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道 / 포항, 구룡포 - 食客여행 |
잡지 만드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이번에 ***에 좀 등장하셔야겠는데요." "싫다." "왜요?" "야, 뭐 신문에 나오고 또 짧게라도 TV에 나오고 계속 이렇게 나오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냐. 뭔 얼굴 내밀려고 환장한 싸구려 인생같이." "이건 형이 해 주셔야는데. 형은 이 기획을 거부하실 수 없어요." "못한다. 다른 사람 알아봐라. 그런데 내용이 뭐냐? 구례는 다뤘잖아." "독자체험 여행인데 포항에서 음식 몇 가지 드시면 되거든요. 메뉴가 뭐냐면... 고래고기, 물회, 과메기, 개복치..." "야야, 언제 어디로 가면 되냐?"

12월 17일 목요일. 나는 포항 죽도시장에 서 있었다. 잡지의 여행 아이템은 포항으로의 겨울 여행이었고 포항과 구룡포에서 1박 2일이었다. 응락해 놓고 월인정원에게 이야기했지만 대략 거부 -,.-. 더 이상 어디에 얼굴 나오기 싫다는 것이 이유.
"그건 나도 같은데 이 짜식이 내가 가장 약한 고리를 걸고 넘어지는데..."
월인정원 역시 이런 아이템은 내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는 것이고.
"영후하고 가지 그래요. 아이와 아빠의 겨울여행." "그럴까, 영후한테 가업도 전수할 겸..."
겨울 장거리 운전이 좀 불안해 보이는 내 차를 남겨 두고 운조루 차를 훔쳐 탔다.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섰다. 부산에서 아이를 픽업하고 포항 죽도시장에 당도한 것이 목요일 오후 1시. 잡지팀과 접선하고 바로 정해진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직업적인 식객食客 노릇이 시작된 것이다.

물회로 시작했다. 정해진 집은 없었다. 죽도시장에는 물회거리가 있고 어느 집이건 비슷한 맛인 모양이다. 죽도시장은 개인적으로 아마도 세 번째 방문일 것이다. 매번 물회를 먹었고 그때 마다 정해 놓은 집은 없었다. 시청 옆 어디, 포항 엠비씨 어디엔가 잘하는 집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찾아가기 심란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죽도시장에 발을 넣고 난 다음에는 그냥 '여기서 끝장을 보자'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물회는 왜 생겨났을까? 검색해보니 시초가 제주도 어쩌구 뭐라뭐라 그러는데 글쎄... 예나 지금이나 제주도로 넘어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고 개인적으로는 동해를 자주 찾았다. 나의 뇌리에는 동해에서는 물회를 먹는다는 등식이 박혀 있다. 물회로 가능한 생선은? 회로 등장할 수 있는 모든 바다고기는 물회로 가능하다. 모든 돔, 아나고, 숭어, 오징어, 상어, 도다리, 전복, 해삼도 된다. 혹시 물회를 드셔보지 못한 분들이 백 명 중 한 명은 될 수도 있으니 잠깐 식객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겁나게 상세한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다. 물회는 초장이나 된장, 간장 등으로 무친 회에 시원한 물을 부어 먹는 음식이다. 숟가락으로 퍼 먹는 회이고 입을 대고 막걸리 마시듯이 마시는 회이다. 밥을 말아도 되고 국수를 말아 먹는다면 더 좋다. '가장 맛있었다' 는 표현은 당시의 상황이 결정하는 것이다. 산해진미, 진수성찬이 꼭 '내 인생의 음식' 이란 법은 없다. 이문열의 소설에서 창수령을 넘다가 얻어 먹은 라면 같은 경우가 그렇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물회는 속초에서 별 생각없이 먹은 오징어물회다. 콧날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바닷바람이 부는 방파제 포장마차에서 대충 최소한의 양념으로 말아 준 오징어물회. 내가 가진 음식에 관한 확신은 간명하다. 최소한의 조리과정과 최소한의 양념으로 만든 음식이 항상 베스트였다. 요즘 동해에서 맛보는 그럴싸해 보이는 식당의 물회는 양념이 너무 많다. 참기름이 너무 많다. 그래서 회 자체의 간명한 맛이 없다. 회의 매력이 무엇인가? 이건 아냐! 다음!

