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분 / 15세 이상 관람가>
모든 남자가 증오했고 모든 여자가 사랑한 남자
전 유럽 여성들의 마음을 거머쥔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묘한 외모와 화려한 연주 기교로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멎게 만드는 그는 명성과 권력보다 방탕한 생활만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우르바니라는 인물이 나타나 달콤한 제안을 한다.
"당신은 좋아하는 연주를 미친 듯하면 되오.
난 이 순간부터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수족이 되어 몸 바쳐 일하겠습니다."
우르바니의 도움으로 파가니니는 곧 전 유럽의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지휘자 왓슨에 의해 런던에서의 단독 콘서트에 초청받게 된다. 런던에 도착한 파가니니는 왓슨의 딸 샬롯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를 이용해 스캔들을 만들어 명성을 얻고자 한 우르바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함정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데…
=== 참고자료 === <2015년 5월 27일 네이버캐스트 / 진회숙 글>
영화 속 클래식
버나드 로즈 감독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는 18세기 후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적인 기교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웬만한 사람은 흉내내기 힘든 고난도의 기법들을 능숙하게 해냈는데, 이런 파가니니를 사람들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그 대가로 고난도의 연주기술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버나드 로즈 감독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영화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들었다. 영화는 어린 파가니니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작곡한 [카프리스] 5번을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면은 곧바로 성인이 된 파가니니의 콘서트 무대로 연결되는데, 파가니니는 무대에서 신들린 듯 연주에 열중하지만 관중들은 그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법 잘 하는데...”하는 정도의 반응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람이 있다. 바로 우르바니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는 파가니니에게 접근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좋아하는 연주를 미친 듯하시오. 이 순간부터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당신의 수족이 되어 몸 바쳐 일하겠소.”
“거저 해 주지는 않을 거고 조건이나 말하시오”
“현생에서는 내가 당신을 섬기겠소. 하지만 내세에서는 당신이 나에게 똑같이 해주시오.”
“난 내세니 뭐니 하는 거 안 믿어. 그러니 이 제안, 받아들이지.”
이 대화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젊음을 얻었다. 우르바니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약속대로 파가니니를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었다. 우르바니의 도움으로 파가니니는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유럽의 극장들이 모두 그를 초청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런 파가니니의 명성은 유럽 대륙을 넘어 멀리 영국 런던에까지 전해진다. 일찍이 파가니니의 인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지휘자 존 왓슨은 파가니니를 런던으로 초청한다. 코벤트 가든 오페라 하우스에서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다.
존 왓슨의 초청장을 받은 우르바니는 그의 초청에 응하겠다는 답장을 보낸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막무가내로 런던행을 거부한다.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파가니니는 사생활이 엉망이었다. 연주회에서 벌어들인 엄청난 돈을 술과 여자, 도박과 같은 방탕한 생활을 하는데 다 써버렸다. 매일 주색에 빠져 살다가 틈만 나면 도박장으로 달려가 가진 돈을 모두 날리곤 했다. 돈을 모두 잃자 자신의 보물인 바이올린까지 팔아 버렸다.
이런 줄도 모르고 런던의 존 왓슨은 파가니니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선불조로 파가니니에게 이미 상당한 액수의 돈을 보낸 그는 만약 파가니니의 연주회가 무산되면 빚더미에 올라 않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기다리는 파가니니는 오지 않고, 대신 편지 한 통이 그에게 배달된다. 파가니니가 몸이 아파 런던에 올 수 없다는 편지이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존 왓슨은 깊은 절망에 빠진다. 파가니니를 데려오려고 이미 엄청난 돈을 빌린 그는 집안의 물건을 모두 압류당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노심초사하고 있던 어느 날, 드디어 파가니니가 런던에 도착한다. 우르바니가 몸이 아파 의식이 몽롱한 상태의 파가니니를 강제로 런던으로 데려온 것이다. 존 왓슨은 파가니니와 우르바니를 런던 시내의 한 호텔로 안내한다. 하지만 호텔 앞에 불청객들이 기다리고 있다. 파가니니의 방탕한 사생활을 문제 삼은 여성윤리연합이 그의 콘서트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파가니니가 도착하자 여자들은 “악마는 물러가라. 간음한 자는 물러가라.”고 외친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존 왓슨은 급히 파가니니와 우르바니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이미 파산해서 하인도 요리사도 모두 내보낸 상황이지만 존 왓슨은 이를 숨기기 위해 딸 샬롯을 하녀로, 동거녀인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소개한다. 샬롯을 소개받은 파가니니는 남다른 기품과 외모를 지닌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은근히 추파를 던지지만 샬롯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연주회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티켓 판매 실적이 저조하다. 신문 기자들은 티켓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기사를 써대고, 거리에서는 여성윤리연합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파가니니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존재이며,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존재라고 외쳐댄다. 존 왓슨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 노심초사한다. 그런데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왕으로부터 파가니니를 궁전으로 초대한다는 초대장을 받은 것이다. 궁전에서 연주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흥행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존 왓슨은 우르바니에게 왕의 초대장을 보여주지만, 우르바니는 이를 거절한다. 아무리 왕이라도 티켓을 사고, 직접 극장에 와서 연주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우르바니의 배짱에 존 왓슨은 혀를 내두른다.
