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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慧明華
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유마경 공부(2020.11.30.PM7시)
유마경 입불이법문품
33보살의 불이법문
유마경 아홉 번째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이다.
유마경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신 경전이다, 이런 표현을 한다. 불이법문(不二法門) 둘이 아닌 이치를 나타내는 법문이다.
규모를 제대로 갖춘 사찰에는 으레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둘이 아닌 문, 둘이 아니라고 하는 뜻을 가진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면 승속이 둘이 아니고 남녀가 둘이 아니고 모든 것이 통일된 하나로 한 권속이다, 모두가 하나인 이치를 우리가 봐야 되고, 또 그 하나인 이치속에서 우리가 살아야 된다, 하는 의미를 가진 뜻이 불이문이다.
범어사에는 물론 불이문이 있다. 범어사 뿐만 아니라 규모가 제대로 갖춰진 사찰에는 불이문이 다 있어서, 그 불이문을 통과해서 큰 마당에 들어오고 대웅전을 친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불이(不二)의 이치, 둘이 아닌 이치를 우리가 잘 안 뒤에사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가 되겠다. 둘이 아닌 이치를 우리가 모르고서는 부처님을 봐도 부처님을 제대로 본 것이 못된다, 이렇게도 부연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이치가 있다.
불교에는 여러 가지 차별, 분별 이런 것도 아주 참 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의 실상은 둘이 아니다, 남녀가 둘이 아니고, 출가와 재가가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모든 차별된 것이 전부 하나로 통일된 이치가 있다, 그것을 볼 줄 알면 부처님을 보는 것이고, 불교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여기 유마경 불이법문품에는 서른 두 명의 보살들이 등장해서 이분들이 둘이 아닌 이치를 나름대로 피력을 한다. 아주 재미가 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차별된 것을 들고 그것의 차별이 차별이 아니라 둘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써 이야기가 되어 간다.
九.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
1. 33보살의 불이법문
이시유마힐(爾時維摩詰)이 위중보살언(謂衆菩薩言)하되 제인자(諸仁者)여 운하보살(云何菩薩)이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 각수소요설지(各隨所樂說之)어다
그때에 유마힐이 여러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훌륭하신 분들이여, 무엇이 보살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각각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말씀해 주십시오.”
유마거사가 병이 나서 그 병환을 위문하러 많은 대중들이 유마거사를 위문갔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근사한 법석이 펼쳐지고, 드디어 불이법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둘이 아닌 도리가 무엇일까?
우리도 불이법문품을 읽기 전에 둘이 아닌 이치를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회중(會中)에 유보살(有菩薩)하니 명(名)은 법자재(法自在)라 설언(說言)하되 제인자(諸仁者)여 생멸(生滅)이 위이(爲二)니 법본불생(法本不生)이어늘 금즉무멸(今則無滅)이라 득차무생법인(得此無生法忍)이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법회 중에 보살이 있었는데 이름은 법자재(法自在)였다. 말씀하기를, “모든 훌륭하신 분들이여, 생과 멸이 둘이니 법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곧 소멸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멸이 없는 법의 진리를 얻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맨처음 법자재(法自在)라는 보살님이 생과 멸, 생하는 것과 멸은 정반대이고 둘이다, 라고 하였다. 생과 사라고 해도 좋고, 같은 뜻이다. 생과 멸, 생과 사, 아침과 저녁은 둘이다. 그러나 또 하루를 두고 아침과 저녁 둘이면서 잠깐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로 통일된 것인데 거기에서 우리가 나눠놓고 공연히 둘이다 라고 하는구나, 본래 둘이 아닌데 둘이라 하는구나’ 이런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2>
덕수보살(德守菩薩)이 왈아(曰我)와 아소위이(我所爲二)나 인유아고(因有我故)로 편유아소(便有我所)니 약무유아(若無有我)면 즉무아소(則無我所)라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덕수보살이 말하였다.
“나와 나의 것이 둘이 되지만 내가 있음을 인하여 곧 나의 것이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내가 없으면 곧 나의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아(我)와 아소(我所) 불교 경전에는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아와 아소, 나와 나의 것, 내가 있고 나에게 딸린 것이 있다. 전부 나의 것이다. 나와 나의 것 그 둘로 나눌 수가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둘로 나눌 수가 있다. 저 태양도 나의 것이 된다. 아와 아소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나눠진다.
