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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about 10 am when I completed inputting address of Presidio in to my minivan GPS after searching it on my cell phone. I wish the information I found on my smartphone could be transferred to the car GPS system as an input wirelessly.
제 똑전에서 프뤠시디오의 대한 정보를 찾아 제 미니봰 위성운전안내기에 주소를 집어 넣은 것이 10시쯤 되었습니다. 이 똑전에서 찾은 정보가 차 운전안내기에 자동으로 입력이 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Driving across the new bay bridge was noticed from more lanes available one way and the metal structure remains as old skeletons.
새 만교를 운전하여 만을 건너는 동안 한쪽으로 주행선이 더 많아진 것과 옛 교량이옆에 괴물처럼 남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I premade a right turn that made me to make a left turn to get to the street the GPS instruction gave me.
위성운전안내기에서 주는 정보를 보고서도 오른 쪽으로 일찍 길을 걲은 것 때문에 왼쪽으로 한 번 돌아 그 안내해 주는 길로 가야했습니다.
When turned to left, I noticed a huge old building which I saw it before. I shouted, “It is the City Hall of San Francisco.” When I first time saw this building with my wife and dad in 2009, I thought it was a colonial governor’s building. Turned out it was the city hall.
왼쪽으로 돌자, 지난 번에 본 크고 오래된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이건 샌 프롼씨스코 시청건물이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2009년 아내와 아버님과 같이 본 이 건물을 기억합니다. 저는 이것이 식민지 시절 총독 건물인 줄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청이었습니다.
A vast area in the front of the city hall where a lot of homeless people and a whole lot more tourists loams, there were fences all over around the lawn areas for construction(?) or protection(?), except the middle section leading to the city hall.
시청 앞 큰 광장, 시청문 앞으로 연결되는 중앙 부분만 빼고 잔디 깔린 곳을 공사인지 잔디보호 때문인지 철망으로 둘러 막아 놨는 데, 거기에는 여럿의 노숙인이 자리잡고 있었고 많은 관광객이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My wife and dad went out of the van and started to take pictures of the coarse marble surface building which has gold plated tops, tips and edges of high structures. But I gazed through metal wire fences for the homeless people crouched in the middle section away from the building.
집사람과 아버님이 차에서 내려 그 거친 대리석 벽을 가진 건물 사진을 찍었는 데 그 건물은 둥근 탑을 머리에 이고 추녀 모서리 부분에 금색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철조망 사이로 중앙에 모여있는 노숙자들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I went across between fenced walls which became a walkway laterally from the building front to treat homeless’.
그런 후 건물 앞면과 나란히 난 철조망 사잇길로 가 중앙에 모여있는 노숙자를 치료하려고 했습니다.
There, I openly treated two homeless people while some tourists watched me with wonders. One who said he had occasional cramping on his left calf, and the other who had both shoulder blades pains. The former was Samoan looking and the latter was young chines man respectively. Both were well educated and very intelligent.
거기서 몇몇 관광객들이 신기해 쳐다보는 것을 보며 그 들 앞에서 대놓고 두 명의 노숙 인을 치료했습니다. 한 명은 가끔 왼 종아리에 쥐나 난다고 했고 다른 하나는 양 어깨 쭉지가 아픈 이였습니다. 전 자는 사모아 인처럼 생겼고 후 자는 중국계 젊은이였는 데, 둘 다 굉장히 교육을 많이 받았고 똑똑했습니다.
People cannot understand why these intellectuals had ended on the street living that needs to be educated. It is the system of capitalism that you are in and live under your means you would be OK but if you off tract once from it’s way, you end on the street. Think about it! They have to survive from others! You and I. So they are gathered around high foot traffic area.
보통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 왜 길에서 사는 지에 대해 교육을 좀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살면서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다 잘 따르면 그럭저럭 살 수 있지만 한 번이라도 거기서 떨어지면 길로 나서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존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도움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서 살아야 합니다.
Next stop was at Presidio. We never visited this place before although we came to this city many times in the past.
다음 장소는 프뤠시디오 였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에 많이 와 봤지만 과거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The Presidio of San Francisco (originally, El Presidio Real de San Francisco or The Royal Fortress of Saint Francis) is a park and former military base on the northern tip of the San Francisco Peninsula in San Francisco, California, and is part of the Golden Gate National Recreation Area.
샌 프롼씨스코 프뤠시디오는 (원래 부르기는 엘 프뤠시디오 뤼알 데 샌 프롼씨스코 또는 쎄인트 프뢘씨스 왕정 요새) 현재 공원이지만 예전에는 군 기지였으며 반도 북쪽 끝 금문교와 같이 연방 공원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It had been a fortified location since September 17, 1776, when New Spain established it to gain a foothold on Alta California and the San Francisco Bay. It passed to Mexico, which in turn passed it to the United States in 1848.
