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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펜들힐의 명상)
나는 다른 어느 책보다도 「요한복음」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가장 내 속을 잘 풀어주는 듯합니다. 퀘이커들은 일반으로 「요한복음」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는 대부분 거기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요한복음」을 좋아하게 된 것은 퀘이커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 말씀해 주시는 이에게 배워서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을 좋아했기 때문에 퀘이커가 됐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안에는 가슴을 찌르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내게 감격을 주는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4장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문답하는 이야기, 둘째는 8장에 있는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와서 성전에서 예수 앞에 서는 여인과의 이야기, 그리고 셋째는 12장에 있는 예수 돌아가시기 한 주일 전에 예수에게 값진 향유를 붓고 발을 씻어드리는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이 세 여인이 다 인생에 실패한 멸시받는 것들이었습니다. 요한이 다른 공관복음의 기자와 다른 점은 속의 예수를 그리려고 애쓴 점입니다. 그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 예수의 생애의 여러 사실 중에서 특히 그의 깊은 속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들을 골라서 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 놀랍게 우리 혼을 깨우쳐 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이 세 개의 대화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몇 번을 읽어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새로운 감격을 얻습니다.
내가 그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문답에서는 먼저 입을 연 것이 예수였습니다. “나 물 좀 주셔요.” 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실 예수는 그 여자에게 생명의 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뭇 영적인 말로 시작을 하면 그가 알아듣지 못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 예수에게는 종교 살림과 세속 살림이 서로 딴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양으로는 그는 하나의 피곤한 길손으로 잠깐 쉬고 마른 목을 축이고 가자는 것이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영적으로 목이 마른 사람이라면 그것을 본 이상 육체상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쓰고만 갈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는 우선 일상생활의 실지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 여자를 만났을 때 예수는 맘속에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움직일 수 있을까?” 예수에게는 남의 속을 뚫어보는 힘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 여자는 한 집안 식구에 물을 길어다주러 온 별것 없는 여자지만 속에는 저도 모르게 목이 타 마르고 있는 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을 좀 달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대답하기를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 어찌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더러 물을 달라 합니까?” 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겉으로는 내가 당신보고 물을 달라지만) “속으로 한다면 당신이야말로 나보고 물 달라 해야 할 것이요, 또 그런다면 내가 산 생명 물을 당신께 줄 수 있을 터인데” 했습니다. 여자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못할 뿐 아니라 바로듣기를 거부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만 것으로 놔 보낼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도망하려는 사람을 팔을 벌려 앞길을 지르듯이 끈질기게 여자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안됐다 생각하자 갑자기 화제를 돌려 “가서 당신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했습니다.
예수는 그 여자가 어떤 살림을 하고 있는지 첨부터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묻지 않고도 남편이 다섯 여섯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새삼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을까? 여자의 간지러운 데를 찌른 것입니다. 거기를 찔리고는 그 이상 더 회피하는 태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라고 했을 때 그 여자의 마음의 주인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이날까지 여자는 사람대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도 자기를 사람으로 대접치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무엇을 찾는지 저도 모르면서 찾아 남편을 다섯 여섯 번 바꿨습니다. 그러나 마음엔 여전히 얻은 것이 없고 세상을 낡은 신짝처럼 굴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한번 보고 그 안에 사랑에 타 마르는 혼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깨우려고 당신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했습니다. 그 찔림을 받고 나면 그 이상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짓밟혀 피곤해 쓰러졌던 혼은 깼습니다. 이제부터 말은 세속에서 영적인 세계로 들어갑니다. 여자가 “주여, 내가 보니 예언자이십니다.” 했을 때 그것은 완전히 투구를 벗고 무조건 항복을 한 것입니다. 자기 내부를 부끄럼 없이 내놓은 것입니다. 이제부터 대화는 시작됩니다.
