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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金東三(1878 ~ 1937】 "만주 호랑이, 무장독립운동 3대 맹장, 일송 김동삼 장군"
친일작사가 윤해영 친일작곡가 조두남이 지은 선구자의 노랫말 중의 일송 (一松) 이라는 말이 들어 있어 그럴리는 없겠지만 일설에 의하면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으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롤모델이라고 하며, 김좌진·오동진과 더불어 만주지역 민족주의 진영의 대표적 무장투쟁론자로서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一松) 김동삼. 그의 호처럼 척박한 대지에 꿋꿋하게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처럼 지조와 기개의 한생을 살았다. 그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어세우고자 했던 통합운동의 주역이었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둘러싸고 분파 간의 갈등이 심했던 독립운동 내부의 좌우 어느 쪽에서도 비난을 받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인물로서 통합운동의 구심 역할을 한 거목이었다. 그의 본명은 김긍식(金肯植)이지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김동삼(金東三)으로 개명했는데 이는 당시 만주지역 길림성·봉천성·흑룡강성을 일컫는 동삼성 독립운동 지도자와 단체들의 단결과 통합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출생: 1878년 6월 23일, 안동
사망: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
본명/이명: 긍식(肯植)/종식(宗植)
자/호: 한경(漢卿)/일송(一松)
경력: 서로군정서 참모장, 대한 통의부 위원장, 정의부 참모장
관련 단체: 협동학교, 경학사, 신흥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족회, 국민대표회의, 혁신 의회
쌀알만 한 독립운동의 기운을 만주 벌판의 불길로 만들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김동삼 장군, 7년 옥고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시기 전 남기신 유언
1878년 6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서 아버지 김계락과 어머니 영해 신씨의 2남 1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본명은 긍식이고, 종식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한경, 호는 일송이고, 김동삼은 만주로 망명한 뒤 사용한 이름이다.
광산 김씨 김노창의 딸과 혼인했으나 장녀를 낳고 죽음에 따라, 반남 박씨 박순부와 재혼하여 장남 정묵과 차남 용묵을 두었다.
가학을 이어받고, 서산 김흥락에게 유학을 배웠다.
1905년 20대 중반의 나이에 서울을 드나들며 민족 문제와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사상적 변화를 보이다가 가장 보수적이었던 안동 지역 계몽운동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전통 질서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은 안동에 혁신의 물길을 끌어들이는 작업은 다른 지역에 비해 어려웠다.
10년 전에 서울에는 신식학교가 들어섰지만, 안동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서는 성리학적 질서가 흔들림 없었다.
그럴 즈음 상경하여 새로운 문물을 접한 류인식이 1904년에 계몽운동을 시작하다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1907년 3월 다시 시도한 것이 협동학교 설립이었다.
1907년 3월 류인식·김후병·하중환 등과 함께 내앞마을에 3년제 중등과정인 협동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앞장섰다.
내앞마을 의성 김씨 종손 김병식이 교장을, 선생이 교사를 거쳐 교감을 맡았다.
선생과 협동학교 교직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1910년)
맨 뒷줄 왼쪽이 김동삼 선생
협동학교는 영남 사회가 변하는 교두보이자, 새로운 깃발이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협동학교 설립과 발전상을 보도하고 격려하였다.
유림의 압력과 예천 의병의 공격으로 교사들이 폭살 당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협동학교는 젊은 신지식인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이들이 경북 지역 곳곳으로 계몽운동을 확산해 나갔다.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격려 글을 게재하였고, 신민회에서 교사를 파견하였던 사실은 이 학교에 쏠린 기대감을 잘 보여주었다.
협동학교 경영 일선에 나서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민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협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서상일과 안희제 등을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경상도 일원의 계몽운동가들과 연대하여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 사실은 서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약한 사실과 계몽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910년 8월에 나라가 망하자, 국내에서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키운 뒤에 국내 진공을 감행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후반 집안 동생인 김만식을 만주로 파견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필요한 기초 조사를 시킨다음, 같은 내앞마을 출신이자 족숙인 김대락과 논의하고, 만주 망명 계획을 확정 지었다.
