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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0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김소리 목사
사도행전 20:32-35
가치관 뒤집기
어느덧 올해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올해 우리 평화목교회의 주제는 “자족이 있는 경건”입니다. 올해의 반을 보낸 지금, 이 주제를 상기하고자 합니다.
자족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것”으로, 내가 스스로 만족하니 충분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충분히 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지요. 그러므로 자족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욕심과 지나친 소유를 경계하고 제어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자족과 욕심은 같이 갈 수 없는 사이입니다. 자족의 생활은 탐심을 버려야지만 가능합니다. 물론, 자족하는 삶은 돈과 같은 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사회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모든 것에도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지위나 권력, 명예 같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 외에도 더 있을 것입니다.
비록 10여 년 전의 것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조선일보와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과 글로벌마켓인사이트가 세계 10개국 5190명을 대상으로 ‘행복의 지도’를 조사했는데, ‘나는 매우 행복하다’고 답한 사람은 한국이 7.1%로 제일 적었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 2위 부자인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꼽은 나라는 한국이 49.3%로 압도적인 1위였다고 하고요. 마지막으로 ‘돈과 행복이 무관하다’고 답한 비율에서도 우리나라가 가장 낮은 7.2%였다고 합니다. 조사결과, 우리나라 사람은 행복은 곧 돈,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몇 년 전에 한 TV프로그램에서 어느 심리학자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이라고 말한 것들이 있습니다. 부채 없는 30평 아파트, 월 500만 원 이상 급여(수입), 2,000cc급 이상 중형차, 1억 원 이상 예금 잔고, 연 1회 이상 해외여행 정도가 충족되어야 우리사회는 중산층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을 최고로 여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우리 역시 이런 사회의 분위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런 풍조를 수시로 겪으며 마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온 마음과 힘을 집중할 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버티고 버티다 힘이 들어 그만 잠깐 마음을 놓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어쩌면 그런 풍조가 이미 나에게 녹아들어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현재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돈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병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 이래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돈 때문에 같은 민족을 종으로 삼거나,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문제가 이스라엘에서 성행하여 큰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레25:35-39)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의 곁에 살면, 너희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너희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 거주자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너희가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안다면, 너희의 동족을 너희의 곁에 데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 너희는 그런 사람에게,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거리를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 곁에 사는 동족 가운데서, 누군가가 가난하게 되어서 너희에게 종으로 팔려 왔어도, 너희는 그를 종 부리듯 해서는 안 된다.
(겔22:7,12-13)성읍아, 네 안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며, 네 한복판에서 나그네를 학대하고, 네 안에서 고아와 과부를 구박하였다. 돈을 받고 살인을 하는 자도 있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 모든 이웃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도, 네 안에 있다. 그러면서도 너는 나를 잊고 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네가 착취한 불의한 이익과 네 한복판에서 벌어진 살인 때문에, 내가 분노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벼르고 있다.
(겔18:5,7-9)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법과 의를 실천한다고 하자. 사람을 학대하지 않으며, 빚진 사람의 전당물을 돌려주며, 아무것도 강제로 빼앗지 않으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며, 돈놀이를 하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으며, 흉악한 일에서 손을 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리며, 나의 모든 율례대로 살아가며, 나의 모든 규례를 지켜서 진실하게 행동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13:18, 막4:18-19, 눅 8:14)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19:21-24, 막10:21-25, 눅18:22-25)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6:24, 눅16:13)
이처럼 돈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뿌리 깊은 본능인 것 같습니다. 좀처럼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며 가르치시고 선포하셨는데도 포기 못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줍니다.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바울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고별장면입니다. 붙잡힐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만남을 갖고, 역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당부의 말을 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합니다.(33-34)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 옷을 탐낸 일이 없다.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했다.” 즉, 돈과 재물에 대해 탐심내지 않았다. 욕심내지 않았다. 돈과 재산, 소유에서 자유로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의 많은 편지에서 일관되게 진술되고 있고 오히려 이 점을 약점으로 삼아 바울을 공격하는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럴듯하게 꾸며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정말 이렇게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돈과 재물을 욕심내지 않고, 돈과 재산, 소유에서 자유롭게 살아왔다는 바울의 말과 그런 삶, 부럽지 않습니까? 어떻게 거기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바울도 나와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 그렇다면 나도 가능한 것이 아닌지 다소 들뜨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 희망 때문에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돈과 소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비법은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32를 보면,
“나는 이제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맡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돈과 재물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도 나를 튼튼히 세우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덕분이었다. 그 말씀에 여러분을 맡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5를 보면 또 하나의 말씀을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이것은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경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본문에서만 언급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언급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쉽게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약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전승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직접 이 말씀은 하신 것은 아니지만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종합하여 재구성 또는 핵심 요약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간에,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이 말씀을 실천하며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체득하고 체화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덕분에 자신이 재물과 소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떠신가요? 무엇인가를 받을 때 기쁘신가요? 줄 때 기쁘신가요? 귀한 무언가를 받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그 귀한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으신가요? 무엇을 더 즐겨하시나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각과 가치관을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고 기쁘고 행복하다고 말이지요. 의심이 들고 동의되지 않더라도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가르침에 자신을 맡겨 한 걸음 내딛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야 그것을 몸소 깨달으며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더 큰 깨달음과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마치 주는 것이 더 복되다는 말씀을 되새기며 삶의 순간들을 선택하며 걸어갔더니, 어느 순간 재물과 욕심으로부터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되는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가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고 따라올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서 주는 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힘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이 섬김 받는 것에서 섬기는 것으로, 복수하는 것에서 화해와 용서로, 원수를 미워하는 것에서 사랑하는 것으로, 크고 넓은 길보다는 작고 좁은 길로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 나의 삶과 내면을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바꾸어야 할 생각과 가치관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은...’이라며 뒤로 미뤄두고 싶기도 하고, ‘나중에...’라며 기존에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나의 삶과 걸음을 맡기고 내딛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안에서 샘솟을 것입니다. 동시에 기존에 것을 포기 못하고 붙잡고 있던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고 생각이 짧았는지 깨달아질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말씀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이곳에 나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는 우리를 새롭게 하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내 존재와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내 내면을 비춰 생각과 가치관을 직시하며 바꾸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에는 목적가치와 수단가치가 있습니다. 목적가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가치로 행복, 기쁨, 평화, 사랑 등이 있습니다, 수단가치는 이 목적가치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부귀, 권세, 명예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단가치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흔합니다. 돈과 권력, 지위와 명예를 삶의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가치전도’ 또는 ‘목적전치’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겐 거꾸로 된 가치를 다시금 제대로 돌리는 ‘가치관 뒤집기’가 필요합니다.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의미 있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보람 있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더 이상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삶과 생명을 우리에게 나눠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이지요.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처럼 말이지요. 사도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말씀에 담긴 이 의미를 몸소 경험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은총이 우리 평화목교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가치관을 바로 잡으시는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