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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 사헌부 대사헌 이공 묘갈명 병서
(司憲府大司憲李公墓碣銘 幷序)
효도하고 우애하고 청렴결백함은 우리 이씨(李氏) 가문의 전통인데, 세대가 내려갈수록 집안이 더욱 번성해지니, 이것을 삼가 지키고 실추하지 않는 자가 또한 드물었다. 휘(諱)가 교악(喬岳)이고 자가 백첨(伯瞻)인 분은 우리 이씨 가문 중에 명망이 높은 분이다.
아홉 살에 고비(考妣)의 상(喪)을 거듭 만나 상례를 집행하기를 어른과 똑같이 하였으며, 나중에 관직을 받을 때마다 살아생전에 봉양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였다. 늙어서도 더욱 부모를 추모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였으며, 집이 비록 가난하였으나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풍성하게 제수를 장만하였다.
외직으로 있을 적에 봉급을 털어 선친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 선친의 장례를 치를 때에 부족한 점이 있음을 애석하게 여겨서 집안 식구들에게 자신이 죽었을 적에 검소하게 장례 지내라고 미리 경계하였다. 아우를 교육하여 성립함이 있게 하였고 아우를 위해 집을 경영해서 한
마을에 나란히 거주하였으며, 의복과 음식을 함께 하였다.
평소에 재화와 이익을 입에 담지 아니하여, 여러 번 주(州)와 도(道)를 맡았는데 소탈하고 검약하다는 명성이 드러났고, 국가의 창고에 곡식이 흘러 넘칠 만큼 많았으나 혹시라도 함부로 허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인색함을 조소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못난 수재(秀才)의 규모는 자연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이른바 ‘가문의 전통을 삼가 지키고 실추하지 않았다.’는 말에 들어맞는 분이 아니겠는가. 우리 이씨 가문의 훌륭한 분이 되지 않겠는가.
공의 외가는 은진 송씨(恩津宋氏)인데, 호중(湖中 충청도)에 거주하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과 한 마을에 살았다. 우암 선생은 공의 자품을 몹시 사랑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가르치고 여러 손자들과 똑같이 대하니, 공은 선생의 문하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보고 감동함에 얻은 것이 깊었다. 이 때문에 그 선(善)과 아름다움을 성취한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우리 이씨는 관향이 용인(龍仁)이니, 국초(國初)에 강원도 관찰사 휘 백지(伯持)가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표창을 받아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었다. 고조 휘 신충(藎忠)은 병조 정랑으로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영인(榮仁)은 정선 군수(旌善郡守)로 집의에 추증되었는데, 지극한 행실이 있으므로 우암이 전(傳)을 지어주었다.
조고 휘(諱) 사익(士益)은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선고 휘 후망(後望)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선비(先妣) 증 정부인(貞夫人)은 주부 송담조(宋覃祚)의 딸이다. 공은 문장 짓는 재주가 몹시 뛰어나 일곱 살에 시구(詩句)를 엮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차츰 자라자, 경사(經史)에 크게 힘을 쏟아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게을리하지 않으니, 우암 선생이〈석음와설(惜陰窩說)〉을 지어 권면하였다. 밖으로 나와서 한가로이 붓을 잡고 글을 지으면 동무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하여 명성이 크게 전파되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에 우암 선생이 화를 당하자 공은 즉시 자취를 숨기고 스스로 수양하였고,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에 시국이 다시 변하자 비로소 과거에 응하여 병자년(丙子年, 1696, 숙종 22)에 사마시의 생원ㆍ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사직서 참봉에 제수되었다.
세 번 승진하여 공조의 낭관이 되고 순안 현령(順安縣令)으로 나갔으며, 을유년(乙酉年, 1705, 숙종 31) 괴과(魁科)로 뽑혀 지평으로 부름을 받으니, 고을 백성들이 철비(鐵碑)를 세워 공의 은덕을 표하였다. 숙종(肅宗)께서 전위(傳位)한다는 전교를 내리자, 공이 등대(登對)하여 강력히 간쟁하니 목소리가 온 청사를 진동하였다.