191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김대락·이상룡 등이 가족을 이끌고 출발하였고, 뒤이어 망명객이 줄을 이었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신의주로 이동하였다.
걸어서 압록강을 건넌 뒤,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망명길이었다.
내앞마을 의성김씨 문중, 김대락의 매부인 이상룡이 이끄는 고성이 씨 문중 각각 150명 정도씩 만주로 향했다.
또 이들과 혼반 관계인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 씨, 안동의 흥해 배씨,
그리고 영양 주실 마을의 한양 조씨 문중 등이 대규모로 참가하였다.
문중 단위, 그것도 혼반으로 얽힌 큰 단위가 움직인 것이다.
김동삼 선생의 가계. 선생 대(代)의 7형제 중 5형제와 숙부 뻘인 김대락 선생 등이 대거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이 가운데 5명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정해질 정도로 가문 전체가 헌신했다.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류허현 삼원보에 도착하여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 결성에 참가하는 등, 초대 사장 이상룡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이는 안동 출신 인사들과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이 힘을 합쳐 벌인 사업이었다.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면 동포들을 이주시켜야 하고, 경작지가 필요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했다.
그 사업을 주도해 나갈 조직이 바로 경학사였고, 장차 독립운동의 중추적 인물이 될 인력을 양성한 기관이
신흥강습소와 그를 이은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였다.
신흥강습소나 그를 이은 신흥학교가 협동학교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에서 따서 김동삼, 동생은 김동만으로 바꾸었다.
1914년에 백서농장을 건립하고, 장주가 되었다.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생 등 385명을 인솔하고, 둔전형 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두산 서쪽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다고 ‘백서’라는 이름을 붙였고, 군대 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농장’이라고 위장했지만, 사실상 병영이었다. 망명 이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군대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은 첫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3월 지린에서 민족대표 39명 이름으로 「대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상룡과 더불어 서명에 참여하였다.
이들 39명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물을 비롯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의 지도자급 인물들이었다.
이 선언 발표 직후 상하이로 가서 4월 10일부터 이튿날까지 열린 회의에 참석한 2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가하였다.
국가 이름을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이를 운영할 조직으로 임시정부(정부)와 임시의정원(의회)을 구성하였다.
연호도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 공화제를 선택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였으니, 이는 제헌헌법이요, 이날 회의는 곧 제헌의회였다.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 인선까지 마친 다음 활동 본거지인 서간도로 되돌아갔다.
당시 서간도에는 세 개의 조직이 결성되어 독립운동 전선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종래의 부민단이 한족회로, 백서농장 군영이 서로군정서로, 고산자에 있는 신흥중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각각 개편하였다.
먼저 한족회는 부민단의 류허·퉁화·싱징현 대표들이 1919년 4월 삼원보에서 결성하였다.
한족회는 곧 백서농장을 서로군정서로 발전시키고 군정과 민정 이원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보로 돌아와 한족회에서 서무 사장을 맡았다.
이어서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였고, 한족회 서무 사장 자리는 같은 마을 출신이자 집안 조카인 김성로에게 넘겨주었다.
또 학무 사장은 김대락의 아들이자 집안 동생인 김형식이 맡았다.
자신은 백서농장 장주를 거치면서 독립운동 진영의 지도적 인물로 자리 잡아갔던 것이다.
서로 군정서는 당초 군정부 조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 정부 외곽 조직으로 위상을 정리하여 서로 군정서가 되었고, 이상룡이 최고 책임자인 독판을 맡았다.
한족회가 민정 기관이라면, 서로 군정서는 군정 기관인 셈이다.
