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이었다.
하늘이 꾸중하게 흐리더니 오후가 되자 기어이 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이 지속되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며칠 동안 열에 달아오른 피부를 식혀주어 더욱 좋았다. 원래부터 비가 오면 좋아서 사족을 못 쓰는 나였지만, 그날은 고즈넉한 기분에 사로잡힐 여유도 없이 서둘러야 했다. 저녁에 있을 아이의 대금 발표회 때문이었다. 아이가 사사받고 있는 대금 연구소 수강생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한 <대나드리>의 첫 발표회였다.
-->지난 가을, 담양 가사문학관 앞뜰에서
나는 아이와 단원들이 리허설 막간에 먹을 수 있도록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한 다음 발표회장으로 차를 몰았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사람들은 행여 뒤집어질까봐 우산을 꼭 쥔 채 종종걸음을 쳤다. 바람에 허리를 휘던 나뭇가지에서 무성한 이파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발표회장에 도착하니 리허설도 얼추 끝나가는 판이었다. 열세 명으로 이루어진 단원들의 면면을 보니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그저 대금소리가 좋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인사업, 어린이집 원장, 주부, 대학원생, 교사, 의사...... 등 대부분 30대부터 50대까지의 출연자들 속에서 고등학교 1학년생인 우리 아이의 나이가 제일 어렸다.
--->발표회장 입구
이곳 지역 신문들마다 주말판 지면에 '다른 악기가 섞이지 않고 오직 대금만으로 이루어진' 연주단 발표회 소식을 의미 있게 다루어주었지만, 청중의 대부분은 출연자의 가족과 지인들이었다. 배운 지 몇 달 안 되는 초짜들에서부터 3년, 5년 된 출연자들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이며 격려하는 가족들에게 미소를 보이며 화답했다. 아이들이 무대 앞으로 달려 다녀도 아무도 제어하지 않을 만큼 넉넉하고 편안한 자리였다.
마침내 발표회는 대금산조 합주로 시작되었다. 창작곡과 민요, 가요, 그리고 찬조 출연한 가야금의 산조에 이어 드디어 우리 아이 순서가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차분한 신디사이저의 배경 음악에 따라 아이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1분쯤 지나서였을까. 뭔가 이상한 조짐이 느껴졌다. 갑자기 윙하는 마이크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서 파밧파밧 불꽃이 튀는 듯한 소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위잉~~ 소리는 더 커졌고, 음향과 신디사이저와 마이크의 소음이 어지럽게 섞이며 아이의 대금 소리는 소음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당황한 스텝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무대로 나와 마이크 조절을 했고, 다른 마이크를 갖다 놓기도 했다. 스텝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무대 주변을 뛰어다녔다.
-->기다리는 동안
디카로 동영상을 찍고 있던 내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첫 발표를 준비하던 아이의 상기한 얼굴이 스쳐갔다. 아이를 바로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연주를 했다. 소음 속으로 아이의 대금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마침내 담당자가 음향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지더니 숨죽이는 적막이 찾아왔다. 아이의 대금 소리는 적막 속으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는 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하며 연주를 끝냈다.
연주를 마친 아이가 인사를 하고 퇴장을 하자, 관객들은 큰소리로 박수를 쳐주었다. 담당자들이 음향의 이상 유무를 재확인하는 사이 사회자가 머쓱해하며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금방 기상청에서 연락이 왔는데, 천둥과 번개가 원인이랍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말이죠. 재능이 있는 아이인데 아쉽습니다만...... 다음 순서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러자 관객들 사이에서 '다시 해!' "다시 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회자가 관객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사회자가 관객을 두루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쩔까요? 다시 할까요?"
"그럽시다!"
아이는 쑥스러운 듯 웃는 얼굴로 다시 무대에 섰다. 스텝이 이번에는 마이크 하나를 더 아이 앞에 대주었다.
-->아이의 연주 장면ㅋㅋ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물었다.
"엄마, 어땠어?"
"좋았어!"
"뭐가?"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연주하는 모습이...... 나 같으면 당황해하다가 그만뒀을지도 모르는데......"
아이가 킥 웃더니 말했다.
"엄마, 그건 연주자의 자세가 아니야."
하긴, 앞으로 별의별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잊지 못할 추억 하나를 만들었구나, 싶다.
--> 아랫입술에 생긴 흉터는
취구에 입술이 닿는 부분에 피가 나면서 굳어진 상처다.
첫댓글 처음 배운다고 한것이 엊그제인듯한데 연주실력이 일취월장이네~연주모습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저는 요쪽 판을 잘 몰라서 아이가 삑삑 소리를 내고 있으면 무척 신기해요. 그래서 무조건 잘한다고 해요. 그러면 지도 좋아서 히~~ ㅎ
대금연주를 이렇게 진지하게 듣기는 처음이야 ~ 연주자가 행복하면 돼 ~~그것이 관객에게 전이가 되니까 ~~ 고1답지 않고 음이 안정되어 있어요 ~짝짝짝
연주자의 행복... 맞아요. 무슨 일이든 스스로 행복해야 된다는 말쌈 접수! ㅎㅎ 음이 안정되어 있다는 말쌈도 고맙게 접수!! ㅎㅎ
고녀석사람 쏙 빠지게 만드네
빠지면 되남요 그래도 이쁜 언니가 빠진다니 아이도 겁나게나 좋아하겠으요
밖에 있던 울애아빠가 끝까지 듣다가 자신도 이런 소리를 내고 싶다고 ..정말 좋다고 ..직녀하고 넘 잘 어울리는 아들여!
맞아. 직녀의 아들이다. 정말 대견하네....
사실은 제가 젤 첫번째 관객이라는 행복만으로 투자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요. 이러다 귀명창 되겠어요. 이러다가 나중에 잔소리 팍팍 날리는 마귀할멈로 바뀌는 거 아닌가....
그 천둥번개 소리속에서도 다른사람은 못듣는 아들연주소릴 들었을걸요. 전국을 함께 돌며 콩클나가는 아이 보따리들고 따라 다니던 경험으로 그 조마조마한 몇 분의 고통스런 시간을 알지요.^^
아이 보따리 싸들고 전국으로 따라 다니는 기분... 어때요 일 접으면 귀찮다고 할 때까지 따라다녀볼 생각이에요. 조마조마한 몇 분의 황홀한 그 고통을 맞보러요.^^
아따~~하필 그 때 그런 일이...그래도 대견하다...연주자의 자세라~~벌써 크게 연주자의 자세가 되어부렀네. 기특하게시리 ^^
내가 나중에 물어봤으요. 뭣이 연주자의 자세라냐 했더니.... 어떤 상황이든 끝까지 연주하는 것이 연주를 보러오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나 어나
대금의 선율이 마음을 적셔주네요...^^
고맙습니다. 아이한테는 팔불출 부모가 되어 맨날 잘한다고 잘한다고 그러고 살아요~~ 이러다간 앞길 망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