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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의 아름다움
문학은 아름다움을 생명으로 한다. 아름답지 않으면 문학이 아니다. 1791년 정조대왕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읽고 의문이 나는 대목을 적어 성균관 유생 등에게 나누어 답하게 하고 이를 정리하여 『강목강의』를 편찬했다. 그중에 문학을 사랑하다 나라를 망하게 한, 진(陳) 후주(後主)와 관련되는 대목에 대해 정조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 졌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문식이고 산천과 초목은 땅의 문식이다. 문학에도 문식이 있음이 또한 그러하다. 문학은 반드시 더러운 것을 씻어내 아름답게 윤색하여 환하게 빛나고 찬란하게 드러나게 한 뒤 에야, 비로소 진리를 담으면 진리가 더욱 분명해지고 사실을 기록하면 사실이 더욱 구비되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만약 문학의 화려함을 싫어하여 이를 일체 금지한다면, 이것은 구름 문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도자기가 막사발이 되지 못하였다고 탓한다거나, 수놓은 비단이 삼베옷이 되지 못한다고 탓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수(隋)의 문제(文帝)는 서리(胥吏) 출신으로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장부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문학을 쓸모없는 것이라 여겨 배척한 것이 아니었던가? 『시경(詩經)』의 비(比)와 흥(興)으로 된 시는 대부분 음풍농월 한 것에서 많이 가져왔지만 이 때문에 국풍(國風)과 아(雅)의 흠으로 여겼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노라.”
정조는 문학의 생명은 아름다움이므로, 막사발이나 삼베옷이 아니라, 고려청자나 임금의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옷이 바로 문학이라 했다. 아름다워야 진리를 담고 사실이 구비된다 했다. 정조는 몸을 수양 하거나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무관해 보이는 음풍농월이 시의 본질이요. 그것이 흠이 되지 않는다 했다. 이처럼 문학은 아름다운 고려청자요. 임금이 입는 화려한 비단옷이다.
2. 청각과 시각의 즐거움
아름다움이 시의 본질이라면, 한시에서 그 아름다움의 내용은 무엇인가? 한시의 아름다움은 먼저 소리에서 찾을 수 있다. 한시의 소리는 외부의 소리와 내부의 소리로 나눌 수 있다. 외부의 소리는 낭송했을 때의 효과다. 지금 우리말은 소리의 높낮이가 없어졌지만, 조선 초기까지는 뚜렷하게 존재했다. 한자는 현대 중국어의 사성과 정확히 대응되지 않지만,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가 나는 글자로 구분된다. 한시는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가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배열되므로, 한시를 읽으면 절로 가락이 생긴다. 예전 시를 짓는 사람들은 글자 소리의 높낮이를 외웠기 때문에 시를 읽으면 가락을 느꼈다. 혹, 중국어를 아는 사람이 중국어의 성조에 따라 한시를 읽는다면 높고 낮은 가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한시를 지금의 중국 음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옛사람들이 중국 음으로 우리 한시를 읽지 않았거니와, 특히 고려 중엽 이전의 한자음은 현대 중국 음과 매우 다르고 오히려 지금의 우리 한자음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시를 읽을 때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하여 글자 소리의 높낮이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소리와 거친 소리를 적절하게 배열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시는 낭송해 보면 발음이 어려워 잘 읽히지 않거나 침이 튈 정도로 거친 소리가 나는 것도 있고, 소리가 부드러워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도 있다. 또한 작품 안에서도 한 구절이 거친 소리를 중심으로 한 것이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소리로 한 구를 구성하기도 한다. 거친 소리와 부드러운 소리가 교체되면서 강약의 리듬을 형성함으로써 시를 소리 내어 읽을 때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같은 경치를 묘사하더라도 봄날의 흥취를 노래하는 즐거운 분위기의 시는 부드러운 글자나 소리가 비슷한 글자를 나란히 둘 때가 많지만, 시인의 울분이 들어 있을 때는 거친 소리의 글자를 자주 구사한다. 또 당나라 시풍을 좋아하는 시인은 부드러운 소리를 자주 쓰고, 송나라 시풍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친 소리를 자주 쓴다. 