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하릴없이 선배 집 안에 들어앉아있다. 컴퓨터를 틀어볼까하다가 그것조차도 포기하고 티비 리모콘만 매만졌다. 백날 채널을 돌려봐야 이미 몇년전에 개봉하고 한물간 영화들과 수없는 재방송 프로그램밖엔 없는것을 알면서도, 달리 할것을 찾지 못해서 또 티비를 틀었다.
몇백개의 채널에서 볼것이 하나도 없는거야 말로 현대판 악몽이 아닐수 없다. 다섯번은 본듯한 프렌즈의 에피소드가 흘러나오고, 관객들은 한참 피비가 외치는 ‘do do’라는 대사에서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깔깔대고 있었다.
나는 티비를 끄고 주먹크기의 보물상자를 서랍에서 꺼내어 옆에 두고 한참 바라보았다. 힘없이 웃다가, 준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선배에겐 또다른 폐를 끼치는것이 되겠지만, 겁이 나서 이 방법 아니면 안될것만 같았다.
선배에게 간단하게 죄송하다는 메모를 남기고 (이것은 매우 부적합해보였다.선배는 날 위해서 감수한 불이익이 수만개도 넘었을테니까), 내가 첫 월급으로 샀던 그 몇만원짜리 보물상자를 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것은, 열면 노래도 흘러나오는 여성스러운 것이었다. 구지 이것을 샀던 이유는 이것을 적극 추천했던 상점직원이 갈색머리에 갈색눈이었기 때문이다.
기억에 파묻혀있던 한 사람을 꺼내었다. 기억력도 나쁜 주제에 아직도 그 아이에 대한거라면 뭐든지 기억하고 있는, 정확히 10년전의 아이. 평생 잊을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날 사람인 그 아이를.
내 첫사랑은-그 아이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그 여자아이는-초등학교 4학년때였다. 우리 집은 중상정도의, 보통 사람들이 보면 나름대로 잘사는 집이었다. 서울 한복판은 아니지만 꽤 번화한 곳에서도 50평이 넘는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고(사실은 네명밖에 없는 가족이라 그렇게 넓은 집이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그마해서 별장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 비슷한 것도 시골에 하나 갖고있었다. 그런만큼 우리집은 교육열이 셌고, 나는 발치조차도 따라가지못할 성적을 언제나 유지하는 형이 하나 있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규모는 꽤 컸는데, 12반 정도까지 있었던것 같다. 그때 아마도-나는 6반이었을 것이다(나는 기억력이 절대 뛰어난 편이 아닌데다, 십년도 넘은 일을 기억하긴 쉽지 않다)
내 첫사랑 -이아름, 그녀는, 아니 그 아이는 아직 티비의 미의 기준에 세뇌되지 않았던 어린 내 눈에 정말 예뻤다. 똘망똘망하게 커다란 눈에 거의 항상 땋아내린 긴 천연 갈색머리. 지금 돌이켜 생각해볼때 특출나게 예쁜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반 부반장으로 똑 부러지는 목소리와 시원시원하게 일을 해결하던 그 능력은 약간 소심한 편에 들어가는 나에게 있어서는 우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방과후에 집으로 가는 모습을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름이는 항상 바빴기 때문에 다른애들이 학교를 다 떠나고나서야 가곤했었다. 부반장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름이는 가끔 방과후에 남아서 바쁜 선생님을 도와 시험을 채점하곤 했다. 학구열에 불타는 부모를 둔 반장녀석은 거만했고, 학원에 가지 않는 날에도 뭔가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아름이에게 모든 일을 떠밀기 일쑤였다.
여하튼 아름이는 어떤 남자애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가고 있었다. 그 아인 누구나에게 친절했지만, 남자애와 그렇게 활짝 웃는것은 처음보았다. 그 어린마음에도 질투가 났던 나는 나무 뒤에 숨어서 그들이 함께 걷는것을 보았다. 그 둘은 왠지 모르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날밤 그녀의 해맑았던 웃음소리가 귀에 맴돌아서, 잠들수 없었다. 어렸을적 (초등학교 4학년때 그런말을 생각하는것 자체가 웃길지도 모르겠지만) 9시만 되면 저절로 졸리던 시절에, 새해에 12시를 기다리려고 잠이 들지 않았던것 후로는 처음으로 잠을 청할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그 아이를 찾아 복도를 걸어다녔다. 쉬는시간마다 반의 열린 뒷문으로 고개를 기웃기웃 들이밀어 그 남자아이의 모습을 찾았다. 찾아서 어찌하려고 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누가 내 적인지는 알려는 생각이었을테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녀석을 그 전까지는 학교에서 본적도 없었다. 전교생이 많아서 그런거라고 변명하기에도, 그 녀석은 너무 낯설었다. 물론 옆모습만 몇번 힐끗힐끗 훔쳐본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3교시 쉬는시간에야 나는 그 놈의 모습을 윗층 8반에서 찾을수 있었다.
녀석은 왕따인것마냥 자기자리에 혼자 엎드려있었다. 존재감이 하도 없어서 아까 8반을 둘러봤을때 발견을 못한것 같았다. 내가 그 녀석을 이번에 발견할수 있었던것은 구름이 걷혀 해가 들어와, 아이들의 머리카락에 반사되면서 그 머리카락의 색들이 눈에 쉽게 띄었기 때문이었다. 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 그 녀석의 뒷통수가 매우 낯이 익었다. 그 녀석은 한국인들은 거의 갖지 못한 천연 갈색머리를 갖고 있었다.
