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문화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
1.생활과 주점
2.80년대 대학가 주점-회기집의 추억
3.주모- 또 하나의 엄마
4.신자유주의 체제와 술집 문화의 변화
1.생활과 주점
아주 가끔 새벽에 술이 당길 때가 있다. 그럴 때 청량리 시장을 찾는다. 내가 사는 동네 술집은 새벽녁에 문을 열 리가 없어서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 술집에 대한 나의 추억이 발길을 당기는 곳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청량리 수산시장에는 매일 새벽 어시장이 선다. 이 곳 상인들은 자정부터 지방에서 올라오는 어물을 받고 짐을 부리고 정돈하다보면 금방 새벽이 되고 이 때는 피곤과 허기가 몰려올 시간이다. 그럴 때 잠시 들러 큰 컵으로 소주 한잔 가득히 따라 마시고 얼른 나서는 곳이 있다. 자리에 앉아 여유를 피우며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바쁜 사람들은 그냥 선 채 한숨에 벌컥 들이키고 나간다. 문자 그대로 선술집이다. 시내의 고급 바에서 손님이 자기 양주 병을 가지고 있듯이, 소주 한 병을 가지고 수시로 드나들며 마시는 분들도 있다.
내가 자주가는 집은 '보통식당'이란 상호의 식당이다. 선술집 겸 밥집이다. 이곳은 모든 게 싸고 인심이 후하다. 단 돈 육천원이면 푸짐한 식사상을 차릴 수 있다. 오늘 아침에는 꽃게탕에 볼락 튀김 그리고 각종 신선한 나물이 정결하고 맛깔스럽게 요리되어 나왔다. 가게 안은 허름하고 주변환경도 정결하다고 하기엔 무리지만, 식단만큼은 깔끔하고 맛있다.
수산물 시장에 들어서면 비릿한 생선 냄새가 맑은 새벽 공기를 타고 흐른다. 골목 양쪽에는 갖 잡은 듯 싱싱한 각종의 물고기가 즐비하다. 후각과 시각 모두 입맛을 자극한다. 식당에 들리기 전, 반드시 준비할 꺼리가 있다. 만만한 횟거리를 구입하는 것. 간단히 손질해서 먹을 수 있는 병어, 문어, 낙지, 골뚜기, 멍게, 해삼 따위가 대상이 되고, 오늘 아침에는 병어를 선택했다.
백반을 주면하면 이 정도의 횟거리는 무료로 손질해 준다. 딸려 나오는 초장도 무료이다. 가끔 내가 몇 천원 더 얹어 계산하기도 하지만, 주인이 먼저 서비스 비용을 청구하는 경우는 없다.
이런 술집은 서민들 생활의 일부이다. 수산시장 상인들은 이 곳에서 술과 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웃 상인과 환담을 나눈다.
유흥과 오락을 위해 찾는 요즘 유흥가 먹자골목이나 대학가의 술집과는 술을 판다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술 문화도 고객도 주인 행세도 판이하게 다르다. 이 곳에는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얄팍한 상업적 계산보다는 이웃과 고객을 배려하는 주인장의 따뜻한 인정미가 배어있다.
어느 시대나 각양각색의 술집이 다양하게 존재하겠지만, 나는 이것을 생활형 술집과 유흥형 술집으로 양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활형이란 서민들이 삶을 영위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고민을 해소하고 정서의 정상적인 순환을 위해 찾는 주점이다. 반면 유흥형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향락과 사교를 위해 모이는 곳이다.
선술집은 생활형 술집의 대표적인 것으로 서민들 생활공간 속에서 아직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2.80년대 대학가 주점-회기집의 추억
80년대 대학가 주점은 대학 문화의 일부라 할 정도로 우리들 삶과 밀착되어 있었다. 전두환이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아 무단으로 통치하던 시절, 대학생들은 가장 큰 반독재 세력었고, 당시 대학문화의 주된 화두는 '독재타도'였다. 학생들은 주점에 모여 술을 마시며 군부독재를 성토하고, 노래를 부르며 투쟁의지를 북돋우는가 하면 가끔 세미나라 불리던 사상교육을 이 곳에서 진행하기도 하였다.
대학가 주점은 이 시기 대학과 연관된 사람들 사이에서 자리잡은 전형적인 생활형 술집의 하나로 정착하였다.
그래서 대학마다 학생들이 단골로 모이는 술집들이 있었다.
나는 회기동에 소재한 대학을 다녔고, 대학 정문으로 통하는 골목 삼거리에 '회기집'이란 간판이 걸린 주점이 있었다.
큰 키에 말상의 긴 얼굴을 가지고 진한 경상도 대구사투리를 구사하는 아줌마가 주인이었다. 다소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면서도 인심이 후해서 학생들에게 외상술을 잘 줬다. 이런 주모님의 후한 인심 덕택에, 돈이 없어 술을 마시지 못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기억하는 당시 대학생활은 낭만이 가득한 곳이 아니라, 번민과 고뇌로 가득한 고해(苦海)였다. 학교 정문은 최류가스가 난무하고, 학교 교정 곳곳에 짭새라 불리던 사복경찰들이 잠복해 있고, 수시로 공안 당국에 누가 끌려 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우리가 술을 마시는 것은 괴로움과 분노의 표현이었다. 진짜 기분 더러운 날은 아침 등교길에 한잔, 대낮에 낮술 한잔, 저녁 정식 술판에 또 한 잔, 하루종일 술동을 이고 살았다. 권모, 이모,김모,박모, 조모,홍모....선구자적 자세로 술을 마셔대던 기라성 같은 친구들이다. 술판 전위부대였다. 숱한 우여곡절을 격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대학을 졸업해서 중견 사회인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주점문화를 통한 위로와 격려의 공을 빼놓을 수는 없다.
