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1. 중국의 고대 역사
1-1. 고고학 성과와 중국 고대 문명의 형성
중국 고대 문명의 발생은 동아시아세계가 문명의 길로 들어서는데 실마리를 열었다. 과거 중국의 고대문명은 황하유역에 국한해 발달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황화문명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분야에서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황하 유역 이외의 양쯔강일대를 비롯하여 동북부, 서북부 일대에서도 원시문명이 발달했으며, 은과 주는 이를 바탕으로 보다 성숙한 청동기문명에 이르렀다고 이해되고 있다.
한편 전설상으로 전해지던 夏왕조에 대해서는 그 실재가 추정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실체는 해명되지 않고 있다. 殷과 그 뒤를 이은 周왕조는 성읍국가 또는 읍제국가 등으로 불리는 많은 자치세력들의 연맹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주왕조는 이들 세력들을 제후로 책봉하여 황실과 묶는 봉건제도를 발전시켜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 주왕조에서 각각의 성읍국가는 지배신분인 國人과 피지배신분인 庶人들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씨족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1-2. 춘추.전국시대의 문화
春秋.戰國시대는 봉건제도가 이완되면서 주가 지방에 대한 통제수단을 상실하고, 성읍국가를 단위로 한 각지의 제후들이 자립하여 경쟁하던 시기이다. 제후국가들의 대립에 따라 전쟁이 격화되는 혼란기라는 측면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서로의 경쟁 가운데 기술의 발전을 통한 경제적 발전과 급격한 사회변화가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기반으로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관료조직을 갖추고 영토 내의 평준화된 인민을 모두 지배하는 전제군주 중심의 고대국가가 자리잡기에 이른다.
춘추.전국시대의 변화를 주도한 요인에 대해서는 전쟁의 격화에서 찾는 연구자들도 있으나 철기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기술의 발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철기의 보급으로 잡곡생산을 주로 한 황하 일대에 旱地농법이 정착했을 뿐 아니라 수공업의 발전이 일어났으며, 이를 기반으로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全 중국적인 유통이 촉진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문화의 동질화 과정을 촉진함으로써 통일의 기반을 축적하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농업의 발달은 아울러 씨족공동체를 해체하고 개별적인 가족단위의 소농경영을 가능하게 하여, 이후 가족이 생활의 주요한 단위로 자리잡았다.
1-3. 秦.漢제국의 사회와 문화
戰國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후진적이었던 진은 개혁에 성공함으로써 강력한 고대국가를 이루고 다른 열강들을 압도하여 최초의 통일제국을 성립시킨다. 진 제국의 성립은 동시에 황제지배체제의 등장을 의미한다. 진은 통일제국의 유지를 위해 중앙집권적인 지배를 지향, 전국에 걸쳐 郡縣制를 강력히 추진했으나, 각지의 향속과 마찰을 빚고, 무리한 토목공사와 함께 진왕조의 단명을 초래했다. 이후 내란을 수습하고 재통일을 이룬 한대에는 봉건제를 가미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중앙집권이 일시적으로 후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제시기에는 황제지배체제가 안정되고, 흉노 등 이민족에 대한 압력과 함께 대외적인 팽창이 본격화되기도 했다.
한대에는 향촌사회에 존재하는 민간질서의 자율적인 요소를 인정함으로써 황제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는데, 거대한 제국의 통치를 위해 민간질서와 국가권력이 타협하는 방식은 이후 前漢代 全般에 걸쳐 나타났다. 계층분화가 덜 이루어진 전한 초기의 향촌사회에서는 연장자들인 父老들을 중심으로 민간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안정이 지속되면서 호족들이 출현하면서 향촌질서를 주도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1-4. 諸子百家의 사상과 한대 유교의 발전
춘추.전국은 사회.경제적인 발전을 배경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가 개화하여 가치에 대한 논의가 폭넓게 전개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이 교양을 통해 관료로의 길을 찾던 새로운 인간형인 士들이었고, 제자백가의 사상은 이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가족윤리로부터 출발하여 孝를 강조하고 명분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완성을 통한 사회의 개량을 추구한 인본주의자들인 儒家. 유가와 대립하여 공리주의적 가치관을 내세우며 만민평등의 겸애를 주장하고 그 실천방법으로 현자에 의한 하향식 통제를 제시한 墨家. 기존의 가치관을 인위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배격하면서 인위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삶을 찾고 자연과 합치할 것을 주장한 道家. 개개의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법치를 통한 철저한 군주 중심의 지배에 의해 부국강병을 이룰 것을 주장한 法家는 제자백가 중 가장 중요한 학파였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논쟁의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논의가 사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지향적이고 지배자의 논리 위주였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진.한의 통일과 함께 다양한 학파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사라진다. 그리고 사상의 통일이 요구되어, 전한 말에 이르면 가족윤리를 핵으로 한 향촌질서에 적합했던 유가가 황제지배를 수용함으로써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아, 이후 지배층이나 지식인의 교양형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테두리가 되었다.