1920년 여름부터 일본군 침략이 간헐적으로 자행될 때,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서 사령관 지청천과 함께 300여 명의 서로군정서 독립군을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7월 29일에는 부대를 안투현 삼인방에 주둔시키는 한편, 8월에는 왕칭현 서대 파의 북로군정서를 방문하여 작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 후 서로 군정 서군 이 청산리대첩을 치른 후 북상하여, 미산에서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10여 개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 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러시아로 넘어갈 때, 서간도에 남아 독립 전선을 재정비하였다.
서간도에서도 군사력을 기르고, 조직을 정비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보복으로 서간도나 북간도 지역 한인 사회는 참변을 겪었다.
1920년 벌어진 경신참변은 장군의 가족에게도 그대로 들이닥쳤다.
삼원보 삼광 소학교 교장으로 활약하던 동생 김동만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에 앞서 청산리대첩 와중에 집안 조카인 김성로가 전사하는 비극도 맞았다.
장군은 김형식과 논의하여 집안 일가들을 북만주 닝안현 주가 둔(현재 닝안현 강남 조선족·만주족 공동 자치향)으로 옮기고, 고향에서 사촌 동생 김장식을 불러들여 가족들을 이끌도록 하였다.
또 김정식·김창로·김성로에게 군자금 모집 임무를 주어 국내로 파견한 다음, 자신은 류허현과 싱징현 일대로 옮겨 활동하였다.
1922년 6월 한인 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남만 통일회를 주도하여 합의를 도출했으니, 그 결실이 통군부였다.
이후 8월 30일 전만 한족 통일회가 결성되고, 이 무렵 통군부는 통의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장군은 통군부 교육부장을 거쳐 통의부 총장을 맡았다.
청산리대첩 이후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거친 다음, 만주 지역 군사 세력을 통합하려 했던 노력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1921년 이후 준비되어온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 15일 사이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대표가 모여, 오랜 기간, 민주적으로 진행된 독립운동자 대표 총회였다.
국내외 지역대표와 단체 대표 400명 정도가 집결했는데, 의결권을 가진 대표가 130명을 넘을 만큼 규모가 컸다.
1921년 이후 침체 현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 쇄신 방안을 찾던 이 회의에 서로 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에 선출되었다.
1923년 5월 말부터 국민대표회의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절하게 개조하자는
개조파, 그리고 이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로 나뉜 것이다.
장군은 김형식과 함께 개조파에 속했다.
별개의 정부 수립은 미루고, 일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통할 체계에 맞게 개조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두 주장이 맞선 상태에서 5월 15일 만주에서 대표를 소환함에 따라 의장에서 물러나 만주로 되돌아갔다.
6월에는 창조파가 가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만주로 돌아온 1923년 가을, 만주 지역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는 작업이 급선무로 대두하였다.
북경군사통일회의나 국민대표회의가 뚜렷한 결실을 못맺자, 이상룡과 양기탁이 다시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돌아오자마자 통합 작업에 매달렸다.
1924년 7월 10일과 10월 18일 10개 단체 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주비회를 열어 의장에 선임되었고, 11월 24일 정의부를 탄생시켰다.
정의부는 참의부·신민부와 함께 만주 지역 3대 조직 가운데 하나였고, 류허현 삼원보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하여 1925년 만주 지역 한인 사회는 민정과 군정 기능을 갖춘 3부가 정립하고, 독립군 양성과 무장력 향상 등을 도모해 나갔다.
정의부에서 중앙 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안동에서 함께 망명해 온 이상룡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었고, 상하이로 부임한 이상룡이 장군을 국무 위원으로 임명했지만, 만주 항일투쟁 현장을 비울 수 없어 부임하지 않았다.
1927년 이후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고, 정부를 정당 중심으로 운영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이념상 분화된 좌우 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이란 의미를 가졌다.