성상께서 “몇 번째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하고 물으시니, 좌우의 측근들이 공의 이름을 대답하였다. 이에 성상은 마침내 예전에 내린 명령을 환수하였으니, 사람들은 공의 힘이 크다고 말하였다. 체직하고 병조의 낭관이 되었으며, 어사(御史)로 호남 지방을 암행하여 염찰(廉察)함에 마땅함을 얻으니, 남쪽 지방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정언이 되어 정사를 논하다가 당시 권신과 부딪쳤는데, 뒤에 옥당의 관원으로 뽑히자 그에게 저지당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평현(咸平縣)에 보임되었다. 돌아와 사서가 되고 삼자함(三字銜)을 겸하였으며, 정언과 지평으로 전직하여 병상(柄相)이 당을 내세워 경전을 훼손한 죄를 탄핵하였다.
얼마 후 특별히 수찬에 제수되었으니, 이때 공은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서 봉직하고 있었는데, 성상은 공이 강설을 잘함을 살피시고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녹선(錄選)을 따르지 않고 얻은 경우는 예전에 보기 드문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다.
공이 동료와 함께 유생 중에 윤증(尹拯)을 배척하다가 벌을 받은 자를 논하여 구원하자, 성상은 노하여 차자를 올린 세 사람을 함께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안주(安州)로 귀양갔다. 적소(謫所)에 있은 지 3개월 만에 사면을 받고 돌아와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다.
조정에서는 성상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홀로 부화뇌동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의 지조에 탄복하였다. 장령과 헌납으로 옮겼다가 얼마 후 일로 승진하여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제수되었고 들어와 승지가 되었으며, 여러 조(曹)의 참의를 역임하고 천거되어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제수되었다.
정유년(丁酉年, 1717, 숙종 43)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가 체직하고 승지와 대사간이 되었으며, 또다시 외직으로 나가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부사(副使)로서 연경(燕京)에 사행(使行) 갔다가 돌아와 대사간과 승지가 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흉악한 무리들이 기회를 엿보고서 제멋대로 날뛰어 큰 화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때 공은 파직 당하고 고향의 집에 돌아가 있었는데, 우암이 윤증의 무리에게 무함을 당하여 서원에서 출향(黜享)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연히 일어나 서울로 올라와 글을 올려 통렬히 변론하자, 군흉(群凶)들이 죄를 얽어서 경산(慶山)으로 유배 보내었다. 공이 유배지에 이르자마자 죄를 더하여 동래(東萊)로 유배 보냈는데, 장독(瘴毒)이 살갗을 파고들어도 공은 태연해하였다.
성상이 즉위한 다음 사간원의 장관으로 소환되고 곧바로 승지로 전직하였다. 이때 성균관의 유생인 정유(鄭楺)가 토역(討逆)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성상은 몹시 노하고 대면하여 힐책하였다. 정유가 항거하는 말을 하고 굽히지 않자, 성상의 우레와 같은 위엄이 거듭 진동하여 책상머리에 있는 물건을 쳐서 깨뜨려 두 조각을 내고 그 상소문을 땅에 던지는 등, 성상의 거조(擧措)가 예사롭지 않았다.
공은 서글퍼하며 손수 상소문을 주워 올리고 반복하여 간절히 간쟁하니, 성상은 즉시 말씀하기를 “승지가 나를 사랑하도다. 승지가 나를 사랑하도다.” 하였다. 이날 입시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전전긍긍하여 얼굴빛이 흙빛이 되었으나, 공은 홀로 말소리가 변함이 없고 조용히 간언을 올려 끝내 성상을 감동시켜 깨닫게 만드니, 선비들의 의논이 훌륭하게 여겼다.
승진하여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있다가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며, 또다시 대사간과 대사성으로 옮겼다.
성균관의 유생이 제술(製述)에 응하여 급제하자, 성상은 공이 유생들을 잘 지도한 공을 높이 기려 특별히 고비(臯比 호랑이가죽)를 하사하였다.
