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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선지자의 죽음이 주는 역설적인 진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선지자의 죽음이 주는 역설적인 진리이다> 역설적이라는 말은 상반되는 두 개의 명제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둘 다 옳은 경우에 역설이라는 말을 씁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 아느냐 나는 분쟁을 주려고 왔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믿어요. 왜? 예수님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노래 불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로다> 이 땅에는 평화를 주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평화가 저절로 오는 평화가 아니라고 하는 거죠. 이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값을 지불해야 됩니다. 많은 희생과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온 줄로만 생각하지 마라 내가 분쟁케 하려고 온 거다. 또 내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려고 오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고 다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데도 안 계신다.> 역설로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옳은 거예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것을 체험하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신자의 눈에는 하나님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어디에도 계시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바르게 알아가는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우리가 다 잘 아는 이야기인데 당시에 헤롯 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해가지고 자기 아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헤롯이라는 놈도 나쁜 놈이지만 그 여자도 얼마나 나쁜 여자입니까? 동생의 아내 노릇 하다가 왕인 남편의 형이 자기를 부른다고 해서 자기 남편을 버리고 그리로 가서 붙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 여자입니까?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었으면 되는데 그러니까는 책망을 해도요 가난한 사람 못난 사람 병든 사람 약한 사람을 상대로 해가지고 막 책망을 하면 그 사람들은 쩔쩔매고 아이고 잘못했다고 하지만 특별히 권세 가진 자들, 높은 자들에 대해서 책망을 하면 100% 어김없이 대적하고 이를 갈고 죽이려고 복수하겠다고 합니다. 남을 책망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근데 사람이 일반적으로 책망을 받으면 네 가지로 반응이 일어납니다. 우리 성경을 보니까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어요.
첫째는 악인들은 이를 갈고 대들고 복수하겠다고 합니다. 스데반이 책망하니까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쳐죽였어요. 예수님이 책망하시니까 예수님한테 이를 갈고 있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들이 다 이렇게 순교를 당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류는 어떤 사람들이냐 조금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책망을 받으면 슬금슬금 꽁무니 빼는 인간들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 예수님 앞에 놓고 “이 여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번 이 여자를 심판해 보시오.” 하고 예수님께 다그칩니다. 그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어요? <너희들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이 말씀이 얼마나 권위가 있었는지 이 말씀에 무리들이 다 양심에 찔림을 받고 그래서 돌을 하나씩 들고 오긴 했지만, 예수님을 쳐죽이려고 들고 왔던 돌은 그 여자에게 던지지도 못하고 그냥 양심에 찔리니까 괴로워가지고 돌멩이는 또 거기다 그 자리에다 떨어뜨려놓고 슬금슬금 다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비겁합니다. 잘못을 알면 회개하면 되는데 잘못을 알아도 회개할 줄은 모르는 것입니다.
셋째 부류는 어떤 사람들이냐, 자기가 잘못된 걸 알면서도 결단을 못 내려요. 그렇다고 악인들처럼 잘못을 지적해 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을 피해서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이 셋째 무리의 사람들은 <당신 말씀 다 옳습니다. 내가 고치기는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못 고치고요, 조금 이따가 고치겠습니다> 이게 차일필 미루는 인간들, 이런 사람들 그게 누구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왕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 아닙니까? 이 사람이 그런 짓을 했습니다.
