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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星群)
박 태 원
1
무장야(武藏野) 넓은 벌판에 이미 가을도 깊어, 방란장(芳蘭莊)의 이 밤이 짝없이 소조하다, 한산하다.
원래가 세월이 없는 방란장인지라 그 한산하고 또 소조함이 어찌 이 밤에 비롯하였으랴마는, 빚에 졸리며, 그날 밤거리에 궁하며, 그래도 어떻게 이 년이라는 짧지 않은 동안을 장사라고 유지하여 오던 이다방이, 이제는 도저히 더 어떻게 하여 본다는 재주도 없이, 내일이라도 문을 닫아 버린다든 그러지 않으면 안 될, 혹은, 오늘이 그 마지막 밤일진댄, 한가지로 소조하고 또 한산한 가운데도, 그 감회가 또한 크게 다른 것이 있을 게 아니랴.
한 명의 손님도 와 있지 않은 다방 안에가 방란장 주인은 혼자 시름없이 앉아서, 밖에 철 겨운 빗소리를 들으며, 아까부터 애꿎은 담배만 연달아 뻐억 뻑 빨고 있었다…….
아무리 동경 시와 외따로 떨어진 조그만 동리라고는 하지만, 겨우 삼백 원 남짓한 돈으로 무어 찻집이라 경영하여 본다든 그러려 들었던 것은 아무래도 좀 지나치게 어림없는 짓이었던가 싶다.
하지만 또 생각하여 보면, 그때 그것은 역시 애달프게 즐거운 일이기도 하였다. 자기가 손수 두벌목수로 나서서, 서투른 솜씨에 톱질, 대패질― 그래도 어떻게 집 안을 뜯어고쳐, 명색이 다방이라 꾸며 놓고, 자작(子爵)은 자기가 연래로 애용하여 오던 포터블과 이십여 매 레코드를 기부하였고, 만성(晩成)이는 또 만성이태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수집하여 두었던 것인지, 대소 칠팔 개의 재떨이를 들고 왔던 것이요, 또 한편 수경 선생(水鏡先生)은 한 분의 난초를 들고 와서, 다방의 이름은 ‘방란장’이라든 그러한 것어 좋을 듯싶다고 제의하여 주는 등, 이 조그만 끽다점이 하나 탄생되기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심로와 또 사랑이 필요하였던가 하면 어느 틈엔가 불우한 화가의 마음은 눈물겨워지고, 그렇기에, 이제 이르러 끝끝내는 문을 닫히고 말게 되는 것이 스스로 애석하여 견디는 수 없는 것이나, ‘그렇다고 매일같이 손님은 찾아들지 않고, 빚은 빚대로 짊어진 채, 어떻게 하루라두 더 버티어 본다는 재주가 있단 말인구……?’
다음은 으레 쓰디쓴 입맛과 하잘수없는 한숨이 있을 뿐이다.
수경 선생이 일껏 갖다 준 귀한 난초도, 옹색한 집 안에서는 제대로 살아간다는 수가 없었던지, 시들어 말라 죽은 지 이미 돌이 되었고, 자작의 레코드와 축음기도 전당국 창고에 들어가 있는 지 이미 오래요, 오직 사면 벽에 걸려 있는 자기의 작품들―유화(油畵) 나부랭이만이 만성이가 기부한 재떨이와 함께 어떻게 단돈 얼마라도 바꾸어진다는 수가 없이 그대로 집 안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도리어, 이 집 주인의 마음에 애달픔을 더하여 주는 것이지만, 언제까지든 그러한 감상(感傷)만 되씹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장사를 그만둔다 하고, 자기는 알몸 하나로 거리로 나간다든 그러더라도 대체 미사에를 어떻게 처분을 하여야 옳단 말인고― 차비를 변통하여 주께시리, 우선 얼마 동안이라도 시골에 가 있으라 하여도 결코 자기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 여자의 마음이 가난한 화가에게는 슬프게 고맙기보다도, 현실 문제로 딱하게 걱정 인 것이다.
2
비록 육례를 갖추지는 않았더라도, 작년 동짓달 열이렛날 밤부터, 미사에는 어엿한 자기의 아내다. 더구나 그의 뱃속에 새로운 한 개의 생명이 깃들인 지 이미 다섯 달이나 되고 보니, 가난한 화가는 좀더 책임이 무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참말 자기 한몸이라면 아무렇게 한다든―가령 하다못해 이 친구에게서 사흘, 저 친구에게서 닷새, 번차례로 친구집을 찾아다닌다기로 설마 굶어죽으란 법이야 없을 게다. 하지만 미사에에게는 그러한 방법이 통용될 턱 없다. 역시 이것은 아무래도 우선 니가타(新瀉) 본집 오라비에게라도 가서 잠시 의탁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게다.
그러나 여자는 결코 그의 말을 좇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대로 한집 살림을 할 수 없다 하면, 그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나, 그러면 그런대로 같은 동경에나마 있어, 보름에 한 번이고 달에 한 번이고,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방도를 차리자 한다. 방란장의 여급으로 들어오기 전에, 자기는 수경 선생 댁에 하녀로 있었던 것이니, 다시 한번 그렇게 나서면 그만이 아니냐 한다. 월급이라는 것은 고작 십 원이나 그밖에는 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나마라도 ‘임자’가 용돈에 보태 쓸 수 있게 하고 싶다고, 그저 내 생각은 말고 더욱 그림에만 정진하여, 부디 명년 봄에는 ‘입선’이 되고, 그러면 그림도 또한 팔릴 터이니, 우리는 그때 다시 함께 모일 수 있을 것이 아니냐 한다.