항상 느끼는거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는 놀라운 면을 갖고 있다. 동물처럼 놀라운 청각도 시력도 후각도 갖고있지 못하지만, 느낌만은 아직도 야생일때의 그 능력을 갖고있는것 같다. 어찌하였든 그 녀석은 내 눈길을 느끼고는 부시시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를 관찰하던 나는 그제서야 내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바보같이 왜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흔하지 않은 갈색머리, 그리고 눈빛이 다르긴 하지만 아름이와 똑같이 크고 둥글은 눈망울, 아주 약간 끝이 마늘코처럼 퍼질듯말듯하지만 콧대 자체는 매우 높은 점. 그 둘은 이란성 쌍둥이였다.
“너 혹시 쌍둥이 있어?” 그날 나는 확인을 위해 아름이에게 물어보았다. 사실 속으론 답을 알고있었지만.
“아, 응, 어떻게 알았어?” 평소에 그녀에게 말을 잘 걸지도 못하던 내가 불쑥 질문하자 그녀가 약간의 당황을 눈가에 머금은채 되물었다.
“아..그냥 저번에 같이 있는거 보고 좀 비슷한거 같길래..” 차마 엿보았다고 말할수는 없어서 난처해진 나는 말끝을 흐렸다.
“응, 다운이라고, 8반이야. 아름다운. 웃기지?” 아름이는 겸연쩍게 웃었다. 사실 아름다운이라는 건 남매 사이에서 몇번 본 이름이어서, 내겐 별로 이상하지 않았지만.
“괜찮네 뭐. 근데 난 걔 전엔 한번도 못 봤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다운이는 몸이 약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처음에 태어났을때도 다운이가 나보다 몸무게가 덜 나갔대. 어렸을때 병도 많이 앓았고.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아.”
“아…그렇구나.” 딱히 위로해줄 말이 없었던 나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아름이가 말했듯이 다운이녀석은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 출석일수만 간신히 채울까말까하는 것 같았다. 나와봤자 그 반 애들은 그 녀석과 놀아주지 않았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는듯했다. 물론 그렇게 보였을테다. 내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그렇게 다운이에 대해 조사하고 다닌것도, 순전히 그 첫인상이 잊혀지지 않아서였으니까. 친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으니까. 아파서인지는 몰라도 아름이보다도 훨씬 창백한 얼굴위에 자리한 그 눈빛. 십년후인 지금에서도 잊을수 없는 그 눈은 절대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죽음의 문턱을 왔다갔다해서인지도 몰랐다.
자신을 엿보고 있던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던 그는, 분명히 나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의 너머를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것처럼 느껴졌었다. 내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시선이었다. 그 후에 나는 아름이 때문에 다운이를 관찰하기 보다는, 다운이 자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매일 한번씩은 8반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름이가 말했던것처럼 자주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혼자 외톨이로 자신의 자리에 엎드려있기만 했다. 가끔은 자신을 지켜보는 나를 마주 바라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항의는 하지 않았다.
그 후에 다운이와 직접 대화하게 된것은 몇달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날은 선생님이 여지없이 아름이에게 채점을 부탁한다며 부르던 날이었다. 아름이는 곤란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교실문을 막 나서려는 날 붙잡았다.
“저기, 승우야, 미안한데 교문에서 다운이 보면 나 오늘 늦을것같다고, 먼저 가라고 좀 전해줄래?”
“교문? 응, 알았어.” 오늘은 왠일로 그녀석이 학교에 나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 녀석은 친구가 없었다.
단 하나도.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수업시간에 쓰러지듯이 있어도 선생들이 아무말 안한다며 내게 불평하던, 이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8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다운이는 항상 학교에 오는 날이면 아름이를 기다려서 함께 집으로 돌아갔었고, 다운이가 학교에 오는 날이면 아름이는 쉬는시간마다 그를 찾아가야 했음은 물론이었다. 나는 다운이가 무슨 병을 갖고있는지는 몰랐다.
아름이가 그에게 약은 챙겨먹었냐고 물어보는걸 복도를 지나다 들은적이 있을뿐이었다. 다운이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자신의 누나에게 (고작 몇분 차이지만) 말했다.
“그냥 아픈게 끝났으면 좋겠어. 내가 아프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어.”
“그런말 하지 말랬잖아, 너 금방 나을수 있다니까?” 아름이가 다그치듯 말했다.
다운이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벌써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의 것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것이 아닌, 자신의 친구마냥 받아들일 준비가 한껏 되어있는. 그러나 그는 자신의 누나를 걱정했던지, 이내 활짝 웃었다.
“우리 집에 가면 엄마한테 와플 해달래자,” 그가 생글거렸다. 그와 달리 아름이는 역시 죽음을 보지못한 아이다왔다. 그녀는 밝았고, 어두운것들은 금방 잊어버렸다.
“그래, 맛있겠다!” 그녀는 마주 웃었다. 구김없는 웃음. 자신의 쌍둥이와는 본질적으로 너무나 다른 웃음을.
