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로맨스 소설이자 4대 국문 소설 가운데 하나인 <춘향전>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일반적인 학설에 따르면 초반부는 당시 유행하던 판소리나 민간설화에서 따온 듯하고, 후반부는 산서 조경남 선생이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어사'를 모델로 글을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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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계서당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성의성)의 집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다. 요즘 매일 손님이 200여명 정도 온다고 한다) | ⓒ 김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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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봉화와 영주에 살았던 성의성이 이몽룡이라는 학설은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 <춘향전 비교연구> 등의 굵직한 저서를 출간한 연세대 국문학과 설성경 교수의 30년 넘는 춘향전 연구의 결과물이다. 설 교수는 이미 지난 1999년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주제의 연구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설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성의성 본인의 일기 따위를 후손이 편집해 낸 <계서선생일고>와 선생의 4대손 성섭이 지은 <필원산어>, 남원 광한루에 있는 부친 성안의의 송덕비는 이몽룡이 실존인물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울러 <조선왕조실록>등 각종 사료는 물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를 면밀히 대조, 분석하여 내린 결론"이다.
또한,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은 이몽룡이고, 이도령의 실제 이름은 성이성이며, 여주인공인 성춘향은 성이 이씨라는 사실을 숨겼는데 당시 양반신분에 따라 구체적인 실명을 공개할 수 없는 사회임으로 작자가 임의로 남·여의 성을 바꾸어 쓴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춘향전은 신분에 구애받지 아니한 파격적인 최초의 러브스토리라는 점이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몇 가지 설화형식을 갖추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춘향전은 실존인물인 성이성의 역사적 사실과 구전, 설화 등 허구를 반반씩 접목하여 창작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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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이몽룡(성의성)이 살던 계서당의 방 (작은 방이 2칸 정도이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다 | ⓒ 김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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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읍에서 물야면소재지로 가는 길에 소재지를 좀 못미처 가평리에 위치한 계서당(溪西堂)은 지난 1984년 국가지정문화재 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계서당의 원주인은 성이성(1595∼1664)선생으로 평생 청렴·결백하여 검소하게 살았던 그는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서되었고 1695년 숙종21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786년 정조10년 오천(梧川)서원에 주향되었다.
계서당은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의 아들 성의성이 광해군 5년인 1613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인 추측은 봉화군 유곡리 닭실마을이 고향인 부인 권씨를 얻어 분가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는 그가 과거에 장원 급제해 어사로 부임할 당시 임금이 직접 내린 어사화, 어사 출두시 얼굴을 가리고 직분을 행할 때 쓰는 얼굴가리개인 사선(紗扇) 및 창녕 성씨 족보 등 수 십 여점의 유물이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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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서당 계서 성의성을 기리는 사당(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소재) | ⓒ 김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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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정면 7칸, 특면 6칸의 ㅁ자형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계서당과 중문으로 연이어 있다. 건물 우측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계서당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계서당에서 우측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부친 성안의 공을 기리는 부용당 사당도 있다. 현재의 계서당은 지난 2004년부터 정부 지원금 13억 5천만 원을 받아 복원된 것이다.
실제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이몽룡은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반상가효는 만성효요, 촉루낙시는 민루낙, 가성고처도 원성고라.(金樽美酒는 千人血이요, 玉盤嘉肴는 萬姓肴요, 燭淚落時는 民淚落, 歌聲高處도 怨聲高)" 외친 후 서리가 암행어사출두를 소리치며 나아가 당일 파출수령 6인과 그 밖의 6인에 대한 서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는 성이성이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몽룡과 흡사한 성이성 선생의 행적내용이 계서공파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계서선생일고> <암행록>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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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 부용당 성안의의 묘소 (영주시 이산면 석포 1리에 있다) | ⓒ 김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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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친 부용당 성안의 선생은 1561년(명종16년) 경남 창녕 출신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두문동72현 중 성만용의 7대손이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관이 되었다.
퇴계의 수제자 가운데 한사람이며, 퇴계의 아들과 사돈이었던 영주출신의 경상우도 관찰사 백암 김륵 선생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백암 선생은 당시 홀아비였던 성안의의 학문의 깊이와 사람 됨됨이를 믿고 자신의 종손녀와의 혼인을 주선한다. 성안의는 재혼 직후 부모, 형제 전부를 고향 창녕에서 처가인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로 피난시켰다.
그가 가족 모두를 고향 창녕에서 영주로 이주시킨 이유는 창녕이 전쟁의 피해가 컸던 이유도 있었지만, '영주 최고의 명문가인 선성김씨 처가에서 많은 토지와 재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계서당 종가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후 창녕으로 돌아가 1,000여명의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으며, 곽재우와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5년 아들 성이성이 출생했고 형조좌랑, 예조, 병조좌랑을 거쳤다.