사실, 시골서 소학교를 마쳤을 뿐으로, 총명하지도 어여쁘지도 않은 이 여자는, 다방의 ‘마담’이라든, 예술가의 ‘부인’이라든 그러한 짓보다는, 역시 바른 대로 말하여, 어느 중류 가정의 ‘조추(가정부)’가 제격에 맞는다 하겠다. 그러나 이제 있어서는 이렇든 저렇든 간에, 미사에는 오직 단 하나의 자기 아내―아무리 굶어죽는단 한이 있다더라도 다시 그를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시키고, 자기는 태평으로, 무슨 예술이니 미술이니 그러고 있을 수는 양심으로든 자존심으로든, 참 정말 없는 것이 아니냐?
‘돈, 돈…… 그저 돈 한 가지 때문에…….’
새삼스러이 그러한 것에 생각이 미치자, 무명 화가는 별 까닭도 없이 다시 벽에 붙어 있는 그림들을 둘러보는 것이나, 세상은 아직 한 개의 화가로 자기를 대접하여 주고는 있지 않아, 그것들은 지금에 있어 한푼의 상품 가치도 없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자기를 유능한 화가로 보아서든, 또는 단순한 다방의 주인으로 보아서든, 누가 바로 패트런이라든 그러한 것으로 나서 줄 듯도 싶지는 않아, 기운 없이 코웃음을 한번 쳐보기도 하였으나, 문득,
‘참, 수경 선생은 내게 우리 내외에게 참말 그렇게도 호의를 가지고 있어…….’
사실, 수경 선생이면, 단지 마음뿐 아니라, 그러려고 들면 능히 그럴 수도 있는 실력을 가진 이라, 그는 일순간, 그에게 말을 해볼까 하고도 생각하였던 것이나, 그 즉시,
‘그건 또 무슨 어림도 없는 생각…….’
극도로 병적인 선생 부인의 히스테리를 생각해 내고, 다시 우울하여지려니까,
“이눔의 찻집은 늘 이 모양인가?”
어디서 한잔 하였는지, 유난스레 문을 박차고, 술만 먹으면 딴사람 같이 활기가 나는 자작이 쓰옥 들어온다.
3
“빛 푼 생긴 모양일세그려.”
방란장 주인은 지금 우울한 심사에, 제멋대로 술 먹고 찾아온 친구가 그다지 반가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우선 이런 때 말동무라도 생긴 것이 한편 대견하기도 하여, 본래 색깔이 흰 자작의, 몇 잔 술에 더욱 창백하여진 얼굴을 빠안히 쳐다보며 한마디 하였다.
“멫 푼 생겼느냐구……? 홍, 내가 은젠, 술 사먹을 둔 없던가?”
빗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지우산을 한옆에다 세워 놓고, 그는 주인의 맞은편 의자에가 털썩 주저앉으며, 후우 술기운을 내뿜었다.
(자작) “만성 이녀석, 안 왔네그려.”
(주인) “아아니, 왜?”
(자작) “흥, 녀석이 요샌 아주 과부한테 미쳐서 친구두 잊어버린 모양아냐?”
(주인) “아아니, 쥔 예편네허구 좋아 지내니 으쩌니 허는 게, 그럼, 그게 사실인가?”
(자작) “아, 뭇 미덥거든 지금이래두 그리루 가보게그려. 있으면 둘이 함께 있구, 없으면 둘이 함께 없구, 헐 게니…….”
(주인) “……”
(자작) “허기야, 친구가 외려 생각은 잘 헌 셈이지. 재주라군 눈굽만치두 없는 터에 괜스레 소설이니 창작이니 허구 날뛰느니, 숫제 쥔집 과부나 데리구 벼엉뗑허는 게 제격엔 꼭 맞었지. 하, 하, 하, 요샌, 아마 밤낮 들러붙어 있던 책상 앞에는 가지두 않나 보데.”
(주인) “……”
(자작) “사실 작자가 우습지. 바루 소설을 하나 쓴답시구 삼 년 전부터 벼르는 게 입때 한 줄이나 그밖엔 더 뭇 썼으니…… 아주 떠억 원고지를 펴놓구 앉어서 두 시간이구 세 시간이구 담배만 뻐억 뻑 빨구 있는 그게, 제깐엔 생각을 정돈헌다는 체격이렷다. 그리구 있다가 기껏 펜을 들어 쓴다는 것이,
‘가을 햇살은 페이브먼트 위에 힘 없이 떨어져 있다…….’
하, 하, 하, 그게 무슨 유치허구 못생긴 수작이야. 하, 하, 하…… 그래도 그나마 그냥 계속이나 했으면 조련만, 거기서 또 펜을 내려놓구 을마 동안이든 다시 담배만 태고 있다가, 다시 펜을 들어, 일껀 썼던 것을 부욱북 짓구서, 그 옆에다가,
‘페이브먼트 위에 가을 햇살은 힘 없이 떨어져 있다…….’
하, 하, 작자는…… 그러구 또 담배를 태다가 역시 안됐든지, 다시 그걸 부욱북 짓구 그 아래다가 먼점대루,
‘가을 햇살은 페이브먼트 위에 힘 없이 떨어져 있다…….’