당나라 시풍은 소리의 울림을 중시하지만, 송나라 시풍은 소리의 기세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한시에는 낭송할 때의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여러가지 소리가 담겨 있다. 자연을 노래한 시에서는 바람소리, 개울물소리, 비오는 소리, 낙엽지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는 자연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니,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도란도란 사람들의 말소리도 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동의 피리소리도 있으며, 한스럽게 부르는 여인의 노랫가락도 있어 이러한 여러 소리들이 두루 실린다. 시를 짓는 사람은 이러한 음향효과에 세심한 배려를 하므로 시를 읽는 사람도 작품 내부에서 들려오는 이러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시를 읽는 즐거움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한시를 읽을 때는 후각도 사용해야 한다. 문향(聞香)이라는 말이 있다. 향기를 맡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름다운 꽃향기를 묘사한 구절에서는 그 꽃의 향기를 상상으로 맡아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은 역시 시각이다. 자신의 뜻을 일관되게 써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도 있지만, 음풍농월의 대상인 자연을 노래한 대부분의 한시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들어가 있다. 작품 속에 묘사된 풍경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떠한 그림이 될지 머릿속에 그려 본다면 한시의 아름다움과 재미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한시에 담긴 소리와 향기, 그림을 두루 즐기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기관을 활짝 열어야 한다. 감각기관을 열어서 보고 듣고 맡노라면, 절로 상상력이 발동된다. 한시는 현실 공간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한다. 그러면 방 안에 앉아서 대자연을 마주할 수 있고 정다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리운 사람을 만 날 수 있다. 감각기관을 열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를 읽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하고자 한다.
3. 머리로 읽는 시
감각기관을 열고 상상력으로 시를 읽는 즐거움은 가슴의 몫이다. 시라 하면 가슴으로 읽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머리로 읽어야 하는 한시도 많다. 고소설을 보면 뛰어난 인물은 일필휘지 선장(場先)하여 장원급제를 한다. 과연 예전에 다 그러했을까? 당연히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한시는 규칙이 매우 복잡하여 좋은 시상이 떠오른다 하더라도 바로 작품을 완성할 수 없다. 시상이 떠오르면 대략적으로 시를 얽어 놓고 조용한 방에 혼자 앉아 시구를 이리저리 배열해 보고 또 이 글자 저 글자 바꾸어가며 퇴고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용히 앉아 한시를 짓거나 다듬을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상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한시. 특히 율시는 시상의 전개가 매우 중요하다. 주제를 제시하고 이를 발전 혹은 변화시킨 다음 시적 종결에 이르는 과정에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또 흥을 돋우는 경치를 먼저 묘사한 다음 자신의 뜻을 표방할 수도 있으며, 뜻을 먼저 적은 다음 경치를 묘사할 수도 있다. 시인이 시상을 어떻게 안배하는 가를 살피는 일이 시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중요한 절차다.
퇴고라는 말은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가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 [僧敲月下門]라는 구절을 얻고 혼자 손짓을 해대면서 고(敲)가 좋을지, '퇴(推)'로 바꾸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는 데서 나왔다. '고'라 고 하면 두드리는 것이니, 문을 두드리는 청각적 이미지를 중시한 것이요. '퇴'라고 하면 소리보다는 밝은 달빛에 어우러져 문을 미는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한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알기 어렵지만, 예전 시인들은 이처럼 더 좋은 시를 만들기 위하여 수염을 꼬아가며 고민을 했다. 시의 눈, 시안(詩眼)이라는 말도 이렇게 하여 나온 것이다. 하나의 글자로 한 구 전체의 이미지가 확 달라지므로 글자 하나가 화룡점정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한시를 읽을 때 시인이 왜 그 글자를 썼을까 고민해야 한다.