여자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합니다.” 해서 참 종교는 어떤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이것은 윤락여성이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참 사람의 혼에서 나오는 물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참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신약의 최고봉이라고 합니다. 신약 안에 진리가 많습니다마는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높은 진리를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베드로도 요한도 아니요 남편이 다섯이던 윤락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참 대화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또 얼마나 쉬운 것입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한 연극의 장면입니다. 여기 깊고 깊은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쌓아올린 늙은 돌에 퍼렇게 이끼조차 돋아 이스라엘의 오랜 문화를 상징합니다. 그것을 배경으로 그 앞에 세 사람이 섭니다. 하나는 예수, 하나는 윤락 여인, 그리고 놀라는 제자들, 클라이맥스에 가까웠을 때 여자는 말했습니다. “나는 메시아가 오실 줄 압니다.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일러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은 벌써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기쁨이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
그러나 아직 그는 분명히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듣자 예수는 “당신과 말하는 내가 그입니다.” 했습니다. 그는 일찍이 누구에게도 이렇게 분명히 잘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여자가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삼십 청년이 한나절 길에 피곤해서 이마에 땀을 철철 흘리며 티끌을 뒤집어쓰고 우물가에 주저앉아 나 물 좀 주시오 하는 것을 당하고 있는 그의 속에는 메시아라면 반드시 웅장한 체격에 얼굴에 광채가 나고 구름을 타고 오실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는 메시아는 밖으로는 아무 특별한 것이 아니요, 저같이 남편이 다섯 되는 타락 여성의 존재의 밑바닥에 졸고 있는 영혼을 불러낼 수 있는 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는 “너의 영혼과 고뇌를 참으로 알아준 이만이 정말 메시아다. 그리고 그가 곧 나다” 하는 뜻을 말하신 것입니다. 여자는 마침내 알아들었습니다. 나와 네가 대면을 했고 그 가운데서 한 여인이 새로 났습니다.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야기에서는 요한은 매우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때도 정오 가 아니라 이른 아침이요, 예수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거의 끝까지 수동적 태도로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는 무지의 문제였지만 여기서는 죄 문제입니다. 어떤 오랜 사본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지 않다 해서 더러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하는 의견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이 신약에서 빠진다면 나는 신약이 그 가치를 절반은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로 살아난 영혼이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허다한 파산한 영혼에게 등대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이야기의 직전에 7장 끝에 있어서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그립니다. 예수의 능력 있는 말과 기적을 보고 수많은 군중이 열광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될 때 모든 사람은 다 헤어져 가고 말았습니다. 일본 시인 이시가와 다꾸보꾸의 노래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마치 무덤에 들어가듯 돌아가 자버리는구나.” 꼭 그 말과 같습니다. 또 돌아가 자버리거나 하면 괜치 않습니다. 모든 죄악이 밤에 이루어집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유한 세계를 보지만 밤엔 무한 세계를 봅니다. 밤은 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기도와 명상은 밤에 됩니다. 그러나 또 사람의 나쁜 부분이 날뛰는 것도 밤입니다.