런던에서도 파가니니는 예전의 방탕한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연습을 하지 않고 여자를 유혹하거나 놀 궁리만 한다. 어느 날 밤, 유흥을 즐기기 위해 우르바니와 함께 술집을 찾은 파가니니는 바이올린 연주로 좌중을 압도한다. 그가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베니스의 카니발]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음악을 연주하는 도중 바이올린 줄이 모두 끊어지고 한 줄만 남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줄만 가지고 연주를 무사히 마쳐 또다시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파가니니는 존 왓슨의 딸 샬롯이 슈베르트의 가곡 [물레질하는 그레트헨]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동했는지 생전 연습이라고는 하지 않던 그가 바이올린을 잡고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의 2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가 샬롯의 마음을 움직인다. 파가니니의 연주에 감동을 받은 그녀는 그에게 그동안 무례하게 군 것을 사과한다.
드디어 연주회가 열리는 날, 파가니니는 연주회 직전 돌연 자취를 감추어 존 왓슨과 샬롯의 마음을 태운다. 존 왓슨은 악장에게 만약 파가니니가 안 나타나면 대신 바이올린 독주를 하라고 부탁한 다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연주곡목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드디어 오케스트라 제시부가 끝나고 독주 바이올린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어딘가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의 진원지는 무대가 아닌 객석. 파가니니는 객석에서 [카프리스 24번]을 연주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관객들은 파가니니의 독특한 출현 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전까지 어느 바이올리니스트도 시도하지 않았던 화려하고 다양한 연주기법을 구사하는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이 연주회에서 파가니니는 앙코르곡으로 샬롯과 함께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의 2악장을 편곡한 [나 그대를 생각해요, 내 사랑]을 연주한다. 두 사람의 연주는 많은 박수갈채를 받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파가니니와 샬롯은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파가니니는 순진한 처녀를 우롱한 파렴치범으로, 샬롯은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정부로 이름을 날린다. 결국 파가니니는 성추행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가 쫓기듯 런던을 떠난다. 하지만 그 후에도 샬롯을 잊지 못해 그녀에게 유럽 연주여행을 같이 하자는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샬롯은 미국 연주여행이 잡혀 있다는 이유로 이 청을 거절한다. 그 후 파가니니는 자신의 작품을 악보에 옮기며 쓸쓸히 말년을 보내다가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둔다.
바이올린 연주사에서 파가니니는 구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음악가로 꼽힌다. 세계 역사가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 기원후로 나뉘듯, 바이올린의 역사는 파가니니 이전과 파가니니 이후로 나뉜다. 그전에 바이올린 기교는 지금처럼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파가니니가 이것을 극한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파가니니는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에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였다. 브리지에 활을 써서 백파이프 소리를 내는 등 남들은 하지 않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러다가 15살 때부터는 하루 10시간 이상 바이올린을 연습하며 자기만의 독창적인 연주기법을 개발했다. G선 하나만 갖고 연주한다거나 높은 음역에서 더블 스토핑을 구사하고 이중 트릴을 연주하며, 왼손으로 줄을 튕기면서 오른손으로는 활을 켜는 등 보통 사람은 구사하기 힘든 초인적인 기법들을 개발했다.
그 기법을 총망라한 것이 바로 그가 작곡한 [24개의 카프리스]이다. 영화에서는 이 중 5번과 24번이 나온다. 카프리스란 형식에 제약받지 않고 독창적이고 발랄한 악상을 표현하는 지유 분방한 곡을 말한다. 이 작품은 피아노 반주 없이 바이올린 혼자만 연주하는데, 파가니니의 주법이 총망라되어 있는 바이올린의 경전으로 꼽히고 있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리스트가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이 곡을 듣고 스스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820년 로마에서 악보가 출판되었는데, 출판 즉시 연주 불가능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짧은 시간 동안 손가락 근육이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고난도 기교가 펼쳐진다. 24개의 곡이 진행되는 동안 연주자는 왼손으로 줄을 퉁기는 피치카토 주법을 비롯해 옥타브와 10도 중음 주법 등 각종 기교를 선보이며 주제 선율을 장식해간다.