넷째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은 누구냐? 양심에 찔림을 받으면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려 회개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내 양심에 찔림을 주는 말씀이 있게 되면 그 말씀을 듣고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즉시 즉시로 회개해서 새롭게 변화받는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죽음은 세 가지의 중대한 역설적인 진리가 들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 진리는 뭐냐? 세례 요한은 어떻게 죽었느냐? 음녀의 춤값에 죽었습니다. 이 헤로디아라고 하는 악한 이 여자의 딸이 춤을 추어가지고 헤롯을 기쁘게 하니까 헤롯이 그 아이에게 <너 소원이 뭐냐 뭐든지 다 주겠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달라면 주겠다> 세례 요한은 결국 이 음란한 여자의 춤값에 팔려 죽고 말았다 하는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 춤 값에 요한은 너무나 싸구려로 싼 값에 이렇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의인은 어떻게 죽습니까? 가장 싼 값에 죽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비싼 값에 죽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이 어떻게 보면 참 싼 값에 죽은 것 같아요. 그러나 아닙니다. 그들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가장 비싼 값에 죽었던 것입니다. 오직 누구의 생명이 그렇게 귀한 거냐 의인들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 우리는 우리 생명이 얼마나 귀한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귀한 생명을 주님께 바쳐서 천국을 건설해 나가는 거룩한 역사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진리 둘째는 무엇이냐? 세례요한이 죽으면서 만약에 내가 이렇게 죽게 되면 내가 하던 일은 누가 계승해서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은 아마 죽지 못할지도 몰라요. <조금 더 살아야 되겠다, 내가 누구에겐가 바톤을 인계해 줄 사람이 나타나기까지는 나는 죽으면 안 되겠다> 그럴지 몰라요. 모세가 죽게 될 때에 모세는 위대한 후계자 여호수아라고 하는 사람을 두어서요.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바톤을 넘겨주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후계자를 자기 눈으로 보았고 자기 손으로 안수했고 이래가지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신이 충만해지고 이렇게 해서 가나안 정복의 그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엘리아의 경우도 엘리사라고 하는 후계자를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눈으로 세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경우는 자기 사역을 넘겨줘야 될 후계자가 있어야 되겠는데 자기 눈에 그게 안 보였잖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고 더 살아보겠다고, 했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광야의 소리는 죽었습니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소리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어떡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광야에 나온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보려고 나왔을지 몰라요. 선지자의 소리를 들으려고 왔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그들 앞에 보여주신 분은 세례 요한이 아니고 메시아,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그들 앞에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놀랍고 신기합니다.
46. 바람아 잔잔해져라
마태복음 8장23절~27절
배에 오르심에 제자들이 따랐더니,
24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절: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우리가 다 믿음이 있는것 같아요. 교회에 다녀요, 믿습니다~ 하다 우리가 아까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도 했지만 잘 믿는 거 같아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다 믿습니다> 하니까 잘 믿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마음에 예수님을 느끼고 살아야 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살아야 되고,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고, 이런 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되는데 믿노라 하는데 사실은 그런 것들이 없단 말이에요. 전혀 예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집에 계신다~ 그러면 우리가 이 방에 들어와서도 <아이구 예수님 여기 계시네, 주님 그동안 잘 계셨어요. 그동안에 뭐 하셨습니까? 아이구 이거 내 정신 봐라> 예수님이 계시는데 예수님하고 자꾸 말을 해야지 이 집에 누가 계시면은 말을 해야지 손님 대접을 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사실은 그분은 손님으로 와 계신 게 아니잖아요. 주인으로 와 계시지. 오히려 내가 손님이지. <주인님 안녕하셨어요? 제가 주인님 알아 뵙지를 못하고 신뢰를 많이 했습니다. 주인님 저한테 뭐 시키세요. 말씀 좀 하세요. 제가 무슨 일을 시키시든지 다 행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서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서 <주님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 자세를 가져야 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그런게 부족하다.
첫째: 내 집에 예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몰라, 근데 집에 예수님 안 계신 것은 뭐 말할 것도 없는 거고. 나는 교회에도 그래요. 교회에 갔는데 교회 성도들이 교회에 주일날 나왔으면 여기에 예수님이 계신다 이걸 의식해야죠. 우리가 예수님께 예배드리러 왔다. 우리가 찬양을 한다. 대상이 누구예요? <예수님 주여 나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를 드린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설교를 듣는다 주여! 나의 귀에 말씀에 주시옵소서> 우리가 모든 예배의 모든 순서가 예수님께 초점을 두고 이렇게 진행되어 나가야 되는데 내가 볼 때는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 가지고. 마음이 섭섭할 때가 참 많아요. 특별히 목사님들부터 신자들을 상대로 해서는 설교를 할 줄 아는데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설교하지를 않는 것 같아요.