하, 하, 하, 하, 벨 빌어먹을 친구두 다 있지. 그게 그래두, 소위 불후(不˙朽)의 대작(大作) 「행로난(行路難)」의 첫 구절인데, ‘가을 햇살’허구, ‘페이브먼트’허구, 어느 녀석이 앞장을 스느냐?―허는 게, 친구에겐, 삼 년 이래 해결이 안 된 중대 문젠 모양이라, 하, 하, 하…….”
(주인) “하, 하, 하…… 허지만 그렇게만 말헐 것두 아니지. 사실, 얕은 재준 없지만 이제 두구 보게. 오 년 십 년 후에 얼만헌 일을 해 놓을지…….”
(자작) “해놓긴 제까짓 게 붤 해놔? 수경 선생은 가히 관후장자라, 그래 원만허게 말을 해주느라 친구를 보구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니 뭐어니 헌 게지만, 그걸 바루 무슨 크나큰 칭찬이나 받은 듯싶게 생각허구, 우리가 만성이, 만성이 허구 불러 주면 아주 주우와허구…… 그게 벌써 작자가 똑똑지 않은 증거거든. 그렇게 둔헌 친구두 사실 드물지 드물어.”
(주인) “그렇게까지 말헐 것두 없지. 당자가 들으면 주움 섭섭허겠나?”
(자작) “섭섭해두 사실이니 허는 수 없지.”
공연히 흥분이 되어, 자작이 또 술기운을 뿜었을 때, 호랑이 얘기를 하면 호랑이가 온다고, 문을 쓰윽 열고 만성 이가 들어온다.
4
“아, 왜, 연앨 그만두구 나왔나?”
당자가 없는 사이 독설(毒舌)을 놀렸더니만치 역시, 순간에 약간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자작은 생각난 듯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러한 말을 한마디 하였다.
“연애……? 흥, 쓸데없는 소리…….”
만성이는 한 사람의 예술가이기보다는, 오히려, 한 개의 육상경기 선수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체격의 소유자이다. 자작은―몸이 가냘프고 색깔이 흰 것이 가히 귀골로 생겼다 하여, 그래 자작이란 별명도 생겨난 것이지만―만성이의 건강미를 탐내도 좋으련만, 그는 도리어 그것을 예술가에게 당치 않은 ‘추악한 건강체’라고 욕하였다.
(만성) “윌리엄 텔 오지 않었나?”
(주인) “아아니, 왜 그러나?”
주인은 조금 전부터 카운터에 나와 앉아, 편물(編物)을 하고 있는 미사에 편을 돌아보고, 차를 명하였다.
(만성) “수경 선생두 안 오시구?”
(주인) “아마 요새 집필중(執筆中)인가 보데.”
(만성) “어떻게 오늘 좀 만날 수 없을까? 모두 모여서 중대헌 의논이 있는데…….”
(주인) “무슨 의논이 게……?”
(만성) “하여튼 무던히 중차대힌 문젠 줄만 알구 있게.”
잠깐 두 사람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작이 말참견은 하여,
(자작) “아따, 작자두…… 중대헐 게 어텼어? 어서 승거운 소리 그만 두구 자네야말루 하숙으루 돌아가서 집필중이라구 패나 내걸게.”
(만성) “집필중?”
(자작) “아, 왜, 가을 햇살 말야. 페이브먼트 위에가 힘없이 떨어지는 거 있지 않은가? 하, 하, 하, 하…….”
(만성) “온, 자식, 승겁긴…….”
(자작) “내가 승거워? 자네가 승겁지.”
(주인) “그, 웬, 쓸데없는 소리…… 그래, 중대헌 의논이란 대체…….”
(만성) “아아냐, 역시 모두 모이거든 같이서 의논허기루 허지.”
빗줄 내리는 창 밖에 문득, 그림자가 지나며, 다음에 발소리가 문 앞에 와서 멈춘다.
(주인) “마침, 윌리엄 텔이 오나 보이.”
들어온 사람은 그들보다는 너덧 살이나 젊어, 박박 깎은 알머리에 학생 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음악가 지원의 지방 청년이다. 언제고 섹소폰을 가져, 윌리엄 텔의 행진곡을 즐겨 연주하는 까닭에 그 이름이 있다.
(주인) “자아, 왔네. 그래 의논이란 뭔가?”
(만성) “아아냐, 역시 수경 선생두 모셔다가…….”
(윌리) “아아니, 무슨 얘기게?”
우산도 없이 그대로 비를 맞고 와서 반드르르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쓰윽쓱 문지르며 만성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윌리엄 군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자작) “호일대(好―對)야 호일대―”
(만성) “호일대라니?”
(자작) “자네허구 윌리엄 텔허구 호일대란 말일세.”
(월리) “호일대라니?”
(만성) “으째서?”
(자작) “으째서가 아니라, 자네 둘이 다아 무슨 소설감네― 음악갑네― 허구 바루 꺼떡거리지만, 소질이든 천분이란 약에 쓰랴 없으니 말이지, 하, 하, 하…….”
(주인) “그, 왜 또 쓸데없는 얘긴 그리 허나? 자넨 똑 그게 안 됐어.”