그런데 여기서 이분의 말씀은 ‘내가 있음을 인하여 곧 나의 것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내가 있음으로 나의 것이 있게 된다. 내가 없으면 태양도 없다. 산도 없고, 산하대지도 다 없다.
만약 내가 없으면 곧 나의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3>
불순보살(不眴菩薩)이 왈수(曰受)와 불수위이(不受爲二)어늘 약법불수즉불가득(若法不受則不可得)이라 이불가득고(以不可得故)로 무취무사(無取無捨)하며 무작무행(無作無行)하나니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불순보살이 말하였다.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둘이 되는데 만약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얻을 수 없습니다. 얻을 수 없으므로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며 지음도 없고 행함도 없습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는 것
<4>
덕정보살(德頂菩薩)이 왈구정(曰垢淨)이 위이(爲二)어늘 견구실성(見垢實性)이면 즉무정상(則無淨相)하여 순어멸상(順於滅相)이라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덕정보살이 말하였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되는데 더러움의 실다운 성품을 보면 곧 깨끗한 모양도 없어서 적멸의 모습을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더러움의 실다운 성품을 보면 곧 깨끗한 모양도 없다. 더러움의 실상을 보면 거기는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다. 본래 더러운 것이 어디 있는가? 본래 없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
시골 작은 절 원주스님이 시장에 가서 노스님이 소변보기 어려우니 요강을 하나 사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요강을 하나 새로 사서 오다가 겨울이었는지 풀빵을 팔기에 풀빵을 몇 개 사서 노스님도 갖다드리고 해야겠다고 샀는데 담을 데가 마땅치 않아 요강에 담아왔다.
요강은 1000도 이상 뜨거운 불에 구워서 짱짱 소리가 나는 깨끗한 도자기다. 균이라고 하는 것도 도저히 있을 수가 없고 거기에 물을 한 번 담았던 적도 없고, 소변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절에 내려서 풀빵을 대중들에게 나누고 노스님도 드리려고 하고 그것을 사가지고 간 자신도 먹으려고 하니까 도저히 요강속에 가져간 풀빵이 먹히지가 않더라는 것이다.
깨끗한 도자기에 담아 왔는데 소위 이름이 ‘요강이다’ 라고 하는 ‘오줌을 누는 요강이다’ 하는 그 이름 하나에 걸려서 도저히 빵을 먹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가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은 이름 하나에 그렇게 걸린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이 사실은 굳이 나눌 성질의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그렇게 잘 걸린다.
요강이라는 이름하나, 그저 이름하나에 걸리는 것이다.
한 번도 쓴 적도 없고 1000도 이상의 불에다 구워서 깨끗하기로 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깨끗한 도자기인데도 불구하고 요강이라는 이름 하나에 걸려서 돈 주고 사온 풀빵을 거기에 담아와서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더러움과 깨끗함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문득 생각이 나서 드리는 말씀이다. 일상생활에 그런 것을 잘 적용하면 또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5>
선숙보살(善宿菩薩)이 왈시동시념(曰是動是念)이 위이(爲二)어늘 부동즉무념(不動則無念)이요 무념(無念)이면 즉무분별(卽無分別)이라 통달차자(通達此者)가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선숙보살이 말하였다.
“움직임과 생각이 둘이 되지만 움직이지 아니하면 곧 생각이 없으며 생각이 없으면 곧 분별이 없습니다. 이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움직임과 생각 둘이 되지만, 생각에서 움직임이 등장한다.
<6>
선안보살(善眼菩薩)이 왈일상무상(曰一相無相)이 위이(爲二)어늘 약지일상(若知一相)이 즉시무상(卽是無相)하고 역불취무상(亦不取無相)하면 입어평등(入於平等)하리니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이다
선안보살이 말하였다.
“일상과 무상이 둘이 되지만 만약 일상이 곧 무상인 줄 알고 또한 무상도 취하지 아니하면 평등한 곳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일상과 무상
<7>
묘비보살(妙臂菩薩)이 왈보살심(曰菩薩心)과 성문심(聲聞心)이 위이(爲二)어늘 관심상공(觀心相空)하되 여환화자(如幻化者)면 무보살심(無菩薩心)하고 무성문심(無聲聞心)이라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묘비보살이 말하였다.
