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가해)
제1독서(신명 8,2-3.14ㄴ-16ㄱ)는 빵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머물렀지만,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몸에 걸친 옷이 해진 적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적이 없었습니다(8,4). 하느님께 대한 성실성을 시험하는 시련의 장소인 광야에 머무르게 하면서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하느님만 섬기는 백성이 되도록 단련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8,5). 또한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도록 그들을 낮추시려는 것이며, 그들이 모르는 음식을 먹게 해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 백성임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죽음에 직면할 때마다(불뱀과 전갈, 그리고 갈증)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끌어내신 것은 물론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을 살리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고, 대대로 기억하라고(8,8)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요로움에 젖으면서 교만에 빠져 멸망하지 않도록 하려면 반드시 광야 생활을 떠올림으로써 하느님을 잊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영적 바위(그리스도: 1코린 10,4)에서 솟는 물(영적 양식)을 마셔야 하므로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모세는 가르칩니다.
복음(요한 6,51-58)은 성체성사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당신 살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유다인들은 격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살을 먹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파괴적인 적대감이나(이사 9,19; 27,2) 적군에게 당하는 절망적인 파멸을 뜻합니다(예레 19,9; 에제 39,17). 피를 마시는 것도 율법에 금지되어 있습니다(창세 9,4; 레위 17,14).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충분히 말다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먼저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5,24.26)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라는 “생명의 빵”은 영적으로 같은 뜻으로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6,33.35.48)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1,14) 하느님이심(마태 1,23)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6,42).
예수님께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라고 하신 것은 착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다(10,11)는 뜻인데,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빵을 빼버림)을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1,29.36)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일으켜달라면서 하느님께서는 자기 조상들에게 하늘에서 빵(만나)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고 했습니다(6,30-31).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라고(6,32) 하십니다. 예수님을 모세보다 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그들이 생명을 얻고,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은 물론 그들 안에 예수님께서도 머무르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유다인들의 친교 제물 규정(레위 7,14-15; 신명 12,27)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당신을 제물로 바쳐질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살과 피”는 사람을 뜻하며(마태 16,17; 히브 2,14), “먹고 마시다”는 “음미하고, 되새기다”는 뜻이기 때문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 다가가고, 그분을 믿는 사람입니다(3,35).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6,27)의 말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입니다(5,24).
결국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분이야말로 죽음을 이기신 분(16,33)이시므로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서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사람입니다(6,27). 또한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6,12).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오고 믿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6,27.35). 유다인의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만나(율법: 6,49)와는 달리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6,46) 주시는 살과 피(말씀과 빵)를 먹고 마시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제2독서(1코린 10,16-17)는 성찬의 전례에 참여와 친교의 정신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와 이교 제사”를 비교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탈출의 여정이 주는 교훈을 나열합니다(10,1-13).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영적 바위”(그리스도: 10,4)에서 솟는 물(말씀)을 마셔야 하며, 닥친 시련이란 이겨내지 못할 것이 아니므로 투덜대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바오로는 복음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사는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모르느냐고(8,4) 강조합니다. 특히 이교도들의 제사에 참석해서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며, 코린토인들이 마귀들과 상종하는 것이라고(10,20) 합니다. 마귀들과 상종하는 것은 “질투하는 하느님”(탈출 20,5; 신명 4,24)의 진노를 불러들이는 것이므로(10,9-10.22)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주님의 만찬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친교를 나누라고 합니다. 만찬에서 성체(그리스도의 몸)와 성혈(축복의 잔)을 받아 모시는 것은 먼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을 나누겠다는 다짐이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12,13) 우리가 미사에서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일치하는 친교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탈출 16,31-35)와 바위에서 솟아난 물을 주신 것(민수 20,213)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면서 죽음으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알게 하시려는(신명 8,3)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먹어야 할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 안에 살게 하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일용할 양식으로 내주셨습니다. 만나(율법)가 죽음의 빵이었다면 성체는 생명의 빵이고, 성혈은 생명의 물이라서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이(로마 6,8) 전제되고,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형제가 되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성체성사는 교회를 만들고, 교회는 성체성사로 살아갑니다. 성체와 성혈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절정이며, 신앙생활에 필요한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생명의 빵과 피를 받아 모시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성체와 성혈을 모시기 위한 규범을 잘 지켜야 합니다. 성체와 성혈을 모독한다면 거룩한 식탁은 물론 이웃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또한 성체성사(미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맛보았다면 주님과 이웃 형제를 알아보아야(사랑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의 핵심이며 정점인 미사는 분열의 식탁이 아니라 친교와 일치의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와 성혈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받아 모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사랑의 성사인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친교와 일치,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성체와 성혈을 모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성체와 성혈을 모시기 전에 하느님의 말씀에서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무서운 심판의 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1코린 11,29).
- 방효익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