(자작) “안 되구 뭐구, 하아두 보기에 딱해서 그래 일깨 주는 말이지. 그래두 만성 이는 추악헌 건강체나마 가지구 있으니까 막벌이꾼으루 나선다손 치더래두 설마 굶어죽기야 허겠나마는, 월리엄 군은 속무(俗務)에두 적당치 않은 것이, 원래 또 도벽(盜癖)이 있어 놔서…….”
자작의 독설이 예까지 탈선이 되자, 윌리엄 텔은 더 참을 수 없는 듯이 얼굴빛을 변하기까지 하여 가지고 소리쳤다.
“아아니, 도벽 이라니? 그래, 내가 언제 뮐 홈쳤단 말인가……?”
5
“원래 천성이 도벽이 있단 말이지, 뭐어 꼭 집어, 언제 어디서 뭘 훔쳤다는 건 아니지만…….”
자작은 시비가 되면 되어도 좋다는 듯이 입가에는 웃음조차 띄우고 담배 연기와 함께 술기운을 후우 뿜었다.
윌리엄 텔도 역시 예술가로 자처하고 있는만치, 그 천분이나 소질은 어떻든 간에 신경질한 점으로는 남에게 지지 않는 터이라,
“원래 천성이 도벽이 있다? 아니꼬운 놈. 늬가 대체 무슨 근걸 가지구 그따위 수작을 허는 거냐?”
(자작) “글쎄, 뭐어 근거랄 건 없지만두 집안 사람 몰래 둔 삼백 환 끄내 가지구 상경헌 것만 해두…….”
(윌리) “뭐 삼백 원? 아, 내 집 돈을 내가 가주 나온 게 네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자작) “글쎄, 그건 그럼 그만두더래두 학교에서 음악부원에게 빌려 주는 악기란 건, 그게 빌려 준 게지 아주 준 건 아니거든. 그걸, 일금 일백오십 환짜리 색소폰을 그대루 동경까지 들구 와서 모른체 하는 건 역시 숙이 컴컴헌 짓이지. 허기야 현회의원(縣會議員)이신 자네 어르신네께서 값을 물어 노셨으니까, 그래, 학교서두 눈을 감아 버렸으니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게 훌륭헌 형사 문제(刑事問題)가 될 게 아닌가? 하, 하, 하…….”
(윌리) “그래, 대체,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 있어 허는 말이냐?”
윌리엄 텔이 한껏 홍분이 되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말하였을 때, 집필중이라던 수경 선생이 우산도 없이 들어와,
“여전들 허구려.”
천성의 온화한 것을 그 빙그레 웃음에 나타내며 옆 테이블에 와서 자리를 잡는다.
(주인) “선생, 참 오래간만입니다. 그런데 그냥 나오셨으니, 비가 그쳤습니 까.”
(수경) “응, 조끔 전에…… 헌데, 그 무슨 형사 문제니 뭐니 허는 건…….”
(주인) “네, 그, 뭐어, 잡담입니다.”
(만성) “자아, 수경 선생두 오시구 했으니 일체, 제잠담허구…….”
그러나 윌리엄 군은 좀처럼 분이 가라앉지 않아,
(윌리) “그래, 늬가 밤낮 날 깔보니, 어디 우리 두구 보자꾸나, 늬가 참말 시인으루 성공을 허나…… 내가 음악가투 명성을 얻나.”
(자작) “하, 하, 하…… 그, 성공이니 명성이니 허는 것부터 자네가 벌써 속물(俗物)이라는 걸 나타내는 것이거든.”
(윌리) “속물이래두 상관 없다. 어디 두구 보자.”
(만성) “자아, 쓸데없는 수작들 그만 허구. 그, 뭐, 어린네들 모양으루…….”
(주인) “그래, 만성 군이 중대헌 문젤 끄낸다니 자아, 쉬이이.”
수경 선생만은, 그러나, 별달리 의견을 발표 않고, 언제나 한가지로 ‘호호(好好)’ 하고 한마디 ― 삼국시절(三國時節)의 높은 선비 사마덕조(司馬德操)는 누가 무엇이라든 그 대답이 역시 ‘호호’― 이, 이미 오십 줄에 든 무명 작가도, 그 원만한 천성은 가히 공명 선생(孑ι明先生)의 벗 됨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게라 하여, 바로 ‘사마휘’의 도호(道號)를 그대로 따다가 그들은 그를 수경 선생이라 부르는 것이다.
(윌리) “남을 깔보려 들지만 말구, 너두 시인을 표방허는 터이니, 시다운 시래두 한 편 써내라.”
(자작) “나야 참 후세에 남을 걸작을 가히 지어 낼 수 있는 자지. 허지만 자네야 십 년은 공부해야 으떻게 소위 성공이라 헐 겔세. 저어 진따루나 그저…… 그렇지 않으면 고작 진동야…….”
(월리) “뭐, 인마, 으째?”
(수경) “호호―”
수경 선생은 가비야히 웃고,
“문인상경 자고이연(文人相輕 自古而然)이라구, 예술가란 흔히들 서루 그러기가 쉬운 게지…… 헌데 무슨 중대헌 문제가 있다니?”
그는 생각난 듯이 만성이 편을 돌아보았다.
6
(만성) “사실 문젠즉슨 중대허고 간절허지, 우리들의 예술을 위하여 우선 빵 문제를 해결하자…… 하는 게니까.”
만성이는 말을 끊고 잠깐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잠잠한 가운데, 방란장 주인만이,
“해결을 헌다니, 대체, 으떻게?”