“보살의 마음과 성문의 마음이 둘이지만 마음의 모습이 공하여 환화와 같음을 관찰하면 보살의 마음도 없고 성문의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한 가정에서 남녀가 같이 살든지 선후배가 같이 살든지 스승과 제자가 같이 살든지 다 여러 가지 차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산다. 보살과 성문도 같이 살 수가 있다. 보살과 성문의 마음 그것은 사실 알고 보면 둘이다.
그런데 ‘마음의 모습이 공하여 환화와 같음을 관찰하면’ 이 사람 갑이라는 사람 마음하고 을이라는 사람 마음하고 분명히 다른데 다르면서도 그 실상을 찾아보면 모습이 공(空)하다. 마음의 모습이 공하여, 환화,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알면 보살이라고 하는 마음도 없고, 성문이라고 하는 사람의 마음도 없다.
갑이라는 사람의 마음도 없고, 을이라는 사람의 마음도 없다. 아들이라는 사람의 마음도 없고 아버지라는 사람의 마음도 없고, 아내라는 사람의 마음도 없고 남편이라는 사람의 마음도 없다. 그런 도리가 있지 않은가? 정말 신기하다. 묘비보살(妙臂菩薩)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법문을 하셨다.
<8>
불사보살(弗沙菩薩)이 왈선(曰善)과 불선(不善)이 위이(爲二)어늘 약불기선불선(若不起善不善)하고 입무상제이통달자(入無相際而通達者)면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불사보살이 말하였다.
“선과 불선이 둘이 되지만 만약 선도 불선도 일으키지 아니하여 형상이 없는 경계에 들어가 통달하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선이다 불선이다 그것을 우리가 일으키니까 선이다 불선이다, 라고 한다. 일어나기 이전에 무슨 선이 있고, 무슨 악이 있는가? 그런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9>
사자보살(師子菩薩)이 왈죄(曰罪)와 복(福)이 위이(爲二)어늘 약달죄성(若達罪性)하면 즉여복무이(則與福無異)라
사자보살이 말하였다.
“죄와 복이 둘이지만 만약 죄의 본성을 통달하면 곧 복과 다름이 없습니다.”
죄의 본성도 없고, 복의 본성도 없다.
이금강혜(以金剛慧)로 결료차상(決了此相)하여 무박무해자(無縛無解者)면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금강의 지혜로 이러한 모양을 깨달아서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둘이 아닌 법문, 여기 나온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전부 다 일리가 있다. 이것을 가지고 부연설명 하면 모든 존재에 다 먹히고 모든 법에 다 해당이 된다.
죄와 복에 대해서 말했다.
<10>
사자의보살(師子意菩薩)이 왈유루무루(曰有漏無漏)가 위이(爲二)어늘 약득제법등(若得諸法等)하면 즉불기루무루상(則不起漏無漏想)하야 불착어상(不着於相)하며 역부주무상(亦不住無相)하리니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사자의(師子意)보살이 말하였다.
“유루와 무루가 둘이지만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함을 얻으면 유루와 무루의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형상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또한 형상 없음에도 머물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유루법, 무루법은 불교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다.
<11>
정해보살(淨解菩薩)이 왈유위무위(曰有爲無爲)가 위이(爲二)어늘 약리일체수(若離一切數)하면 즉심여허공(則心如虛空)하야 이청정혜(以淸淨慧)로 무소애자(無所碍者)가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정해(淨解)보살이 말하였다.
“유위와 무위가 둘이지만 만약 일체의 숫자를 떠나면 곧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청정한 지혜로서 걸릴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유위법과 무위법 그것도 불교에서 자주 이야기한다.
그런 것을 가지고 교리상으로 많이 다툰다.
유루도 그렇고 무루도 그렇고 유위도 그렇고 무위도 그렇다. 그러니 그것이 이 유마경을 읽으면 다툴 일이 아니다. 둘이 아니다.
