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사
고창군 대산면 연동리
한국 불교 태고종 1950년에 승려 서민혜와 보살 하종례가 한날 한시에 같은 꿈을 꾸었으며
꿈속에서 미륵보살에게 "야산에 내가 있으니 모셔다 절을 창건하라"는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받나 미륵도량으로 용화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용화사는 1950년 창건, 대웅전, 미륵전, 요사와 용화사 오층석탑이 있다.
1972년 한국 불교 태고종에 등록
초대 주지인 서먼혜는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과 요사를 창건하여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두를 이어 고대근, 김철봉, 이종남이 주지가 되어 사찰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952년 승려 정법운이 대웅전을 늘려 짓고 종각을 새로 지어 범종을 조성했고
스리랑카에서 진신사리를 가져와 용화사 오층석탑을 세웠다.
그리고 부처의 지혜로 암흑의 세계를 비춘다는 2기의 석등과 인류의 평화와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평화통일 기념비를 세웠다.
이어서 용화사의 창건주 서민혜와 하종례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졌다.
용화사는 염험한 석조미륵 불상이 있는 미륵도량이다.
당우로는 대웅전과 미륵전, 요사, 범종각이 있다.
대웅전에는 불상 금동보살상, 석가모니불좌상, 관세음보살상이 있고
불화로는 석가모니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신상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등이 있다.
용화사에 가면 고색창연한 법종각이 있다.
이 범종각은 일제강점기때 뜯어서 전라남도 영광 서여자중학교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래 2층이던 것을 1층으로 세웠다.
용화사 미륵불상
용화사에는 2002년 11월 15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3호로 지정된 용화사 미륵불상이 있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용화사 1987년 승려 정법운이 세웠다.
탑의 기단부에는 8부신중이 조각되었고, 1층부부에는 동서남북으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승려 서경보를 통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이다
불상은 두툼한돌을 이용하여 뒷부부부는 원형 그대로 다듬지 않고 두었으며 앞부분은
조각을 가하였지만 전체적으로 평면감을 주고 측면에서 보면 상당이 중량감이 느끼지는
불상이다.
사호집
사호집은 조선후기 간행된 고창 출신 유학파 오익창의 시문집으로
오익창(吳益昌)은 (1557~1635)은 자가 유원(裕遠), 호는 사호(沙湖),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연동리 장동에서 태어나 23세에 사마시에 뽑혔다.
성리학에 밝고 육예를 통했으며 특히 산수에 깊고 재략이 있었다 함.
효종 때 우암 송시열이 이조에 있으면서 오익창의 시문을 사고하다 그의 사적에 탄복하여 이를
경연에 알려 중훈대부에게 추종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병조참판 이태화가 오익창의 충절과 학문에 감동하여 사호집 서문을 기꺼이 썼다고 한다.
본서의 저본은 아사면 흥룔 오영택 소장본이다
시집의 형태는 3권2책이다. 표제는 사호집이다
구성내용은 건(제1권),곤(제2권)으로 이루어 졌고 병조참판 이태화, 이산관, 정언유, 정범조,
목만중의 서가 있다.
이어 오사호전.사호선생세계, 사호선생사실,이 수록되어 있고
을사편에 심원별야외 6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다음 행시 편에는 여재춘풍중 외 7편이 수록되어 있고
책 8편이 실려 있다
잡저편에는 무극재곤 복지간론 외 3편이 실려 있으며 발 1편, 기타 장, 갈 사림통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오익창은 문신이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을 모은 뒤 이순신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사호집은 그의 학문과 사상을 나타내주는 문집이고
오익창의 후손인 오영택의 집에 사호집과 함께 선무원종일등공신녹권이 잘 보존되고 있다.
정인후 묘표(鄭仁垕 墓表)
정인후 묘표는 대산면 연동리673번지에 세워졌다
이 묘표는 양사동으로 이어지는 농로변에 위치한다.
비신의 전면에는 조선처사진주정공인후지묘(朝鮮處士晋州鄭公仁垕之墓)란 비명이 있으며
측면에는 "공지졸후 이백십년 신미계추변간"이라 쓰여 있다.
비문은 7세손 태환(泰煥)이 세웠다고 각자되어 있다
대산지서 대장 출장소
대장리 연동리 446-2 일대에는 1949년도에 고창경찰서 대산 출장소가 있었는데
한국 전쟁 말기인 1950년 좌익의 점령으로 학살 대상자인 우익계 인사들을 구금 감금하던 곳으로
사용하였다. 1950년 12월 26일 대산면이 수복됨에 따라 1951년 철거되었다.
인공시절 대산 인민위원장은 연동리 통배미에 살던 이모씨였으며 군경이 대산을 수복하자
불갑저수지에서 죽었다한다.한편 연화 출신 구용서는 인민군에 끌려가서 장교가 되었다가
국군에 자수하고 송정리 포병부대 교관으로 있다가 제2차 서울 탈환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철의 삼각지 전투(철원)에서 순국하였다.
연동리 시설
연화마을 경로당(연화, 장동, 청룡마을 회관)이 있다.
특히 연화마을은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쌀을 한섬씩 마을에 기부하고
이 마을 출신 구양서 씨가 기증한 마을 답에서 나오는 쌀로 출향인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한다
모정 연화마을에는 모정 2개소, 부기마을 1개소, 장동마을 모정은 연방죽과 아름드리 팽나무 두그루가 있다
연화마을 수구막이
연화마을 입구(붓도랑) 1997년 이전까지 숲정이가 있었다.
숲정이는 마을앞 하천인 장자천을 따라 부기마을 앞 갈마천까지 수백 년 이상 왕버들이 1km 이상 있었다
이곳에는 못샘이라는 식수용으로 쓰던 우물도 있었다 한다.
연화마을 답
마을 답은 650평 구양서 전 고창군 산림 조합장이 마을에 희사한 논이다.
몆 해 전 이마을 출신 여성들이 마을 회관에서 숙식을 하였을 때 쌀도 업소 누가 쌀도 제공하지 않아
쌀을 사먹는 것을 보고 마을 답을 조성하게 되었다 한다.
남은 일부의 싸른 마을 기금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장동마을 당산과 철륭
장동마을은 남북 방향으로 골이 깊게 발달하였으며 따라서 수구는 마을의 좌청룡에 있으며
이 좌청룡의 수구를 보호하기 위해 당산이 있다.
현재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으나 팽나무로 된 두그루의 당산이 있가.
향재
햔재는 장동마을 (대산면 장동길 21-5번지)에 있다.
영뤙 신씨 자제들과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고져 대산면 장동에 고종 때 야암(野菴) 신정규(辛廷珪)가
세운 서당이다
향재 옆에 은행나무가 있어 향재라 이름하였다.
장동마을의 소공원
장동마을의 이공원은 영월 신씨 신달하씨가 이곳에 양자로 오면서 물려 받은 터라 팔지 않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신달하씨 생전에 이곳 마을 중앙에 작은 공원을 조성하여 마을의 휴식처로 자녀들이 꾸며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