시인이 어떻게 시상을 배열하고 글자를 가다듬었는가를 살펴야 하므로, 시는 머리로도 읽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와 함께 한시는 현대적인 서정시처럼 시인의 감정만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철학적 깨달음을 시로 드러내기도 하고, 사회적 모순을 시로 첨예하게 고발하기도 한다. 현대시에 낭만적인 주정주의(主情主義) 계열의 시가 있는가 하면, 감정을 절제한 이성적인 주지주의(主知主義) 계열의 시도 있는 것처럼, 한시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의 감정 대신 이성만을 제시하는 시도 많다. 이러한 시는 냉철한 머리로 읽어야, 그 즐거움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시인이 냉철한 머리로 어떻게 시를 제작했는가라는 창작 방법을 이해함으로써 시를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하고자 한다.
4.삼라만상을 담는 시
한시는 옛사람에게 다반사(茶飯事). 곧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과 같은 일상이었다. 한시는 생활의 일부였다. 그래서 꽃이 피면 시를 지어 즐거워하고 꽃이 지면 가는 봄을 슬퍼했다.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그 괴로움을 노래했다. 낮잠을 자고 나면 시를 짓고 낮잠을 방해하는 파리와 밤잠을 설치게 하는 모기를 두고도 시를 지었다. 먹고 마시는 음식이나 생활 주변의 사소한 기물을 두고도 시를 지었다. 주변 사람에게 축하할 일이 있어도 슬퍼할 일이 있어도 편지를 겸하여 시를 지어 보냈다. 사람을 만나면 시를 짓고 헤어질 때 시로 전송했다. 길을 가다 무엇이 눈에 띄면 시를 지었다.
시마(詩魔)라는 귀신은 시인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고 시를 짓게 했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가 「시마를 쫓는 글[驅詩魔文]」을 지어, "구름과 노을이 피어나고, 달과 이슬이 맑고, 벌레와 물고기가 기이하고, 새와 짐승이 희한하고, 새싹과 꽃받침, 초목과 화훼가 천태만상으로 천지에 변화하고 있는 것을 너는 거침없이 취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보는대로 읊는다."라고 시마를 꾸짖어 쫓았다. 이 때문에 시인은 삼라만상을 시로 노래한다. 시인은 이러한 사람이다.
시는 삼라만상을 담는 그릇이다. 이때 시인이 삼라만상을 시에 담는 방식 역시 삼라만상만큼 다양하다. 시인의 개성에 따라 삼라만상을 담는 방식이 다르고, 담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서도 담는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시대의 유행에 따라 또 다른 방식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 달라지는 방식을 살피는 것도 시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이다. 그 시를 읽을 때 삼라만상을 담는 방식에 따라 한여름 우물물을 마시는 듯 시원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고, 한겨울 숭늉을 마시는 듯 훈훈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수 없다. 삼라만상을 시에 담는 방법을 이해해야 시를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삼라만상을 다룬 한시 중에서 특히 사랑과 우정, 죽음, 자연, 여행, 일상과 현실 등 우리 한시의 가장 보편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을 통하여, 이러한 소재가 어떻게 묘미 있게 표현되는가를 살핀다. 이 역시 한시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리라.
5.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의 역사
시는 예술의 하나이기에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 한시사는 진부함을 극복하고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역사다.
적어도 고려 말 성리학이 이 땅에 유입되기 이전에는 한시는 음풍농월(吟風弄月)이 주를 이루었다. 글자 그대로 바람을 노래하고 달빛을 희롱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정조 역시 정전(正典)의 지위를 누린 「시경」조차 음풍농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했으니, 음풍농월이 시의 본령인 것은 분명하다.
시는 음풍농월이다. 『논어』를 보면, 공자가 제자들의 뜻을 물었을 때,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다가 노래를 읊조리면서 돌아오고 싶습니다"라 했다 한다. 바람을 쐬다가 노래를 읊조리면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음풍농월의 근원이다. 조선의 이념을 떠받든 성리학에서 주자와 함께 추앙받는 정명도(程明道)가 「춘일우성(春日偶成)」에서 "엷은 구름에 산들바람 정오가 가까운 때, 꽃 찾고 버들 따라 앞개울을 건너노라"[雲漢風輕近午天, 傍花柳過前川(운한풍경근오천, 방화류과전천)] 라 했듯이 꽃을 찾고 버들을 따르는 일이 곧 음풍농월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명유학안(明儒學案(권54)』에 따르면 명(明)의 학자 여곤(呂坤)은 "천욕(天欲)이 있고 인욕(人欲)이 있으니, 음풍농월하면서 꽃을 찾고 버들을 따르는 일은 천욕이다. 천욕은 없어서는 아니 되니 없으면 적막하고, 인욕은 있어서는 아니 되니 있으면 더러워진다"라고 했다. 천욕을 따라 음풍농원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본령이다.