서른 두 명의 보살과 유마거사 그리고 문수보살까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여서 둘이 아닌 도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많은 이치중에서 둘이 아닌 이치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둘이 아닌 이치를 한 번 논해보자, 당시로서는 불교의 이치 중에서 가장 고준한 이치인 둘이 아닌 이치를 우리가 한 번 논해보자,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12>
나라연보살(那羅延菩薩)이 왈세간출세간(曰世間出世間)이 위이(爲二)어늘 세간성공(世間性空)이 즉시출세간(卽是出世間)이라 어기중(於其中)에 불입불출(不入不出)하며 불일불산(不溢不散)이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나라연((那羅延)보살이 말하였다.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지만 세간의 본성이 공한 것이 곧 출세간입니다. 그 가운데에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나가지도 아니하며 넘치지도 아니하고 흩어지지도 아니합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세간과 출세간, 예를 들어서 출가와 재가 이렇게 이야기 해보자. 그러면 재가였던 사람이 출가하고, 또 출가했다가 집에 돌아가면 재가인 것이고, 그것이 둘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 있겠는가? 출가와 재가, 세간과 출세간 그것을 콕 집어서 어떤 고정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주 견고하게, 돌로써 성을 쌓은 것처럼 견고하게 있는 듯이 보인다. 일단 그런 공부를 하다보면 그렇다. 세간과 출세간, 출가와 재가, 얼마나 견고하게 보이는가?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3>
선의보살(善意菩薩)이 왈생사열반(曰生死涅槃)이 위이(爲二)어늘 약견생사성(若見生死性)하면 즉무생사(則無生死)라 무박무해(無縛無解)하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리니 여시해자(如是解者)라사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선의(善意)보살이 말하였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지만 만약 생사의 본성을 보면 곧 생사가 없어서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생기지도 아니하고 소멸하지도 아니합니다. 이처럼 이해하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라고 우리가 법성게를 많이 읽지 않는가? 생사와 열반이 하나다. 공화다. 같은 것이다. 그런 이치를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14>
현견보살(現見菩薩)이 왈진부진(曰盡不盡)이 위이(爲二)어늘 법약구경진(法若究竟盡)커나 약부진(若不盡)이 개시무진상(皆是無盡相)이니 무진상(無盡相)이 즉시공(卽是空)이라 공즉무유진부진상(空則無有盡不盡相)하리니 여시입자(如是入者)가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현견(現見)보살이 말하였다.
“다함과 다하지 아니함이 둘이지만 법이 만약 구경에 다하거나 만약 다하지 아니하면 모두가 다함이 없는 모양입니다. 다함이 없는 모양이 곧 텅 비어 공한 것이며 공하면 다함과 다하지 아니한 모양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에 들어간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공하면 다한 것도 없고 다하지 아니한 것도 없다. 공(空)한 데 뭐가 있겠는가? 다함과 다하지 아니함
<15>
보수보살(普守菩薩)이 왈아무아(曰我無我)가 위이(爲二)어늘 아상불가득(我尙不可得)이어든 비아(非我)를 하가득(何可得)이리요 견아실성자(見我實性者)는 불가기이(不可起二)니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보수(普守)보살이 말하였다.
“아와 무아가 둘이지만 아도 오히려 얻지 못하는데 아가 없음을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의 실다운 성품을 보는 사람은 두 가지를 일으키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아(我)와 무아(無我) 얼마나 이것을 가지고 많이 다투는가? 특히 소승불교에서는 무아를 얼마나 강조하는가? 많이 강조한다.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니라고 했다.
아도 오히려 얻지 못하는데 아가 없음을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도 없는데 무아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이것을 가지고 그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 똑 떨어질 것이다. 무아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아도 없는데 무아가 뭐가 있겠느냐? 처음부터 뭐 이야기거리가 되느냐?’라고 할 수 있다.
<16>
전천보살(電天菩薩)이 왈명무명(曰明無明)이 위이(爲二)어늘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시명(卽是明)이라 명역불가취(明亦不可取)하야 이일체수(離一切數)하되 어기중(於其中)에 평등무이자(平等無二者)가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전천(電天)보살이 말하였다.
“명과 무명이 둘이지만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명이며 명도 또한 취할 수 없어서 일체 숫자를 떠났으나 그 가운데서 평등하여 둘이 없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보통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할 때 그 12인연의 첫째 무명이라고 하는 말이다.
명과 무명, 밝음과 밝음이 없음이 둘이지만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명이며 명도 또한 취할 수 없다. 그래서 깨뜨린 것이다.