이곳은 1776년 9월 17일 스페인 제국이 알타 캘리폻니아와 샌 프롼씨스코에 첫 발을 들이고 요새로 삼았습니다. 이 곳은 멕시코에 넘겨졌다가 1848년 미국이 총성없는 전쟁으로 이곳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As part of a 1989 military reduction program under the Base Realignment and Closure (BRAC) process, Congress voted to end the Presidio's status as an active military installation of the U.S. Army. On October 1, 1994, it was transferred to the National Park Service, ending 219 years of military use and beginning its next phase of mixed commercial and public use. In 1996, the United States Congress created the Presidio Trust to oversee and manage the interior 80% of the park's lands, with the National Park Service managing the coastal 20%. In a first-of-its-kind structure, Congress mandated that the Presidio Trust make the Presidio financially self-sufficient by 2013, which it achieved 8 years earlier.
1989년 (BRAC)브뢕이라고 불리우는 군기지 재편 폐쇄 정책으로 의회는 이 프뤠시디오 미 육군 기지 문을 닫도록 투표했습니다. 그리고 1994년 10월1일자로 이 기지는 연방공원국으로 넘겨져 219년 동안의 군기지 사용을 끝내고 공공장소와 상업용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1996년 의회는 프뢔시디오 재단을 만들어 80퍼센트의 내륙쪽 면적을 관리하게 하고 바닷가 쪽 20퍼센트는 연방공원국이 관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누어 관리하게 한 것은 의회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으로 프뤠시디오 재단이 2013년까지 재정자립을 요구하였는 데, 8년만인 2004년 재단은 재정자립을 이룩했습니다.
The park is characterized by many wooded areas, hills, and scenic vistas overlooking the Golden Gate Bridge, San Francisco Bay and the Pacific Ocean. It was recognized as a California Historical Landmark in 1933 and as a National Historic Landmark in 1962.
이 공원은 삼림숲과 언덕, 금문교와 샌프만 그리고 태평양 경치 보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1933년에 벌써 캘리폻니아 역사적지가 되었으며 1962년에는 연방 역사적지가 되었습니다. “
역자주: 그리고 이곳에는 미군 연방묘지가 있어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때 전사하였거나 참전 후 나이 들어 사망한 예비군과 그 부인들이 묻혀 있습니다. 또한 박물관과 전시회를 통해 기금을 마련하기 때문에 공원 입장료는 무료지만 전시회나 박물관은 꽤 비싼 입장료를 받습니다. 월트디즈니 박물관이 전시를 하는 데, 한 성인당 입장료가 $20이었습니다. 너무 비싸 바깥 구경만 했습니다. )
Coming out of Presidio, we decided to go to Lombard Street where it has world famous Winding Street. The traffic was heavy as we followed the GPS instruction. So I veered off to go to an adjacent street to the top of the street where I could drop my family.
프뤠시디오를 나와 꼬부랑 길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롬밣드 길로 가기로 했습니다. 위성차량안내를 따르자나 그 길은 차량이 너무 밀렸습니다. 그래서 옆으로 빠져 다른 길로 그 꼭대기 길에 올라가 식구들을 내려 놨습니다.
Lombard Street is an east–west street in San Francisco, California. It is famous for having a steep, one-block section that consists of eight tight hairpin turns. The street was named after Lombard Street in Philadelphia by San Francisco surveyor Jasper O'Farrell.[1]
롬밣드 스트륏은 동-서로 난 길로, 그 중 한 불럭이 가파르고 경사가 심한 여덟번을 꼬불꼬불 꺽게 되어있습니다. 이 길의 이름은 샌 프롼씨스코 땅 측량사 재스펋 오퐈뤨이 퓔라델퓌아 시에 있는 롬밣드 스트륏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The street design, first suggested by property owner Carl Henry and completed in 1922, was intended to reduce the hill's natural 27% grade, which was too steep for most vehicles. It is also a hazard to pedestrians, who are accustomed to 4.86° inclines because of wheel chair navigability concerns. The crooked block is perhaps 600 feet (180 m) long (412.5 feet (125.7 m) straight line), is one-way (downhill) and is paved with red bricks. The sign at the top recommends 5 mph (8 km/h).