대사헌에 제수되고 괴원(槐院 승문원)과 주사(籌司 비변사)의 일을 겸임하였으며, 형조 참판을 거쳐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가 임기가 차자 예조 참판이 되었다. 도헌(都憲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오적(五賊)을 극률(極律)에 처할 것을 청하였는데, 성상은 장차 정국을 크게 변화시키고자 하여 급히 공을 삭탈관직하여 문외출송하도록 명하였다.
다음 해 오적이 내통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세 도(道)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공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골에서 달려와 성상의 안위(安危)를 물었는데, 이로부터 근심과 울분이 쌓여 병이 되었다.
공은 평소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는데 사람들이 공의 건강을 염려하여 술을 자제할 것을 권하자, 공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옛 시인이 부디 잠이나 들어 죽어서 움직이지 말기를 바라는 소원을 품었으니, 내 빨리 죽어서 종국(宗國)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하였는데, 마침내 이해 7월 19일에 별세하니, 태어난 계묘년(癸卯年, 1663, 현종 4)과 따져보면 향년이 66세이다.
공의 초상을 아뢰는 자가 있자, 성상은 관작을 회복하고 부의(賻儀)를 내렸다. 양주(楊州)의 행촌(杏村)에 있는 선영에 전배(前配)인 장수 황씨(長水黃氏)와 한 언덕에 장례하였다. 황씨 부인은 현령 휘(暉)의 딸이고 부원군 정욱(廷彧)의 후손이다. 황씨 부인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지평 정익하(鄭益河)에게 출가해서 숙(橚)과 박(樸) 두 아들을 낳았고, 딸은 진사 이헌보(李獻輔)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계배(繼配)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통덕랑(通德郞) 진기(震基)의 딸인데, 두 부인이 모두 아들이 없어 족자(族子)인 세준(世準)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였다. 세준은 모두 네 번 장가들어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모두 어리고 딸은 윤득대(尹得大)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고아로서 대현(大賢)을 사사(師事)하여 일찍 성립함이 있었다. 나의 선친인 충정공(忠正公 이세백(李世白))께서 공에게 기대하심이 매우 지극하여, 매번 불초에게 당부하기를, “아무개가 능히 자립하여 우리 집안에서는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물이니, 뒤에 만약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오르거든 네가 항상 이끌어주고 소홀히 하지 말라.”라고 하니, 나 소자(小子)는 감히 이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었다.
중간에 비록 완급(緩急)과 경중(輕重)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으나 정의가 시종 변치 않았는데, 이제 노년에 이르러 갑자기 공을 잃으니, 숙향(叔向)의 ‘더불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한탄이 깊다. 슬프고도 슬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은 대대로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스승의 도움을 얻어 / 公承世美得師資
행실을 삼가고 지조를 닦아 스스로 다스렸네 / 飭行修操以自治
황복(隍復)의 운을 만나 용감하게 분발해서 / 運値隍復勇奮發
채색 동정을 제거하고 장식하지 않은 말을 타며 세 번 쫓겨남을 달갑게 여겼네 / 徹緣乘髦甘三黜
자취는 굽혔으나 이름은 드날려 끝내 진실로 훌륭하니 / 跡詘名揚終允臧
천추의 후세에 이 명문 없어지지 않으리라 / 有來千秋銘不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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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석음와설(惜陰窩說) :
이 글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인《송자대전(宋子大全)》권135에 보인다. 석음와는 이교악(李喬岳)의 호로, 석음은 ‘일촌(一寸)
의 시간도 아까워하며 노력한다.’라는 뜻이다.
[주02] 기사년에 …… 당하자 :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난 것을 이른다.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15)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西人)들이 숙원(淑媛) 장씨(張
氏) 소생인 왕자 이윤(李昀)의 원자(元子) 책봉을 반대하자, 이에 분노한 숙종(肅宗)이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
壽恒)을 사사(賜死)하고 서인의 지도층을 정계에서 대거 축출하며, 이어서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실각하였던 남인
(南人)들을 다시 등용한 사건이다.