그렇다고 다운이 녀석이 암울하거나 그랬다는건 아니다. 그녀석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아이였다. 그건 어린 나도 느낄수 있었다. 나와 다르다는걸. 다만 그는 죽음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 봤을뿐이었다. 그는 몸은 여기에 남아있었지만, 항상 눈은 꿈을 꾸는듯이 저 먼곳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그리워하는 날개다친 새처럼.
교문엔 역시나 다운이가 기둥에 기대어서서 아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전엔 그와 대화해본적이 없었고, 그리고 내 친구들이 모두 그 녀석은 이상하다고 말했기에 잠깐 멈칫거렸지만, 나는 이내 그에게 다가갔다.
“아름이가 먼저 가라고 전해달래.”
그는 넌 누구냐는 듯한 눈빛으로 날 한번 쳐다보았지만, 내게 물어보진 않았다. 그는 다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겐 내 또래에게선 볼수 없는 그 어떤 분위기가 어려있었다. 호기심에 난 그에게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여기서 뭔가 더 말을 하는건 어색할거란 생각에 발걸음을 떼어 교문을 나서려하고 있었던 찰나.
“너 우리 누나 좋아하는구나.” 멈칫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짖궂거나 비웃는듯한 기색없이 그저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물어보는것이 아니라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 나이의 나라면 당연히 부정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겐 그래봤자 소용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딱히 긍정을 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번에 나무 뒤에서 우리 지켜보던것도, 그 다음에 그게 누군지 확인하려고 우리반에 와서 나 보던것도 너잖아.” 딱히 뭐하고 있었냐고 원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러니까 그랬어, 라고 말하는 듯했다.
“미안, 훔쳐보려고 하던건 아니었는데.” 나는 진담반 가식반으로 말했다.
“괜찮아. 누나한테 말 안할게.”
나는 그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생각보단 괜찮은 녀석인것 같았다.
“사탕 먹을래?” 다운이는 자신의 바지에서 청포도 사탕을 하나 집어 내게 건넸다. 나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바로 껍질을 까서 입에 하나 넣었다. 그러고보니 다운이는 벌써 반쯤 녹은 청포도를 입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그를 알때에는 어느새 익숙해져버려서 몰랐지만, 십년 지난 지금에서 생각해보자면 그 아이에게선 언제나 청포도사탕향이 났다. 나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 여우마냥 그의 평범하지 않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이다운이야.” 그가 말했다.
“난 최승우.”
“우리 엄마가 벌써 누나몫까지 와플 만들어놨을텐데, 지금 누나가 안가면 다 식어버릴거야. 가서 같이 먹을래?” 그가 물었다.
나는 딱히 와플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왠지 그를 따라가야할것같은 생각에 그와 함께 갔다. 와플은 맛있었다.
그 후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딱히 평범한 기준으로선 제일 친한 친구라고 말하기엔 좀 그랬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석이 친구라고 부를수 있는 가장 비슷한 존재였다. 그리고 내게도 그는 특별한 친구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주로 어울려놀았지만 이상하게도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것은 다운이와 함께였다. 그 녀석은 내 평범한 고민들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는 절대 내게 무엇을 하라고 직접적으로 방법을 제시해주는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를 더 가까이 느꼈는지도 몰랐다.
우리 집은 잘사는 만큼 내게 기대가 컸다. 한문제라도 틀리면 나는 그날은 죽도록 맞아야만 했고, 나는 유별나게 내 성공에 집착하는 내 아빠를 증오했다. 그의 기대에 맞추기엔 내 머리는 그렇게 잘나지 못했다. 마치 형이 태어나면서 좋은 DNA를 쇼핑하듯이 골라잡아 나오고, 나는 세일해야만 처분되는 떨거지들을 가지고 태어난것만 같았다. 덕분에 나는 언제나 그를 실망시켰고, 그는 자식이 아닌 쓰레기처럼 나를 대했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부모의 행동이라며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절대 아니라고 지금도 자부할수 있다.
그건 꼭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역시도 어렸을때부터 그렇게 자라왔으니, 아는게 그것밖에 없었을것이다. 엄마와도 사랑해서 결혼한게 아니라, 배경을 보고 골라따져 선을 본 자리에서 서로 좀 괜찮다 싶자, 양쪽 집에서 합의하에 서둘러 결혼을 시켜버린 것이었다. 난 그 둘이 결혼기념일따위를 챙기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나는 애였다. 어렸을때 아는 사랑이라곤 부모의 사랑밖에 없는법이고, 또 친구들은 85점만 가끔 넘겨와도 맛있는걸 해주는 부모를 두고있었기에, 나는 어쩔수없이 그것을 갈망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어느 선을 지나면 더 이상 성적이 올라가지 않았다. 공부를 하고 또 해도 절대 기대치에 닿을수 없는 나를 난 스스로 자책했고, 해가 갈수록 점점 소심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가출을 몇번 시도했었는데, 물론 그것은 내가 여태 해왔던 모든일처럼 실패로 돌아갔다. 난 자기 의지가 생기는 그 순간부터 죽고싶다는 생각을 몇백번이고도 더 했었다. 내가 죽고나면, 그제서야 아빠가 울면서 자신의 일을 후회하는 상상을 내 머리속에서 몇천번이고 몇만번이고 반복재생했다. 씁쓸하면서도, 그것이 내가 할수있는 가장 통쾌한 상상이었다. 그런 나에게 다운이는 나의 정확한 반대이자 쉼터였다.