2. 魏. 晉. 南北朝 및 隋.唐 제국의 역사
2-1. 위.진.남북조의 역사전개
황건적의 농민봉기를 계기로 후한이 멸망한 이후 중국은 3국을 통일한 西晉의 단기간을 제하면 오랫동안 분열상태에 놓인다. 이 시기에는 문벌 귀족이 대두하고 북방민족이 중국에 침투하여 귀족과 문화적 융합을 이룬 사실이 주목된다.
삼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구품중정제가 실시되자 종래 향촌 사회에서 여론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들이 고위관료로 중앙에 진출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이들은 주요관직을 독점하면서 혼인관계 등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배타적으로 유지하는 계층으로 전환하여 문벌귀족의 성립을 보게 된다. 문벌귀족은 당말까지 지배층으로 존속한다.
후한부터 변방에 이주하고 있던 북방민족 가운데 흉노는 중국의 내분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이어서 다른 북방민족들도 중국에 침입하여 화북일대는 이들의 각축장이 된다. 그중 鮮卑계통의 북위가 화북일대를 통일하여 강남의 다른 왕조들과 대립하는데, 이를 남북조시대라 칭한다. 북조에서는 기존의 한족 문화와 호족문화가 융합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융합현상은 수 및 당 초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조의 존속은 후진지역이었던 강남의 개발이 촉진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한편 3국 이후에는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고 도교가 성립하여 민간에 널리 확산되었다. 극가권력도 이를 수용하여 통치에 이용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반면에 지배이념으로서의 유교는 위축되는 현상을 보였다.
2-2. 수.당의 재통일
남북조의 분열에 종지부를 찌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는 법령을 정비하고 과거제를 실시하며, 대운하를 건설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개혁을 시행하여 제국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수왕조는 지나친 토목공사의 폐단에 고구려 원정의 실패가 겹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속에서 단명하고 말았다.
통일제국을 재건한 당은 문벌귀족의 통제에 어는 정도 성공하고 신흥관료들이 등장하여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에 부분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또한 초기의 잦은 정쟁에도 불구하고 여러 왕조에 걸쳐 누적되어 온 법령을 정비하고 3성 6부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조직을 완성하는 등 내치에 안정을 이루었다. 또한 당은 외부로는 돌궐을 분쇄하면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한편 도호부를 설치하여 주변민족에 간섭하는 기미정책을 통해 동아시아의 세계제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安史의 반란을 계기로 기미체제는 완전히 해체되고 반란을 방지코자 내지에 설치했던 절도사들이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립하면서 당왕조를 약화시켰다.