[주03] 갑술년에 …… 변하자 :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난 것을 이른다. 갑술환국은 1694년(숙종20)에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 서인(西人)들이
폐위되었던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암(閔黯), 이의징(李義徵) 등 남인(南人)들이 이
를 빌미로 서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다.
이 당시 숙종(肅宗)은 희빈(禧嬪) 장씨(張氏)에 대한 감정이 점차 악화되어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남인들이 무모한 옥사
를 벌이려 하자 분노하여 민암과 이의징 등을 유배 보내고, 송시열(宋時烈), 민정중(閔鼎重), 김익훈(金益勳) 등 기사환국(己巳換
局) 때 축출된 서인들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서인을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였다.
[주04] 괴과(魁科) :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함을 이른다. 이교악(李喬岳)은 1705년(숙종31)에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주05] 삼자함(三字銜) :
지제교(知製敎) 또는 봉조하(奉朝賀)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를 작성하는 지제교를 가리킨다. 조선
조 초기에는 승정원과 사간원의 관원에게 지제교를 겸임시켜 내지제교(內知製敎)로 삼았고, 또 문관 10명을 선발하여 지제교를 겸
임시켜 외지제교(外知製敎)로 삼았다가, 세종 때에는 집현전의 녹관(祿官)이 내지제교를 겸임하였고, 문신 10명을 선발하여 외지
제교로 삼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홍문관의 부제학으로부터 부수찬에 이르는 관원과 별도로 선발한 6품 이상의 문신이 지제교를 겸임하
도록 했으며,《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홍문관 부제학 이하의 관원이 겸임하는 것을 내지제교, 대제학이 이조 판서와 상의하여 6
품 이상의 관원 가운데 특별히 뽑은 후보자를 초록(抄錄), 상주하여 지제교로 임명하는 것을 외지제교라고 불렀다.
외지제교는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에 이를 때까지 겸임하며, 규장각의 직제학 이하 관원은 현임ㆍ전임을 막론하고 모두 외지제교를
겸임하였다.
[주06] 병상(柄相)이 …… 죄 :
병상은 권력을 잡은 정승이란 뜻으로 당시 판중추부사로 있던 최석정(崔錫鼎)을 이르고, 경전을 훼손한 죄는 최석정이《예기유편
(禮記類編)》을 저술하면서 일부 주자(朱子)의 주(註)와 다른 주석을 단 것을 이른다. 이교악(李喬岳)은 1710년(숙종36)에 정언
이 되어《예기유편》의 일로 최석정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예기유편》은 최석정이《예기》의 원문 중 뒤바뀌고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 하여 뒤바뀐 것을 바로잡고 빠진 것을 보충하여 편차와
장의 단락에 따라 다시 분류하고 정리한 책이다. 1693년에 초간되고 1700년에 중간되었는데, 책의 체제는 주자의《의례통해(儀禮
通解)》를 본떴고, 주설(注說)은 원(元)나라 진호(陳澔)의《예기집설(禮記集說》을 모범으로 삼았다.
저자인 최석정은 이 책의 주의 일부가 주자의 주와 다르다는 이유로 노론(老論) 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1711년 이후
미사(渼沙)에 은거하였다.
[주07] 녹선(錄選)을 …… 경우 :
이교악(李喬岳)이 홍문록(弘文錄)에 오르지 않고도 홍문관의 수찬에 임명된 일을 이른다. 녹선은 홍문관 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
람의 이름을 홍문록에 기록함을 이르는데, 홍문관에 결원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만든 제도로, 예문관에서 홍문관이 독립된 1478년
(성종9)부터 시행되었다.
홍문관의 부제학과 동벽(東壁), 서벽(西壁)이 함께 의논하여 본관록(本館錄)을 작성하고, 이를 이조에 이송하면 이조에서는 이를
심사하여 이조록(吏曹錄)을 작성하였다. 이 이조록과 본관록을 의정부에 이송하면, 의정부는 본관록을 중심으로 누락과 오류의 여
부를 심사하여 정부록을 작성하였는데, 이를 홍문록이라 하였다. 홍문관에 결원이 생기면 이조는 홍문록 중에서 3인을 추천하고, 왕
이 이 중 한 명을 낙점하여 임용하였다.
