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기획되어 온 동화작가들의 영월 역사기행(6월 23일~24일)
전날(금요일) 몹시 속이 안 좋아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죽 먹고 푹 쉬고, 강한 정신력으로 토요일 아침 씩씩하게 길을 떠났어요.
서울팀, 일산팀, 인천부천팀으로 나뉘어 출발하였고, 영월역에서 12시에 만나기로 하였지요.
다행히 길이 그다지 막히지 않아 서울팀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그 다음 우리 팀, 마지막으로 일산팀이 도착하였습니다.
일산팀이 도착하기 전 인증샷부터 찍고...
아, 영월역이 보여야 하니 다시 찍읍시다.
셀카놀이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수런수런 모여 무엇을 하는 거냐면요?
서대표님이 운전하시는 일산팀이 도착하기 전(서대표님이 올갱이해장국을 사주시기로 했는데요)
과연 어느 올갱이해장국집으로 갈 것인가 내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는 사람은 1,000원씩 내기로...
영월역 건너편에는 올갱이해장국집이 일렬로 쭈욱 늘어서 있더라구요.
누가 이겼더라....
왁자지껄 내기를 했는데 정작 벌금은 걷었나, 안 걷었나?
맛집으로 유명한 올갱이해장국집은 역시나 줄이 쭉 늘어섰는데
이번에는 그 집으로 안 갔습니다.
서대표님 말씀이 몇 년 동안 그 집을 갔는데 언제부터인가 짠 맛과 조미료 맛이 강하게 느껴졌더랍니다.
이번에 간 집은 그 유명한 집의 옆집옆집...
올갱이해장국에 각종 약재를 넣었다고 하네요.
위 사진은 올갱이해장국에 앞서 나온 올갱이전입니다.^^
자, 배도 부르고 기분도 상쾌하니 얼른 김삿갓문학관으로 떠납시다!
흔히 김삿갓을 방랑시인, 그리고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시를 남긴 기행의 시인쯤으로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김삿갓의 참모습일까요?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흔히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부르지요.
그의 조상은 19세기에 들어와 권력을 온통 휘어잡은 안동 김씨와 한 집안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익순(益淳), 그의 아버지는 안근(安根)이며 그는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벼슬이 높았던 그의 할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 때 평안도 선천부사로 나가 있었어요. 그런데 1811년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전쟁이 일어났고 농민군들은 가산 · 박천 · 선천을 차례로 함락시켰는데, 가산군수 정시는 항복하지 않고 거역하다가 칼을 맞아 죽었고, 선천부사 김익순은 재빨리 몸을 피했습니다. 그 뒤 김익순은 농민군에게 항복해 직함을 받기도 하고, 또 농민군의 참모 김창시를 잡았을 때 그 목을 1천 냥에 사서 조정에 바쳐 공을 위장하려는 어줍잖은 짓거리를 하기도 했지요. 이로 인해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집안은 폐가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역적의 자손이니 그 자식과 손자들은 법에 따라 죽음을 당하거나 종이 될 운명에 놓여 있었지만 죄는 당사자 김익순에게만 묻고 아들 손자들은 종이 되는 신세를 면했는데, 여기에는 안동 김씨들의 비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나이든 큰아들 병하(炳河)와 작은아들 병연은 종을 딸려 황해도 곡산으로 가서 숨어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광주(廣州) 땅 촌구석에서 살다가 이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가 살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김삿갓 형제는 세상이 좀 잠잠해지자, 어머니 곁으로 와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집안 내력을 철저히 숨기고 살면서 남달리 영민한 작은아들 병연을 글방에 다니게 했습니다. 철없는 어린 병연은 열심히 공부했고, 스무 살이 되자 과거를 보아 출세하려고 마음먹었지요.
그는 고을에서 보는 향시에 나갔고(어느 지방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시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한다.”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김삿갓은 가슴을 펴고 시를 써내려갔습니다. 그중 마지막 한 구절만 보면 이렇습니다.
임금을 잃은 이 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
김삿갓은 장원급제를 했고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옛 일을 더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삿갓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는지 스물두 살 때 장가를 보냈고 이어 손자도 보았지만 그는 마음을 잡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족과 이별을 고하고 긴 방랑생활을 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방랑시인, 철인, 광인, 술꾼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민중과 벗이 되었으며, 한문을 조선 것으로 만들고 한시의 틀에 박힌 정형을 깨부순 시인이었습니다. 한시를 짓는 선비나 시인들은 운자를 맞추고 글자의 고저를 따지고 또 화조월석이나 음풍농월만 일삼지요. 그래야만 시의 격이 높고 품위가 지켜진다고 생각했기 떄문이었죠..
김삿갓은 이런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시가 비록 칠언고시(七言古詩, 한 구가 칠언으로 된 한시의 형식) 등의 형식을 빌려 운자를 달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외형일 뿐입니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모두가 인간의 일이었고 그가 쓰는 시어는 더러운 것, 아니꼬운 것, 뒤틀린 것 그리고 우리말의 속어, 비어가 질펀하게 깔려 있습니다.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고,
민중과 함께 숨쉬며 탈속한 참여시인, 민중시인-김삿갓...
천재시인의 일생을 보며 작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부끄럽지만 재능 없음을 한스러워했답니다.ㅋ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
김삿갓의 에너지와 정기를 받고 싶은 마음은 똑같습니다.
다른 작가들은 짧게는 서너 번 길게는 열댓번 영월에 왔다갔다 하네요.
영월이 초행길인 저는,
다음에 꼭 다시 한번 와서 찬찬히 느껴보리라 결심했습니다.
원래 일정은 청령포에서 장릉이었으나
이번 여행은 장릉~ 청령포 순으로....
자, 장릉으로 갑니다!
첫댓글 벌금 걷지 않은 것 같아요
아깝다~~^^ 전 이겼는데 ㅋㅋ
나중에라도 걷어야지요, 내기는 내기이니까...ㅋㅋ
@바람숲 꼭요.
정말 정리를 잘하셨네요. 선생님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영월 역사 기행을 정리해봅니다. ^^
생각보다 정리가 잘 안 되더라구요.ㅠㅠ
진짜 정리 잘했다! 내가 놓친 부분을 다시 읽었네!
와, 선생님이 읽어주시니 기뻐요^^
다시 보니 그날의 즐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릅니다.
그때도 좋았지만 지나고 나면 더 좋은 것 같지요? 참 이상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