수.당 제국은 均田制를 실시하여 소농민의 안정을 꾀하였다. 租庸調의 수취체계는 균전농민의 확보 위에 유지되었다. 그러나 안사의 반란을 계기로 균전제가 붕괴하고 대토지를 소유한 장원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당은 빈부의 차이에 따라 차등을 두어 조세를 부과하는 兩稅法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중국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3. 宋.元.明.淸의 시대
3-1. 송대의 경제발전과 문화
당의 멸망 이후 5代 10國의 분열기를 거쳐 들어선 송왕조에서는 병권을 장악하고 문신 우위의 관료체제를 유지하여 황제의 권한을 강화했다. 또한 과거제가 개혁되어 문벌귀족이 몰락했다. 이를 배경으로 문신관료를 지향하는 사대부가 등장한다. 이들은 유교적 교양과 능력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기때문에 송대 사회는 비교적 개방적인 분위기를 이루었다. 사대부는 불교와 도교로부터 영향받아 유가사상에 형이상학의 측면을 보완하고 지배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위치를 회복했다. 이렇게 성립된 송학은 남송시대의 주희에 이르러 주자학으로서 완성된다. 송대는 학문의 발달을 비롯한 문화의 開化가 두드러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송대에는 경제발전도 두드러졌다. 당 중엽 이래 이앙법(모내기)을 비롯한 미작농법의 개선이 행해져 송대에는 농업생산의 비약적인 증대가 이루어졌다. 또한 농업 및 수공업의 발전을 기반으로 유통이 확대되었다. 당시의 경제발전은 강남지방이 주도하여, 송대부터 경제중심지는 강남으로 이동했다. 번영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잡극 등 서민문화가 개화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3-2. 북방민족의 대두와 정복왕조
송의 등장과 함께 동아시아세계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거란.여진.몽고족 등 북방민족이 성장하여 중국중심의 국제질서를 위협하고 일부는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정복왕조를 세운 사실이다.
거란은 요를 건설한 뒤 화북의 북부인 연운 16주를 차지하여 송을 압박했다. 요를 멸망시킨 여진족은 금을 세워 북송을 무너뜨려 강남으로 쫓아낸 후 화북일대를 차지했다. 금을 정복하고 제국을 세운 몽고는 남송을 정복한 후 원왕조로 이름을 고쳐 全 중국을 지배하는 정복왕조로 자리잡았다.
요.금.원 및 이후의 청 왕조는 정복왕조로서 이민족적인 문화와 독자적인 통치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漢족이 절대다수인 농경민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중국문화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공통적으로 겪고, 명실상부한 중국왕조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3-3. 명.청 시대의 정치전개
명은 원을 축출한 뒤 몽고풍을 배제하면서 원말 반란으로 피폐해진 향촌사회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명대에는 황제에의 권력집중이 두드러졌는데 내각이라는 친위적 형태의 관직이 등장했다든가 환관이 전횡했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외관계에서는 영락제의 원정만이 예외적일 뿐, 대체로 폐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와 함께 몽고와 왜구의 지속적인 침입에 시달렸다.
명 중반부부터 새로운 지배층으로 紳士층이 등장했다, 이는 과거 지망자가 증가하면서 과거제가 확대되고 학교제도가 결합하여 나타난 현상으로, 신사층은 20세기 중반까지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앙정부의 부패가 게속되는 가운데 명은 만주족의 청에 멸망했다. 중국지배 이전부터 중국문화에 친숙했던 청은 중국문화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동시에 신사층과 결탁하여 안정된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청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광범한 영토를 지배하는 정복왕조로서의 특성을 보였다. 한편 황제권이 강화되는 추세는 계속되어 청에서 고도로 성숙된 황제통치를 보이기에 이른다.
3-4. 명.청 시대의 경제와 사회
종래에는 유럽 세계의 비약적인 근대화과정과 비교하여 비슷한 시기에 해당하는 명.청시대의 사회가 정체되어 있었음을 지적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명 중기 이래 중국에서도 경제적인 발전과 사회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리전의 확대와 상품작물의 증가, 그리고 이를 토대로 직물업 등 수공업이 발달하고 경제중심지가 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원거리교역이 증대하여 全 지역이 시장망으로 연결되었다. 다만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근대세계로의 진입이 지체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신사층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는 동시에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의식이 성장했다. 명말 빈번하게 일어났던 抗租抗糧운동과 도시의 民變은 이러한 변화를 알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4. 중국 근현대사
4-1. 서양의 침입과 중국사회의 변화
청대의 중국은 전근대로서는 고도로 성숙한 사회에 이르렀으나 근대세계로 진입하려면 서양의 침입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기다려야 했다.
