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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1;1-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종려주일. 2021. 3. 28.
1.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은 예언의 성취와 함께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오늘이 무슨 주일입니까? 신앙인은 반드시 기억하고 알아야 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이고 부활절 전 주일입니다. 이제부터 고난일주일이 시작됩니다. 고난의 시작이 예루살렘인데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어떻게 들어가셨느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실 이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깔아주고 종려나무 가지를 펴면서 요12;13,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환호성을 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시면서 3-4번 정도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여려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1-1.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은 이미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의 성취입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의 선지라가 선포하는 왕의 출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였습니다.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기다리고 바라던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예루살렘입성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한 사건이 됩니다. 예루살렘 시온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합니다.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데 호산나를 부릅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심입니다. 그 왕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데 나귀를 타십니다. 그 나귀는 작은 나귀새끼입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냥 우연히 교회에 나오고 그냥 우연히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주님의 은혜이지만 예수님께서 예언하시고 섭리하시고 뜻하신 내용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 살아가면서 믿음 안에서 어떤 교제를 하고 주어진 어떤 길을 걷는 것 또한 예수님의 뜻하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늘 항상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부탁하신 예언의 성취로 사는 것이고 성취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성취는 미래를 위한 그 어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집니다만 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을 위하여 하는 시작입니다.
1-2.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예수살렘에 입성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임을 대외적으로 공포하는 사건이고 시점입니다. 지금까지는 갈릴리와 나사렛의 제자들과 백성들의 사역이었습니다. 힐링과 프리칭과 티칭이 제한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하시는지 일부만 알았습니다.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랐습니다. 어렵고 고난을 받고 힘이 들고 도움이 없이는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의 인정이었습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사실 세상과 백성들에게 알리는 시점이고 사건이고 공포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11,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증언합니다. 누구이심을 드러내고 어떤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지 분명하게 세상과 사람들이 알게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일을 단독으로 행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나갈 때 혼자하지 아니하시고 꼭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는 노아에게 알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아브라함에게 알립니다. 창18;17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려 하실 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사랑하는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1년 뒤에 일어날 일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6개월이나 한 달이나, 하루 뒤의 일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모르기 때문에 앞날이 궁금하고 불안해서 이리 저리 다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앞의 일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꼭 해야 할 일과 필요한 일들을 알려주시고, 위험한 일과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를 알려주시고, 알지 못할 때는 징조로 보여주십니다. 오늘이 그렇습니다. 종려주일로부터 이제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과 함께 선지자 되심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거치면서 예수님을 믿는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어떻게 가르칠까요? 무엇으로 가르칠까요? 오늘날은 제사장의 기능이 확대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배를 드리고 매일 찬송을 하고 언제 어디서나 기도를 합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기능은 축소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선지자의 기능을 증거 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르치고 지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 입성은 단순한 입성이 아니고 선지자 되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미리 신호를 보내주십니다. 신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을 주시려고 보내시는 신호이고, 하나는 심판하시기 전에 주시는 경고의 신호인데 준비하고 막기 위한 신호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말씀에 예언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고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지자 되심에 대한 선포를 기억하고 은혜와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일하심과 말씀하심으로 변했는데 지금도 그렇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선지자 되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고 회복을 주시고 일어날 힘을 주시고 피할 갈과 복 받을 사건을 알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선지자의 기능이 되살아나고 드러나고 선포되는 그래서 기회와 회복과 일어날 힘을 얻고 피할 길과 복 받을 사건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예루살렘의 입성은 육체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의 마지막 사역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하신 마지막 사역이 무엇입니까? 그 것은 예루살렘입성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죽음을 당하신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 것이 사역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사역의 완성 뒤에 부활의 영광이 또 다시 나타납니다.여러분, 힘이 드시고 괴롭습니까?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주여! 주님이 받으시는 고난과 수난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서 고난의 날을 보낸 엘리아처럼, 시내 산에 올라가 금식하며 기도한 모세처럼, 거치른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그래서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슬픔에 잠기던 길 예루살렘의 그 거리, 죽음의 거리 골고다 언덕에서 붉은 피 흘리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기도와 참회와 절제와 경건한 마음으로 냉혹한 현실에서 내 자신을 성찰하고 십자가를 묵상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 앞에 빚 진자가 빚 갚은 자의 심정으로, 마음속에 버렸던 십자가와 쓰러졌던 나의 십자가를 다시 세우는 신앙과 영적 성장의 뜻 깊은 사순절과 고난주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 것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노래하고 호산나를 외치고 고난 가운데 드러나는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리고 부탁을 드립니다.