[주08] 차자를 …… 사람 :
당시 수찬이었던 이교악(李喬岳)과 부교리 홍우서(洪禹瑞), 수찬 이택(李澤)이다. 이들은 1710년(숙종36) 향유(鄕儒) 곽경두(郭
景斗) 등이 올린 소에 대해 국가에 무익하다는 하교(下敎)가 있자, 차자를 올려 변명하다가 숙종(肅宗)의 노여움을 사서 모두 유배
되었다.
[주09] 얼마 …… 듯하였다 :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난 것을 이른다. 신임사화는 경종(景宗) 즉위 초인 신축년(1721, 경종 1)과 임인년(1722)에 세제(世
弟) 책봉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둘러싸고 일어난 옥사이다. 1720년에 숙종(肅宗)이 승하하고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
데, 후사가 없고 병이 많았다.
이에 노론(老論)의 주도하에 연잉군(延礽君)이 세제로 책봉되자, 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론(少論)인 사직 김일경(金一鏡) 등이 노론의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이라고 몰아 소를 올리자, 경종이 노론 사대신(四大
臣)을 파직시켜 유배 보냈으며, 이외에도 많은 노론의 인물들을 삭직시키고 소론을 등용하였다.
1722년 3월에 목호룡(睦虎龍)이 노론 측이 세자 시절의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하자, 소론은 이를 기회로 옥사를 일으켜 유배
된 노론의 사대신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대다수의 노론을 제거하였다. 사대신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
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다.
[주10] 토역(討逆)을 청하는 상소문 :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과 목호룡의 잔당을 역신(逆臣)이라 하여 이들을 토벌할 것을 청한 상소문으로,《영조실록(英祖
實錄)》1년 6월 11일 조에 그 내용이 자세히 보인다.
[주11] 오적(五賊) :
경종(景宗) 때에 영조(英祖)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에 반대한 소론(少論) 다섯 명의 대신들로 유봉휘(柳鳳輝),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조태구(趙泰耉), 최석항(崔錫恒)을 이른다. 영조가 즉위하자 영조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노론(老論)들은 이
들 다섯 사람에게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책임을 지워 처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주12] 오적이 …… 일으키니 :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난 것을 이른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에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의 일부 세력이 영조(英祖)
와 노론(老論)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고자 일으켰던 반란이다. 무신년에 발생했으므로 ‘무신란(戊申
亂)’이라고도 한다.
1724년에 경종(景宗)의 승하로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 정권이 들어서자, 일부 소론들이 남인들을 포
섭하여 반정을 도모하기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영조가 1727년에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탕평책을 실시함에 따라 서울
의 많은 소론들이 이탈하였다.
이에 초조해진 지방의 세력들이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고 거병하였는데, 한때 청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치고 도성을 향해 진격
하였으나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 관군에게 대파당하고 이인좌 등 수뇌부가 체포되어 평정되었다.
[주13] 부디 …… 소원 :
나쁜 세상을 만난 것을 싫어하여 차라리 빨리 죽기를 바라는 소원으로, 본래《시경(詩經)》〈왕풍(王風) 토원(兎爰)〉에 보이는 내
용이다. 이 시에 이르기를, “내가 태어난 뒤에 이 온갖 걱정을 만났으니, 부디 잠이나 들어 죽어서 움직이지 말기를 바라네.〔我生
之後, 逢此百罹, 尙寐無吪.〕”라고 하였다.
[주14] 숙향(叔向)의 …… 한탄 :
숙향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경(卿)이다. 숙향을 도공(悼公)에게 천거했던 사마후(司馬侯)가 죽자 숙향이 사마후의 아들을 어루
만지면서, “자네의 아버지께서 죽은 이후로는 내가 함께 임금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되었다. 지난날 자네의 아버지가 일을 시작해 놓으
면 내가 그것을 마무리 지었고, 내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자네의 아버지가 그것을 마무리 지어서 못할 일이 없었다.