<17>
희견보살(喜見菩薩)이 왈색(曰色)과 색공(色空)이 위이(爲二)어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비색멸공(非色滅空)이요 색성(色性)이 자공(自空)이니
희견(喜見)보살이 말하였다.
“색과 색이 공한 것이 둘이지만 색이 곧 공이며 색이 소멸한 뒤의 공이 아니므로 색의 본성이 저절로 공합니다.”
색이 그대로 공이지 색이 소멸한 뒤에 공이 아니므로 색의 본성이 저절로 공하다. 색의 본성은 그대로 두고 공한 것이다.
여시(如是)하야 수(受)․ 상(想)․ 행(行)․ 식(識)과 식공(識空)이 위이(爲二)어늘 식즉시공(識卽是空)이라 비식멸공(非識滅空)이요 식성(識性)이 자공(自空)이니 어기중(於其中)에 이통달자(而通達者)는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이처럼 수, 상, 행, 식과 수, 상, 행, 식이 공함이 둘이 되지만 식이 곧 공이며 식이 소멸하여 공함이 아닙니다. 식의 본성이 저절로 공하여 그 가운데 통달한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색을 들어서 이야기하면서 색수상행식 오온을 다 이야기했다.
<18>
명상보살(明相菩薩)이 왈사종이(曰四種異)와 공종이(空種異)가 위이(爲二)어늘 사종성(四種性)이 즉시공종성(卽是空種性)이라 여전제(如前際)하야 후제공고(後際空故)로 중제역공(中際亦空)하나니 약능여시지제종성자(若能如是知諸種性者)가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명상(明相)보살이 말하였다.
“지, 수, 화, 풍 네 가지의 다름과 공의 다름이 둘이 되지만, 네 가지의 본성은 곧 공의 본성입니다. 앞과 같이 뒤도 공함으로 중간도 또한 공합니다. 만약 능히 이처럼 모든 종류의 본성을 아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앞에서는 색수상행식을 말했고, 여기는 지수화풍 사대를 두고 이야기했다.
<19>
묘의보살(妙意菩薩)이 왈안(曰眼)과 색(色)이 위이(爲二)어늘 약지안성(若知眼性)하면 어색(於色)에 불탐불에불치(不貪不恚不癡)하리니 시명적멸(是名寂滅)이라 여시(如是)하야 이성(耳聲)․ 비향(鼻香)․ 설미(舌味)․ 신촉(身觸)․ 의법(意法)이 위이(爲二)어늘 약지의성(若知意性)하면 어법(於法)에 불탐불에불치(不貪不恚不癡)하니라 시명적멸(是名寂滅)이라 안주기중(安住其中)이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묘의(妙意)보살이 말하였다.
“눈과 사물이 둘이지만 만약 눈의 본성을 알면 사물에 대해서 탐내지도 아니하고 성내지도 아니하고 어리석지도 아니합니다. 이것이 이름이 적멸입니다. 이처럼 귀와 소리, 코와 향기, 혀와 맛, 몸과 촉감, 뜻과 법이 둘이지만 만약 뜻의 본성을 알면 법에 대해서 탐내지도 아니하고 성내지도 아니하고 어리석지도 아니합니다. 이것이 이름이 적멸입니다. 그 가운데 안주하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의 상대적인 것, 그 상대적인 것은 둘이다.
그러나 눈을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눈의 본성을 우리가 알면, 눈의 본성이 실체가 어디 있는가?
눈 때문에 사물을 인식해서 사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본은 눈이다. 그 눈의 본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 사물 그것이 어떻게 이야기가 되겠느냐? 안이비설신의도 그렇고 색성향미촉법도 역시 그런 이치다, 하는 내용이다.
<20>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왈보시(曰布施)와 회향일체지(廻向一切智)가 위이(爲二)어늘 보시성(布施性)이 즉시회향일체지성(卽是廻向一切智性)이라 여시(如是)하야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와 회향일체지(廻向一切智)가 위이(爲二)어늘 지혜성(智慧性)이 즉시회향일체지성(卽是廻向一切智性)이라 어기중(於其中)에 입일상자(入一相者)가 시이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무진의(無盡意)보살이 말하였다.