사람의 눈은 하나만이 아닙니다. 둘입니다. 영원 무한을 보는 눈과 유한 물질의 세계를 보는 눈과. 영원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비쳐주는 영원한 빛을 따라 사람의 영혼을 뚫어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만을 가진 사람은 어둠속에서는 보지도 못하고 보는 사람도 없는 줄 압니다. 그래서 물질계를 보는 눈만을 가진 사람은 밤에는 보는 사람이 없다 생각하기 때문에 꺼림 없이 온갖 죄악을 짓습니다. 그러나 영적 눈을 가진 사람은 영원한 증인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밤에도 낮에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군중도 낮에 그의 말을 들을 때는 알아들은 것 같았으나 밤이 올 때, 소수의 사람을 제하고는, 집으로 가서 다시 죄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아침이 되면 그 영적인 사람과 육신의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전략적인 순간에 연극이 벌어졌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뒤에 장엄한 성전이 배경을 이루고 그 앞에 또 세 사람이 섭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눈이 새벽이슬같이 반짝이는 예수. 어둠의 그늘 속으로 정욕으로 한 밤을 지내다가 이불 속에서 끌려나와 도살장으로 가는 짐승처럼 떨며 온 하잘길 없는 여자, 그리고 민족과 종교와 법을 대표하며 스스로 의롭다 하는 마음에 가슴을 제치고 거만히 서서 자기의 업신여기는 자를 잡아먹으려 제 잘난 것을 칼처럼 내두르는 서기관 바리새교인들. 그들이 그렇게 분노하며 그 불쌍한 여인을 끌고 온 것은 정말 그 여자와 그 여자의 한 일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자는 하나의 미끼로 이용이 됐을 뿐입니다. 이렇게 거짓되고 간악한 마음에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잠잠하고 땅 위에 글자만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세당당하게 네가 이번에는 걸렸구나 하는 듯 추궁했으나 예수는 그저 잠잠했습니다.
왜 잠잠합니까? 그들의 감정이 잔잔해지고 이성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숨을 태우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제정신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예수는 땅위에 글만 쓰고 있었습니다. 사실을 말한다면 그들의 가슴을 어루만진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보드라운 손이 앓는 아이의 가슴을 쓸어주듯이. 사람은 아무리 타락이 됐다 하더라도 그 깊은 속에는 영혼이 있는 법입니다. 예수는 양쪽을 다 불쌍히 보았습니다. 남을 억누르는 사람이나 억누름을 당하는 사람이나 다 같이 그 잘못된 살림으로 영혼이 속에서 쭈그러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강한 서기관이요 하나는 약한 여자지만 그들 속사람은 다 같이 죽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 둘을 다 불쌍히 보았습니다. 손이 땅에 글자를 쓸 때 그의 마음은 그들의 가슴을 쓸어주고 있었습니다. 아마 첨에는 ‘죄’하고 썼는지 모릅니다. 그 담은 그것을 슬쩍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영혼’하고 썼습니다. 또 슬쩍 지워버리고 이번은 ‘용서’하고 썼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은 차차 지나가고 마음들은 식기 시작했습니다. 벌벌 떨던 여인도 숨을 쉬고 눈에 예수의 얼굴이 들어오게 됐고, 노가 천정에 올랐던 서기관들도 차차 숨이 가라앉아 예수의 얼굴을 보게 됐을 때 거기는 어떤 거룩하고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 고개를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누구든지 당신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했습니다. 거기는 비난하는 기색도, 타이르는 어조도 없었습니다. 다만 한없이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빛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씩하나씩 빠져나갔습니다. 아무 말 없이. 침묵의 말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돌이켜 여자를 보고 “그들이 다 어디 갔소? 당신을 죄 주는 사람이 없소?” 했습니다. 여자가 말하기를 “없습니다.” 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음행의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입에서 “나를 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했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용서를 받아 깨끗해진 양심의 입에서가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도 “나도 당신을 죄 주지 않소, 가시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했습니다. 왜 예수는 그를 죄 주지 않았습니까? 그는 분명히 죄 속에 뒹군 사람입니다. 그러나 속을 본다면 그 여자의 속사람은 목이 타서 사랑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더러운 죄를 지은 것은 바로 사랑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만나겠는지 그 방법을 몰랐습니다. 정신적인 사랑을 그는 육체 속에 찾았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뚫어보셨습니다. 그때 그 한 행동을 옳다는 것 아니지만 그 불쌍한 것 속에 사랑과 아름다움을 찾아 더듬는 손을 보셨습니다. 그 더듬는 손을 잘못 나가게 해서 죄를 빠지게 한 것은 다만 그의 어리석은 자아입니다. 예수는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것을 인간에게 공동으로 있는 비참으로 보시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예수의 첫째 가르침은 용서입니다. 용서하는 심정이 없이는 대화는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동굴 속에 살던 이래 백만 년 동안 무지와 정욕으로 인해 막혔던 인간의 숨이 한 마디 대화로 열렸습니다.