왜 예수님이 여기 계시는 걸 내가 안다면 내가 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됩니까? 내가 잘났다는 거 내가 무슨 큰일 했다는 거 그거 자랑하겠어요?. 신자 가운데 어느 장로님이 어느 집사님이 지난주에 무슨 일을 하셨습니다~ 해서 그거 칭찬하고 박수치고 이렇게 하겠어요? 정말 중요한 거는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는걸 소개해야 되잖아요. <오늘 우리 예배에 예수님이 여기에 와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이 예수님께 우리가 경배를 드립시다. 예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예수님께 기도를 올립시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모든 게 이렇게 예수님 중심으로 하는 산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목사님들 설교를 내가 들어봐도 예수님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 그러면 예수님이 거기에 앉아 계시다가 목사가 혹시 나를 언제 좀 소개하나 그러고 기대를 하시고, 예수님도 듣고 계실 텐데 한 시간 내 지나도록 예수님 소개하는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고 그냥 자기 얘기만 실컷 떠들다가 끝나버리고 말면 예수님이 설교를 들으시고 얼마나 섭섭하시겠는가? 여기에 정말 예수님이 계신다면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시냐,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느냐?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데 한밤중에 건너가는데 예수님은 종일 사역을 하시고 피곤하셔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데 그때 갑자기 큰 풍랑 일어나고 바람이 거칠게 불고 그러니까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고 어떻게든지 이 바다를 잘 건너가 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어요. 이 사람들은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데 그런 아주 능숙한 어부들인데 이 사람들이 열심히 배를 노를 저어가면서 배를 몰아서 저쪽 건너편으로 갈려고 하는데 바람이 거세게 불고 풍랑이 일어나니까 배가 전진은 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어 엎어질 것 같기만 하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안 된단 말이에요. 절대 안 되니까. 결국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잖아요. <주여! 우리가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무시고만 계시면 어떡합니까?> 어떤 분은 그래요. <예수님은 주무신 게 아니다. 눈 감고 가만 누워서 이렇게 계시면서 바람아 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풍랑아 일어나라!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꼴 좀 보자> 그랬더니 바람이 조금 불었더니, 제자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이렇게 난리를 치고 있더라. 근데 사실 그게 우리의 모습이 아니에요?
한 가지 한 가지에 내가 하겠다고 하는 생각 다 버리고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주님이 말씀해 주시도록 이렇게 하시면 주님이 <알았다. 내가 해주지> 그래서 <바람아 잔잔해져라! 바다야 잔잔해져라!> 한마디 하시게 되면 모든게 잔잔해지잖아요. 그래서 우리 가정의 평화가 오는 거예요. 이 나라의 평화가 오는거예요. 근데 세상은 날이 갈수록 평화가 없습니다. 이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뭐 끝날 것 같으면 또 생각하지도 못한 데서 뻥 하고 터지겠죠.
세상은 끊임없이 이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렇게 두셨느냐, 우리보고 먼저 깨달아서 기도하는 사람 되라고.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합시다.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전 세계에 나가서 복음전하는 많은 우리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의 조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가 그런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여기 보내신 거잖아요.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평강의 복음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이 백성들이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 잘 섬기고 복 받으면서 살아야 하겠는데 우리가 이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지만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있으면 평안한 줄 알고 돈을 잔뜩 쌓아놓고 평안하다 배부르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내가 평생 먹고 살 만큼 재산을 쌓아놓았으니까. 내 영혼아 이제는 편안히 좀 쉬자 그러는데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라도 내가 너의 영혼을 데려가면 니가 쌓아놓은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는 거를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겠다. 자꾸 나이가 많아져 가요 죽음이 눈앞에 한 걸음 한 걸음 이렇게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죽음이라는 놈은 안 다가오고 있겠죠. 저쪽에 있는데, 내가 자꾸 한 걸음 한 걸음 가니까 결국 가까워지는 거죠.
우리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야 됩니다. 평소에 주님의 도우심을 늘 의지하고 주님께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체적으로 받으면서 사는 사람은 큰 환난의 날에 넉넉하게 도움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평소에 주님과 가까이 지내지 않은 사람은 큰 환난이 일어나도 주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염치가 없어가지고 망하는 사람들이 많고요.