“보시와 일체 지혜에 회향하는 것이 둘이지만 보시의 본성이 곧 일체 지혜에 회향하는 본성입니다. 이처럼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와 일체 지혜에 회향하는 것이 둘이지만 지혜의 본성이 곧 일체 지혜에 회향하는 본성입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의 모양에 들어간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여기는 6바라밀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21>
심혜보살(深慧菩薩)이 왈시공시무상시무작(曰是空是無相是無作)이 위이(爲二)나 공즉무상(空卽無相)이오 무상즉무작(無相卽無作)이라 약공무상무작즉무심의식(若空無相無作則無心意識)이니 어일해탈문(於一解脫門)에 즉시삼해탈문자(卽是三解脫門者)라사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심혜(深慧)보살이 말하였다.
“공과 무상과 무작이 둘이지만 공이 곧 무상이며 무상이 곧 무작입니다. 공과 무상과 무작이 곧 심의식이 없음과 같습니다. 하나의 해탈문에 곧 세 가지 해탈문이라야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22>
적근보살(寂根菩薩)이 왈불(曰佛)․ 법(法)․ 중(衆)이 위이(爲二)니 불즉시법(佛卽是法)이요 법즉시중(法卽是衆)이라 시삼보개무위상(是三寶皆無爲相)이니 여허공등(與虛空等)이어던 일체법(一切法)도 역이(亦爾)니 능수차행자(能隨此行者)가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적근(寂根)보살이 말하였다.
“부처님과 법과 대중[승]이 둘이지만 부처님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대중입니다. 이 삼보가 다 무위의 모습이어서 허공과 평등합니다. 일체의 법도 또한 그러하니 능히 이러한 행을 따르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삼보를 두고 이야기했다. 불교의 명제를 전부다 거의 중요한 것을 다 열거하면서 일일이 ‘둘이 아니다’ 라고 설파를 하는 장면이다.
<23>
심무애보살(心無碍菩薩)이 왈신(曰身)과 신멸(身滅)이 위이(爲二)어늘 신(身)이 즉시신멸(卽是身滅)이라 소이자하(所以者何)오 견실상자(見身實相者)는 불기견신(不起見身)과 급견멸신(及見滅身)이니 신여멸신(身與滅身)이 무이무분별(無二無分別)이라 어기중(其於中)에 불경불구자(不驚不懼者)라사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심무애(心無碍)보살이 말하였다.
“몸과 몸의 소멸이 둘이지만 몸이 곧 몸의 소멸입니다. 왜냐하면 몸의 실상을 보는 사람은 몸을 보는 것과 몸의 소멸을 보는 것을 일으키지 아니합니다. 몸과 몸의 소멸이 둘이 없고 분별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놀라지도 아니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24>
상선보살(上善菩薩)이 왈신(曰身)․ 구(口)․ 의업(意業)이 위이(爲二)어늘 시삼업(是三業)이 개무작상(皆無作相)이라 신무작상(身無作相)이 즉구무작상(卽口無作相)이며 구무작상(口無作相)이 즉의무작상(卽意無作相)이라 시삼업무작상(是三業無作相)이 즉일체법무작상(卽一切法無作相)이니 능여시수무작혜자(能如是隨無作慧者)라사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상선(上善)보살이 말하였다.
“몸과 입과 뜻의 업이 둘이지만 이 삼업이 모두 지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몸의 지음이 없는 모습이 곧 입의 지음이 없는 모습이며 입의 지음이 없는 모습이 곧 뜻의 지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 삼업의 지음이 없는 모습이 곧 일체법의 지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능히 이처럼 지음이 없는 지혜를 따르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25>
복전보살(福田菩薩)이 왈복행(曰福行)․ 죄행(罪行)․ 부동행(不動行)이 위이(爲二)어늘 삼행실성(三行實性)이 즉시공(卽是空)이라 공즉무복행(空則無福行)하며 무죄행(無罪行)하며 무부동행(無不動行)이니 어차삼행(於此三行)에 이불기자(而不起者)라사 시위입불법문(是爲入不法門)이니다
복전(福田)보살이 말하였다.