역시 내일이라도 길거리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도록 사정이 절박한 사람이라, 무어 만성이에게 별 묘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도, 그래도, 누구보다도 귀가 번쩍 띄는 모양이다.
(만성) “방법은 다른 게 아니라 수경 선생을 모시구 여기 모인 우리가 같이서 한번 장사를 해보거든.”
(윌리) “장사라니 무슨 장사?”
(주인) “밑천이 있어야 헐 게 아닌가.”
(만성) “밑천이 들어야 되는 장사면 그게 무어 그리 신통헐 게 있겠나? 밑천 없이 헐 수 있는 게니 묘허지.”
(주인) “그래, 밑천 없이 무슨 장살?”
(만성) “우리의 예술을 팔잔 말일세.”
(자작) “하, 하, 하, 친구두…… 팔릴 것 겉으면 버얼써 팔었지, 자네가 말을 끄낼 때까지 이러구 있어? 온, 참, 승겁긴…….”
(만성) “아따, 자세 듣구나 말허게. 어디 무슨 작품을 지어서 잡지사나 출판업자에게 들구 가잔 말인가……? 우선 이름은 아무렇게든, 가령 매문사(賣文社)면 매문사라든 그래 가지고, 광고, 도안, 대필, 번역…… 일체 그러한 것을 주문에 응하여 우리가 공급을 허기루 허거든.”
(주인) “글쎄, 누가 청허러 올 사람이 있을까?”
(만성) “자아, 저렇게 생각두 잘 안 해보구서 첨버텀 그러니까 안 되는 게거든. 그저 능동정신을 발휘해서 적극적으루 나서야 헌다니까 우선, 자네 그림을 지금 누가 둔을 주구 사나? 허지만 장식 문자나 써내구, 광고 도안이나 꾸며 내구, 거기다가 가령 자작이 광고 문안이나 꾸며 넣구 그러면, 그것두 상품가치가 있어질 게 아닌가 말일세. 주문에 의하여선 편지라든 그런 거 대필두 해주구, 학교 시험 때 가선, 겔름뱅이 대학생 노트 필기두 해주구…… 왜 그야 시작헌 당초엔 별루 주문이 많지 않을 게지만, 차차 선전만 돼보게. 역시 동경은 워낙이 넓어 놔서, 별별 주문이 다 많을 겔세. 그렇다구 무슨 우리에게 우선 밑천이라 헐 밑천이 드는 것 아니구…….”
(수경) “글쎄, 믿져두 본전이니, 어디 구체적으루 생각을 해볼까?
선생 께선 으떻게 생각허십니까?”
(수경) “호호― 그 다아 좋은 말이지. 불우헌 예술가들에게 역시 그러한 시절이 있는 것도 한편으로 보자면 홍미 깊은 일이니까…….”
(주인) “전, 흥미보다두 당장 빵 문젭니다.”
(수경) “글쎄 말이오. 한번 해보지 뭐어…….”
(만성) “이왕이면 고물상에 가서 허름헌 등사판이래두 하나 사다놓구 인쇄업을 겸허는 것두 좋을 게 아ψ 영업 종목은 많을수룩에 좋으니…… 오지두 않는 손님을 기대려 홍차 댈일 생각을 허느니, 자네두 이층에 올라가서 포스터 한 장 그리는 게 훨씬 날 겔세, 적어두 찻집버덤 이가 남을 겔세.”
(주인) “아, 찻집허구 대서야 으떻게 해먹겠나……? 하여튼 좀더 생각을 해보기루 허까?”
(윌리) “해보지, 뷜 그래?”
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윌리엄 텔이 비로소 말참례를 하여,
(월리) “허지만, 그런 장사엔, 난, 한몫 낄 여지가 없군그래.”
하고,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자작이 또 짓궂게 받아 가지고,
(자작) “자넨, 왜, 문간에서 색소폰으루 손님두 부르구, 또 때때루 넓은 마당터 가서 선전두 허구…….”
그 말에 윌리엄 텔은 이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윌리) “늬가, 왜, 날, 못 먹겠다고 이러니? 망할자식 같으니…….”
씹어뱉듯이 한마디 하고, 누가 채 붙들 수 있기 전에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7
(주인) “그, 왜, 괘애니 그러나? 술 좀 먹으면 자넨 똑 그게 안 됐데."
(자작) “안 되긴…… 내가 사실대루 말했지, 언제 거짓말했나?”
(주인) “아아닐세, 이 사람아, 자네가 농담이래두 좀 심했네. 더구나 내 앞에선 그러지 말게. 일테면 윌리엄 군이 우리 방란장에 대해선 구세주라구두 헐 은인 이니…….”
(수경) “참말이야. 그 군두 젊은 사람이 무던허지. 그게 언제던가? 바루 작년 이맘때 아녔소?”
(주인) “바루 이맘때죠. 꼭 이 경우죠. 빚에 몰려 내일 모레래두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때였으니까……˙.”
(수경) “그래, 꼭 경우가 같앴군. 하여튼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집안 사람 몰래 무작정허구 올러와서, 하숙을 구하러 예까지 나왔다가 우연히 들른 이 다방에서 우리와 초면 인사를 허구, 방란장이 곤경에 빠졌다구 알자, 흔연히 이백 환 돈을 내어, 다시 이렇게 일년이래두 끌어 오게 헌 게, 그게, 사실, 아무나 돈 있다구 헐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다른 건 그만두구래두 우선 그 점 하나만 가지구두 우리는 그 군을 존경해야만 헐 게 아뇨?”