말없는 대화
세째 번 이야기는 저녁에 됩니다. 유대 사람에게는 새 날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일주일 전입니다. 거기도 세 사람이 나옵니다. 자기의 죽을 것을 알고 그것을 제자에게 알려주려 애쓰는 예수의 몸에 값진 기름을 붓던 마리아, 그도 아마 천한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불평을 품는 가롯 유다. 이번에는 셋이 다 말이 없습니다. 예수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찾는 것도 아니고, 수동적으로 참는 것도 아니요, 조용히 사랑의 순간을 즐기시는 태도입니다. 마리아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말로 할 수도 없고 말이 필요치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미 죽음을 당하기로 마지막 결심을 했고 그것을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이번은 평상시와 다르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사랑은 직감을 가집니다. 직감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예수는 일찍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더 많기 때문에 나를 더 사랑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속눈이 열렸고, 그랬기 때문에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는 천연하고 평상과 다른 것이 조금도 없지만, 마리아의 눈에는 그의 마지막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 말 아닌 말로 해 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말로 뭐라 대답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 사랑은 자기 할 것을 압니다. 사랑은 제 말을 가집니다. 사랑만이 사랑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 여자의 그 사랑의 표현이 곧 그 옥합을 깨고 값진 기름을 그의 발에 붓고 제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것입니다. 그 기름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보던 제자에 의하면 그것은 쓸데없는 낭비였습니다. 그 여자는 아마 슬픈 일생을 두고 모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제 쓰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단순한 향기름이 아닙니다. 그의 사랑의 결정입니다. 이제 그것을 쓸 순간이 왔습니다. 이제 그때입니다. 두었다가 쓸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합을 깨쳐서 단번에 다 부어버린 것입니다. 공리주의의 눈으로 하면 이것은 낭비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는 이에서 더 중대한 순간이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 다 쓰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예수는 이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유다의 하는 그럴 듯한 비난을 물리치고 “그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 그가 나를 위해 장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의 속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마리아의 속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사랑의 하나 됨이 도리어 유다의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사랑은 반동을 일으키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샘입니다.
이 대화는 여기서 끝난 듯하지만 사실은 엿새 후 마지막 만찬에서 계속이 됩니다. 이번에 비극의 주인공은 유다입니다. 성경에서 수수께끼가 많습니다마는 모든 수수께끼 중에서도 수수께끼는 유다의 성격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그의 동기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은 합니다마는 그것은 추측뿐입니다. 아무도 이 비극의 주인공에 대해 환하게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해주는 이는 없습니다.
깨어진 전체
그런데 11월 어느 저녁 나는 펜들힐에서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나뭇잎들은 누렇게 단풍이 들었습니다.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이었습니다. 나는 내 방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쓸쓸했습니다. 내 일생은 실패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죽기 전에 내 속을 열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할까? 누구에게다가 할까? 누가 하나 있어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풀어주어야 하겠는데 누가 그것을 할까? 누구에게다가 내 마음을 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일에 성공한 사람은 말할 자격이 있지만 실패한 사람은 아무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실패한 사람이야말로 할 말이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런데 보통 들으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재판장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 부모도 실패자의 심정을 참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혼자 골방에 갇힌 마음이요, 막다른 골목에 든 심정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사람이란, 한 사람만이라도 자기를 알아주고 귀를 기울여준다면 다시 살아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겠는데 하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그날 저녁 내 마음은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땅 위에 계신다면 나는 달려가서 마리아처럼 그의 발밑에 앉아서 내 속을 다 털어 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 같은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마이더스 왕의 이발사 같이 마음이 터질 듯했습니다.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 같은 것을 보기는 했는데, 그 말을 하면 죽인다고 위협을 하고,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을 수도 없고. 그는 견디다 못해 빈들에 나가 땅에 구멍을 파고 거기다 대고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다” 했다고 합니다. 그럼 나도 땅에 구멍을 파고 내 모든 이야기를 할까? 그러고 있는데 웬일인지 창 밖에 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커튼을 젖치고 내다봤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돌아와 앉았습니다. 다시 거기 누가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또 내다 봤습니다. 물론 아무도 있을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는 아니 뵈는데 꼭 저기 나무 밑에 누가 쭈그리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문득 ‘가롯 유다’ 일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습니다. 나는 돌아와 앉아 명상에 잠겼습니다.