그 녀석도 내게 고민상담을 몇번 하긴 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고민이랍시고 말하는것은 고민이 아니라 그저 꿈같은, 비현실적인 얘기들이었다. 그는 피와 살로 이루어져있는 지금 이 세상은 자신이 곧 떠날것이라는걸 알아서였는지는 몰라도, 현실적인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이 말도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내 현실에서 잠깐만이라도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동화책을 읽는 아이마냥 즐겁게 그의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
하루는 그 녀석이 그 아이로써도 이상한 말을 했다.
“넌 나중에 커서 날 기억할까?”
“당연하지.”
“나는 항상 초등학생일테고 넌 나중엔 할아버지가 되버릴지도 몰라.”
그는 현실적이었다. 자신은 곧 사라질거라는걸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억에서 잊혀지는건 죽는것보다 더 무서운거라고 몇번이나 말했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망각과 일치하는것이었다.
“걱정마. 안 잊을테니까.”
그는 말없이 쥐고 있던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더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슬쩍 보았다. 무슨 풍경같았다. 그 녀석은 아름이와는 달리 그림을 잘 그렸다.
“뭐 그려?”
“천국.”
딱히 교회에도 절에도 나가지 않았던 나는 그 말에 그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종교를 잘 모르는 내 눈에도 그것은 보통 천국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것은 천국보다는 헨젤과 그레텔 속의 삽화를 더 닮아있었다.
보통 재질은 아닌것 같아 보이는 울창한 나무들 (더군다나 잎 대신엔 분홍색 솜사탕이 있었다) 가운데에 서있는 역시 평범하지 않은 과자집은, 울타리 대신에 고사리같이 고풍스럽게 꼬이고 꼬인 자그마한 나무에 둘러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건 은색 옹달샘이었는데, 그곳에 반사된건 분명히 ‘보라색 바다’ 속에서 ‘별’들 사이에 ‘떠다니는’, 물결에 가려 별달리 힘찬 빛을 뿜어내지 못해 달빛같은 빛만 내고 있는 ‘해’였다.
덕분에 그림 전체는 새벽의 어슴프레한 빛정도밖에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 어두운 그림중에서 단 하나 눈에 띄는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역시 솜사탕같은 재질로 보이는) 하얗다 못해 무(無)에 가까운 날개를 지닌 은빛의 고양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그림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내가 중얼거렸다.
“내 천국. 나중에 힘들면 놀러와.”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것을 그리며 눈을 반짝거리는 그가 너무 행복해보여서, 나는 차마 반박할수 없었다.
“어떻게 가는데?” 농담반 진담반으로 물었다.
“지도를 보고.”
“지도는 어딨는데?”
“내가 나중에 줄게.”
“가서 뭐하는데?”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당연한건 왜 묻냐는듯한 투였다.
“행복해지지.”
말도 안됬지만, 역시 행복이란건 인간으로써 거절할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자 권리였다. 뭐 하늘에 떠있는 햇빛 아래서 행복하든 위로 올라간 바다안에서 헤엄치는 햇빛 아래서 행복하든, 행복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손에서 아직 껍질에 둘러쌓인 청포도사탕 하나를 굴리고 있었다. 껍질은 하도 다운이의 손에 만져진 나머지 잔뜩 구겨져있었다. 다운이는 벌써 몇주째 그 사탕만은 먹지 않은채로 주머니에만 넣어두고 있었다 (내가 그건 왜 안 먹냐고 물어보면, 그는 조용히 가방에서 다른 사탕을 꺼내어 내게 주었다. 딱히 먹고 싶어서 물어본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저 그것을 받아 입에 넣곤 했다).
그 녀석은 평소에도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놓곤 내가 그게 뭔 소리냐고 물으면, 날 연민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나중엔 반박하는것조차 포기해버렸었다. 이번만큼 반박하기 싫은 그의 상상은 없었었다.
그 녀석과 친구가 된 후로 다섯달이 흘렀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 기억나는 월요일. 그리고 월요일치고도 최악인 월요일이었다. 아름이는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를 빠졌다. 혹시 다운이가 학교에 와있으면 왜 아름이가 안 나왔는지 말해줄수 있을것 같아서 8반으로 찾아갔다. 다운이는 거의 항상 그렇듯 학교에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가 있는 날이든 없는 날이든 8반은 똑같았고,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8반에 있는 친구를 불러내서 물어보아도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걱정은 됐지만, 역시 나도 어렸다. 무슨 일이 있을거란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며칠후 아름이는 초췌해진 얼굴로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그리곤 소문이 퍼졌다. 다운이가 소리소문없이 하루만에 사라졌다고.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새로운 주제가 되었다. 이젠 포켓몬이 아니라, 다운이의 사라짐에 대해 웅성거렸다. 이것은 이상하기에 그지 없는 일이었다. 다운이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던 녀석들이, 다운이가 없어짐으로 인해서 다운이의 존재를 느꼈으니까.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니고 뭐겠는가.
