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비하여 미니픽션 ‘호텔로 간 골드 미스’는 완벽한 소설이다. 수필의 냄새는 거의 맡아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필도 이처럼 소설 형식을 차용해 와서 쓸 수는 없을까. 소설 형식이더라도 수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방법은 없을까.
여기 그의 작품 ‘호텔로 간 골드 미쓰’를 소개만 하겠다.
수필쓰기보다 소설쓰기에 더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로 간 골드 미쓰
김아가다
“ 63000원 밖에 없는데, 어쩌죠?”
여주는 프런트 위에 천 원이 모자라는 숙박비를 올려놓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은, 에누리라니 어림도 없다는 태도다. 애원과 거부의 눈빛이 부딪히며 서로를 밀어낸다. 조용하고 긴장된 순간, 여주가 애교로 눈빛을 바꿀까 갈등하는데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검지로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빌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309호 실입니다.”
여주는 얼떨결에 열쇠를 받으면서 재빨리 남자를 훑어봤다. 순간 숨을 들이켰다. 중저음 목소리와 쭉 빠진 키, 다비드 상을 닮은 갈색 곱슬머리의 젊은 남자. 남자는 무심한 듯 자신의 방 열쇠를 받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와우! 연말연시 여행이 헛되지 않기를. 여주는 두 마리 토끼를 향해서 팔을 마구 흔들고 싶다.
며칠 전, 칼럼 원고 마감일을 지키라며 박기자가 전화를 했다. 자신은 연말에 남친과 남해로 여행간다고 자랑질까지 하며 은근히 압박을 가해왔다. 여주는 MZ세대의 연말 휴가와 이를 지켜보는 기성세대의 사회적 담론이나 여론형성 패턴에 대한 칼럼을 쓰는 일로 머리를 싸매고 있던 처지였다. MZ세대가 사는 법을 어른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구직과 결혼, 출산과 내집 마련에 대한 고민 앞에 불안감이 가중된다. 어차피 미래는 깜깜하고 그 탈출구로 현실을 더욱 중시하는 문화가 그들 사이에 만연하게 퍼지는 것이 사실이다.
누구라서 이것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박기자의 전화는 여주의 가슴에 겨울바람을 몰고 왔다.
마흔 중반을 지나면서 그녀는 부쩍 외로움을 많이 탔다. 일 때문에 남자를 만날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결혼이라는 틀에 박힌 삶의 방식이 시시하다고 생각되는 성격 탓도 있었다. 집에서 차로 두 시간이나 달려 A호텔에 온 이유는 마감이 코 앞에 닥친 칼럼 때문이기도 했지만 첨단 지식단지가 근처에 있어 소위 물이 좋다는 소문에 혹해서였다. 재수 좋으면 벤처기업 젊은 대표? 나이는 비슷하면 좋겠지만 연하면 금상첨화다. 상상만 해도 온 몸의 세포가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A호텔은 국가 기관 기탁업체라 신용카드만 사용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루만 묵을 것이라 지갑에서 카드만 달랑 꺼내 패딩 코트에 미리 넣어 두었다. 그런데 아뿔싸! 호텔이라 패딩 코트보다 캐시미어가 격에 맞을 것 같아 옷을 바꿔 입은 것이 문제였다. 코트 주머니에 오만 원 권 두 장과 만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3장이 들어 있었다. 호텔에 묵으려면 방 값을 계산하고도 오 만원은 꼭 남아있어야 했다. 조식 후 커피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으니 말이다.
남자의 천 원이 보태진 열쇠로 여주는 309호실 문을 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얼굴이 자꾸 그녀의 머릿속을 해작거렸다. 이자를 듬뿍 붙여 율곡 선생으로 같을까. 세종대왕으로 갚을까.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잠시 쉬려는데 마음은 뒤죽박죽이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자판에 손을 얹었다. 마감이 임박한 칼럼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손가락은 허공에서 천 원짜리를 만지작거렸다. 기혼일까? 그럴 리 없잖아. 연말에 혼자 호텔에 오는 남자라면 아내나 애인이 없다는 이야긴데------ 나처럼 일에 치여 사는 능력있는 돌싱? 40대 초, 중반? 천 원을 내밀 때 얼핏 보았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말하는 직업은? 묻지도 알려고도 않는 시크한 표정, 바로 여주가 찾는 이상형이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다 말고 여주는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혹시 자동차 동전 통에 천 원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녀는 프리랜서 작가의 밥줄인 노트북을 들고 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쓰다만 칼럼 몇 줄이라도 긁적일 작정이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천 원으로 인해 두뇌가 오작동에 걸린 걸까. 마감에 쫓기며 잡지사에 메일을 전송할 때와 같은 증세다. 이럴 땐 달착지근하고 거품이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카푸치노가 당긴다.