이 길의 도안은 칼 헨뤼 건물 소유주의 제안으로 생겨 1922년에 만들어 졌는 데, 모든 차에 무리가 되는 27% 언덕 자연 경사율을 줄이려 한 것입니다. 그 경사는 또한 걷는 사람에게 위험했으며 바퀴의자를 탄 사람들을 고려해 4.86%의 경사에 익숙해 있는 걸름걸이를 고려한 것입니다. 이 꼬부랑길 블럭은 약600 ft (180 m) 길이이며 직거리는 412.5 ft (125.7 m) 인 데, 빨간 벽돌로 포장되어 있고 아래로만 가는 한쪽길입니다. 위에 있는 진입구의 속도판은 5 mph (8 Km/h)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In 1999 a 'Crooked Street Task Force' tried to solve traffic problems around the winding section of Lombard Street. In 2001 the task force decided it would not be legal to permanently close the block to vehicular traffic. Instead, it decided to institute a summer parking ban in the area, to bar eastbound traffic on major holidays, and to increase fines for parking in the area. The task force proposed the use of minibuses to ferry sightseers to the famous block, although residents debated the efficiency of such a solution, since one of the attractions is driving down the twisting section.
1999년 이 꼬부랑길 대책위원회는 이 길의 교통란을 해소해 보려고 했습니다. 2001년 이 회는 영구 차량통행금지는 법으로 용납되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 대신 여름기간 주차 금지를 결정했는데, 휴일 중 동진 불가와 주차벌금을 올렸습니다. 이 회는 작은버스를 이용 관광객을 실어 나를 것을 제안했으나 주민들은 그들이 운전하고 꼬불꼬불 내려가는 것을 원하기에 그 효율성에 의의를 제기했습니다
The Powell-Hyde cable car stops at the top of this block.
파웰-하이드 케일블카가 이 블럭의 꼭대기에 정차합니다.“
While they walked down the block, I parked on a vacant spot in the front of one resident’s garage door. The owner came and honked me to pull out. As I did, my family rushed in getting on board.
가족들이 그 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어느 집 주차문 앞 빈자리에 주차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와 차를 빼라고 해 뒤로 뺄 때 가족들이 급하게 차에 올라탔습니다.
Then we still have more than an hour until the dinner set with Angel’s parent so I drove to Chinatown nearby.
그리고 나서 앤젤 부모와 할 저녁식사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가까이 있는 중국마을로 갔습니다.
A Pacific port city, San Francisco has the oldest and longest continuous running Chinatown in the Western Hemisphere. It originated circa 1848 and served as a gateway for incoming immigrants who arrived during the California gold rush and the construction of the North American transcontinental railroads. Chinatown was later reconceptualized as a tourist attraction in the 1910s.
태평양 항구도시 샌 프롼씨스코는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어온 중국마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1848년에 처음 시작된 이곳은 가주 채금열광 기간과 대륙관통열차 노선공사에 동원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진 사고 후1910년대에 이곳을 관광지로 재인식시키려는 탈바꿈의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San Francisco's Chinatown was nearly, but not completely destroyed by the 1906 earthquake, but many of its inhabitants did not relocate elsewhere. Looming large were proposals by real estate speculators and politicians to expand the Financial District's influence into the area, by displacing the Chinese community to the southern part of the city. In response, many of Chinatown's residents and landlords defiantly stayed behind to stake their neighborhood's claim, sleeping out in the open and in makeshift tents.
1906년 지진에 의한 대 화재로 차이나타운 건물은 몇 개를 빼고 거의 전소되거나 파손되었는데도 많은 중국인들이 다른 곳으로 삶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부동산 개발업자와 정치가들이 시 중심 금융가를 확장하기 위해 이곳으로 연장하려고 중국인들을 시 남쪽으로 소개시키려고 암암리에 추진했었습니다. 그에 대항하여 많은 중국인들과 건물주들이 이곳에 임시 천막을 쳐 대기 조를 만들어 번갈아 가 잠을 자면서 이곳을 지키며 불복대항 했습니다.
Numerous businesses and housing based in brick buildings survived with moderate damage and continued functioning, if only in a limited capacity. In just two years after the earthquake, the landmark Sing Fat and Sing Chong buildings were completed as a statement of the Chinese community's resolve to remain in the area. As a result of this action, Chinatown remains the longest, continuously occupied Chinese community outside of Asia.
많은 벽돌로 지은 상점과 집이 부분적으로 파손과 화재를 당했지만 부족한대로 계속 해오던 그 상업활동을 지속시켰습니다. 지진 2년 뒤 싱 팟 그리고 싱 청 건물이 이 지역 중국인 거주 허용 해결책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중국타운이 아시아 외에 중국인이 계속해 모여 사는 가장 오래된 곳이 되었습니다.
