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퍼온글입니다
영화로 보는 세계 경제사
美산업화 출발점 된 나폴레옹 전쟁
19세기 자본주의 胎動 불러일으킨 보나파르트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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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얼굴을 보라. 이 시선을 마주 보라. 그러면 그 눈 속에서 장중함, 꿈, 의지, 왕성한 활력, 확고함을 발견할 것이다. 반듯한 용모, 굳건한 턱, 굳게 다문 육감적인 입. 이 사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의 운명의 세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얼굴에서 풍기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공전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장편소설 ‘나폴레옹’에서 작가 막스 갈로는 젊은 나폴레옹을 이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의 초상화와 그의 삶을 돌이켜 보면 별 과장이 없는 듯하다. 많은 영웅이 있었어도 그만큼 극적인 삶은 드물다. 한 편의 드라마,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드라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년생이니 불과 25세의 나이에 이탈리아 전선의 여단장으로 프랑스군을 호령했다. 29세 때인 1799년 11월에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프랑스 최고 권력인 제1통령의 자리를 꿰찼고 1804년 34세 때 황제에 등극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인근 국가들을 차례로 복속하며 40세가 되기 전 전유럽을 평정해 형제 자매에게 영토를 나눠줬다. 가위 프랑스 역사에서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을 만하다. 나폴레옹에 대한 프랑스의 자존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프랑스 영화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영화는 어림잡아 20여 편.
그러나 비디오로 출시된 것은 샤샤 기트리 감독이 만든 1955년작 하나 뿐이다. 기트리 감독은 자유분방한 나라 프랑스에서도 기이하게 여겨지는 인물이다. 1885년 프랑스 연극의 스타 루시앵 기트리의 아들로 태어나 10대 초 이미 연극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17세 때는 뛰어난 희곡을 써 ‘천재’란 평가를 받기도 했던 그는 이후 1백20여편의 희곡과 영화 시나리오를 써낸 작가로, 또 영화를 만들어 내는 감독 그리고 배우로 활약했다. 그는 또 네 명의 아름다운 여배우를 아내로 맞아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나폴레옹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그는 자신의 많은 시간을 영화로, 연극으로 그를 그리는데 할애했다.
내우외환의 위기에서 영웅 탄생
나폴레옹은 확실히 ‘시대가 만든 영웅’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전형적인 내우외환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내적으로는 혁명 이후의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만 갔고 외적으로는 황제를 없애고 공화정을 실시한 프랑스를 용서할 수 없다는 주변국들의 위협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루이 이전의 구(舊)체제로 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국민들의 염원은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이었고 나폴레옹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강력한 황제권을 발동해 국내 혼란을 잠재웠고 통합된 국가의 힘을 한 곳에 모아 외세를 이겨냈기 때문이다.
역사는 1797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정복에 나선 후 1815년 워털루 싸움에서 패할 때까지의 19년 동안 벌어진, 프랑스와 유럽 전체의 싸움을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1815년을 비로소 19세기가 시작된 해로 여긴다. 그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자본주의 세계는 이전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국의 선봉장이었던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19세기 단일 패권 국가로 등장했다. 무려 1백50년 동안 계속된 프랑스와의 패권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 영국은 그야말로 세계 최강이었다. ‘불간섭주의’와 ‘자유무역’의 기치를 내걸고 19세기 자본주의 세계를 이끌었던 데에는 이같은 강국의 위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일 강대국’으로 불리는 현재의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반면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10여년 후 다시 혼란에 빠져 들었다. 특히 봉건귀족과의 연합을 통해 구제도의 부활을 꾀했던 샤를 10세는 ‘자유’를 갈구했던 부르주아의 최대 ‘적’이었다. 부르주아는 다시 한 번 혁명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1830년 7월 혁명으로 반동정치는 막을 내린다. 프랑스 산업이 영국에 미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처럼 계속된 혼란에서 찾고 있다.
전쟁은 또 두 개의 신흥강국을 만들어 냈다. 미국과 프로이센이었다. 미국의 산업화는 부분적으로 나폴레옹전쟁의 부산물. 나폴레옹전쟁 초기 무역이 없어진 유럽과 영국 사이를 오가며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이 돈이 나폴레옹 전쟁 후 미국 산업혁명의 기반이 된 것은 물론이다. 장차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될 프로이센을 보자.
비인회의에 참여할 때까지 프로이센은 본질적으로 구제도를 탈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비인회의에서 섹소니 지역을 얻은 프로이센은 인구나 영토면에서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프로이센을 주축으로 1834년 맺어진 관세동맹은 20여년 후 이뤄진 독일통일의 출발점이었다.
기트리 감독의 역사 해석은 ‘혼란’
배우로 활약하던 기트리 감독은 나폴레옹 시대를 좋아했고 이 시대의 많은 인물을 직접 배우로 연기했다. ‘나폴레옹’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탈레랑. 나폴레옹시대 프랑스를 살린 또 하나의 영웅이었던 그의 입을 통해 나폴레옹의 삶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탈레랑의 응접실에서 시작된다. 젊은 손님을 맞아 담소를 나누던 그에게 한 장의 쪽지가 전달된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제야 얘기할 때가 됐어-.” 나폴레옹 사망 소식을 접하고는 이제 할 말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였다.
나폴레옹의 공식 사망일은 1821년 5월5일. 67세의 탈레랑은 정치·외교면에서 노련함을 한껏 발휘할 때다. 그는 마치 손주들에게 옛날 얘기를 해 주는 할아버지와 같은 여유로움과 따뜻함으로 이제 막 죽음을 맞은 한 영웅을 회고한다. 영화는 아주 평이하고 단조롭게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문제는 그의 역사 해석이다. 탈레랑의 입을 통해 기트리 감독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역사적 사실에 가장 충실하게 접근하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영웅과 신화의 창출을 노렸던 것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영화들처럼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같은 ‘영웅 만들기’에 일조한 기법과 역사 각색이 많이 보인다. 나폴레옹의 ‘신화’를 깎아먹을 수 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이 생략됐고 그의 영웅적 행동이 돋보이는 장면을 길게 늘렸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특히 평범한 학생이었던 어린 시절을 미화한 것은 대표적인 ‘신화 만들기’.
그러나 만일 기트리 감독의 의도가 그것이었다면 영화는 실패다. ‘신화’를 훨씬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장면이 어리숙하게 처리됐는가 하면 ‘신화’를 깎아먹는 장면(심지어 불필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들이 중간중간 고개를 쳐들고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의 영웅담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황제 취임식 때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머리에 올려 놓았던, 명장면이 생략됐다. 근대법을 창출한 그의 업적도 그리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는 혼란스러운 느낌을 준다. 역사 왜곡을 통해 ‘영웅’으로 만들다가 불쑥 그 이미지를 추락시켜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