“복의 행과 죄의 행과 움직이지 않는 행이 둘이지만 세 가지 행의 실다운 본성이 곧 공합니다. 공하다면 복의 행이 없으며 죄의 행도 없으며 움직이지 않는 행도 없습니다. 이 세 가지 행에 일으키지 않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복과 죄에 대한 이야기다.
<26>
화엄보살(華嚴菩薩)이 왈종아기이(曰從我起二)가 위이(爲二)어늘 견아실상자(見我實相者)는 불기이법(不起二法)이라 약부주이법(若不住二法)이면 즉무유식(則無有識)이니 무소식자(無所識者)가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화엄(華嚴)보살이 말하였다.
화엄보살이 드디어 나왔다.
“나로부터 두 가지를 일으키는 것이 둘이지만 나의 실상을 보는 사람은 두 가지 법을 일으키지 아니합니다. 만약 두 가지 법에 머물지 아니하면 곧 앎이 없습니다. 아는 바가 없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불이법문이 참 시원하다.
<27>
덕장보살(德藏菩薩)이 왈유소득상(曰有所得相)이 위이(爲二)어늘 약무소득(若無所得)이면 즉무취사(則無取捨)라 무취사자(無取捨者)가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덕장(德藏)보살이 말하였다.
“얻을 것이 있는 모습이 둘이지만 만약 얻을 것이 없으면 곧 취하고 버릴 것이 없습니다.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얻을 것이 있는 모습, 얻을 것이 없는 모습에 대해서 말했다.
<28>
월상보살(月上菩薩)이 왈암여명(曰暗與明)이 위이(爲二)어늘 무암무명(無闇無明)이면 즉무유이(則無有二)라
월상(月上)보살이 말하였다.
“어둠과 밝음이 둘이지만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으면 곧 둘이 없습니다.”
밤낮이 둘이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저 잠깐 스쳐가는 것일 뿐이다.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여입멸수상정(如入滅受想定)이면 무암무명(無暗無明)이니 일체법상(一切法相)도 역부여시(亦復如是)라 어기중(於其中)에 평등입자(平等入者)는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왜냐하면 느낌과 생각이 소멸한 선정에 들어가면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습니다. 일체법의 모양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그 가운데에 평등하게 들어가는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29>
보인수보살(寶印手菩薩)이 왈요열반(曰樂涅槃)하고 불요세간(不樂世間)이 위이(爲二)니 약불요열반(若不樂涅槃)하고 불염세간(不厭世間)이면 즉무유이(則無有二)라
보인수(寶印手)보살이 말하였다.
“열반을 좋아하고 세간을 싫어하는 것이 둘이지만 만약 열반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세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곧 둘이 없습니다.”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고 세간을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둘이 있을 까닭이 없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어야 그것이 둘로 나눠질 것이다.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약유박즉유해(若有縛則有解)어니와 약본무박(若本無縛)이면 기수구해(其誰求解)리오 무박무해(無縛無解)면 즉무요염(則無樂厭)이니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왜냐하면 만약 속박이 있으면 해탈도 있지만 만약 본래 속박이 없으면 그 누가 해탈을 구하겠습니까.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면 곧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30>
주정왕보살(珠頂王菩薩)이 왈정도(曰正道)와 사도위이(邪道爲二)어늘 주정도자(住正道者)는 즉불분별시사시정(則不分別是邪是正)하나니 이차이자(離此二者)는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주정왕(珠頂王)보살이 말하였다.
“정도와 사도가 둘이지만 정도에 머문 사람은 사도와 정도를 분별하지 아니합니다. 이 두 가지를 떠난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정도다 사도다 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따지는가? 제가 특히 정법 정법 엄청 따진다.
‘정도에 머문 사람은 곧 사도와 정도를 분별하지 않는다’ 정법에 제대로 머문 사람은 정법이다 비정법이다, 소승법이다 대승법이다 그거 안 따질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떠난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숨이 막힌다.
<31>
낙실보살(樂實菩薩)이 왈실부실(曰實不實)이 위이(爲二)나 실견자(實見者)는 상불견실(尙不見實)이어든 하황비실(何況非實)가
낙실(樂實)보살이 말하였다.
“진실과 진실이 아님이 둘이지만 진실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진실도 보지 아니하는데 어찌 하물며 진실이 아님을 보겠습니까.”
진실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진실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야 제대로 진실을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물며 진실이 아님을 보겠는가?