"회는 왜 시키는데?" "촬영팀 한 사람하고 담당 기자가 물회를 좋아하지 않아요." "물회하고 그냥 회하고 뭐가 다른데?"
여튼 그래서 회를 시켰다. 무엇이건 표준으로 먹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모듬회고 돔, 광어, 가자미, 밀치 등이 올려졌다. 물회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다. 장식이 없어서 좋았다. 일명 와사비나 간장, 채소 등을 업그레이드하면 그 횟집은 좀 달라보인다. 이 집은 평범한 횟집이다. 명함을 받아서 나오지 않았다.

과메기다. 요즘 전국적으로 먹는 과메기는 껍질을 벗기고 잘 다듬어 한 입에 쏘옥 들어가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을 다시마, 미역, 김 등을 쌈으로 해서 마늘 하나, 고추 하나... 뭔 메뉴얼처럼 먹는 장면을 재현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저건 과메기가 아냐!"
내 기억 속의 과메기는 통으로 먹는 것이다. 껍질째로 먹는다. 내장 정도만 끄집어 내고 꾸덕하게 말린 과메기를 손으로 쥐고 약간 힘들게 끊어 먹었다. 위 사진의 상태를 그대로 먹는 것이다. 그러면 입안으로 제법 진한 바다향 맛이 번져 나갔다. 청어와 꽁치는 날 것으로 먹을 때 독특한 향이 있다. 겨울 학꽁치회를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등 푸르고 살이 붉은 생선은 비린내가 그 맛의 핵심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전국화된 과메기는 비린 맛이 없다.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란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더 이상 청어로 과메기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옛 맛을 느껴볼 수는 없다. 내 기억 속의 과메기와 요즘 과메기 맛의 차이점은 바로 청어와 꽁치라는 원재료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이제 지역 특색의 음식은 전국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 방송은 먹는 소재에 혈안이 되어 있다. 여행을 가는 이유의 절반은 '맛집'이 차지한다. 잘 닦여진 도로와 집집마다 있는 자동차는 오늘 TV에서 본 음식을 먹기 위해 내일 장거리 운전을 감수하게 만든다. '원래 방식'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퓨전화된다. 이런 문제에서 나는 좀 고전적인 편인데, '그 음식은 그 곳에 가서 먹을 때' 본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도로와 차, 빠른 정보는 이동의 편리함 뿐만 아니라 '그곳의 전국화'를 가능하게 했다. 전국화는 맛의 표준화를 필연적인 다음 수순으로 삼는다. 죽도시장은 지금 과메기시장이다. 전국으로 팔려나가기 위해 너도나도 손 가진 사람들은 모두 과메기를 다듬고 있다.

포항 죽도시장과 부산 자갈치 시장 중 어디가 더 넓은지 가늠하기 힘들다. 얼추 부산 자갈치가 더 넓다는 산수를 하지만 한 걸음에 둘러보기에는 죽도시장이 더 편리하다. 정해진 구역 안에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자갈치 시장은 부두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고 죽도시장은 하나의 넓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구경하기 쉽게 펼쳐 있다. 장어와 가자미도 많이 말리고 있었다. 지금 시장을 둘러보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면 몇 가지를 사고 싶을 정도로 '물이 좋아' 보였다. 유통이 발달해서 지리산 자락에도 해산물이 흔하지만 그 질이 낮은 편이다. 싼 물건이 대세다. 언젠가 장에서 어느 할머니가 '이거 여수 갈치요'라고 물었는데, 그날 생선전 엄니가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버럭 소리를 했다.
"여수 깔치가 서울로 가제 구례로 와 오요!"