3.주모- 또 하나의 엄마
통상 생활형 주점의 여주인은 이모(혹 엄마) 혹은 아줌마로 호칭되었다. 유흥형 술집의 그것이 마담, 미스 모로 다소 성적인 관계를 시사하는 것이라면, 생활형 호칭은 친족관계의 친밀성을 드러낸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선술집 아주메(아줌쇠)의 제일가는 조건은 이해심이 많아야 한다. 이런 저런 사연의 쓰라린 상처를 가진 뭇 남성들을 모두 품어줄 수 있는 도량이 넓을 수록 손님을 끌기 마련이다. 마치 젖동냥하는 아이가 유모를 찾듯, 인생살이에 지친 남자들은 이런 여인네를 주모(酒母)로 받들며 따라 다닌다. 관대한 이해심을 베푸는 것은 선천적 기질만으로는 부족하다. 타고난 어진 성품에 더하여 속칭 산전수전으로 불리는 세파를 두루 겪어, 젊은 시절 에고(ego)의 모난 구석을 모두 깍고 연마하여, 어릴 때의 생마음이, 마치 두엄 속에서 삭힌 홍어처럼, 푹 익은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발휘될 수 있는 성품이다.
칠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량리 수산시장 보통식당 주인 할머니는 전형적인 주모 마음새를 가진 분이다. 할머니는 일년 삼백육십오일 거의 쉬는 날 없이 가게를 연다. 몸이 힘든 때는 자신도 쉬고 싶지만, 밥을 먹으러 술을 마시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헛걸음 치고 돌아가는 모습이 안스러워 쉴 수가 없다고 하신다. 자아를 버린 이런 헌신적인 모습 속에서 나는 가끔 살아있는 부처를 발견하고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일반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런 할머니들 중에는 인생이 기구한 분이 많다. 일찍 남편을 잃거나, 남편에게 소박맞거나, 아들이 요절하는 등 나름대로 쓰라린 한을 가진 분들이 대다수이다. 고객으로 찾아오는 뭇 남자 손님들의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고 따뜻한 위안의 말로 품어주는 것은 기구한 한을 품고 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동병상린이 아닐까.
세상에서 남자들을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직업이 주모라고 생각한다. 남자 손님들의 인간관계, 인심, 주머니 사정 심지어 술버릇과 취한 후 드러나는 잠재의식까지 모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을 팔면서 알게 된 고객의 정보에 대해서는 일체 발설을 하지 않는 것이 이 분들의 불문율이다. 보고도 못 본 채 알고도 모르는 채, 누구를 헐뜯거나 비방하지 않는다. 뭔가 답답한 일이 있을 땐 그저 말없이 혼자 담배만 뻐껌 거릴 뿐이다.
파란과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를 살아온 뭇 남성들이 정신적 안정을 잃지 않고 견디고 살수 있었던 데에는 이 분들의 공이 크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4.신자유주의 체제와 술집 문화의 변화
90년대 IMF 환란이후 한국사회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금융개방과 함께 부동산,증권,보험업 등 기생적 성격의 사업이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전통적 제조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사회의 금융화는 급속하게 진행되고, 이전까지 자본이 침투하지 못했던 인간관계의 영역까지 자본관계에 포섭되어 해체되고 있다.
생활형 주점에 존재하던 여유와 낭만과 훈훈한 인심은 냉혹한 금융자본의 시각으로 볼 때는 합리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한 인적/감정적 자원의 낭비로 간주된다. 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 자원에 대한 침탈은 원시적 자본축적의 연속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과도한 임대료 부담이 구조화된 조건에서 서민들 휴식공간인 생활형 주점들이 존립할 근거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서민들을 위한 생활형 주점들은 급속히 사라지는 한편, 부유층을 위한 유흥업 술집만 번창하고 있다. 양극화가 술집문화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조만간 서민들은 선술집에 드나드는 것마저 사치로 여겨지고, 집에서 혼술하거나 일본처럼 자판기에서 술을 사먹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예견된다.
한국인은 음주를 좋아하고 실제 많이 마신다. 급속한 산업화와 군사정권 하의 스트레스를 한국의 서민들은 독특한 생활형 주점문화를 통해 극복해 왔다. 서민들은 이런 공간을 통해 서로 교감하고 정서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해 왔다.
IMF가 강요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한국서민들의 생존근거를 뿌리채 흔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주점의 몰락을 경제발전에 따른 불가역적 추세로 오해한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흥주점은 줄어들고, 생활형 주점들은 오히려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 서민들의 정신적 안정과 연대를 위한 정서적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향락은 부유층의 전유물로 변화하고, 서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최후의 정서적 보루마저 파괴된다면 어떤 결과가 남을가? 노동도 감정도 인간관계 마저도 자본화된 세상에서 인간은 과연 좀비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제시대 선술집 카툰
청량리 수산시장 '보통식당'의 상 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