고려 말 성리학이 문인의 공적인 의식 세계에 군림하기 이전의 시는 대부분 글자 그대로 음풍농월이었다. 시로 명성을 날린 문인들은 피는 꽃을 보고 기뻐하고 지는 꽃을 보고 눈물지었다. 이러한 시를 가지고 교제를 하고 벼슬을 했다. 아무도 음풍농월을 탓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시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당나라 말기의 시를 배워 바람과 구름을 노래하면서, 영원한 자연에 대비되는 유한한 인생의 비애를 노래하는 것이 유행했다.
그러다가 고려 중기에 이르면 이러한 시풍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서서히 문단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소식(蘇軾)으로 대표되는 송나라의 시를 배워 때로는 활달한 기상을 노래하거나 사물을 기발하고 교묘하게 표현하는 일이 유행했다. 음풍농월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표현의 방식에서 새로움을 찾았다.
다시 고려 말 이래 성리학이 유입되어 정착하면서 문인들은 서서히 시가 음풍농원 이상의 것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는 내면을 바르게 하는 성정 수양의 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공자나 정명도의 음풍농월도 성정을 수양하는 방편으로 해석되었다. 이황이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拔) 『퇴계집 권43』에서 '탕척비린'(蕩滌鄙吝), 곧 마음의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 없애는 것이 시의 기능이라 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학자들은 마음의 수양을 거쳐 나온 맑은 정신을 닮은 시를 짓고자 노력했다. 시인이기만 한 데서 벗어나 정치가적인 면모가 강했던 문인들은 개인적인 정감을 넘어 사회적인 현실을 적극적으로 시에 담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관풍찰속(觀風察俗), 곧 풍속을 관찰하여 시에 담는다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대세는 음풍농월이었다. 성리학으로 삶의 자세를 다잡은 학자들도 한시가 일상의 하나인지라 생활 주변에 놓인 꽃과 새를 노래하는 시의 본령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아름다움과 새로움을 생명으로 하는 시를 사랑하는 시인은 낡은 시풍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유행을 일으켰다. 조선 초기에는 기본적으로 송나라 시풍을 견지하면서도 황정견(黃廷堅) 등의 시를 배워 조직적으로 시상을 안배하고 글자의 조탁에 힘을 쏟으면서 비극적인 세계관을 시에 담았다. 조직이 아름다운 시를 쓰느라 고심하는 사이 이들의 시는 난삽하여 시다운 흥취가 사라지는 병폐를 드러냈다.
이에 16세기 무렵, 다시 세월을 거슬러 당나라의 모범적인 시를 배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소리가 부드럽고 흥이 있어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시를 써서 문단의 풍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신라 말 고려 초 시인들이 드러냈던 유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당나라 때보다 더 이전의 시를 읽어 이를 보완하고자 했고 또 제법 성과를 거두었다.
18세기 무렵부터 문단의 분위기는 다시 크게 바뀌었다. 개성에 바탕을 둔 새로움이 문학의 본질임을 깨달은 문인들은 새로움을 넘어 아예 기이함으로까지 나아갔다. 여기에 더하여 중국적인 것이 아닌 조선적인 무엇을 담아야 진정한 시라는 각성이 일어났다. 조선의 경물과 풍속을 시에 담아내기도 하고, 아예 우리말 어휘를 시어로 사용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중 내부적인 모순에 서양의 충격이 더해지고, 서양을 먼저 배운 일본에 의하여 조선이 멸망하면서 한시의 생명은 끝이 났다.
우리 한시가 시대에 따라 새로워진 면모를 살피는 것이 시를 읽는 큰 즐거움이다.
- 이종묵, 『우리 한시를 읽다』, 돌베개,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