동해안 최대의 어시장이란 타이틀 때문일까? 죽도시장 엄니들은 카메라를 박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시장번영회나 시 차원에서 관련한 교육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웃거나 무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구례장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기 가장 힘든 부스가 생선전 거리다. 동해안도 이 날은 추웠다.

바다에서 이 많은 것들이 마치 영원할 것 처럼 뭍으로 올라온다. 바닷가 마을은 먹는 문제가 좀 더 풍성해 보인다. 이를테면 어촌에서는 고기도 잡고 조개도 잡고 적지만 텃밭도 하고 쌀농사도 짓는다. 하지만 산골에서는 고기도 잡고 조개도 잡고는 안되는 아이템이니 당연한 것이다. 두 번 정도, 서울에서 온 '무조건 유기농일꺼야'라고 굳게 믿고 있는 손님에게는 구라를 친 적은 있다. 고등어를 구워 놓고,
"이게 말입니다. 요즘은 해발 700m 이상에서는 고등어를 양식합니다. 고랭지고등어란 것인데 맛이 어떻습니까?" "어멋! 어쩐지 맛이 달랐어요!"
손바닥 보다 좀 큰 저 가자미를 사 오지 못한 것이 일생의 恨이다. 터질 듯 알이 밴 가자미를 두고 갈등하다가 다음 날 구룡포에서 구례로 출발하기 전에 좀 더 마른 가자미를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짐 들고 다니기 싫다는 이유로 그러했다. 결국 게으르면 굶는 것이다. 서울 가는 길에 저 가자미를 사들고 간 후배가 전화를 해 왔다. 서른 마리를 사가지고 갔는데 사무실에서 모두 빼앗기고 집에는 달랑 두 마리를 들고 간 모양이다.
"혀엉, 다음 주에 죽도시장에 가자미 사러 다시 가요. 이 맛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해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이 모든 질문에 정답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가장 좋음'은 상황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당신에게 최고의 육고기는?' 이라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고래고기'다. 그 육고기는 바다에서 산다. 최고의 육고기는 거대한 포유류 특유의 육질과 바다의 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죽도시장에는 몇 집이 고래고기를 파는 골목이 있다. 고래수육이다. 가장 보편적인 고래고기 요리에 해당한다. 고래고기는 여전히 전국화되기 힘든 아이템이다. 공식적으로 포경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언제부터 고래고기를 먹었나? 기억하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다. 부산의 그 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몇 가지 불량식품을 파는 수레가 있었는데 학교를 파하고 십 원도 아닌 몇 원의 돈을 내면 아저씨는 손바닥에 고래고기 몇 점과 소금을 올려주었다. 다 먹은 다음 손바닥의 고래기름은 바지에 대충. 대한민국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래고기를 먹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신문기자를 하셨는데 한두 번 새벽에 '병수 아저씨'가 운전하는 신문사 "까망 짚차'를 타고 이름 모를 항구로 갔었다. 새벽 항구에서는 거대한 물고기를 해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 상투적이지만 '원시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다. 김이 무럭했다. 그것이 고래에서 나는 것인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열기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항구에 연한 가판에서 고래육회와 고래불고기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 생각없이 먹는 아이 입맛으로도 그 고기에서는 깊은 바다가 느껴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고래는 잡을 수 없는 동물이 되었다. 그래서 보기도 귀했고 먹기에는 너무 비싼 고기가 되었다. 맛은 그렇게 각인되고 기억된다. 맛 뿐만 아니라 그 옛날 포구의 비릿한 내음과 차가운 열기, 연탄불 위에서 구워지던 고래불고기와 그 아래의 석쇠와 불꽃이 생각난다. 고래는 다음 날 메뉴다.

재래시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죽도시장에서 충분한 즐거움을 맛 볼 수 있다. 보기 힘든 바다 것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다. 구경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복어다. 사이즈가 제법 된다.

항구로 향하는 이 낡은 부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날것의 분위기로 충만한 시장이었다. 문자가 왔다.
'눈 와요-12월 17일 3:46 pm'
구례에 눈이 오는 모양이다. 이번 겨울에는 눈사진을 찍어야는데. 출발하기 전 일기예보로는 목, 금, 토, 일 눈이었다.