이건 몇달 후의 이야기지만, 그녀는 밝은 모습을 되찾긴 했다. 그러나 예전의 구김살 하나 없던 그런 종류의 밝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아는한은 평생 예전의 그 웃음을 되찾진 못했고, 내 아름이에 대한 첫사랑도 다운이의 실종과 함께 왠일인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어쩌면 이란성 쌍둥이라도 역시 가족이라서, 한참 닮아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슬픔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어렸기에 그게 왜인지는 파악하지 못했고, 기억력이 나쁜 나로썬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운이의 유일한 친구였던 나에게만 아름이는 그의 실종에 대해 그나마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침을 먹으라고 불렀는데도 다운이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름이의 부모님은 아름이에게 다운이를 깨우라고 시켰는데, 정작 다운이의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다운이는 없었다고 했다. 아무도 다운이가 나가는것은 듣지 못했다고. 없어진 물건조차 없었고, 누가 침입한 흔적은 더더욱 없었으며, 그저 다운이가 없어진것을 제외하곤 모든게 그대로였다고 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하며 시종일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떨궈냈다. 남매도 아닌 쌍둥이였기에 충격이 더 컸던 모양이다.
“이거, 받아. 다운이 책상 위에 놓여있었어.” 그녀가 울먹거림 반 이야기 반으로 설명해준 후에, 무언가를 내게 건넸다.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며 양호실로 가버렸는데,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손을 피자, 청포도 사탕 하나가 놓여있었다. 껍질이 잔뜩 구겨진 낯익은 청포도 사탕.
그 청포도엔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그 포스트잇엔 다운이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다짜고짜 ‘승우를 위한 약도’라고 적혀있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다운이가 준 사탕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먹지 않았어도 청포도 사탕 특유의 향은 옅게 맡아졌다. 어이없게도 다운이에 대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것은 그의 그 인상깊던 눈빛도, 그의 모습도 아닌 청포도 사탕의 향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 날을 보냈는진 지금도 알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편으로는 담담해졌다. 이렇게 떠났든 저렇게 떠났든 나는 그가 떠날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당연한거라고 여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이런 세상에 머무를수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어쩌면, 말도 안된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 좋아하던 자신의 천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주 조금이지만, 알수없는 원망까지 들었다. 나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왜 나는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았을까. 나도 행복하고 싶은데.
그 후로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힘들때면 청포도 사탕을 사먹었다. 왠지 그렇게 하면 다운이가 나타나서 예전처럼 내 고민을 들어줄것만 같았다. 물론 그럴일은 없었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번화한 쪽으로 이사를 갔고, 다운이의 실종후 어색해진 사이가 되어버린 아름이와는 아예 연락이 끊겨버렸다.
그 후 물론, 나는 수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다운이같은 녀석은 한명도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땐 처음으로 아빠에게 반항했었다. 그리곤 손이 아니라 매로 맞았는데, 도중에 손으로 그 매를 잡아서 부러뜨려버렸다. 어렸을때부터 성장이 빨랐던 나는 그 당시 아빠보다 7cm 더 커진 185cm였다. 나는 아빠를 내려다보며 여태 생각해왔던 말을 한꺼번에 내뱉곤 집을 뛰쳐나왔다. 딱 한번 문을 쾅 닫으며 뒤를 봤는데, 그의 얼굴은 역시나, 끝까지 날 깔보는 눈초리였다.
그가 내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다름없는 “니 형 발치라도 따라가봐라” 였다. 내 생일은 잊었어도 형의 생일엔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와선 환히 웃곤 했던 그. 내가 중학생이었을때 형은 유학을 가서 프린스턴에 붙었고, 그날 나는 며칠 밤을 새서 간신히 받아온 90점짜리 시험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부모싸인을 받아오라고 잠시 돌려줬던 시험이었기에, 다음날 나는 그 과목 선생에게 몇대 맞았다. 그 선생의 매는 아프기로 학교에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날만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집을 뛰쳐나간뒤로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찾으려고 했으면 충분히 찾을수 있었겠지만, 집에서는 날 찾지 않았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형의 반강제적인 태도에 못 이겨 자취하고 있던 그 선배의 집에서 머무르며 잔일을 도와주고 학교를 다녔고, 알바 두개를 뛰었다. 자연스레 성적은 더 떨어졌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까지 신경쓰진 않았다. 대학교에 가지 못한채 고졸로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끝났지만, 그것 역시 별달리 생각하진 않았다. 선배는 요즘 세상에 대졸 못하면 어떡할거냐고, 평생 알바만 뛸거냐고 재촉했지만, 난 다 괜찮다고 여겨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제 야간 편의점 알바 도중이었다. 편의점으로 한 남자와, 그 남자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하고 있는 한 여자가 걸어들어왔다. 졸고 있다가 눈을 반쯤 떠보니 여자는 입은건지 안 입은건지 모를 옷을 입고선 딱 봐도 비싸보이는 정장을 입은 남자에게 콧소리로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잠깐 편의점을 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의 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운이 없는 놈이었다. 우연도 이런 빌어먹을 악연이 있나.
우리 둘 사이에는 한없는 침묵이 흘렀다. 상황을 모르는 그 여자만 옆에서 자기야, 뭐야? 저 사람 누구야? 자기랑 엄청 닮았다, 자기가 물론 훨씬 더 잘생겼지만, 이라며 아양을 떨고 있었다. 형. 나의 형. 내가 맞고 있을때 자신의 방문을 빼꼼히 열어 알듯 모를듯한 비웃음을 머금었던 나의 잘난 형.