건륭(乾隆, 1736-1795) 중기 이후 서양과 이루어진 대외무역을 보통 광동무역체제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청과 무역을 하려는 서양국가는 광동의 광주(廣洲)라는 항구에서만 교역할 수 있었다. 이는 청의 경제, 정치, 군사적 필요와 서양의 무역상의 필요에 의해서 탄생된 무역제도이다.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영국은 이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에 결재해 주어야 했기때문에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 인도에서 나는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 급기야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중국이 허울만의 잠자는 호랑이 임을 알아차린 미국과 프랑스는 호혜평등원칙을 내세워 조약체결을 요구해왔다.
이리하여 아편전쟁에 패배한 중국은 내부로는 전근대적 사회구조를 청산하고 외부로는 국민국가로 전환하여 세계질서에 편입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불평등조약이라는 장치를 통한 제국주의열강의 간섭과 이권침탈로 중국은 半식민지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아울러 황제 중심의 전제적 지배구조 역시 완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열강의 침입으로 지배권력이 약화된 틈을 타 강남에서는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 청왕조에 중대한 타격을 가한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일어났던 태평천국운동은 대표적인 근대민중운동으로 아래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의 시작이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분권화경향이 일어나는 한편 신사층의 영향력이 증대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 청왕조에서는 洋務운동을 추진하여 기존의 지배체제를 유지한 채 서구식의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하였다. 양무운동은 군사,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는 초보적인 자강운동이고, 이 운동은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시작되고 중체서용에 그 이념적인 바탕을 두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그 성과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4-2. 근대 중국의 개혁과 혁명
청 왕조 중심의 양무운동이 한계에 부딪힌 후 중국의 장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심화되는 가운데 신사층 지식인 사이에 입헌을 추구하는 개혁운동이 출현했다. 그 결과 강유위의 주도 아래 무술변법이 추진되었다. 변법운동은 의회개설같은 제도개혁을 실시하여 강력한 주권국가로 나아가는 자강운동이다. 그러나 개혁파의 지지기반이 약했고 입헌운동에 회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개혁으로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보수파의 반격으로 결국 1백일동안 진행되던 무술개혁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쿠데타로 그 막을 내렸다.
한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민중 사이에 확산되면서 서구화에 대한 반발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반기독교운동의 형태를 띠고 산발적으로 전개되다가 의화단운동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게 된다. 반기독교적 민족운동이었던 의화단운동은 청을 부흥시키고 서양을 멸하자는 부청멸양 의 구호를 내걸고 천진과 북경으로 진출하면서 기독교도와 선교사들을 살해했다. 이에 서태후 등 청정부의 보수파는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오히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8개 연합국은 자국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공동 출병하여 북경을 점령하니, 의화단운동도 끝났다. 이 결과 중국 내의 보수정권의 기반은 더욱 취약해졌고 제국주의국가들은 무역업과 은행업에 투자하면서 생산에도 뛰어들어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확대해 갔다.
4-3. 20세기 1/4 시기의 중국
한편 무술변법의 실패 이후 입헌운동을 추진하는 세력 이외에 진보적인 지식인을 중심으로 청 왕조를 배격하는 혁명운동이 나타나 여러 계층에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신해혁명(1911)이 일어나 청왕조가 무너지고 황제 지배가 소멸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청산하거나 제국주의열강의 간섭으로부터 자립을 이루지는 못한 채 다시 침체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은 원세개에 의한 독재통치를 거쳐 군벌할거의 상태로 들어갔다. 당시 지방에서는 신사층의 영향력이 존속하는 가운데 일본의 압력은 증가해 가고 있었다.
1920년을 전후하여 지식인 사이에 전근대적인 제도.가치를 배격하는 신문화운동이 전개되어 학생들을 중심으로 의식의 개화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반군벌 반외세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니, 5.4운동은(1919) 그 산물이었다. 또한 산업화의 진행으로 노동자층이 형성되어 사회의 주요세력으로 대두했을 뿐 아니라 농민들 사이에서도 의식의 진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5.4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중국공산당의 창당과 중국국민당의 결성이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면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현실적인 안목에서 보게 되었고, 군벌과 제국주의 지배 하에 있는 중국을 구할 수 있는 가능한 이념으로 받아들여 1921년 중국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손문을 중심으로 한 중화혁명당도 비밀조직의 성격을 공개정당인 중국국민당으로 개칭, 남경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하고 삼민주의에 입각한 국민정부를 구성했다.