2.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의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들의 생각입니다. 먼저는 제자들과 무리들의 생각과 행동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예루살렘 입성 이전이나 이후가 같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호산나 찬양을 하고 찬송을 합니다.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말없이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입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자들의 마음이 드러나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아끼는 척, 소중한 척, 못 들고 못 본 척, 모르는 척 했습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갑니다. 떠나고 뿔뿔이 흩어지고 부인을 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새로운 시작이 이렇게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제자들과 따르던 무리들에 의해서요. 이 것이 이들의 신앙이고 이들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격동의 시대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배려하고 걱정하고 관심이 있고 도와주는 척. 사랑하는 척, 위로하는 척, 순종하는 척 했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척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이고 척이 아니고 진심이고 삶입니다. 갖은 고문을 당하시고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생명을 드려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53;4-9,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고난의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7마디 표현을 합니다. 순서대로 봅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
눅23;43,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요19;26-27,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혼자 그 현장에 남아있던 요한에게 네 어머니니라.
마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요19;28, 내가 목마르다.
요19;30, 다 이루었다.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3. 저의 간증인데 찬양 먼저 하고 간증을 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 속에 빛을 비추어, 죄악 속에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
구해 내게 하시려고 택한 이 가정, 임마누엘 은총 속에 귀히 쓰시리.
상처받고 가난한 이 소외된 자들, 위로하고 소망 주며 주께 인도해
구원 얻게 하시려고 기름 부으사, 야웨닛시 승리 가정 삼아 주셨네.
열과 성을 다 바쳐서 주님 섬기며, 뜨거웁게 사랑하니 큰 복 임하리
자자손손 창성하고 빛나는 가문, 야웨이레 은혜로서 인도 하시리.
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치 않으며, 목숨 걸고 충성하니 영광 넘치리
금생 내세 만사형통 성공을 이뤄, 야웨살롬 영생 복락 길이 누리세.
저는 제가 하는 건설업이 너무나 잘 되어서 저한테 빌딩과 주택을 의뢰하려면 6개월에서 3개월 정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1993년 겨울에 하루는 일면식도 없고 알지 못하는 교회 집사님께서 저를 찾아 왔습니다. 장로님! 사장님! 제발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면서 도면을 저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건축해 달라고요. 그런데 정상적인 건설업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규칙이 하나 있는데 다른 분이 설계한 건물은 시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을 했는데도 그 집사님께서 근 5개월 이상을 저의 건설 현장마다 좆아 다니면서 간청을 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집사님의 간청을 들어 주지만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 것은 착공과 상낭식과 준공 때에 반드시 3번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설교는 반드시 저를 케어하시고 인도하시는 영적 아버지이신 제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축도와 기도는 집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 하시면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학을 하려고 턴 할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만나서 부터 25년 동안 목사님을 한 번도 마음 아프게 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목사님께서 저의 건설 현장마다 설교를 하시고 저는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목사님예게 맹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건을 흔쾌히 수락을 하고 1994, 3. 19일 건물이 세워질 현장에서 착공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축도로 마무리 되면서 접대를 하려고 할 때, 그 예배장소에서 그 분이 섬기시던 목사님께서 이 장로님, 진심으로 이렇게 건축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를 드리고 지금 보니까? 장로님에게 시 한편을 작사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러시더라고요.