우리의 만남은 수많은 형의 비웃음, 옆에 있던 여자의 끊임없는 콧소리, 그리고 내가 형을 때리면서 울려퍼지던 그 여자의 높은 소프라노 비명으로 끝났다. 삭힐수 없는 분노에 편의점을 뛰쳐나오는 바람에 물론 몇시간 후에 짤렸고.
그것은 내게 알람같은 역할이었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되어버린 내게, 너는 이런 놈이다, 라고 각인시키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있는 집만 해도 그렇다. 혼자서는 방을 구할 능력도 없고, 선배 집에 몇년째 눌러붙어 앉아있지만, 말 그대로 나는 선배에게 누룽지같은 존재였다. 처음엔 좀 괜찮았다가, 그것만 보이면 짜증나기 시작하는.
선배의 여자친구가 나 때문에 그와 동거하지 못한다는것쯤, 그리고 가운데에 껴서 난처해하는 선배에게 날 내쫓으라며 독촉하고 있다는것쯤은 새로운 사실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어쩔수없다는 핑계하에,선배의 괜찮다는 말을 어설픈 확신으로 삼아 그대로 있었다. 언제나 선배는 웃었지만, 선배에겐 그런말을 했다. 선배, 걱정마세요. 좀있으면 다운이의 천국으로 갈테니까. 그것은 하도 입에 박힌말이라, 선배도 처음엔 반쯤 비웃던 다운이의 사탕과, 내가 언제나 지니고있는 보석상자에 대해 뭐라고 하진 않았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모든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된다. 행복은 하지 못하더라도, 불행하진 않을수있다.
정리할것은 얼마 없었다. 어차피 있는것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씁쓸한건 어쩔수 없었다. 얼마 없는, 그것도 이젠 예전만큼조차도 친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웃긴 아이디어였다. 전화를 걸어서 뭐라고 할텐가. 오랜만이야,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지만 난 이제 죽을 목숨이라서. 잘있어, 라고 할텐가?
갈색머리 알바생 때문에 샀던 보석상자 (그것은 내가 집을 나온후 스스로를 위해 사본 가장 비싼 물건이었다). 그 안에는 다운이가 준 사탕이 들어있었다. 어렸을때 알던 친구지만, 그녀석만큼 성숙한 녀석은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 고민을 들어주던 친구도 그 녀석 단 하나였다.
나는 중학생이 될때까지 그가 돌아올거라고 믿었다. 어떻게보자면, 그는 가출을 한것이었다. 누가 쳐들어온 흔적도, 무언가 불법의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도 하나 없었으니까. 그 당시 초등학생이 가출을 해서 하루만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웃기지만, 어차피 그녀석은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나는 무의식중에 그가 그의 천국을 찾았기 때문에 오지 않는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까지 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는 돌아와서 나를 그의 천국으로 데려가줄거라는, 백마탄 왕자만큼이나 어이없는 생각도 몇번인가 했었다.
물론 그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사탕을 간직했다. 그게 정말 엘도라도에 갈수 있는 약도라도 되는것마냥.
수면제 병을 열었다. 다른 자살방법도 많겠지만, 끝까지 겁쟁이인 나는 이것이 가장 성공확률이 적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별도리 없이 이것을 선택해야만했다. 다만, 꼴에 용기있는 짓이랍시고 몇병을 모아두긴 했다. 한병 가지곤 택도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옆에 놓인 생수병을 벗삼아 나는 수면제를 한웅큼씩 넣기 시작했다. 순간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수면제가 더 맛있었더라면 좋았을것을.
어느새 나는 몽롱해졌다. 그건 정말이지 내 인생만큼이나 별볼일 없는 결과였다. 극적이지도 않고, 어색하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타이밍으로. 어찌되었든 나는 잠에 빠졌다. 깊은 잠이든, 아니면 죽음이든 알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이 지긋지긋한 인생에서의 휴식임은 분명했기에 나는 기뻤다. 내 손에는 보석상자가 꼭 쥐어져있었다. 지금 내 글씨보다도 더 예쁜, 어린 다운이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는 여전했다. 승우를 위한 약도.
나는 눈을 떴다. 천장을 보며 내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한숨을 내쉬는것이었다. 난 성공하지 못한것이 분명했다. 내가 인생에서 했던 모든 일처럼. 난 죽는것조차 성공하지 못한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기쁜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다. 뭐 제대로 할줄아는것도 없었으면서 은근히 살고 싶었던가보다.
왠지 모를 행복이 밀려왔다. 살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체할수없이 무언가가 가뿐했다. 걱정따위는 이제 하지 않아도 될것같은 책임감 없는 생각들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이런저런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죽다 살아나서 몽롱했던가보다). 이건 선배집의 천장도, 병원의 하얀 천장도 아니었다. 야광별이 잔뜩 붙여져있는것을 제외하고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연예인들 방이나 어디 화보에서나 볼수 있던 이국적인 분위기의 가구들이 잔뜩 배치되어있는 방이었다.