반군벌 반외세의 목표 아래 양자사이에 제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북벌을 통해 군벌세력의 제거를 꾀하게 된다.
4-4. 내전의 전개와 중공의 승리
손문을 계승한 장개석의 주도 아래 북벌이 이루어져 국민당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공산당과 결별하고 군벌의 진압도 타협을 통한 불충분한 것이었다. 국민당정부는 북벌과정에서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 공산당원에게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대체로 도시의 부르주아나 농촌의 지주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국민정부는 극우적인 반공주의 편에 서게 되고 공산당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진압을 통한 국내안정을 앞세운 장개석에 대해 공산당은 도회지 공격 등의 실책을 거듭하다 결국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모택동노선이 자리잡았다. 농촌지역에서 공산당의 근거지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종전 직후 재개된 내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특히 장개석이 소련과 단절한 대신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 제휴를 꾀하여 좌파 이외의 당원에게도 불신감을 주었다. 이는 미래의 농민혁명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국민정부 시기는 정부에서나 민간차원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제한된 범위지만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나, 내외적으로 여러가지 장애에 부딪혔다. 국민당 정부의 통치는 금융의 근대화라든가 근대적 교육의 보급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지주층이 중요한 지지기반이었던 국민당으로서는 농촌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군사적 팽창에 대처하지 못한 것이 중대한 약점으로 작용했다.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지로 강서 소비에트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지만 장개석은 총 5차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했다. 소비에트는 타격을 받기 시작했고 혁명본거지를 서부 내륙지방으로 퇴각시키기 위하여 연안(延安)에 이르는 대장정을 개시했다.
만주사변 이후 항전의 요구가 고양되는 가운데 서안사건이 일어나(1936) 이를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며, 더 나아가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국민정부는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항일전을 수행했다.중국은 다시 내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차대전의 종전 이후 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한 국민당은 대만으로 철수하고,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통한 소유의 균등화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외국 및 국민당의 자본을 몰수해 국영경제를 확립했다.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공업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농촌의 토지공유제를 기본으로 하는 인민공사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즉 농업의 생산증대와 공업의 근대화를 통한 사회주의건설이 목표였다. 순전히 인민들의 노동력으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식량을 증산시키리라는 낙관론 속에서 진행되었으나 공업의 미약한 기초와, 1959년과 1960년의 식량위기로 전후 3년간 약 1천 5백만 명의 아사자를 내면서 파국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이후 이를 거울삼은 조정책은 개인의 생산의지도 고려하는 쪽으로 움직여갔고 이는 부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966년부터 본격화된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사망한 1976년까지 지속되면서 중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 혁명을 주도한 모택동의 의도는 당, 정부, 군대, 사회에서 반혁명게급을 타파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부단한 계급투쟁이 필요하다는 계속혁명론에 입각하여 유소기나 등소평과 같이 실용주의를 추구하던 반대파를 제거했고, 지식인과 학생도 농촌과 공장으로 보내 노동에 참가하도록 했다. 희생자가 1백만명에 가까울 정도로 파괴적이었던 문화대혁명은 현대 중국에 대재앙을 가져온 것으로 종결되었다. 모택동이 사망한 뒤, 그를 추종하던 4인방이 잠시 득세했지만 곧이어 권력은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5. 일본의 역사
5-1. 근대화 이전의 일본
일본은 4-5세기부터 중국 및 백제와의 접촉에서 고대국가의 기반을 부여받았고, 6세기 말 씨성제도에 입각한 호족연합을 통해 야마토정권을 수립한다. 특히 불교는 일본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6세기 후반 정권을 장악한 쇼토쿠태자는 불교옹호론자로서 수와 신라로부터 선진문화 및 문물제도를 수용해 천황중심적인 집권국가로의 이행을 시도했다. 타이카개신(646)은 이를 완성해 당제를 모방한 율령국가가 수립됐다.
8세기 말 귀족간의 싸움으로 율령체제가 해이해지자 무사단을 거느린 호족들이 토지를 겸병하는 장원화의 과정이 진행됐으며, 12세기 중엽에는 가마쿠라막부의 무가정치시대가 열린다. 일본은 9세기 말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고유의 국풍문화를 형성했다.