사람들이 뭔가를 먹고 있다. 김이 무럭무럭 올라온다. 아주머니는 연신 썰어내고 남자들은 선 자리에서 손으로 집어 먹는다.

문어를 막 삶아 낸 모양이다. 다리 사이즈가 엄청나다. 촬영팀과 아이는 촬영을 빌미로 한 점 얻어 먹었다. 여행 기간 내내 문어는 부동의 '1위'를 고수했다.
"십육만 원인데 서른 명이 먹는다고 맞췄데요. 한 명당 오천 원이면 되네. ㅎ"
이런 것이 현장의 맛이고 상황이 결정하는 의외의 맛이다. 많이 먹을 수 없다. 딱 한 점 얻어 먹는 것이 전부다. 아이가 감동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먹었던 문어하고는 완전 달라!"
부산에서는 제삿상에 문어를 삶아 올렸고 아이는 문어숙회에 익숙하다. 먹어 본 놈이 먹는 것이다. 전라도에서는 제삿상에 낙지를 삶아 올린다. (라고 이미 짧은 편지를 보내었지만, 이 역시 지역에 따라 다른 모양이다. 우연히 몇차례 내가 본 전라도 제삿상에 낙지가 있었던 것 뿐이다.) 사무실이 있는 오미동에서 어느 집 제삿날 정보를 입수한 다음 날은 괜히 뭔댁의 동선에서 얼쩡거린다. 꼬지에 말아서 삶은 낙지 한번 먹어보겠다고. 내가 기억하기 힘든 어린 시절 새벽의 고래고기를 추억하듯, 녀석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옛날에 어디 멀리 차 타고 가서 먹은 문어가 말이쥐...' 할 것이다. 그런 기억이 중요하다. 음식은 함께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동반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딘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좋아하는 누군가와 함께 오지 못했음을 살짝 후회하는 것이다. '아, 이거 아버지가 좋아하시는건데.'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화했던 아버님에 대한 나의 회한도 같은 것이다. 돌아가시기 1주일 전에 함께 나눈 보신탕이 마지막 음식이었다. 계산은 아버님이 하셨다. 그것을 제대로 한번 대접하지 못했다.

죽도시장을 올 때마다 문어는 지천이었다. 에일리언이 변태하기 전의 형상들이 삶아진 상태로 시장에 걸려 있었다. 문어 또는 대형 오징어는 종종 영화에서 괴물로 등장했었다. 서양 사람들에게 다리 많이 달린 맛있는 바다 음식은 그렇게 각인되어 있는 모양이다.

먹는 문제에 있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은 당연히 축복이다. 세상 어느 민족이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식재료를 모두 먹어치울까. 중국 사람들은 책상다리도 요리해 먹는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지만, 소를 부위 별로 나누어 먹는데 중국도 이태리도 프랑스도 아닌 조선 사람들이 먹는 소의 부위가 가장 다양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수렵채취 시절의 인류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식재료를 섭취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식재료는 서른가지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요즘 아이들은 못 먹는 것이 많다. 징그럽다, 이상하게 생겼다는 등의 관념이 생기기 전에 그냥 먹이면 식재료에 대한 편견은 없다. 선택의 여지없이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던 시절의 장점은 그런 것인 듯 하다. 어린 시절에 집에서 끓인 소고기국에는 소기름은 보였지만 소고기는 씹히지 않았다. 요즘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게 '못 먹는 놈이 불쌍하지' 라고 간혹 말한다. 세상에 백만 가지의 맛이 있는데 가능하면 모두 맛 보고 세상 하직하는 것이 더 재밌다는.

'머리를 잘라낸 것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저것이 몸매의 전부다. 개복치. 검색해보니 'Head fish'라고 부른다. 보통 1톤을 상회하는 무게의 물고기다. 저 몸매로 헤엄을 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이런 물고기를 먹어 본 사람들은 역시 이곳 사람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먹어보지는 못했다. 몸매와 부위별 질감으로 봐서는 아귀나 물메기, 물곰의 식감과 비슷할 것이란 짐작만 했다.

