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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칽퉤
출처 디씨
만년필 업계는 유달리 100년이 넘은 소위 '근본' 기업들이 참 많아.
몽블랑, 파커, 쉐퍼, 오로라, 파이롯트, 세일러, 플래티넘 등등...
그 중에서도 역사만 놓고 보면 역시 펠리칸이지.
올해로 183년이 되는 근본중에 근본 기업이라 할 수 있는 이 기업은 현재 만년필 기업을 초월한 몽블랑에 그나마 견제구 정도는 날릴만한 몇 안되는 기업이야. (물론 만년필 역사는 이보다 짧지만)
하지만 독일에서 지난 183년이라는 역사는 다들 알다시피 세계 역사의 격동기를 몸소 지나온 세월일 수 밖에 없어.
그래서 오늘은 pelikan이라는 기업이 세계의 격동기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내가 찾아본 정보를 정리해보려 함.
펠리칸은 1838년 화학자 칼 호네만(발음이 맞나 모르겠네)에 의해 만들어졌어.
당시 우리나라는 세도정치 시기인 헌종의 재위 기간이었고, 영국에선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년도이며 영국에선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났으니 엄청나게 오래된 기업이지.
그렇게 페인트와 잉크를 만들며 명맥을 이어오다 화학자인 '권터 바그너'가 1863년에 공장 관리자로 임명돼.
(참고로 바그너는 일본 최대의 만년필 커뮤니티 '와그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야.)
그리고 그는 1871년 작은 잉크 공장이었던 펠리칸을 인수해.
그는 1878년에 그의 '가문'(Family symbol)인 펠리칸을 회사 로고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펠리칸 로고는 독일 최초의 상표라고 해.
81년 바그너는 프리츠 베인도르프를 고용했는데, 이 사람이 영업을 엄청 잘해서인지 와그너는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자신의 회사를 이어받게 함.
직원수가 30명 남짓한 작은 회사인 펠리칸에서 만족 못한 베인도르프는, 수채화 색감 발색에 뛰어난 회사를 차례로 인수하게 되는데
이 덕분인지 1898년에 지금도 쓰이는 미친 근본잉크, 4001잉크를 출시해.
4001잉크는 색이 바래지 않아(지금 블루블랙마냥 전부 아이언갤 잉크였음) 공문서용으로 많이 쓰였고, 이 덕분에 독일 국가 당국에서 가장 선호했다 함.
그렇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4001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잉크가 되어버림.
4001잉크가 펠리칸의 첫 번째 히트작이었던 셈이지.
그 뒤로는 다들 알다시피 피스톤 만년필의 특허를 차례차례 획득한 이후 29년, 최초의 피스톤 필러 만년필인 펠리칸 100으로 만년필 시장에 뛰어들어.
이후 펠리칸 만년필의 역사는 다들 알테니 더는 글 안쓰고, 오늘은 펠리칸이란 기업이 2차대전때 어떻게 지냈는지 써보려 함.
바그너와 베인도르프)
앞서 말했던 바그너의 사위 베인도르프는 4001잉크의 대성공으로 인해 경제적은 물론 정치적으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어.
지금은 사양산업에다가 온고잉 만년필도 제때 못 만드는 하꼬 회사이지만
당시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식민지 확장에 열중하던 다른 열강들과 달리 국가적으로 화학공학을 엄청나게 밀어주던 나라임.
(세계 최초의 합성안료인 '프러시안 블루'도 독일에서 탄생됨)
이런 상황이니, 잘나가는 잉크 및 페인트 화학회사였던 펠리칸의 위상은 지금과는 한층 다른것이었다고 추측돼.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베인도르프는 1차대전기간이 포함된 1907년부터 1919년까지 하노버시 상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 30년엔 하노버 상공회의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프러시아 상공위원회와 루마니아 총영사관에서도 한 자리 해먹음.
(베인도르프를 기리는 동상. 동상 옆에는 두개의 청동 펠리컨 조각이 지키고 있다 함)
지금도 하노버시엔 베인도르프의 이름을 딴 거리와 헌정동상, 헌정 분수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지역경제에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더라고.
문제는 여기서 시작돼.
당시 독일은 1차 대전 당시 장군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수행했어.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전후 독일의 상황은 대내외적으로 복잡했다.
미국은 대공황이 터지고, 내부에선 당투쟁이 심각했고, 공산당원들이 과격하게 행동했을 뿐더러 세계의 빌런 '나치'당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이었지.
이런 상황에서 힌덴부르크에게 독일의 거대 기업가들의 대표들이 히틀러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이 기업가 중엔 펠리칸의 회장인 베인도르프가 있었음.
이 탄원서는 훗날 독일 내각이 힌덴부르크가 사망하면 대통령 직이 폐지되고 그 권한이 수상직에 병합된다는 법률을 제정하는데 도움을 주었는데,
당연하게도 이는 히틀러의 독재정권 획득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어.
이렇게 그는 히틀러에 상당한 신봉자였던 걸로 추측되는데,
이 사진이 바로 1938년 펠리칸의 100주년 기념식임.
여기서 펠리칸의 새끼 새가 두마리로 줄어들었다 하며, 동시에 베인도르프가 히틀러에 대한 충성맹세를 함.
이렇게 수천명의 임직원을 거느리며 경제적, 정치적으로 잘나가던 펠리칸은
당연하면 당연하게도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치면서 2차대전이 발발하자 펠리칸과 나치 독일과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어.