나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바로 옆에는 동그란 창문이 있었는데, 밖은 어두침침한듯 하면서도 밝았다. 거기서로부터 들어오는, 왠지 모를 보라색이라고 느껴지는 빛은 방을 은은하게 달빛처럼 비춰주고 있었다. 밖은 하얀 눈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여기서 나는 잠깐 주춤해야만했다. 지금은 분명 가을이었다. 10월에 눈이 온다는건 아무래도 무리다. 요새 세상이 미쳐가서 날씨도 제정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 정도는 아닌것이다. 패닉이 이쯤이면 몰려와야될텐데, 이상하게 아직도 나는 행복에 젖어있었다. 세뇌에 의한 행복이 아니라,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았던 그 어렸던 시절에, 그저 즐거워하던 그런 행복. 커가면서 서서히 잊어가던 그런 행복이, 나를 감쌌다.
그제서야 나는 이 집이 예전에 내가 하던 플래시게임인 ‘악몽’같은 분위기 (그러나 그런 종류의 위협감은 들지 않았다)를 가진, 가슴께까지 올 정도로 자그마한 나무들이 집을 둘러싸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특이하게도 고사리같이 꼬이고 꼬인 나무들로 이루어진 울타리-어디선가 낯이 익다고 생각되었다. 그 울타리 너머로 저 멀리서, 무언가 자그마한 크기에 비해 인상깊은 양의 빛을 뿜어내는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집쪽으로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빛을 뿜어내는것이 날개달린 고양이라는것을 알았다. 순전히 빛으로만 이루어진듯한 날개를 가진 은빛의 고양이 (몸 자체에서도 은근한 빛이 나오고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그제서야 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 있었다.
그것은 내 유일한 친구가 내게 약속했던 바로 그 천국이었다. 다운이의 천국.
두번의 노크가 내 등뒤의 고풍스런 문 너머로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가 들어왔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인 그가,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그 어떤 때보다도 더 행복해보이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다운이였다. 내가 정확한 이유도 없이 내 구세주처럼 언제나 날 구해주길 바랬던 그 아이. 이젠 나보다 확연하게 작아보이는 아이.
“오랜만이다, 승우야.” 그가 활짝 웃었다. 언제나 웃더라도 눈빛에 가득 고여있는 알수없는 ‘가라앉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행복을 이 곳에서 왠지 모르게 느끼더라도, 이 행복이 억지로 짜여진것은 아니었기에, 이성이 사라진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여기있을수 있는지, 어떻게 다운이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내게 대화할수 있는지 알수 없었다.
“아아, 여긴 내 천국이야. 네게 줄 약도를 찾고나서 떠난것뿐이야. 그 사탕을 찾기 얼마 전에도 난 벌써 찾아가는길을 알고 있었는걸.” 그가 말했다.
“어떻게? 그럼, 우리 둘다 죽은거야?”
“죽는다는건 그냥 상태가 달라지는것뿐이야. 물이 얼음이 되어도 물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잖아.”
이 대화에는 더 이상 진척이 없을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답답하진 않았다. 사실 이렇게 행복한데, 뭐 이렇게되나 저렇게되나 뭐 어떨까 싶었다.
“기다렸어.” 한참 후에 내가 말했다.
“응, 알아. 하지만 여기로 오는 방법은 스스로 찾아내야만 이곳에 영원히 머물수있거든. 그래서 데리러가지 못했어.”
“난 찾아오지 않았어, 그냥 일어나니까 여기였는데?”
“일시적인거야. 넌 조금있으면 다시 돌아가야해.”
“다시 돌아간다고? 그럴리가 없어. 나 수면제 정말 많이 먹었어.”
돌아가기가 싫었다. 그 알수없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현실로. 행복할수있는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여긴 꼭 죽어야만 올수 있는 곳은 아니야. 내가 준 약도를 보고 찾아와, 승우야. 그럼 여기에 머물수있어.”
다운이는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은색 해가 달려있는 목걸이를 풀어 내게 걸어주었다. 꽤 무거울거라고 생각했는데, 걸어보니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약도만 보고 못찾겠으면, 이 해가 널 도와줄거야. 이곳엔 해가 두개야. 서로 공존하면서 이 곳을 밝히는 녀석들이야.” 그가 뜸을 잠시 들였다.
“우리처럼.”
나는 은색해를 잠시 만졌다. 금속같아보였음에도, 놀라울정도의 온기가 느껴졌다. 편안한 온기.
“그 중에 하나는, 이녀석이고 (그가 이젠 내 목에 걸려있는 해를 가리켰다) 나머지는 저 녀석이지.”
그가 창문 너머의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엔 물결 사이에 떠있는 해가 있었다.
“둘은 꼭 같이 있지 않으면 부족함을 느껴. 그래서 스스로를 끌어당기지. 니가 여기에 지금 잠시나마 올수있었던건 그거야. 넌 날 잊지 않았으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더 작게 느껴졌다.
“죽음은 끝이 아니야. 그 무엇도 끝이 아니야. 서로 남녀간의 사랑이든, 우정이든,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지간에 사랑했었던 기억만 간직할수 있다면.”
다운이가 그 후에 뭐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점점 희미해져 나중엔 들리지 않았다. 말도 못하던 시절 엄마에게 안겨, 한없는 보호와 사랑을 느꼈을떄처럼 편안함을 느끼며 다운이의 천국은 흐려져갔다.