유다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를 이해해 주는, 그에게다 자기 속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을까? 마지막 저녁식사 때에 예수께서는 “내 마음이 참 괴롭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의 그 고민은 분명히 유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당신들 중 한 사람이 나를 잡아 주려 합니다.” 했을 때 그는 그때라도 유다가 제발 그 마음을 돌이켰으면 하는 애끓는 생각에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제자들이 다 다만 “주님 그게 저 입니까?” 하기만 했습니다. “내가 당신들 열둘을 택하지 않았소?” 하는 예수께는 한 사람의 배반으로 그 열둘의 전체 사귐이 깨지는 것이 문제였는데, 제자들은 다만 개인적인 생각만 하고 나만 아니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저입니까?”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가 준 헤매는 양의 비유의 가르침을 잊었습니다. 그는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보다 잃어버린 하나가 더 중하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없음으로 전체가 깨지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면 아흔 아홉보다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논리가 서지 않습니다. 열 두 제자는 순전히 개인주의였습니다. 그들이 정말 전체의식을 가졌다면 “저입니까?” 하고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체가 깨지는 것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생을 참으로 이해 못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실패는 결코 한 사람만의 실패가 아닙니다. 전체의 실패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이 베드로의 시킴을 받아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그것이 누군가 물었을 때 예수는 포도주에 떡을 찍어주면서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슬픔으로 “이제라도” 하는 마음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떡을 받아들고 먹을 새도 없이 어둠 속으로 나갔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아마 견딜 수 없는 무슨 실망, 역정이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유다는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회계를 맡겼을 것입니다. 그는 똑똑했고 이성적이었기에 아무래도 현실 문제에 대해 눈을 감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한 제자들이 항상 예수 옆에 가까이 돌고 마지막 장면이 임박한 때에도 하늘나라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을 보았을 때 아마 구역질을 느끼지 않았나? 크게 반발까지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마 따로 돌면서 생각하기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 한 친구와의 사이에 대화의 길이 막혀 버렸을 것입니다. 대화는 정신생활의 호흡입니다. 대화가 한번 끊어지면 마치 통풍이 끊어진 것같이 곰팡이가 돋기 시작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면 의심, 억측, 악의가 성해 그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예수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여러 번 주의를 주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마리아가 향유 붓는 것을 보고 크게 자극을 받은 듯합니다. 이것은 이상주의에 현실주의의 반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왜 이것을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느냐 ?” 할 때 거기는 항의도 있고 빈정댐도 있습니다. 복음 기자는 유다를 도둑이라고 비난하지마는 내 생각에는 그것은 동정은 조금도 없는 심정에서 나오는 말이요 너무 가혹한 판단인 듯합니다. 그래서 열 하나가 제각기 “저입니까? 저입니까?” 하는 것을 들었을 때 유다의 마음은 그만 결정적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이 반발이 되어 예수께서까지 아주 멀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주는 빵을 먹을 겨를도 없이 나가버렸습니다. 그 어둠 속으로 나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날까지 나는 유다를 배반자로만 알고 저주받아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달리 생각하게 됐습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 그 가슴이 터질 듯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하나 중 한 사람도 따라 나가며 “무슨 일이냐, 왜 그렇게 달아나느냐?” 묻지 않았습니다. 스승을 저버리는 것이 하루아침에, 한때 기분에 될 수가 없습니다. 