Still a community of predominantly Taishanese-speaking inhabitants, San Francisco's Chinatown became one of the most important Chinese centers in the United States.
여기는 주로 타이샨니즈 (캔토니즈와 비슷함, 남부 광동 부근의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고 이 샌 프롼씨스코 차이나 타운은 미국에서 제일 중요한 중국인이 모여 사는 중심지입니다. ”
My wife would not even get out of the car to show her opposition of not going to the nearby restaurant until I got enough coin from a local chines bank for the old parking meter. Still she wanted me to open the door requested by her cell call.
집사람은 식당 쪽으로 빨리 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했다가 마침 가까이에 있는 중국은행 (중어로 간판을 달고 있음)에서 동전을 바꿔 오래된 주차기에 넣고 걸어가자 차 안에 앉아 전화를 걸어 문을 열어 달라고 해 멀리서 무선 전자열쇠로 그렇게 하니 나왔습니다.
We walked up and down a street I can’t remember the name, in Chinatown and at the end I bought dimsums and a pound of ham-like pork from two different specialty vendor-like restaurants.
중국마을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한 길을 올라갔다 내려오며 끝에는 만두와 햄 같이 요리된 돼지고기를 다른 전문 식당에서 각각 샀습니다.
It was 540 pm. I thought I could hit the restaurant by 6 to meet angle’s parents because it was only 13 miles away from where we were without thinking of the day end rush hour through the downtown!
저녁 5시 40분이 되었습니다. 식당이 13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6시까지 당도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퇴근시간 시 중심가에서 빠져나가는 차량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We were about 15 minutes late to the Chevy’s Mexican restaurant. Angel’s little sister Christie participated in with her parents. She was beautiful, glaring her face and very quiet, my kind of lady. As I said sorry to his mom and dad we all hugged each other in the all possible combination. It was a quite a scene in the restaurant.
약 15분 늦게 세뷔스 멕시칸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앤젤의 작은 누이도 부모님과 같이 나왔습니다. 아주 예쁘고 얌전해 제가 좋아하는 여자상이었습니다. 그 부모들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경우의 숫자 만큰 서로 포옹하며 인사했습니다. 식당 안에 볼거리를 제공한 것입니다.
We had great dinner while chat, ending me saying, “I’m for it if you two get marry tomorrow legally one way or the other. I also mentioned to Robia that Vincent got legally married that was announced by his dad at the year-end party we had at my place early this month.
많은 얘기를 주고 받으며 끝으로 제가 “너희 둘이 법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내일 결혼을 하더라도 아빠는 찬성이다.” 라고 끝맺음을 했습니다. 또한 로비아에게 아름 아빠가 빈센트가 법적 결혼을 했다고 우리 집에서 한 망년회 파티에서 발표했다고 말해 주었었습니다.
It made me feel easy that I met such wonderful family. It seemed my youngest has the eyes to see the right for her soul mate but that I was forced into by a divine power, I now admit.
좋은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막내가 자기에게 맞는 좋은 상대를 고를 줄 아는 눈을 가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요즘에야 받아드리는 데, 제 경우는, 하늘에서 강제로 짝 지게 했다는 것 말입니다
We came back to Bia two bed room rental home at around 8 pm. I crashed into a deep sleep when my wife and Bia continued smartphone instruction to dad. The following day, my wife told me silently, “dad is the same as Alex dad.” Indicating their habits of not passing a new gadget when comes. What she does not know it that I never felt that she need the phone upgrade this time unless the graphic enhancement that I felt that it will be beneficial to her newly acquired hobby of photography. Dad frequently called his phone as old phone and ours anew that made me to remind him his is BMW and mine is Mercedes-Benz. Any rate he wants to have the Benz, I guess.
저녁 8시에 막내의 방 두 개 셋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와 비아가 아버님에게 똑전의 사용법을 강의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으며 잠에 묻혔습니다. 다음날 아내가 조용하게, “아버님은 알렉스 아빠하고 똑같은 것 같아요. 새 것이 나오면 갖고 싶어 하는 거요.” 라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모르는 것은 제가 아내의 똑전을 새 것으로 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지만 새로 생긴 사진 취미에 영상의 질이 좋은 것을 쓰게 한 것이 좋을 것이란 것 외에 말입니다. 아버님은 자기 것은 낡은 것이고 우리 똑전은 새 것이라 기능이 좋구나를 연발하시기에 예전에 말해 준 아버님 것은 비엠더불유고 제 것은 벤즈라고요 라고 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짐작하기에 벤즈를 갖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