우리가 정말 주님 앞에 기도하기를 힘쓰고 주님께서 잔잔하게 해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 마음에 일어나는 풍랑도 잔잔케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 가정의 풍랑 그리고 세상의 풍랑 이 전쟁의 풍랑 온갖 재앙이 쏟아지고 큰 멸망하는 가운데서 내 마음에도 자꾸 풍랑 일어나고 이 세상은 풍랑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바다의 물결이 요동치는 세상에 삽니다.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어질 듯한 위험 속에서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욱 주님 의지하고 기도에 힘써서 기도에 승리를 맛보는 사람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고 내편이 되어주시고 너무너무 사랑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복을 내려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늘 주님께 감사와 찬양 올려드리며 은혜에 감격하며 살도록 인도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셋째는 무엇이냐? 세례 요한은 억울하게 죽었다, 그때 죽으면 안 되고 좀 더 오래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죽어야지만 그때 죽어야지만 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의 역사를 보면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해 주었습니까? 이렇게 사랑했는데 그 요나단도 더 오래오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어요. 요나단이 일찍 죽음으로 다윗이 왕위에 올라서 왕으로 다스리기가 그만큼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우리의 생사가 다 결정이 됩니다. 요나단을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심으로 다윗의 왕권이 튼튼해지게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심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사역이 드디어 새롭게 시작하고 달려갈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만약에 요한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이렇게 요한은 요한대로 일하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일한다 그러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두 파가 갈라져가지고 지금까지도 계속될지 몰라요. 그런데 요한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러면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수님께로 가라.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으로 통합이 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이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선지자 7천 명을 유대 땅에 남겨두셨던 것처럼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이 찾으시는 훌륭한 선지자들로 세워주옵소서. 특별히 대한민국 땅에 하나님이 의인들을 많이 세워놓으셔서 더욱 번영하는 하나님 나라로 빛나게 하옵소서. 복음으로 통일되고 세계 만방의 빛을 발하는 그 시각을 보게 하옵소서. 이 놀라운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이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7. 왕보다 앞서서 달려가자
열왕기상 18장 41절-46절
41 엘리아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놓고
43 그의 사관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바람과 구름이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우리 크리스찬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앞서서 달려가는 사람이 되야 한다. 선지자는, 우리 목사는 대통령보다 앞서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 세상에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세상에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앞서서 달려갈 수 있어야지 하겠다.
세상 거 따라가지 말고, 세상 거 부러워하지도 말고, 세상 흉내내려고 그러지 말고 이 세상을 닮아가지 마라 이것이 성경에서 거듭거듭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끌고 나가는 게 복음의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어요. 그러니 얼마나 피폐해졌겠습니까? 먹을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완전히 황폐해진 이 땅에 하나님께서 드디어 단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해서 엘리야가 왕보다도 앞서서 달려가더라 그런 말씀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보다도 더 먼저 일어난 일이 갈멜산 제단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하지 않습니까? 바알 선지자들은 450명, 거기에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하면 850명 그렇게 모인 곳에 엘리야는 자기 혼자 850 대 1로 전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불이 내려서 이 재물을 홀랑 태우는 신이 참신이다. 그래서 바알 신들에게 바알 신에게 먼저 해라. 그랬더니 바알의 제사장들, 바알의 선지자들이 바알이여 하고 소리 질러가면서 불을 내려달라고 그렇게 악을 쓰고 애를 썼지만 결국 불은 못 내리고 실패하고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불을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가지고 이 재물을 홀라당 다 태우고, 그래서 하나님만이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증명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타나야 될 게 무엇이냐? 하나님의 재단에는 불이 내려야 된다. 이게 순서예요. 오늘 우리 교회 교회들에 불이 내려야 된다 성령의 불이 내려야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거예요. 성령의 불 받아라. 먼저 성령의 불이 우리 제단에 임해야지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불이 내렸다 안 내렸다 하는 말씀이 거기에는 안 나타나요. 성경에 불이 내려서 이렇게 제물을 홀라당 태운 이야기가 세 번 이렇게 나타나는데요. 첫째로 나타나는 거는 우리 레위기 9장 맨 끝 절 아론이 처음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가지고 이 제물을 싹 태웠다. 그래서 백성들이 다 그것을 보았으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구나, 우리 제물을 받으시는구나, 이것을 자기들이 직접 목도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변화를 받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예배에 함께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 이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역사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신 것이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 몇 명 죽인 그 일로 인해가지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에 있었던 일이죠.
셋째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역사입니다. 엘리야의 갈멜산 제단에 위로부터 불을 내려가지고 이 불이 재물을 홀라당 태우신 이 놀라운 역사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살아있을 때에 그 나라에는 비가 내립니다.