자작은 무어 깊은 근거가 있어 친구를 욕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래, 수경 선생 말에 별로 이의를 제출하려고도 않고,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자작) “참말, 한번 해보세그려. 장사가 되든 안 되든, 자네 말마따나 밑져두 본전이니…… 무어 당장 돈이 드는 것두 아니구…….”
(주인) “글쎄, 해볼 맘이야 왜 없겠나마는 야반도주를 안 허구 그냥 이곳서 눌러앉아, 그런 간판이래두 걸어 놓자면, 아무래두 단 얼마간이나마 빚쟁이들에게 쥐어 주어야 나머지는 참으라구두 허겠네마는…….”
(만성) “그두 그래.”
그래 잠깐들 말이 없었을 때, 자작이 문득 생각난 듯이,
(자작) “참, 윌리엄 군은 그저 제 어르신네허구 국교 단절인가?”
(만성) “그 친구두 그게 딱해. 음악공부허겠다는 걸, 상업학교에 넣으려구 헌다구 집을 뛰어나온 놈을, 어느 부모 쳐놓고, 너 잘했다, 칭찬헐 사람 어딨나? 그래 몇 번 편지루 톡톡히 꾸지람 들은 것을, 너무나 이해가 없는 사람은 내겐 아버지두 아무것두 아니라구, 그 담버텀은 편지를 받어두 뜯어 보지두 않고, 그대루 도루 부치구, 부치구…… 그나 그뿐인가? 바루 저어번 선거 때는 현회의원 당선사례 광고가 난 신문을 부쳐 준 걸, 그 옆에다 빨강 잉크루,
‘그래, 친구가 매우 맘에 기쁜 모양이로군그래? 흥!’
허구 그따위 말을 써보냈으니, 그래, 어르신네가 아무리 자식을 귀애 헌다더래두 맘에 조옴 괘씸헐 겐가……? 내 참, 별짜야, 별짜…….”
(자작) “그 친구가 그러지만 않어두, 집이 둔은 있구, 더구나 아들이라군 저 하나구 허니까, 잘 말허면 뭣 좀 해볼 만큼은 어르신네가 보내 줄 듯두 싶건만……˙.”
(만성) “저엉 뭘허면, 색소폰이래두 잽히라지. 한 오십 환 받아 내온 걸. 그걸루 우선 몇 군데 조금씩이래두 별러 주구…….”
(주인) “이 사람아, 난 죽어두 그건 못 그러겠네. 이백 환쪼두 있구 헌 터에, 내가 변변치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두 그게 말이 되나!”
(자작) “하여튼 누구든 간에 윌리엄 텔 제이세가 오늘 밤으루래두 나타나야만 당장 심이 피겠군그래, 허, 허…….”
그가 선하품을 한번 하였을 때, 문득 문이 조심스러이 열리며, 인버네스에 중산모를 쓰고 한 손에 검은 가죽가방, 또 한 손에 큼직한 박쥐우산을 든 중년 신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만성이는 주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구세줄세, 구세주야…….”
그러한 말을 가만히 한마디 하고, 싱겁게 웃었다.
8
그리 쉽게 ‘구세주’일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 위풍이 가히 당당하다할 중년 신사는, 우선 당장 방란장에 한 끼니 쌀값이라도 떨어뜨리고 갈 사람에는 틀림없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 길로 탁자 곁에까지 간 미사에에게 향하여, 한 잔의 위스키를 청하였다.
그러나, 언제는 무엇이 넉넉하였다는 것이 아니지만, 벌써 며칠 전에 문을 닫았어야 옳을 이 밤에, 그들이 손님 주문에 응할 수 있는 음료는, 커피와 홍차,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다. 그래, 미사에가, 한편 스스로 딱하고, 또 한편 손님에게 미안하고 한 생각을 그대로 표정에 나타내어,
(미사) “저어, 위스키는…….”
라고 말을 하였을 때, 그러나 이제까지 가만히 신사의 행색만 살피고 있던 만성이는, 그 주독이 빨갛게 든 탐스러운 코로, 술을 자셔도 한 두 잔에 그치지 않을 것과, 그 차림차림이며, 더욱이 떡 격에 어울리는 금테 안경으로 돈을 가져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것을, 순간에, 직각하고, 그대로 제 마음대로,
(만성) “위스키요? 네에.”
하고, 선뜻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간다.
카운터 탁자 위에 명색으로 너덧 병 진열되어 있는, 양주병은, 참말 허명무실한 것으로, 물구나무를 세워 본다더라도 단 한 방울 나올 것도 없는 터이요, 그렇다고 정작 술병은 부엌 속에 간수하여 둔 것도 아니라, 주인은 적이 불안하여 뒤따라 부엌으로 들어와서,
(주인) “이 사람아, 위스키가 어딨다구…….”
(만성) “아, 금방 주마 허구, 가게서 한 병 디료면 그만 아닌가?”
(주인) “그래, 한두 잔 팔려구 그걸…….”
(만성) “한두 잔은 왜? 코를 보다 모르나? 주홀세, 주호야. 떠억 채린 걸 보다 모르나? 장괠세, 장괘야.”
