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 세르냉 교회

생 세르냉의 평면도
서기 1000년이 되면 유럽은 거의 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수세기 동안의 치열한 공방 끝에 한 대는 안하무인이었던 야만적인 바이킹족과 마르자르족도 결국 그리스도교로 동화되었다. 파괴된 건물을 재건하고 새로운 교회와 수도원을 거널ㄹ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대규모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부락, 마을, 읍, 도시마다 새로운 교회가 적어도 하나씩 들어서면서 건축과 건축물을 장식하는 조각은 이 활기찬 새 시대의 지배적 예술 양식으로 자리잡아았다.
서ㅣ 3세기 이후로 그리스도교도들은 예술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 순례를 해왔다. 특히 샤를마뉴가 등극하면서 성지 순례는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0세기에 이르면 예수와 성인들의 거룩한 유물을 보면 하느님이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유물을 간직한 교회들은 그런 믿음을 부추겼다.

생 세르냉 내부
이탈리아에서 프로방스를 거쳐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폼코스텔라에 이르는 순례의 여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툴루즈의 생세르냉 바실리카는 뛰어난 로마네스크풍의 건물로 순례자들이 교회 건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반원형의 통처럼 된 천장은 신랑 위로 균일하게 배치된 아치들로 구분되어 있다. 많은 순례자들이 들얼올 수 있도록 신랑은 이중 통로로 되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구획공간, 이름하여 주간은 좌우 날개와 신랑이 교차하는 정사각형을 기준단윌로 하여 만들어졌는데 중앙탑 밑에 있는 정사각형의 정확히 2분의 1이다. 측면 통로에 있는 각각의 정사각형은 기준 단위의 4분의 1이다. 기둥이 달린 부벽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측면 통로 위에 앉힌 2층의 공간은 아치들로 지탱받는다. 순례자들은 이곳에도 앉았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볼 수 있었던 개선문은 찾아볼 수 없고 신랑을 따라 균일하게 배열된 기둥들과 규격이 일정한 주간들은 제단에서 하나의 초점으로 모인다. 생세르냉은 통일감이 있고 명쾌한 프랑스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전적 본보기이다.
참고문헌 : 서양문화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