확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돌아다니다보니 서서히 몸이 얼어온다. 촬영을 예정하지 않았다면 좀 더 돌아다녔을 것이다. 언제 지갑을 두툼하게 만들어서 죽도시장을 다시 방문하고 싶었다. 문어 한 마리 삶아 가서 청년회 모임하면 딱이겠다. 산골 촌놈들 제대로 된 문어 한번 먹여야는데. 구룡포로 이동해야 했다. 날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구룡포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에서 내려다 본 구룡포읍 골목 풍경이다. 포구를 가진 작은 마을의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항구가 있고 주변으로 횟집과 숙박업소가 늘어서 있다. 그 뒤로 오래된 골목이 형성된다. 그 골목길 주변으로 전성기였던 시절이 있었던 가게의 간판만 있는 비워진 상가들, 새로이 생긴 닭집과 노래방이 늘어서 있다. 그런 마을들의 30년 전은 지금보다 인구가 세 배는 많았고 골목길은 왁자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도시로 떠났고 농촌과 어촌은 비워진다. 그런데 왜 우리한테 바닷가 방을 주지 않은 것이야! 食客을 청해 놓고 이렇게 해도 되는게야. 이런 식으로 하면 단식투쟁 들어간다.

저녁을 먹어야했다. 취재팀 중 몇몇이 해산물에 약했다. 어차피 해산물 중심의 여행인데 저녁은 모두 즐겁게 먹을 수 있는 메뉴로 정하기로 했다. 경주와 포항 사이 철강공단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지리산닷컴 덕분에 2년 전에 재회한 친구다. 30년만이었다. 숙소로 찾아 온 친구에게 물었다. 이 부근에서 뭐 삼겹살 같은거 잘하는 집을 아냐고. 전화상으로 친구는 전복물회를 권했지만 다중을 위해 나를 죽이기로 했다.
"고기 먹을꺼면 화산단지로 가야지."
그렇게해서 경주 화산숯불단지로 이동했다. 20분 이상 이동해야 했지만 어차피 식신원정대 아닌가. 무엇보다 여행의 범위가 포항으로 한정되어야 맞는 것이지만 뭐 일단 먹고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친구를 만나러 경주를 찾을 때마다 이 식당을 온 것 같다. 숯불단지 내에서도 유난하게 장사가 잘 되는 집인데 그만큼 고기 로테이션이 원활할 것이다. 일단 횟간과 천엽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회도 못 먹는 사람들이 이것은 가능할까. 아이는 육회를 잘 먹는다. 뿐만 아니라 좋아한다. 녀석이 구례를 오는 날은 대부분 시험이 끝나는 금요일 밤인데, 금요일은 월성정육점이 소작업을 하는 날이다. 금요일은 육회day. 전라도 육회는 채썰어 배하고 함께 무친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냥 생선회처럼 그렇게 소고기를 떠서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다.

이 집은 맛과 가격이 모두 착하다. 갈비살이 주력인데 1인분에 15,000원이다. 육질로 봐서는 서울에서는 2배는 받을 퀄리티다. 산마늘장아찌 등 밑반찬이 훌륭하고 무엇보다 마무리로 된장찌게에 풀어 먹는 국수가 일품이다. 모두가 평소 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했다. 좋은 음식 앞에서 사람들은 즐겁다. 음식을 나누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잔치란 결국 평소보다 좋은 음식을 푸짐하게 먹기 위한, 인류 스스로 고안해 낸 장치일 것이다. 계산은 친구가. 사업이 그렇지 뭐. ㅎ 구룡포로 돌아와서 친구와 포구의 '노을다방'에서 차 한 잔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40년 전에는 부산 양정 산꼭대기 신설 택지에서 축구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때 우리보다 훨씬 커버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개복치같이 생긴 남자스테프들은 대형 PDP화면 앞에서 경건한 자세로 두 손을 꼬옥 쥐고 아이리스 마지막회를 시청하고 있었다. 홍일점 공기자는 그런 남자들을 신기한 눈으로 시청하고 있었다. 대략 새벽바다 풍경 때문에 이른 6시에는 숙소 입구에서 만나는 것으로 정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침대가 싫은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장거리 운전 때문인지 의외로 쉽게 잠이 들었다.