역시 부엌까지 따라 들어온 미사에가,
(미사) “허지만, 가게서 외상으룬 간즈메 하나 안 주는걸요?”
(만성) “안 주긴 왜? 그따위 수작을 허구 외상값 한푼이나 받아 갈 줄 아나. 다아 능동정신을 발휘해야 헙니다. 내 갔다 오죠.”
만성이가 자신있이 그대로 밖으로 나가더니, 딴은 위스키 한 병, 간즈메 세 통, 그 밖에 케이크와 과일까지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주인) “얻어 오긴 용허게 얻어 왔네마는, 너무 많지 않은가?”
(만성) “온, 참, 친구 졸허긴…… 가만히 보구만 있으라니깐…….”
삼 분 뒤에 만성이는 제 자신 방란장의 주인이나 되는 듯싶게 미사에에게 술과 안주를 들려 가지고 신사 탁자로 갔다.
(만성) “비가 오구 허더니, 밤공기가 매우 찹니다. 더구나 이곳은 시외가 돼놔서…… 어서 한잔 드십쇼.”
(신사) “네, 네, 밤중에 이렇게 불쑥 들어와, 이건 너무나 폐를 끼치는군요.”
신사는 분명히 점잖은 이로, 끽다점 풍습 같은 것에는 익숙지 않은 듯싶다. 바로 개인의 가정을 심방하여 접대라도 받는 사람같이 그러한 말을 하고,
(신사) “쥐인장도 한잔 같이 하시지.”
(만성) “감사헙니다.”
(신사) “동리가 퍽 조용하고 정갈하군요.”
(만성) “뭐어 시굴이 돼놔서요.”
신사는 카이저 수염을 연해 손가락으로 비비며, 바로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주인의 자화상(自畵像)과, 저편에 앉아, 이쪽 동정만 살피는 주인의 얼굴을 잠깐 홍미 깊게 번갈아 보다가,
(신사) “저 선생 초상이시로군. 어느 화가가 그렸습니까?”
(만성) “저 군이 그린 자화상이랍니다.”
(신사) “호오, 필시 고명하신 화백이실 게야. 아주 똑같으신데요.”
(만성) “예에, 사실, 가장 촉망되는 신진화가죠…… 잠깐 실례헙니다.”
만성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진화가’에게 눈짓을 하고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주인) “왜 그러나?”
(만성) “뭣이 도화지 같은 건 남은 게 없나?”
(주인) “시키시(色紙)가 한두 장 있긴 있지만, 왜……?”
(만성) “꿜묵허구 빨리 가주 내료게. 내 돈 십 환이나 받구 그림 한 장 팔아 줄 테니…….”
9
신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참말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렇게도 똑같이 그려진 자기 얼굴에, 잠시는 입을 따악 벌리고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다.
(만성) “그, 맘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희에게 들르신 기념으로 받아 주셨으면, 다시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신사) “네, 네, 이건 참 너무나 감사합니다그려. 죄송합니다마는 아주 낙관(落款)두 좀…….”
(주인) “낙관은 뭐얼…….”
(만성) “아닐세, 이 사람아, 낙관이 있어야 허지…… 미사에상, 이칭에 좀 올라갔다 오.”
(신사) “우리는 이 방면에는 아주 무식꾼이라 전연 몰라뵈었습니다마는, 필시 고명하신 화백이실 게라…… 헌데, 실롑니다마는, 윤필료(潤筆料)는 얼마나 드려야 할는지…….”
(만성) “이 군은 저허구 친동기간이나 진배없이 친한 사이구 허니, 그런 건 조금두 괘념 마시구, 그저 기념으루 받아 주십쇼그려.”
(신사) “말씀은 감사합니다마는, 그래도 화백께 대한 예가 아니니까……? 역시 윤필료는 드려야 하는 게라…….”
(만성) “그런 건 괘념 마셔두 좋으련만…… 저엉 그렇게 말씀허시니 그럼 그냥 형식으루 단 얼마구 냅쇼그려, 하, 하, 하…….”
(신사) “네, 네…… 필시 고명하신 화백이시야. 비상한 재주시여. 역시 노력도 귀하지만, 천분이라는 게 없구서는 예술이란 건 미술이구, 문학이구, 또 음악이구…….”
그는 ‘음악’에 이르러 문득 생각해 낸 바가 있는 사람처럼, 갑자기 주머니를 뒤져, 종이쪽을 하나 골라내어 가지고,
(신사) “이천백십삼번지의 사십팔호가 그게 어디쯤입니까?”
(만성) “이천백십삼번지의 사십팔호요?”
(신사) “네, 네, 그, 집 찾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초저녁에 이 동리로 와서 입때 헤맸군요.”
(주인) “사십팔호의 누굴 찾으시게요?”
(신사) “구사카베데루오(日下部輝夫)라고, 학생인데요.”
그러면, 바로 이 시골 신사는 윌리엄 델 군의 어르신네였구나?― 하고, 모든 사람은 신기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나, 이야기로 들어서 알고 있는 그들 부자의 험악한 관계와 윌리엄 군의 급하고 좀 까다로운 기질을 생각하자, 얼른, 그러면 그렇다고, 선선히 집을 일러줄 수도 없었다.
‘아닌밤중에 동네가 소란하게 소동이 일어나기래두 한다면, 그런 모양이 또 없을 게다…….’
(만성) “글쎄요오, 사십팔호가, 그, 어디쯤 될까?”