파가니니는 다섯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의 협주곡은 멜로디가 아름답고 기교가 화려하지만 음악적인 내용은 그다지 없는 편이다. 음악적 깊이보다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영화에서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1악장과 2번의 3악장 그리고 4번의 2악장이 나온다. 이 중 런던 연주회에서 파가니니가 앙코르곡으로 연주하는 2번의 3악장에는 [라 캄파넬라]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라 캄파넬라’는 ‘종’을 의미하는데, 주제 선율이 마치 댕댕거리는 종소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런 제목이 붙었다. 나중에 리스트가 이것을 주제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연습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런던 연주회의 본곡으로 연주되었던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1811년 그의 나이 29살 때 완성한 것이다. 본래는 E플랫 장조로 되어 있었지만 독주 바이올린의 연주기법이 어려워 반음 내린 D장조로 연주하고 있다. 주요 멜로디는 모두 이탈리아풍으로 작곡되었으며, 전 악장에 걸쳐 독창적이고 어려운 기교를 종횡무진으로 구사하고 있다.
파가니니는 작곡가라기보다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모두 바이올린 곡에 편중되어 있다. 영화의 주제곡처럼 나오는 노래 [나 그대를 생각하네. 내 사랑] 역시 바이올린 협주곡의 2악장을 편곡한 것이다. 방탕한 사생활과는 달리 파가니니의 느린 곡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서정을 담고 있다. 빠른 곡에서는 거침없이 악마적인 기교를 쏟아내는 파가니니도 느린 곡에서만큼은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성으로 돌아간다. 샬롯이 그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추어 부른 [나 그대를 생각하네. 내 사랑]도 그런 곡 중 하나이다.
나 그대를 생각하네. 내 사랑.
넘실대는 바닷물에 태양빛이 눈부실 때
나 그대를 생각하네. 내 사랑
고요한 호숫가에 달빛이 은은할 때
길에 먼지만 일어도 그대 모습 아른거려
길 가는 저 나그네 혹시 그대 아닐까
깊은 어둠이 깔리고
적막한 밤이 되어도
나 그대를 느끼네. 내 사랑
어둠을 뚫고 오는 그대의 강렬한 느낌
무거운 침묵 속에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고요한 숲 속으로 발길을 옮겨보네
손도 닿을 수 없는 이토록 먼 곳이지만
내 곁에 들리는 건 그대의 숨소리뿐
그 사랑은 여기에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이 노래를 들으며 문득 악마는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를 자처한 우르바니는 파가니니를 파멸로 몰고 가려 하지만 결국 그에게 퇴출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다. 실제로 파가니니의 삶은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절제했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뜬금없는 서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윤색하고 싶었던 감독의 희망사항이 아니었을까?
----------------------------------------------------------------------------------------------------------------------
=== 인물 정보 === <2009년 5월 27일 네이버캐스트 / 번역가 박중서 글>
인물 세계사
바이올린 연주의 신화
니콜로 파가니니
1782.10.27 ~ 1840.05.27
1840.5.27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한 채 사망하다
이날 카파렐리 사제는 오래 전부터 품은 생각을 마침내 실천으로 옮겼다. 수개월째 병석에 누워 있다가 임종을 맞이한 어느 음악가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성직자가 죽어가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제의 굳은 표정이나 태도에서는 어딘가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이 환자에 관해서는 꽤 오래 전부터 괴이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악마가 들어 있소" - 임종 당시의 한 마디
한때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얻은 그의 경이적인 연주 실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사제가 오늘 환자를 찾아온 주된 목적도 그것이었다. 곧 지옥으로 향할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영혼이 구제될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후두 결핵을 앓고 있던 환자는 침대에 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악마가 나타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 음악가의 고백과 참회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 때문이었을까? 사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환자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의 바이올린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토록 놀라운 선율을 내는 것이오?” 한발 한발 찾아오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던 음악가는 그저 손짓만 했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으니 제발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물러서기는 커녕 한층 더 집요해지는 사제의 질문에 마침내 환자도 짜증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그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소.” 거의 들릴까 말까 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 다음, 음악가는 갑자기 바이올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사제는 비명을 지르며 그 집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야기했다. 악마와 결탁했다는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본인의 입으로 그 사실을 시인했다는 것이었다. 존경받는 성직자의 증언이라서 그랬을까? 이 소문은 그간의 구구한 추측에 대한 확증으로 여겨졌으며, 아무런 검증이나 의심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그 음악가는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했던 것일까? 그런 소문이 근거 없음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임종의 자리에서까지 뜬소문에 대한 추궁을 받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너희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다고 말해주마 하는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소문이 퍼지거나 말거나,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 그에게는 아무 상관없었으리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는 바로 그날, 14세 된 아들이 혼자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의 도시 니스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1840년 5월 27일, 오후 5시 경의 일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해냈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부터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교습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디서나 반년이면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한 연습을 시켰고, 파가니니는 열네 살인 1795년에 처음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동안 궁정 악사로 일하던 파가니니는 1810년부터 본격적인 연주 여행에 나섰으며, 이탈리아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를 순회하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파가니니는 고난이도의 다양한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유명해졌지만, 일각에서는 진지한 음악이 아니라 경박한 잔재주를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비난도 나왔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하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의 울음소리를 재현해서 감탄을 자아냈다. 활이 아니라 나뭇가지로 연주하는가 하면, 현을 한두 개만 걸고 연주하고, 심지어 악보를 거꾸로 올려놓고 연주하는 등, 그의 놀라운 실력을 증언하는 일화들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처음에는 그의 어마어마한 명성을 반신반의하던 관객들조차도 한두 곡만 듣고 나면 모조리 그의 팬이 되어 열광할 정도였다.