눈을 떴을때 처음으로 본건 선배의 얼굴이었다. 그는 병원침대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역시, 결국에 나는 죽었다 살아난것이다. 다운이의 천국에서 느낄수 있었던 행복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씁쓸함만이 가득 밀려오는 와중에서, 혹시 그 천국을 방문한것이 꿈은 아니었는지 벌써부터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반 죽은 상태였으니 그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하지만 그것은 너무 생생했는데 ..
문득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목걸이다! 목걸이가 있었다. 무게가 없어서 느끼지 못했을뿐, 다운이가 준 해는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있었다.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링겔을 가만히 뽑고 일어났다. 어지러웠지만, 반 죽은상태로 잠들어있던게 몇일이 지났었는지 (이것은 선배의 관리되지 못한 수염의 길이로 알수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나를 발견해 병원에 데려온후 아침마다 면도를 하지 못했던것같다. 나는 선배가 면도하지 않은 모습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니까),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내가 자살시도 직전 꼭 쥐고 있던 물건이라 정신없는 상태에 다들 나와 함께 이송해왔던건지, 보석상자는 선배의 발치에 놓여있었다. 나는 조용히 보석상자를 집어들고 뚜껑을 열었다. 작은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선배는 피곤했었던건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청포도사탕을 꺼내고 상자를 닫았다.
이 사탕은 유난히 금이 많았는데, 그 금들이 이제는 다운이의 천국에 있던 하늘에서 빛을 뿜어내던 그 해의 색처럼, 달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목걸이의 영향임이 분명하리라..그제서야 나는 다운이가 왜 그 사탕을 주었는지 알수있었다. 그 사탕에 있던 자잘한 금들까지, 그것은 말 그대로 약도였다. 하도 그 사탕을 보아서 이젠 눈을 감고도 가장 작은 금까지 외울수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렸을적 사회시간에 이런 말이 나왔었다. 예전 마법을 믿던 시절에는, 신의 영역도 그 무엇도 다 멀리 떨어진곳에 있을뿐이지, 실제로 갈수있는 곳으로 여겼었다고. 다운이의 천국은 그런곳중에 하나였다. 현실도 아니고 가상도 아닌 그런곳. 찾아갈 의지만 있다면, 행복을 향해 찾아갈수 있는 그런곳. 그곳의 키는 믿음과 소중했던 사람의 기억.
나는 병실을 숨죽여 나왔다. 나는 이제, 이미 다 외웠던 그 자그마한 금들이 천국을 찾아가는 길이라는것을 알았으니, 다운이의 천국을 스스로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만 느낄수있었던 그 행복을, 내 유일한 친구를, 내 존재 자체로 받아줄수 있었던 그 녀석을 찾아갈것이다.
Witching hour처럼,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지 않는 그 새벽녘. 운이 좋았던건지 나는 병원을 나가면서도 제지받지 않았다. 행복을 찾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맘이 가뿐하다. 왠지 모르게 10월의 날씨에 얇은 병원복 하나를 걸치고 있는데도, 포근했다. 목걸이에서 나오는 온기덕분인듯했다. 행복의 작은 조각.
나는 몇걸음을 걷다가, 문득 돌아서서 다시 병실로 향했다. 하마터면 이 나쁜 기억력 때문에 중요한것을 잊을뻔했다. 선배는 아직도 잠들어있었다. 여간 피곤한게 아니었던것같다. 선배는 직장까지 빠지고 내 곁을 지켜주었던듯했다. 내가 뭐라고..나는 선배를 위해 해준것이 단 하나도 없었는데, 고등학교때부터 나를 지켜주었던 선배. 그는 행복할 권리가 있었다.
나는 침대 옆의 서랍장을 열어 펜을 꺼냈다. 그리곤 보석상자를 열어 사탕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을 꺼냈다. ‘승우를 위한 약도’라고 적혀져있는 사이드를 뒤집어, 아무것도 써있지 않은 뒷면에 적어넣었다.
‘호성선배를 위한 약도’
그리고 그 아래엔, 아주 작은 글씨로,
‘기억으로 열수있는 행복. 천국은 죽음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닌, 상태의 변화’.
그리곤 그것을 포도사탕옆에 가지런히 놓은채 보석상자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단조로운 멜로디가 선배의 자장가처럼 흘러나오는 와중에, 나는 다시 병실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나는 이제 죽던지 실종되던지, 없어지는것은 아닐테다.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는 다운이의 천국의 빛과도 비슷한, 그 편안하도록 어슴프레한 새벽빛으로 출발했다. 내가 언제나 바라던 그 행복을 향해서.
첫댓글 굉장히.. 인상적인 글이네요 ^^
좋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개인 홈피에 퍼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붉무집주소와 작가아이디만 끝에 표시해주시면 물론 괜찮습니다 -
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왠지 찡~하네요 ^^
와우~ 정말 좋아요!! 앞으로도 글 자주 봤으면 좋겠어요^^
마음이 편안해 지는 글이네요..너무 잘봤습니다~^^
정말 재밌었어요! 개인 소장 해도 될까요??
하셔도되요 -
와~~~~ 꼭 환상동화를 본것같아요 잘 읽고갑니다
너무 잘읽었어요!~~!!!
너무 잘봤어요..너무 인상적이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