소이자하(所以者何)오 비육안소견(非肉眼所見)이요 혜안(慧眼)으로 내능견(乃能見)이니 이차혜안(而此慧眼)은 무견무불견(無見無不見)이라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니다
“왜냐하면 육안으로 보는 바가 아니며 혜안으로 능히 봅니다. 이 혜안은 봄도 없고 보지 않음도 없습니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32>
여시제보살(如是諸菩薩)이 각각설이(各各說已)하시고 문문수사리(問文殊師利)호대 하등(何等)이 시보살(是菩薩)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니까 문수사리언(文殊師利言)하사대
이와 같이 모든 보살들이 각각 설하여 마치고 나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엇이 보살의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드디어 문수보살에게 물은 것이다.
여아의자(如我意者)인댄 어일체법(於一切法)에 무언무설(無言無說)하며 무시무식(無示無識)하야 이제문답(離諸問答)이 시위입불이법문(是爲入不二法門)이라하노라
“저의 생각으로는 일체법에 언설이 없으며 보임도 없고 앎도 없어서 모든 문답을 떠난 것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말도 안하고, 말을 떠난 자리가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 했다. 문수보살의 약점은 ‘말을 떠난 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했는데 그러나 말로 했다. 그것이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차이점이 된다.
<33>
어시(於是)에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문유마힐(問維摩詰)호대 아등(我等)은 각자설이(各自說已)어니와 인자(仁者)는 당설하등(當說何等)이 시보살(是菩薩)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니까
이에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각 스스로 다 설하였습니다. 어지신 분은 마땅히 무엇이 보살의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엄청난 질문이다.
시(時)에 유마힐(維摩詰)이 묵연무언(黙然無言)커늘 문수사리(文殊師利)가 탄왈선재선재(歎曰善哉善哉)라 내지무유문자언어(乃至無有文字言語)가 시진입불이법문(是眞入不二法門)이니다
그때에 유마힐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문수사리가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문자와 언어가 없는 것이 참으로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문자와 언어가 없는 것이 참으로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수보살은 계속 말한다. ‘언어가 없는 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계속 말을 하는 것, 흔적이 남는 것이다. 이치는 아시긴 아셨는데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까 유마거사는 흔적마저 없다, 그렇게 보면 되겠다.
세속에서는 방을 쓸든지 마당을 쓸든지 앞으로 가면서 쓴다. 그러면 아무리 깨끗하게 쓸어도 발자국은 남는다. 그런데 사찰에서 마당을 쓸 때는 앞으로 가면서 쓸지 않고, 뒤로 가면서 쓴다. 그러니까 발자국마저도 다 깨끗하게 쓸려 버리고 없다. 바로 그 도리다.
그 하나의 이치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옛날에 어른 스님들이 ‘절 마당은 뒤로 가면서 쓰느니라’ 그래서 반드시 뒤로 가면서 쓴다. 그래 마당을 깨끗하게 쓸고 나면 발자국마저 없다.
쓴 자리만 있지 발자국마저 없다, 그런 이치다.
그러니까 여기 문수보살은 발자국을 남긴 불이법문이고, 유마거사는 발자국마저 남기지 않은 불이법문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다.
설시입불이법문품시(說是入不二法門品時)에 어차중중오천보살(於此衆中五千菩薩)이 개입불이법문(皆入不二法門)하야 득무생법인(得無生法忍)하니라
이 불이법문품을 설할 때에 이 대중 가운데 5천 보살이 모두 다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서 무생법인을 얻었다.
5천명의 보살들이 다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서 무생법인을 얻었다. 여기까지가 불이법문 끝이다.
그리고 유마경 중(中)권, 중간권이 끝났다.
오늘 유마경 공부 불이법문, 유마경 법문의 하이라이트가 불이법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보는 사람의 안목이고 일리가 있다. 일부 일리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워낙 법문이 재미있는 대목이고 불교의 여러 가지 교리, 용어 이런 것들을 총망라해서 하나로 통일시켜버리는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마경 법문은 불이법문이다, 라고 한다.
그렇다고 꼭 그렇게 고집할 것은 아니다.
오늘 유마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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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 밝아지고
진리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굴러가서
중생들의 미망이
활짝 열어지기를 발원하는 바입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