그러나 순회 연주회는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이 평생 완치되지 않았고, 수은 치료법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관객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입장료를 매기고, 무리한 일정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한 재산 모아놓은 파가니니였지만, 말년에 가서는 투자 실패로 인해 그중 상당 부분을 날려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후두결핵으로 인해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자, 그때부터는 아직 어린 외아들이 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요양을 위해 들른 니스에서 꼬박 7개월 동안 앓아누웠다가 결국 사망한다.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파가니니지만 음악사적 평가는 의외로 야박한 데가 있다.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 더 뛰어났고, 악보 출판보다는 즉흥 연주를 더욱 중시했으며,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아서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물론 개성 넘치는 비르투오소(명인)의 시대를 열고 낭만주의를 예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에만 해도 진지한 음악가로서 파가니니의 진면목을 파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난이도로 유명한 그의 <24개 카프리치오>의 악보를 본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조차 “이건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신기에 가까웠다는 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로선 알 수 없고, 다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놀라운 남국의 마법사의 연주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불가사의해진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연주는 도무지 납득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명민한 이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 멈추는 순간, 파가니니는 연주를 시작한다.” (베를린 공연 직후, 한 신문에 실린 기사 중)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빈 공연 직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에 관해 논평한 어느 신문 기사 중)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왜 이런 헛소문이 그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사후 3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식을 얻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평생 헛소문에 시달리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얻은 파가니니였지만, 죽음조차도 그에게 곧바로 안식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생전의 악평 때문에 사후에는 더욱 매몰찬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 당일, 그러니까 1840년 5월 27일부터 시작된 그의 사후 수난은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모두가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증언을 파가니니에게서 억지로 끌어낸 카파렐리 사제는 니스의 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사실을 전했고, 교회 측에서는 곧바로 이 유명한 음악가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치던 조종을 중도에 모두 멈추도록 지시했다.
파가니니는 고향인 제노바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고, 그의 후원자인 디 체솔레 백작은 긴 여행 동안 부패를 막기 위해 의사를 시켜 그 음악가의 시신을 방부 처리했다. 하지만 교회 측의 반대로 파가니니의 시신은 제노바로 가지 못하고 수년간 타향에 머물러 있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신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해지자, 백작은 이 불운한 음악가의 유해를 자기 소유인 어느 작은 섬의 동굴에 숨겨 놓았다. 사후 4년 뒤인 1844년에야 그의 시신은 니스를 떠나 제노바로 돌아갔지만, 역시 교회 측의 반대로 인해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지하 납골당에만 임시로 안치될 수밖에 없었다. 파가니니의 시신이 영구 거처를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76년의 일이었다. 아들 아킬레가 수없이 청원과 뇌물 공세를 펼친 끝에, 파가니니의 시신은 마침내 지하 납골당에서 나와 교회 묘지에 정식으로 묻힐 수 있었다.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던 14세의 소년은 이미 50세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사망한 지 무려 36년이 지난 뒤에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비로소 대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파가니니 / 베르너 풀트 / 김지선 / 시공사
음악가와 연인들 / 이덕희 / 가람기획
음악가의 만년과 죽음 / 이덕희 / 가람기획
불멸의 명연주가들 / 이덕희 / 가람기획
위대한 음악가들의 삶과 죽음 / 디터 케르너 / 박혜일 / 폴리포니 출판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1 00:0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1 00:0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8 15:1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10.20 21:1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10.20 21:1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7.19 00:13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1.20 11:2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10.21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