(신사) “사십칠호도 찾고, 사십구호도 찾고 했건만, 꼭 사십팔호가 어디로 빠져서…….”
신사는 다시 술을 한잔 기울이다가, 문득 공교롭게도, 때마침 서북편에서 들려 오는 색소폰 소리에,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신사) “저, 저게 분병 이 녀석이로군. 저런 요란스런 소릴 이 밤중에 낼 놈이 또 있을라구…….”
또 잠깐 귀를 기울이다가,
(신사) “역시 틀림없어. 저 녀석을 꼭 붙잡어야만…….”
하고, 신사는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그대로 문간으로 향한다. 모두들 잠깐 어리둥절하였으나, 만성 이는 새삼스러이 배반이 낭자한 탁자 위를 둘러보고,
(만성) “저어, 잃어버리신 물건이…….”
(신사) “잃어버린 물건요?”
신사는 다시 부리나케 자리로 돌아와 구석에 세워 두었던 박쥐우산을 집어 가지고는, 술값도, 윤필료도 전연 생각지 못하고, 그대로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 버렸다.
10
황황한 ‘현회의원’의 발소리가 저편 골목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모두들 어리둥절한 채 있었으나, 마침내 자작이 하, 하, 하, 하 하고 크게 웃자, 수경 선생과 미사에까지 유쾌하게 한바탕을 웃었다.
(자작) “내 어쩐지, 첨부터 보던 얼굴 겉다 했지.”
(미사) “그래요. 귀허구, 입모습허구, 아주 천연해요.”
(주인) “윌리엄은 그렇게 말해두, 왜, 의사소통이 잘 안 돼 그런 게지, 그 양반이 예술에 대해서 이해가 없을 분이 아닌데…….”
(만성) “아따, 이 사람이 화백 소릴 듣군 그만 좋아서…….”
(자작) “그래, 친구가 무슨 낙관이니 윤필료니, 그만 사대사상에…….”
(미사) “색소폰 소리가 끊지지 않았에요?”
모두둘 귀를 기울여 보아도 딴은 소란한 음향은 다시 들려 오지를 않는다.
(주인) “그 양반이 무어라구 허시든, 윌리엄 군이 좀 고분고분 듣구, 그저 철두철미 잘못했습니다구 사과했으면 좋으련만…….”
(자작) “어림두 없지. 그건 막무가내니까…….”
(만성) “현회의원 각하두 저 녀석을 꼭 붙잡어야만…… 허던 걸 보면.”
(주인) “아무래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야 말 게야.”
(자작) “이러구 있을 게 아니라, 우리 하여튼 가보세.”
(주인) “그래, 가만있을 순 없는 일이라…….”
(만성) “가만있게, 이왕이면 술병을 들구 가세. 부자 사이에 그럴 수가 있나? 아무래두 우리가 화해를 붙여야지. 자넨 간즈메 남은 걸 들구 오게. 또 고명허신 화백께선 각하의 초상화를 들구 오구…… 수경 선생두 같이 가시죠. 역시 젊은 사람들만으로는 원만허게 해결이 안 될 겝니다.”
(수경) “호호― 무어 부자분이 별일이야 있겠소마는 그럼, 같이 갑시다그려.”
불우한 예술가의 일단이 밖에 나왔을 때, 벌써 전에 비가 갠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만성) “그저 잘뭇했습니다구 빌어야만 될 텐데…….”
(자작) “글쎄 어림두 없다니까 그래.”
(주인) “친구가 성미가 급해 놔서…….”
(자작) “아마 각하두 저번 당선사례 광고쪼에 참말 분통이 터져서 올러온 게야. 그렇지 않구서야 아오모리(靑森)에서 예까지 뭣 허러 일부러 올러오겠나…… 그렇지 않습니까? 수경 선생.”
(수경) “호호―”
그러나 그들이 ‘사십팔호’ 문 앞까지 이르렀을 때,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좀더 여러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어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방란장 주인이 고시도(창살이 있는 미닫이 문)에 손을 대려는 것을 만성이는 눈으로 제지하고 그는 앞장을 서서 집 뒤로 발소리를 죽여 돌아갔다.
윌리엄 텔의 거처하는 방은 아래층 그중 구석진 방―그 창 앞에 이르러 네 사람은 가만히 발돋움을 하여 안을 엿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어찌 된 까닭이었을까? 뜻밖에도 부자는 무릎과 무릎이 맞닿을 만큼 바싹 다가앉아,
(신사) “그 동안에, 그래, 고생을 얼마나 했냐? 좀 말렀구나.”
(윌리) “고생은요, 무슨…….”
(신사) “하여튼 사나이자식이란 한번 맘을 먹은 이상, 누가 반댈허든 끝까지 해봐야지. 네 결심두 그만큼은 견고한 모양이라, 아주 정식으로 음악학교를 들어가라. 그리고 그저 공불해라. 공부밖엔 없느니라.”
(윌리) “네, 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조차 글썽글썽한다.
세 청년은 제풀에 몇 번 인가 고개를 끄떡하며, 수경 선생이 등뒤에서,
(수경) “호호― 그래야 될 노릇이지. 부자분이 모두 무던들 허시지.”
영탄조(詠歎調)로 그렇게 말하였을 때, 그들은 어느 틈엔가 자기들 눈에도 눈물이 떠오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박태원단편집』, 학예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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