가마쿠라막부의 무인정치는 천황으로부터 쇼오군의 칭호를 부여받은 무사의 우두머리가 전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은급이 매개된 주종관계를 형성해 봉건제도와 유사한 성격을 띠었다. 무로막찌막부의 출현(1336) 이후 봉건화는 더욱 촉진되어, 슈고 다이묘라는 봉건영주의 성격을 띤 지방관이 등장했다.
무로막찌 말기부터 막부 특유의 장원제의 위계질서가 붕괴되고 전국시대가 열렸다. 오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패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원정은 일본의 학문 및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히데요시 사후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예야스는 도쿠가와막부를 열어 다이묘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이를 주자학(성리학)의 이념으로 정당화했다.
약 700년에 걸친 막부정치는 일본 특유의 봉건제도와 가부장적 주종관계에 입각한 봉건윤리로 "칼의 문화"를 형성했다. 사회계층은 사.농.공.상이 기본이었으나, 제3계급인 죠닌은 전국시대 이후 상업이 발전하면서 자본을 축적하고 나름의 문화를 형성해 근대화의 터전을 닦았다.
무가정권의 종교는 불교로서 특히 14세기 송에서 들어온 선종은 직관과 섬세한 미적 감각을 조화시킨 선불교로 발전돼, 일본인의 독특한 생활 및 문화감각을 발전시켰다. 주자학은 도쿠가와시대에 관학화해, 고유의 신도와의 융합이 도모됐으며 특히 가부장적 윤리가 선호됐다. 주자학의 명분론과 정통론은 천황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해 명치유신의 왕정복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중세, 팽배했던 족벌정치에 대한 반감이 무사단, 귀족, 사원 사이에서 커지게 되자 그 중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타이라씨 타도에 나서게 되었다. 카마쿠라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간 요리토모는 1185년 단노우라의 싸움으로 타이라씨를 멸망시키고, 1192년에는 무사의 통솔자를 의미하는 세이다이쇼군으로 임명된다. 이 무신정권을 카마쿠라막부라 하는데, 이후 약 140년간 계속되었다.
막부지배의 근본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매개로 한 장군과 가신과의 주종관계에 있었으므로, 카마쿠라막부는 봉건제도에 기초한 일본 최초의 정권이었다.
겐코(원의 침입, 1274/1281) 때에 조정과 사원, 신사에서는 신의 가호를 비는 기도가 계속되었는데, 원이 퇴각하자 일본에는 신국사상이 강화되었다. 전시하 막부의 호죠씨는 독재체제를 통해 전국지배를 강화하게 되었으나, 전비를 부담하였으면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무사들은 막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분할상속제도로 궁핍해진 무사들은 영지를 팔든가 빚은 지게 되었다. 막부는 1297년 무사들이 판 영지를 원상회복케 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별로 효과는 없었으며, 장원영주나 막부, 슈고의 지배에 반항하는 무사들의 집단행동이 일어나면서 막부체제는 동요하게 되었다.
1543년 타네시가마에 표류하여 도착한 포루투갈인이 대포를 전래한 후 포루투갈과 에스파니아의 상선이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였다. 또한 1549년 에수회의 선교사 사비에르를 시초로 하여, 많은 선교사가 일본에서 포교, 교육, 의료활동을 하여 신자수는 급증했다.
대포의 전래로 보병 대포부대가 활약하게 되면서, 통일사업은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로 이어진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아시카가씨의 무로막치막부를 멸망시키고 오우미의 아즈치성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통일에 힘썼으나, 부하장수의 배반으로 1582년 자살했다.
오다의 부하 토요토미는 1583년 오다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하고, 새로 축성한 오사카성을 거점으로 삼아 1590년 전국통일을 완수했다. 토요토미정권은 토지조사를 통해 경작자를 연공부담자로 정하고, 농민의 무기를 몰수하여 병농분리를 꾀했다. 대외정책 면에서는 기독교를 탄압하는 한편, 고아, 루손, 대만에 조공을 요구했으며, 1592년과 1597년에 조선을 침략했다.