시나몬 가루를 뿌린 카푸치노에 하트가 그려져 나왔다. 그녀는 하트 모양을 시답잖은 유치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트 문양을 보자 어쩐지 외롭고 쓸쓸해졌다.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하트는 이내 상상으로 바뀌었다. 남자와 여자가 커피를 마시면서 입술에 붙은 거품을 ---, 애써 머릿속 잔영을 지우면서 그녀는 탁자 위 카푸치노를 몽롱한 눈에 담았다.
서너 테이블 건너, 카키색 재킷에 베이지 머플러를 두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에 반짝이는 파티 라이트가 켜지는 것 같다. 그 남자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 엄동설한에 아이스커피라! 나처럼 심장이 뜨거워졌을까? 혀로 입술을 핥던 여주가 카푸치노를 들고 남자의 테이블로 갔다.
“앉아도 될까요. 아깐 고마웠어요.”
남자의 눈이 번쩍 빛나는 것 같다. 좋은 조짐이 분명하다. 여주는 흥분하려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꼭 64000원을 맞춰 달라잖아요. 오 만원 두 장도 안 된다고, 거스름돈이 없다더라고요. 꼭 갚을게요.”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카드만 있을 때도, 카드가 없을 때도 난감할 때가 있죠. 갚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이해심 깊은 남자라니. 여주는 재빨리 다음 멘트를 장착했다.
“내일 모닝커피는 제가 쏠게요.”
여주는 평소에 헌팅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여겨왔다. 괜찮다는 남자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 것, 여주는 상체를 숙이면서 농염한 자세로 노트북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남자의 알 듯 모를 듯 흘리는 미소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얼굴인지 가슴인지 헷갈렸다. 여주는 자동차 열쇠를 슬쩍 떨어뜨리고 자리를 떴다.
룸으로 돌아 온 여주는 마음이 바빴다. 밑밥을 던졌으니 곧 그가 올라올 것이다. 화장을 고치고 립스틱을 발랐다. 거울에 비친 쌍꺼풀 짙은 커다란 눈을 응시하며 얼굴을 좌우로 살짝 돌려 보았다. 이 정도면 훌륭한 걸.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 어쩌나 아무리 뒤져도 입을 만한 옷이 없다. 실내복 한 벌 밖에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막심이다. 하지만 여주는 이내 마음을 달리 먹었다. 글래머러스한 몸뚱이가 자산이라고 늘 자만해 오지 않았던가. 브레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 젖가슴을 가운데로 볼록하게 모았다. 이 정도면 완벽하겠지.
남자는 감감무소식이다. 창 밖에 산그늘이 드리우고 어둠이 짙어 가는데도 기척이 없다. 여주는 앉았다 일어섰다 방안을 서성거렸다.
“딩동”
그러면 그렇지 여주는 살금살금 다가가 현관문 렌즈에 눈을 바짝 붙였다. 부드러운 조명이 비치는 복도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남자가 고개를 약간 외로 꼬고 엄지와 검지로 턱을 괸 자세로 서 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여주는 남자가 들어 설 만큼 공간을 두고 옆으로 비켜섰다. 공기마저 집어 삼킬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그녀는 침을 삼켰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듯 옆으로 몸을 조금 더 비켜섰다. 여주의 입에서 ‘잠간 들어올래요?’라는 말이 장전된다.
빙긋 웃으면서 남자가 열쇠를 들어 보였다.
“자동차 열쇠를 ---.”
여주는 놀란 척 눈을 크게 뜨고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남자의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는 여주의 손에 열쇠를 건네는 동시에 휴대폰을 연다.
“거의 다 왔다고. 알았어. 기다릴게.”
열쇠가 손바닥에 얹히는 순간 여주의 입에서 ‘땡큐 -.’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돌아서는 남자의 등을 보며 여주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비틀어 손에 쥔다.
귓불이 붉어지고, 뒤통수까지 열감이 올라왔다.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눈이 시릴 만큼 매서운 바람이 쳐들어왔다. 바람을 맞은 커튼이 휘날리며 방안을 휘저었다. 열쇠가 여주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여주는 열쇠를 노려보았다.
해바라기 샤워기를 최대로 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물을 뒤집어쓴다. 이번 연말도 호텔에서 마감 임박한 원고만 쓰고 갈 것 같은 억울함이 느껴진다.
첫댓글 이동민 선생님,
뜻밖의 선생님의 해설이 눈길을 당깁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