전쟁 후 영해부사, 남원부사에 제수되어 3년을 재직하고(이 때 성이성의 나이 13-16세로 춘향전과 연관된다.) 광주목사로 승진하였으나 얼마 후 영주로 돌아가 10여 년 간 후학을 가르쳤다. 1614년에는 처가 인근에 있는 이산서원 원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봉화의 계서당이 1613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이 시기 정도까지는 처가나 처가 인근인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신암리 지역에서 터를 잡고 성안의 일가가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아들 성의성은 결혼 후 분가하여 봉화군 물야로 가고, 부친 성안의는 영주시 이산면에 계속 살았던 것 같다. 영주시 이산면에서 봉화군 물야면까지는 대략 40~50리 길로 집을 두 채 정도 소유하지 않고는 왔다갔다하면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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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부용당 선안의의 신도비 (묘소와 함께 영주시 이산면 석포 1리에 있다) | ⓒ 김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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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편수관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부임치 못하였으며 얼마 후 1629년 69세의 나이로 슬하에 5남5녀를 두고 봉화의 계서당에서 돌아가셔, 처가 인근인 영주시 이산면 석포1리 뒷산에 장사하였다. 당시 성안의의 아들 일부는 출가 이후 고향 창녕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봉화 물야와 영주 이산에 나뉘어 살았던 것 같다. 현재 그의 자손들은 그렇게 분포되어 있다고 전한다.
계서 성이성 선생은 1595년(선조28년) 임진왜란 중 영주시 동면 문단리에 있는 선성김씨 집성촌인 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남원 부사를 지낸 성안의의 아들로 1607년부터 3년여 동안 남원에서 부친과 함께 생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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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이몽룡(성의성)이 말년에 공부하면 지내던 계서초당, 원래는 초가였는데 사후 기와를 올렸다. 현판은 채제공 선생의 글이며,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에 있다 | ⓒ 김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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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홍문관 교리, 응교를 역임하였다. 선생이 35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39세에는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후 부수찬, 부교리에서 수찬, 문학 등을 두루 거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찬으로 귀향하여 지내다가 경상감사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43세에 경상도 진휼어사, 호서 암행어사로 나섰으며 45세에는 병조정랑, 교리, 사간 등으로 배명받았으며, 46세와 53세에 호남 암행어사 등 네 차례에 걸쳐 어사를 지냈으며 46세에 합천현감, 54세에 담양부사 59세에 창원부사, 60세에 봉화로 귀향하였다. 61세에 진주목사, 66세에 강계부사 등, 다섯 고을에 대한 선정을 베풀자 고을민들은 송덕비로 답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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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 이몽룡 (성의성)의 묘지 석 , 청백리를 알려주는 글이 있다. 영주시 이산면 신암 3리에 있다 | ⓒ 김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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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평양감사 임의백이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극찬하였지만 슬하에 6남3녀를 두고 선생은 1664년 현종5년 향년 70세로 계서당에서 돌아가셨다.
말년에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에 있는 계서초당에서 한동안 생활을 했다고 한다. 부엌이 없고 방2칸과 툇마루만 있는 초당은 공부와 손님의 숙박 정도만 해결이 가능한 관계로, 이때도 외가나 외가 인근에 있던 부친의 옛집에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선생의 묘는 외가 인근이며, 부친의 묘와 가까운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 손향원(巽向原)에 있다. 특히 선생의 다섯째 아들 문하(文夏)는 젊은 나이에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학문이 뛰어난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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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 성의성의 묘소, 옆에 청백리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에 소재 | ⓒ 김수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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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성의성 관련 유적은 봉화군 물야면의 계서당을 비롯하여, 말년에 그가 머물며 공부했다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의 계서정(초당), 특히 계서정의 현판은 당대의 문사 채제공 선생의 기문(記文)으로 알려져 있다.
인근의 성이성의 묘 및 석물과 비석, 아울러 그가 복직했던 담양, 창원, 강계 등지에는 청백리 인정비문의 기록이 남아있고, 진주비는 현존하고 있다. 또한 이산면 석포1리에는 부친 부용당 성안의의 신도비와 묘 등이 남아 있다.
현재 봉화군에서는 춘향전과 성의성에 대한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으며, 계서당의 유지관리를 위한 지원과 춘향과 성의성에 대한 축제 등을 기획, 준비하고 있는 상태이다.
반면 영주시에서는 성의성의 외가와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분석하면서 성안의 성의성 부자가 살던 영주시 이산면의 집터를 찾고 있다. 또한 부자의 묘소와 비석, 성의성이 말년에 지내던 계서초당에 대한 유지관리를 위한 준비를 계획하고 있는 상태이다.
첫댓글 깊어가는 가을 낙엽을 밟으며 우리고장에서 가까운 계서 성이성, 부용당 성안의 선생 묘소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