1926년 10월 안창호와 원세훈이 베이징에서 대 독립당 조직 북경 촉성회를 조직한 뒤에 상하이와 난징, 우한과 광저우로 확산되어 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되는 분위기에서 만주 지역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진행되었다.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과 통일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에 앞장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27년 4월 1일 정의부 간부 30여 명과 농민 호조사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상호부조 속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굳게 만드는 등 농민조합 운동의 실마리를 열었던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이어서 4월 15일 지린 남쪽 융지현 신안툰에서 민족 유일당 촉성 회의가 열리자,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어서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 통합회의를 개최하여,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조직 결성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자, 새로운 통합 방법을 찾아 나섰다.
1928년 7월 삼부 통일회의가 결렬되기 직전 정의부를 이탈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에는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뽑혔다.
그러나 1929년 4월 국민부가 출범함으로써, 민족 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고문을 맡았다.
1931년 일본군의 만주 침공 직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안동 출신이자 사돈인 이원일, 경북 영양군 출신 남자현과 항일 공작을 추진하려고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붙잡힌 것이다.
1932년 9월 국제연맹 조사단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를 방문하였을 때 남자현이 무명지를 잘라 독립을 호소하였고, 1933년 2월에는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 무토 처단을 시도한 사실이 이들의 투쟁 성향을 말해준다.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국내로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경성감옥으로 옮겨졌다.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일 감옥에서 순국하셨다.
평소 그를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의 장례는 만해 한용운이 주선했다. 자신의 거처인 성북동 심우장으로 김동삼의 유해를 옮기고 5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한용운은 영결식에서 방성대곡했다. 그가 일생에서 눈물을 흘린 적은 이때 한 번뿐이었다고 한다. 한용운은 “유사지추가 도래하면 이분이 아니고는 대사를 이루지 못한다. 일송을 잃은 우리 민족은 큰 불행이고 손실”이라고 했다.
'내가 죽어도 뼈를 묻을 땅이 없으니 유골을 불살라서 재를 만들어 한강에 띄우면 영혼이 동해 바다에 떠돌다가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지켜보겠다.' (경사유방)
이것이 일송이 옥중에서 남긴 유언이었다. 1937년 3월 3일(4월 14일?) 차디찬 감옥에서 나라를 위한 일생을 마치니, 그의 나이 60세였다. 일제는 일송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발표하지 않았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것은 물론 모든 국민에게 그들의 침략전쟁에 협력을 하도록 강요를 하던 때였으니, 그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그대로 버려 둔 채 있었다. 이때 한 간수가 이원혁에게 몰래 알려 류주희와 함께 감옥에 가서 엄중 항의 끝에 시체는 인수받았으나 장례를 모실 길이 없었다. 이때 만해 한용운이 달려와서
“내 이 어른을 내 집에 뫼 시는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알겠다.”
고, 하면서 자신의 살고 계시던 성북동의 심우장(서울시 지정 문화재)에 서둘러 안치하였다. 이 소식이 몰래 몰래 전해지자 서울에 살던 옛 동지와 알고 있던 사람들이 40여명이나 심우장에 모여서 며칠 밤을 빈소를 지키며 예를 갖추어 장례절차를 마치고, 본인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여 그 유골을 한강에 뿌렸다.
시인 조지훈은 일송선생 추모시에서
아 철창의 피눈물 몇 세월이던가
그 단심 영원히 강산에 피네
심상한 들사람들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일송선생 추모가 일부 조지훈시, 이강숙곡>
독립기념관의 임시정부 관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의 밀랍인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맨 윗줄에 깡마른듯한 얼굴에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일송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혜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친일시인 윤해영이 시를 쓰고 친일 작곡가 조두남이 곡을 붙인 이 곡은 그 배경은 뒤로하고 일송 김동삼 장군의 결기를 읽어볼 수 있다. 나는 이 노래가 만주국이 아닌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민족의 정서가 베인 곡이라 여기고 싶다. 이 노래를 일송선생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를 바란다. 그 거친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일송선생이야 말로 우리 대한민국이 있게 한 기둥이요, 선구자이시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 장군이 심우장에서 시신을 장사지낸 일송장군에 대하여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