그런데 먼저 이 불이 내려온 다음에 비가 내리기 전에 했던 단계가 있어요. 이것이 엘리야가 명령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라. 그래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가지고 전부 쳐죽였습니다. 이런 역사가 먼저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거를 깨달았어요. <내 속에 두 개의 법이 있구나. 나는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 또 다른 편에는 하나님의 법을 대적하는 죄의 법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죄의 법이요, 마귀의 법이오, 그리고 육신의 법이요, 사망의 법이 나를 이렇게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구나>
의의 법, 생명의 법 그리고 성령의 법 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죄의 법이요, 마귀의 법이오, 육신의 법이오, 이 악한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있더라. 그것이 우리 사람의 현 상태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고 예수님을 잘 섬겼던 바울에게서조차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 보통 사람들, 예수님 잘 믿는다고 해도 전부 자기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죄의 길로 가고 있지 정말 성령을 따라서 거룩한 길을 가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너무나도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될 일은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죄의 법, 악한 법을 깨뜨려야지 그래야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왕보다도 앞서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다음 단계가 뭐예요?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셔서요. 그런데 비를 내려주신 게 그냥 저절로 비가 내려진 게 아니고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보면 뭐라고 했습니까? 엘리야가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다 넣고 그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환을 시켜서 <저 산꼭대기 올라가 봐라. 무슨 징조가 있나 봐라> 그랬더니 애쓰고 올라갔다가 내려와 가지고 <아무 징조도 없습니다.> <그래 7번까지 다시 올라가라> 그러면 여섯 번째까지는 갈 필요도 없는데 뭐 가라고 합니까? 그래도 여하간 7번 가야 된다니까 부지런히 올라갔다 내려가고 올라갔다 내려오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6번을 다 하고 7번째에 갔더니 드디어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고 보고를 하죠. 이 말을 듣고 엘리야가 <됐다. 이제 큰 비가 내린다> 그래서 <왕에게 빨리 가서 일러라.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하고 통보했습니다. 빨리 마차를 갖추고 <왕이여 빨리 비 맞지 말고 왕궁으로 돌아가시옵소서> 하고 그에게 전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엘리야의 기도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특징이 뭡니까? 간절한 기도라고 하는 거죠. 얼굴을 무릎 사이에 놓고 간절히 전심전력해서 기도를 했다. 둘째 특징은 확신의 기도입니다. 셋째로는 끈질긴 기도입니다. 기도 그저 한두 차례 해놓고 <주여 믿습니다> 하고 <아멘> 하고 가도 될 텐데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비가 내릴 때까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그다음 단계가 뭐예요?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예수님 믿는 모든 성도들이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너무나 간절히 간절히 소원하셨던 일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는데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원하겠느냐. 그런데 이 불이 붙기까지 나에게는 또 받아야 될 세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가 답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의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불이 한 번 붙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자동적으로 이 불이 새 역사를 이룹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이기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앞서서 달려가는 아름답고 슬기로운 주님의 백성되게 하옵소서. 성령님의 역사를 이루시게 하심에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8. 라마 나욧 같은 교회
[삼상19:19-24]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구약성경에서 제일 위대한 인물이 누구일까요? 예레미야는 두 사람을 들어서 설명을 해요. 첫째는 모세고 둘째는 사무엘이다. 사무엘은 이렇게 위대한 인물이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에서 이제 왕들이 다스리는 시대로 건너가는 길목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웠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또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어떤 시대가 될까요? 새로운 왕이 나타납니다. 사람 가운데서 뽑은 왕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왕이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그 왕이 누구죠? 예수님이십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하나님은 사무엘이라고 하는 사람을 세워서 사사시대에서 왕이 다스리는 시대로 건너가는 이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 시대에도 새로운 사무엘과 같은 사람을 하나님은 일으키십니다.
이런 사무엘과 같은 사람이 어디에서 나타날 것인가? 과연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사무엘 한 사람이 탄생하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 한나라고 하는 분이 고난을 많이 당했어요. 이런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 사무엘이라고 하는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범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우리도 다 기도하는 사람이 돼야 우리 자녀들 가운데 위대한 인물이 나옵니다.
첫째, 우리 자녀들이 훌륭하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준다. 우리가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서 심판받는 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우리 자녀들 가운데서 위대한 인물을 일으키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첫째가 기도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겠다.
