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름답고 쓸쓸한 창녕 관룡사의 용선대 부처님.
어떤 장소에 가면 문득 떠오르는 글이 있고, 그 글을 가슴속에서 꺼내 가만히 읊조리면 문득 지나간 것들이 활동사진처럼 펼치며 지나갈 때가 있다.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몇 소절이 떠오르면서 문득 외롭고 쓸쓸해진다. 그리고 마음이 한없이 넓혀지는 곳이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관룡사의 용선대 일대다.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는 본래 창녕군 창락면의 지역으로 옥천동이라 하였다. 옥천마을을 지나 관룡사 가는 길옆에 고려 말, 역사의 중심에 섰던 신돈(辛旽)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27권 창녕현편 불우조 옥천사란에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 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임을 당하자 절도 폐사 되었으니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도 전에 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문에 헐어버렸다”
역사 속에 요승으로 기록된 신돈은 이곳 옥천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영산(영산)이고 승명은 편조 자는 요공이며 왕이 내린 법호는 청한거사였다.
당시 고려는 국내외적으로 어지러웠다. 공민왕은 새로운 인물을 불러들여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진작 시키려 하던 차에 신돈을 만났다. 그는 “도를 얻고 욕심이 없으며 또 천미하여 친당이 없으니 대사에게 맡기면 반드시 뜻대로 행하여 거리낌이 없으리라” 하고 생각하여 등용하기로 하였다. 신돈은 아홉 번을 찾아온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조정에 들어왔고, 왕의 사부(왕의 고문직)가 되어 오랜 폐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때 신돈이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신돈은「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면서 포고문을 전국에 발표하고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 주었고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켰다.
“성인이 나타났다”라는 농민들과 빈민들의 찬양의 뒤편에는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기득권 세력과 공민왕의 배반으로 1371년 7월 신돈은 수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때의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일어났던 특이한 정치 상황이었고 신돈의 집권 기간은 6년이었다. 신돈의 개혁사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만큼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과 민중고의 해결에 관심을 둔 사람이 얼마나 있었으며, 신돈에 비길 만큼 중상구제를 위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실제로 시행에 옮긴 권력가가 있었던가?
그의 등장과 그의 실패 이후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등 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신진 문인 세력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신돈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이 우리 성씨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때 신돈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아직까지도 신돈은 역사 속에서 악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가 태어난 옥천사터는 향토문화재 5호로 지정되어 그 당시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빈대절터라고 알려진 옥천사 터에서 조금 오르면 나타나는 절이 관룡사다. 그곳에서 관룡산 자락의 산길을 15분 쯤 오르다 보면 나타나는 곳이 용선대다.
이 나라 산천을 수십여 년 동안 떠돌면서 바라본 풍경 중 숨이 멎을 만큼 감동을 받아 한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바라보았고 가슴 속 깊숙이 새겨진 곳은 어디일까?
통영의 장군 봉에서 바라본 한려수도 일대, 북한의 백두산 자락의 삼지연, 합천 황매산 자락의 모산재에서 바라본 영암사지 일대, 금강산에서 바라본 상팔담 부근, 북한 묘향산의 김정일 선물관에서 바라본 묘향산 등이다.
그처럼 가슴 깊이 각인된 수많은 절경 중에서, 나의 마음에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풍경중 한 곳이 창녕의 관룡산 자락의 용선대 부근이다.
1996년 처음 그곳에 가서 받은 느낌을 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관룡사 요사채의 담 길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20여분쯤 오르면 커다란 암벽 위에 부처님 한 분이 날렵하게 앉아있다. 대좌의 높이가 1.17㎡에 불상의 높이가 1.81㎡인 이 석불좌상은 높은 팔각연화대좌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앉아 있는데 어느 때 사라졌는지 광배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석불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이고 직선에 가까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띤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우리 일행은 옛사람들의 지혜와 부처에 대한 경이를 안고 배 바위에 올랐다.”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앉아 있는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보물295호)아래 털썩 주저앉아 거대한 분화구처럼 펼쳐진 세상을 바라다본다. 관룡산을 병풍 삼아 작은 산들이 물결치듯 펼쳐나가고 영산의 진산 영취산을 돌아 계성, 옥천의 자그마한 마을들이 점점이 나타난다.
배바위에서 화왕산 가는 길로 조금 오르면 바위무리가 있고, 그 바위에서 바라보는 부처님, 반야용선이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간다는 상상의 배를 말하는 것으로 용선대의 부처님이 바로 저 모습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나라 부처님 중에 이보다 더 외롭게 혹은 드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없을 것이며, 이 용성대의 부처님보다 더 평화로운 부처님도 없을 것이다.
석굴암의 본존불이 굴속에 갇혀 있는 데 반해 용선대의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것처럼 온 세상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들 인간은 어떤가?
매일 매순간 이미 지나가버린 어제와 오지 않는 내일 때문에 지금, 곧 현재를 못살면서 마음이 편할 날이 없이 살고 있으니,
욕심을 버리면 극락이 바로 근처에 있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실천이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그 욕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먼 데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부처님이 다음과 같은 설법을 들려주는 듯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발판 삼아 생사를 벗어나고, 고해를 벗어나고, 두려움을 벗어나는 것을 궁극의 돌아갈 곳으로 삼아야 하며, 세상의 모든 것이 공空이어서 우리가 알아낼 생사生死가 없다는 것을 앎으로써 생사고해를 벗어나 모든 고액苦厄에서 초탈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용선대와 관룡사 일원을 문화재위원으로 일할 때 명승으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며칠 후면 명승으로 지정된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어놀고, 어서 가서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 부처님을 만나고 싶다.
2023년 1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