못한 집이라 하여 살지 않고, 형을 피하며 어머니를 떠나서 오릉(於陵)(산동성)에 살았다. 진중자는 학식이 깊어 제나라 왕이 직하학궁에서 강학해 주기를 요청했던 사람이며 그의 제자들을 오릉학파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진중자는 오릉에 거주할 적에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으며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는데 우물가에 벌레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 열매가 있어 기어가서 가져다가 먹을 정도로 청렴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고, 이에 제나라의 장수였던 광장(匡章)이 맹자에게 진중자가 참으로 청렴한 선비라고 일컫자 맹자는 진중자는 청렴함에 대한 기준을 잘못 잡아 인간의 기본도리를 해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그런 잘못된 기준에 맞추려면 흙을 먹고 사는 지렁이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며 진중자를 비판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