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 상열 장로님의 이 상 열 님의 이니셜을 따라서 작사를 했는데 항상 이 찬송을 하시고 그 가사를 소명으로 삼고 살라고 권면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 와서 적어 주신 시를 보았습니다. 제가 항상 기도하고 갈등한 내용이었습니다. 놀랍고 섬칫했습니다. 용기 없음에 주님께서 목사님을 통하여 주신 소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5월 말일 경에 건설 회사를 정리하고 모든 법인 당좌와 개인 당좌를 정리하고 신학공부를 위한 준비를 했고 1995년에 신학대학과 대학원에 입학을 했습니다. 졸업 이전에 많은 곳에서 청빙을 받고 또 개척을 하자고하는 여러 가지 중에 1999년 12월 13일에 처음으로 일본 재 일 대한 기독교 히메지교회의 설교를 위해서 간사이공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도착한 바로 그 날, 처음 대하는 분들에게 이끌려 이 곳 저곳의 예배를 드리고 히메지교회는 밤에 도착을 했는데 한 주일 지나고 두 주일 지나면서 이 찬양의 가사가 당시나 현재 지금이나 똑 같이 일본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성도님을 위하여 미리 알리시고 보내신 주님의 메시지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가사의 내용에 대한 각오와 결심과 헌신의 본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몸부림을 치시는 분들입니다.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상처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이 분들을 위로하고 내일의 소망을 갖게 해 주어야 하는데 열과 성을 다 바치라고 합니다. 뜨거웁게 섬기라고 합니다. 이 것이 저를 부르시고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그리고 그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저를 구원하신 그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초심의 마음을 일편단심으로 변치 말고 목숨 걸고 충성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것과 삶을 드려서 여기까지 울 비전교회와 울 성도님들을 섬겼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 교우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히메지 뿐만아니라 오사까와 일본 전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저를 아시는 모든 분들이 잘 압니다. 삶의 십자가를 부탁하면 그 것 또한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부탁하면 마다하지 않았고, 보증을 부탁하면 그 것 또한 책임을 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자녀들과 그 분들의 삶을 위하여 손수 앞장서서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필요한 부분을 드리고 몸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 어느 때는 너무나 힘들고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히메지교회에서 금식기도를 하는데 연로하신 가와싸끼 집사님께서 울면서 만류해 가지고 32일로 끝을 맺고 20일 금식과 10일 금식을 했고 한국의 강남 금식기도원과 갈멜산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때로는 이 하천을 걸으면서 하늘을 보고 물고기를 보고 흐르는 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저에게 주어진 십자가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섬김을 받으시는 목사님들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나의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주님께 묻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12월과 1월부터는 떠나시는 분들도 늘어나고 이제 얼마 안 되시는 적은 교우들인데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선교 22년의 결과가 이 것인가? 이 것이 이렇게 안 되고 힘이 드는가? 안그래도 어려운데 서로 품고 가려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초대교회 공동체는 될 수 없는가? 그래서 주님께 기도하기를 주님, 어찌해야 됩니까? 거기에 또 다시 여러 가지 일과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이 일을 복음 안에서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얼마나달려가야 이 사랑을 놓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달려가야 그리움을 놓을까? 하지만 놓을 수가 없기에 더욱 가슴이 미여졌습니다. 그래서 방황을 합니다. 눈물을 보이고 어디로 좀 떠나 있을까? 그러다가 하천 주변의 썩은 의자에 앉아서 내가 이렇게 썩어져야 하는가? 초점이 없는 눈으로 먼 하늘과 나무와 흐르는 하천 물을 보다가 잘 아는 한 분에게 3번씩이나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왜 그러세요? 처음에는 눈에 눈물 때문에 누구이신지 안보여서 누구시죠? 묻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매주일마다 1부 예배로 먼저 오시는 분들을 위하여 빵을 구입 할 때는 기쁘게 고르면서도 막상 교제실에 들어가면 놓고 그냥 나갔습니다. 1부 예배를 드리고 바로 2부 예배를 위하여 준비 할 때에도 그냥 지나쳤고, 2부 예배 전까지 2층에서 멍하니 있다가 마음을 추슬러서 2부 예배를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울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신 분에게 기도해 드리고 바로 차를 몰고 그냥 정처 없이 드라이브 하고 식사도 건너뛰었습니다. 쓸데없이 이웃교회 목사님과 이런저런 푸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거의 3개월입니다. 