히데요시의 사후,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승리하여 전국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에야스는 1603년에는 세이다쇼군으로 임명되어 에도막부를 열고, 1615년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토요토미씨를 멸망시킨다. 과거의 어떤 정권보다도 강력했던 에도막부는 260여년간 계속된다.
5-2.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했다. 일본 역시 미국의 침입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근대로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면서도 그 자극을 효과적으로 수용해서 조속하게 근대적인 국가체제로 전환하였고 아울러 산업의 발전에도 성과를 거두면서 반식민지로 될 위기에서 벗어나 오히려 우리나라와 중국 등을 침략한, 동아시아에서는 에외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대중의 권리는 무시되고 천황에 권력이 집중된 국가체제를 갖추어 내부적으로는 군국주의,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에 개항을 강요받은 뒤 일본에서는 막부권력이 무너지고 메이지유신이라 불리운 위로부터의 개혁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이묘들이 몰락하고 번이 해체되면서 근대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천황을 최우위에 놓는 헌법에 의해 국민의 정치참여는 배제되고 전체주의국가로 나아가는 길이 마련되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내부의 갈등을 조선 등 인근 국가에 대한 팽창정책에 의해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1840년대에 청이 영국에 패배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이 완화되던 중, 1853년 6월과 185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제독이 내항하여 함대의 위력을 배경으로 막부에 개각과 통상을 요구했다. 당시 여론은 개국반대의 양이론이 우세했으나,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밀린 막부는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시모다, 하코다테의 개항과 미국대표의 일본주재가 허용되었다. 이어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등과도 같은 조약을 맺어 일본의 쇄국체제는 끝났다.
1856년에 총영사로 부임한 해리스의 종용에 따라, 일본은 1858년 6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이는 영사재판권이 인정되고, 일본에게는 관세자주권이 없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막부는 이어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67년 12월 천황조정이 막부의 폐지와 신(新)정부의 성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를 공표한 후, 막부와 신정부군 사이의 내전인 무진전쟁이 벌어졌다. 신정부군은 1869년까지 구(舊)막부군을 모두 항복시켰지만, 1868년 3월 메이지(明治)천황은 천황친정과 여론의 존중, 개국화친 등 신정부의 기본정치이념을 선언했다. 신정부는 정부 조직을 정비하고, 연호를 메이지로 정했다. 1869년 천황조정이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 후,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메이지유신이라 한다.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청국군의 출동으로 실패한 후, 자유민권파는 무력에 의한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대립은 점차 격화됐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국이 출병하자 일본정부 역시 군대를 파견하면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청일강화조약으로 청으로부터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받고, 배상금을 지불받았다. 이 중 요동반도는 러시아를 비롯한 삼국의 간섭으로 청국에 반환하게 되어, 일본 국내에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국가주의가 고양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가세입의 약 3배정도였던 배상금 덕분에 일본정부는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군사공업과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청일전쟁 후 중국, 조선시장이 개척되어 방적업과 직물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미국수출을 중심으로 한 제사업이 발달하여, 1900년경가지 방적업, 제사업 등 경공업 부문에서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미국, 영국의 승인 하에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외교, 내정, 군사의 실권을 게속 빼앗아 갔다. 급기야 조선통감 이토오 히로부미 암살사건을 계기로 1910년 한국을 병합하여 조선총독부를 두고 식민지지배를 시작했다. 또한 일본은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경영했다.
5-3. 20세기의 일본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서는 쌀폭동.파업 등에 의해 민중의 의식이 성장하고 일부 지식인의 자극에 따라 국민대중의 정치참여 요구가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메이지 유신이래의 과두정치가 끝나고 정당정치가 시작되는 한편 보통선거가 실시되어 민주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를 다이쇼민주정이라 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사상통제, 외부적으로는 한국합병 이후의 무단정치와 같이 명백한 한계를 지닌 제한된 민주정이었다. 그리하여 경직된 독재체제로 나갈 여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대공황을 겪으면서 일본에서는 우익세력과 군부가 전면에 등장한다. 또한 만주침략을 게기로 국제사회에서도 고립되어 파시즘적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이어서 일본은 중일전쟁을 통하여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국제적 고립이 더욱 심해지고 결국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연합국에 패배함으로써 군국주의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 미군정 아래 외부로부터 주어진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경제적으로도 회복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