열둘이 같이 먹고 자고 고락을 같이하며 같이 전도를 하며 가깝게 살아왔습니다. 스승의 가르치는 대로 한 포도나무의 여러 가지로 하나가 되어 한 몸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잘못의 책임을 한 사람의 어깨에만 지웁니까? 유다는 사실은 전 인류의 짐을 맡아 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마치 화산의 불이 지구의 깊은 속에서부터 전 지구의 압력으로 터져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깊은 바탈의 알 수 없는 폭발입니다. 만일 열 하나가 따라 나가서 그를 위로하고 그 말을 들어 주었더라면 일은 그렇게 비극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의미로는 예수를 죽인 것은 열 한 제자입니다. 대화가 끊어질 때 얼마나 참혹한 것입니까? 그때까지 예수는 대화의 길을 다시 트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아주 죽음의 길로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유다를 따라가는 예수 (친구여!)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는 지금 어디 계실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가 구름을 타고 오려니 하고 하늘을 쳐다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수증기와 대기 오염의 쌓인 것뿐입니다. 그가 어디 계신다면 그것은 유다가 있는 곳일 것입니다. 모욕과 고뇌에 파묻혀 있는 유다 옆에 그는 가 있지 않을까? 왜? 지금도 그는 그와 대화를 열어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마음을 열어야 세계 구원은 옵니다. 사람들은 천당 지옥 소리를 하지만 유다가 지옥 밑바닥에서 이를 빠드득 빠드득 갈고 있는 한은 천당이 무사할 수 없습니다. 그 이빨 가는 소리에 천당이 흔들흔들할 것입니다. 악마의 마지막 아들이 놓여날 때, 그때에야 온 인류의 천국은 옵니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는 순간도 유다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예수는 유다를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마 유다를 만나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는 유다의 갈 곳이 죽음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만나려면 자기도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유다의 마음은 열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한 사람은 상을 주고 악한 사람은 벌을 줌으로써 이 세상을 이끌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종교에서도,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법으로는 이 세상을 다스려갈 수가 없어졌습니다. 낡은 사고방식은 “못된 놈 집어치워라. 그럼 세상 잘 된다”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형제 눈 속의 티를 빼려면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선은 한 개인의 선이 아니라 전체의 선이요, 악도 한 개인의 악이 아니라 전체의 악입니다. 선악이 개인의 것이라면 문제가 간단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전체의 것입니다. 성냥개비 하나를 훔쳤어도 인간 전체가 들러붙어서 한 일입니다. 전체를 동원하지 않고 악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전체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전체로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서로의 대화 더구나도 실패한 사람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유다의 손을 잡고 지옥 밑에서 올라오는 날 그날은 언제일까? 그가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면 다시 옵니다” 했을 때 그것은 아마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내 임이 다섯입니다. 고유 종교, 유교, 불교, 장로교, 또 무교회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나는 현장에서 잡힌 갈보입니다. 도덕과 종교로 비판을 받을 때 나는 한 마디의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일곱 악마를 그의 발밑에서 고백해야 하고 내 마음의 옥합을 깨뜨려 단번에 부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유다입니다. 나는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내 가족과 스승과 친구에게 못한 것을 그의 앞에는 내놔야 합니다. 나는 온 역사의 압력을 내 약한 등뼈 위에 느낍니다. 한국도 하나의 사마리아 계집이요 갈보요, 마리아요, 유다입니다.
아니오. 세계가 결국은 무지와 정욕과 부패와 불신의 겹친 실패 아니겠습니까? 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냉랭한 키스를 입에 받으면서도 “친구여!” 하는 그이를 만날 것입니까?
씨알의소리 1971. 8월 3호
저작집30; 15- 15
전집20; 3- 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