〔自此其父之死, 吾蔑與比而事君矣. 昔者, 此其父始之, 我終之, 我始之, 夫子終之, 無不可.〕”라고 한탄한 것을 말한다.《國語
晉語》
[주15] 황복(隍復)의 운 :
황복은 ‘성이 무너져 흙이 해자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좋은 세상이 나빠지는 시운을 이른다.《주역(周易)》〈태괘(泰卦) 상육(上
六)〉에 “상육은 성이 무너져 해자로 돌아감이니 군대를 쓰지 말 것이요, 읍(邑)으로부터 고명할 것이니 정(貞)하더라도 부끄럽다.
〔上六, 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吝.〕”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태(泰)가 극(極)에 이르
러 비색(否塞)해짐은 성이 무너져 해자로 돌아가는 상(象)이다. 점치는 자에게, 힘으로 다투지 말고 다만 스스로 지켜야 하니, 비록
올바름을 얻더라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계한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태(泰)는 통태(通泰)함과 태평성대를 이른다.
[주16] 채색 …… 타며 :
‘채색 동정을 제거하는 것〔徹緣〕’과 ‘장식하지 않은 말을 타는 것〔乘髦〕’은 대부(大夫)와 사(士)가 취해야 할 용모와 행동 중의
하나이다.《예기(禮記)》〈곡례 하(曲禮下)〉에 “대부와 사(士)가 죄를 짓고 나라를 떠나가되, 국경을 넘어 단위(壇位)를 만들어서
본국을 향해 곡하며, 웃옷을 희게 하고 치마를 희게 하고 관을 희게 하고 중의의 채색 동정을 버리고 가죽신을 신고 흰 개가죽으로 수
레를 가리고 털과 갈기를 장식하지 않은 말을 타고 손톱과 발톱을 깎지 않고 수염과 머리를 깎지 않고 밥을 먹을 때 제(祭)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말하지 않고 부인이 모시게 해서는 안 되니, 3개월이 지나면 평상의 옷을 회복한다.〔大夫士去國,
踰竟爲壇位, 鄕國而哭, 素衣素裳, 素冠徹緣, 鞮屨素簚, 乘髦馬, 不蚤鬋, 不祭食, 不說人以無罪, 婦人不當御, 三月而復服.〕”라
고 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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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孝友淸白, 我李家傳, 而世愈下族愈繁, 其能謹守無墜者亦鮮矣。 有諱喬岳、字伯瞻者, 我李之望也。 九歲, 荐喪考妣, 居戚如成人。 後有官位, 恒懷不洎之悲, 老益追慕, 泣涕不禁。 家雖貧, 祭則必豐。 在外官, 捐俸石其墓, 痛葬故有闕, 預戒家人儉損終事。 敎育其弟, 俾克有立, 爲營室, 幷巷而居之, 衣食與共。 平居, 口不言貨利, 屢典州藩, 著簡約聲, 囷庾盈溢, 未或濫費。 人嘲其嗇, 謝曰: “拙秀才規模, 自不得不爾。” 卽此而見之, 其非所謂謹守無隊者乎? 其不爲我李之望者乎?