그러나 너무 깊어 옹이가 된 예수님의 부르심과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놓을 수가 없습니다. 1994, 3, 19일 이 어두운 세상 속에 라는 가사를 주신 이 내용을 지켜 내야만 하는 소명 때문에 가슴과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너무나 정신이 없고 분별이 안됩니다. 3/14 주일 늦은 저녁 고민과 갈등을 하고 있을 때 대구 서문 교회의 이 상민 목사님의 아버님이신 이 성헌 목사님께서 주일 저녁에 소천하셨는데 천국 환송예배가 3/15일 이라고 카스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것을 제가 발인 예배로 잘못 알고 왜 빨리 연락을 안 주셨냐고? 카스에 글을 남기고 울 집사람과 통화를 하고 그리고 대구 동산 병원에 계시는 이 상민 목사님과도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발인 예배로 알았기 때문에 어느 액션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저녁 밤에 저한테 이 상민 목사님으로 부터 카톡멜이 왔는데 내일 아침에 발인과 하관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늦었지요? 그 뿐이 아닙니다. 3/15일 아침에 항상 매달 받았던 히메지 비전교회가 적힌 봉투를 받았는데 그 것이 한국의 친구 장로님의 조의금인 줄 알고 이런 것을 주시지 않아도 된다고 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의 문제로 깊은 고민을 하다가 제가 운행을 하는데 시속 20키로로 가는데 경찰차가 와서 서라고 합니다. 잘못이 없는데 신호를 지키고 속도를 지켰는데 무슨 일이냐고 되물으니까? 황당해 하면서 도마레를 그냥 지나쳤다는 거예요. 거기 도마레가 없고 표시도 없고 있었으면 20키로로 달리는데 왜 정차를 하지 않았겠냐고 물으니까? 그 분들이 지도를 핸드폰으로 보여주면서 면허증을 요구하데요. 이 것이 지금의 저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비전교회 여러분, 저는 아무리 흔들려도 저의 초심의 각오와 결심과 헌신의 본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끝까지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어두운 세상에서 몸부림을 치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고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고 상처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로하고 내일의 소망을 갖는 열과 성을 다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뜨거웁게 섬길 것입니다. 이 것이 저를 부르시고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그리고 그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저를 구원하신 주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2년이 흐른 세월 때문에 이 냇가 옆에 놓여 있는 썩은 의자이지만 그래도 그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고 쉼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그 분들을 위하여 기꺼이 썩은 의자라도 내어드릴 것 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너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시고 부탁하신 주님께서 저에게도 이 어두운 세상에서 몸부림을 치시는 분들과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들과 상처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내가 너에게 맡긴 내 양이라고 말씀하시기에 이 분들을 위로하고 세워주고 내일의 소망을 갖게 해 주는 열과 성을 다 바치고 뜨거웁게 섬기고 세워 갈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향한 초심의 마음을 일편단심으로 변치 않고 목숨 걸고 충성할 것입니다. 세워주고 책임져 주고 그만 내려놓으라고 할 그 때까지 그리고 이 예배당을 움직이라고 할 그 때까지 갈 것이고너무 썩고 부러저서 앉고 쉴 수 없을 때까지, 저 혼자라도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추궁도 간섭도 아니하고,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라고도 안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잘하느냐? 못하느냐? 묻지도 않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에 함께 하자고 끌어드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느 분에게도 이 비전교회의 열려진 상황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정리가 되어도 부담도 드리지 않고 저는 기도와 말씀만 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먼저 주여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제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지켜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때문에 평안이 있게 하시고, 갈보리 십자가의의 현장에 혼자 남아있던 요한에게 네 어머니니라 하셨던 것처럼 저에게 상처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양을 목양하는 소명이 들려지게 하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셨던 주님으로 인하여 목양을 하는 동안 항상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받고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주님의 외침 때문에 영적으로 늘 풍성하게 하시고, 이제는 다 이루었다고 하신 주님으로 마지막 한 줌의 흙이 될때까지 이루게 하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예수님께 나의 삶을 부탁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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