물론 대부분 금으로 만드는 만년필은 만년필에 금의 사용이 제한되어 년에 100개정도 만드는 수준으로 전락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펠리칸은 펜 생산을 줄인만큼 대부분의 제조 시설을 페인트, 코팅제 및 기타 군용 화학 물질 생산에 사용했다 함.
이외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확실한 확인은 힘들지만, 탄약 상자 및 기타 금속제품을 만드는 데도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더라고.
심지어 유대인 수용소에서 수용인의 번호를 적는 문신 잉크를 제작한 것이 아니냐는 아주 강한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야.
독일 현지인의 인터넷 글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바늘과 펠리칸의 잉크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네.
아무튼 이렇게 전시 상황에서 펠리칸과 나치 독일은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 훨씬 끈끈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어.
거기다 펠리칸은 강제노동에 대해서도 자유롭지 않은데,
1938년 펠리칸의 직원들)
37년 펠리칸은 하노버시에서 강제로 유대인 보석을 경매하여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40년부터는 강제노동자를 고용하기 시작해.
펠리칸의 여러 공장들은 당시 '자유시민'의 인력이 부족할 때 마다 전쟁포로를 활용했다 하는데, 추정치론 최대 2000명의 노동자(대부분 폴란드, 우크라이나인 여성)를 사용했다 함.
또한 42년과 44년에는 게슈타포가 관리하는 2개의 노동 교육 캠프를 만들어 강제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하며 이렇게 강제 노동을 잘 이용하는 회사는 하노버에선 펠리칸이 유일했다 함.
전쟁이 끝난 후 회사 경영진들은 노동자들에 대해 충분한 대우를 해줬다 주장하지만 증거와 증인은 반대를 가리켰다 하니 말 다했지 ㅋㅋ;
물론, 44년까지 독일에서의 노동력의 4분의 1은 강제노동에서 나왔고 펠리칸 뿐만 아니라 지멘스 바이어같은 거대 기업들도 사용했던거라 한 기업만 탓하기엔 사회가 미쳐돌아가던 상황이었어.
전쟁이 끝나고 펠리칸은 제한받던 본연의 업무인 필기구 생산으로 돌아왔어.
현재 폴란드 그단스크에 남아있는 옛 펠리칸의 공장 건물. 최초의 피스톤필러 만년필 펠리칸 100을 생산했던 공장이며, 독일어 DANZIG의 흔적이 남아있음)
물론 베인도르프가 엄청나게 늘려놓았던 국외 공장은 대부분 잃었지만,
독일 내부 공장설비는 연합국의 무친폭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펜 생산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 하네 ㅋㅋ
이렇게 펠리칸은 전후 필기구와 잉크 생산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어.
그러던 2014년 소집된 자문위원회에서 베인도르프가 나치에 대한 참여를 시사할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15년 결론이 지어지게 되었어.
위원회에선 베인도르프 거리의 이름을 바꾸라고 권고했지.
하지만 지역 위원회는 그가 나치에 관여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그의 명예를 박탈하지 않아.
향간에 의하면 그는 유태인 예술인들을 지원했고, 프리메이슨의 회원이었다고 해.
물론 그와 동시에 나치당원이었다는 점은 의아하긴 한데... 아무튼 재미있는 인물이야 ㅋㅋ;
이렇듯 펠리칸은 나치 독일의 전쟁당시 국가와 협력하며 지금 관점에서 보면 전쟁범죄를 자행한 것으로 보여.
하지만 전후 펠리칸은 이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펠리칸의 이사회는 당시 베인도르프의 집이 폭격을 맞은 후, 하노이를 떠나 회사 경영에 아예 신경을 쓰지 못했을 뿐더러
치매에 걸려 펠리칸이 강제노동을 사용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말해.
18년 발간된 베인도르프와 나치독일에 관계에 대해 조사한 출판물에선
그가 나치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만한 사용 가능한 증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함.
이에 대해 일각에선 위에 첨부한 펠리칸 100주년 사진에서 나치독일의 하켄크로이츠를 지운 버전이 존재하는걸 예로 들어,
회사가 과거에 독일 제국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내고 있더라고.
참고로 베인도르프의 독일어 위키에선
"
베인도르프는 "자신의 회사 구내에서 강제 노동과 노동 교육 수용소 운영을 용인"했고 그로부터 혜택을 받았습니다.
베인도르프의 후손들과 펠리칸 회사는 그의 생애 말기 치매와 관련하여 결정을 내리기 전에 베인도르프의 개입을 조사할 것을 요구합니다.
"
라고 적혀있어.
전쟁범죄 라는 것이 사실 엄청 복잡한 개념이라 하더라고.
특히 당시 전체주의 국가에서 운영되던 기업의 경우 더더욱.
이러한 모호성 때문에 좋다 나쁘다라고 쉽게 결론짓기도 힘들 뿐더러 나는 그러한 가치판단을 위해 오늘 글을 쓴게 아님.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판단이 더욱 중요한 거니까.
암튼 매력적인 기업인 펠리칸, 오랜 역사의 이면에는 이러한 면도 있었다는걸 알리고 싶었다.
결론 :
m800사라
출처 디씨
첫댓글 내 최애 만년필 회사얘기 넘 재밌다...
좋은글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