둘째는 내가 너희에게 의로운 도로 가르치기를 쉬지 아니할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겠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읽어도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하나도 깨달아지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거를 이겨야 돼요. 때가 되면 드디어 확 열리는 때가 있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래야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는 사람, 진리를 찾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이렇게 애쓰고 쫓아다녔어요. 그래서 다윗이 이리 도망가다 저리 도망가다가 결국 사무엘이 있는 곳으로 가면 괜찮겠다 생각을 해서 그리로 찾아갔어요. 그곳이 라마라고 하는 곳에 있는 나욧이라고 하는 작은 동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거기에 갔다는 얘기를 듣고 사울이 또 잡으러 왔어요. 그래서 먼저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잡으러 왔다가 이제 사무엘이 있는 곳에 가까이 왔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다 예언을 했습니다. 뭐라고 예언을 했습니까? 사실은 그건 간단합니다. 장차 다윗이 왕이 될 것이다.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다윗을 잡으러 왔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이 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다윗을 잡아갈 수 있겠습니까? 다윗을 잡아갈 수도 없지만, 혹시 잡아간다고 해도 나는 역적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이 잡지를 못하고 다 돌아가 버립니다. 사울 왕이 또 사람을 보냈습니다. 또 온 사람들도 예언합니다. 세 번째 또 보냈습니다. 그런데 또 돌아왔습니다. 사울이 말을 듣고 이런 바보 같은 놈들아 내가 직접 가야겠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군사를 끌고 다윗을 잡으러 왔는데 사무엘이 있는 곳 가까이 오니까 갑자기 성령의 불이 임합니다, 불을 받으니까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겉옷을 벗어 버렸어요. 그리고 종일 밤까지도 거기에 누워서 이렇게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아마 좀 혼구멍을 냈을 것 같은데, 근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질 않아요. 그들에게도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셨어요. 성령을 부어주시니까 이 사람들이 다윗을 잡지를 못합니다. 더구나 자기 입으로 장차 다윗이 왕이 된다! 하고 예언을 하게 되니까 어떻게 다윗을 잡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악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성령 받으면 마음이 싹 변합니다. 이 세상 욕심으로 가득 찼던 사람도 성령 받으면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그냥 건성 다니는 게 문제가 아니고 성령 충만하게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듣기만 하고 그냥 그렇게만 배웠어요. 그런데 성령이 사울에게도 임했습니다. 자기 입으로 다윗이 왕이 될 것이다 하는 거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냥 남들이 가르쳐주는 소리만 듣고 배워가지고 아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머릿속으로만 하나님을 배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모세 때에는 하나님이 애굽 땅에 열 가지 큰 재앙을 쏟아내리셨어요. 그리고 마지막 재앙은 양의 피를 발라 놓은 이스라엘 집에는 재앙이 안 들어가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국 땅의 집에는 전부 재앙이 들어가서 맏아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홍해가 가로 놓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으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추격해오던 에굽의 병사들은 같이 물속에 뛰어들었는데 물이 합쳐지니까 다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신 거를 이렇게 분명하게 보여주셨어요. 하나님은 반드시 이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니까 귀로만 듣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하신 일이 병자를 고치시는 거예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런 기적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귀로만 듣지 마라, 하나님을 몸으로 만나라, 그래야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구나 이거를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거예요.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이 고기잡이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새벽녁에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깊은 데에 그물을 내려라 말씀하셨어요. 베드로 생각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내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아니 저 사람이 누군데 뭘 안다고 나한테 그물을 던져라 어쩌라 이런 소리를 하냐. 그런데 감히 그분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말 같지 않은 소리지만 그래도 내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번 순종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깊은 데다가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고기가 가득하게 잡혔습니다.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팍 꿇었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이분이 대관절 누구신가? 이분이 누구신데 말 한마디에 이런 어마어마한 기적이 일어나는가? 이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누구예요? 너무 큰 능력을 가진 사람, 이분 앞에는 내가 감히 같이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얼마나 더럽고 악한 죄인인가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주님께 말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는 나를 따라와!> 아무나 주님 따라가는 거 아니에요. 이런 기적을 체험해야 따라가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큰 최악 덩어리인가 하는 게 깨달아져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 사람인가 하는 게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역사하십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앞에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생명 주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만을 만나고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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