蓋公自出恩津之宋, 家湖中, 與尤菴先生同里。 先生甚愛其資品, 携歸斅學, 與諸孫一視。 久處門下, 得於觀感者深矣。 是以其成就善美有如此者云。 我李籍龍仁。 國初, 江原觀察使諱伯持以廉謹褒錄。 高祖諱藎忠, 兵曹正郞、贈直提學。 曾祖諱榮仁, 旌善郡守、贈執義, 有至行, 尤菴爲之作傳。 祖諱士益, 贈左承旨。 考諱後望, 贈戶曹參判。 妣贈貞夫人, 主簿覃祚女也。
公文才絶倫, 七歲, 綴句語驚人。 稍長, 大肆力於經史, 早夜不懈, 尤菴爲著《惜陰窩說》以勖之。 出而掉鞅, 曹偶莫敢抗, 聲譽斐蔚。 己巳, 尤菴禍, 卽屛跡自修。 甲戌更化, 始就公車, 中丙子司馬兩試, 調社稷參奉。 三轉爲工曹郞, 出順安縣令。 乙酉, 擢魁科, 以持平召, 邑民建鐵碑以表去思。 肅廟下傳禪之敎, 公登對力爭, 聲撼一堂。 上曰: “第幾人是誰也?” 左右對以公名。 卒收還前命, 人謂公力爲多云。 遞郞兵曹, 以御史暗行湖南, 廉察得宜, 南人稱之。 爲正言, 論事觸時權。 後選玉堂, 爲所枳, 出補咸平縣。 還爲司書, 帶三字銜。 轉正言、持平, 劾柄相樹黨毁經之罪。 已特授修撰, 時公職春坊, 上察其善講說, 有是命。 不階錄選而得之者, 前所稀覯, 人榮之。
偕同僚論救儒生斥尹拯被罰者, 上怒, 命竝竄上箚三人。 公配安州。 居三月赦還, 復拜修撰, 陞校理。 朝廷請上尊號, 公獨不雷同, 人服其有守。 遷掌令、獻納, 俄以事陞秩, 拜慶州府尹。 入爲承旨、諸曹參議, 薦授水原府使。 丁酉, 拜黃海道觀察使, 遞爲承旨、大司諫, 又出爲忠州牧使。 以副价使燕, 還爲大諫、承旨。 亡何, 凶徒闖逞, 大禍漫天。 時公罷歸鄕舍, 聞尤菴被拯黨誣辱, 見黜院享, 奮然入京, 上章痛辨。 群凶搆罪, 竄之慶山。 纔到配, 加罪竄東萊, 雖瘴毒鑠肌, 晏如也。
聖上卽位, 以諫長召還, 旋移承旨。 時泮儒鄭楺上討逆疏, 上怒甚面詰之, 楺抗言不屈。 雷威震疊, 擊破案頭物作二段, 擲疏於地, 擧措非常。 公慨然手自拾取以進, 反復切諫。 上卽曰: “承旨愛我! 承旨愛我!” 是日入侍諸臣皆戰栗無人色, 公獨辭氣亡變, 從容進規, 卒底感悟, 士論多之。 陞授同知義禁, 由右尹拜都承旨, 又移大司諫、大司成。 泮儒應製中第, 上推公善導功, 特賜皐比。 拜大司憲, 兼槐院、籌司, 由刑曹參判出按畿服。 滿歲, 貳禮曹。
以都憲請五賊極律。 上將有大進退, 亟命削黜。 明年, 五賊通謀擧兵, 合三道而起。 公聞變, 自鄕奔問, 自是憂憤成疾。 雅喜飮, 人
勉其剛制, 歎曰: “詩人有尙寐無訛之願, 吾欲速死, 不見宗國之淪喪也。” 遂以其七月十九日卒, 距其生癸卯, 享年六十有六。 有白其喪者, 命復爵致賻。 葬于楊州杏村先兆, 與前配長水黃氏同原。
黃氏, 縣令暉女, 府院君廷彧之後。 有一女適持平鄭益河, 生二子: 橚, 樸。 女適進士李獻輔, 餘幼。 繼配高靈朴氏, 通德郞震基女。 二夫人俱無男子, 子以族子世凖爲後。 世凖凡四娶, 有三男一女: 男竝幼, 女適尹得大。
公以孤童服事大賢, 早有成立。 我先子忠正公期許甚至, 每語不肖曰: “某甫能自樹脚, 於吾宗良爲不易。 後若決科登
朝, 爾其常加提挈毋忽!” 余小子未嘗敢忘此敎。 間雖有緩急、輕重之不相契者, 情義終始不貳。 今臨老而遽失之, 深有叔向“蔑與比”之歎。 悲乎! 悲乎! 銘曰:
公承世美得師資, 飭行修操以自治。 運値隍復勇奮發, 徹緣乘髦甘三黜。 跡詘名揚終允臧, 有來千秋銘不亡。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