새벽 5시 30분에 눈을 떴다. 캄캄했다. 그러나 이미 잠은 깨었다. 전화가 온다. 시간을 수정해서 7시에 입구에서 보기로 했다. 일출 잡기엔 좀 빠듯하지 않을까? 영후를 깨워서 우리는 6시 30분에 숙소 앞 항구로 내려갔다. 촬영을 하기 보다 촬영을 당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은데 나 역시 이번 여행에서 사진이 필요했기에 가능한 선에서 계속 촬영을 했다. 6시 30분의 사진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사진들은 제일 나중에 그냥 나열하는 것으로 하고. 일행들이 내려오고 대략 7시 즈음에 구룡포중고등학교 앞 언덕으로 올라갔다. 지난 밤에 친구가 촬영포인터로 알려 준 모양이다.

해가 오르기 전의 바다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내려다보는데 이 정도의 표면 질감은 파도가 제법 심하단 뜻이다. 이 시간의 바다를 많이 보았다. 부산에서 도시락 싸가는 군대생활을 했다. 청사포 언덕의 해안초소였고 최고의 전망대였다. 밤이 낮으로 바뀌는 즈음이면 바다는 대부분 요동쳤다. 야간근무 끝나고 퇴근시간이 되어 간다는 의미였다. 간첩은 나의 방어를 뚫지 못했고 나는 간첩을 잡지 못했다. 위 사진의 이런 불안정한 구도도 좋아한다.

역시 바다 맛은 동해다. 익숙한 광경이어서 그런 것인지 나에게 바다란 동해다. 우리는 해가 오르기 전의 빛 상태에서 계속 모델이 되어야했기에 셔터를 누르는 내 손도 순간순간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추웠다.

언젠가 개인적인 글에서는 '나는 수평이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시각적인 경험에서 축적된 미감은 무엇을 디자인하는 일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내가 선호하는 사이트디자인의 대부분은 수평구도다. 흔히 있는 좌측 서버메뉴 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평에 등대 하나 같은 그냥 꼭 필요한 것들만 있는 그런 디자인.

바람은 세기를 떠나 결이 있다. 바람결이 거친 모양이다. 바다는 일제히 마치 하나의 거대한 물고기인 듯 비늘을 세우고 있었고 그 비늘의 움직임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추웠다. 이제 내려갑시다! 춥다니깐!

멋진 새벽바다였다. 기억에 남을 색감과 질감이었다.

포구로 내려왔다. 방파제 쪽으로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들어와서 고기를 부리고 있었다. 오징어였다. 촬영팀이 가서 뭐라고 협조 요청을 하는데 원활하지 않다. 외국인이 태반이다. 옆에서 몇 컷 찍었다.

지난 밤 바다에서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의 세상일 것이다. 그들이 이곳까지 날아와서 바다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마무리 노가다를 하는 이유의 팔할은 새끼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송구스러운 일이다. 건강하게 귀향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방파제로 올라섰다.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해가 올라 오고 있었다. 동해바다 일출. 오래간만이다.

햇살과 만난 바다의 표면은 거친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바다 표면에 김이 서리면 제법 추운 날씨란 소리다.
아이와 같이 이 광경을 한번 보고 싶었다. 남자들은 시기별로 아들과 함께 하고픈 로망이 있다. 누구는 목욕탕엘 같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 시기가 지나면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대화다운 대화 말이다. 그런데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꼰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중학교 중반까지 아이의 관심사는 컴퓨터 게임이었다. 최근 녀석의 관심사는 Rock과 영화다. 나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지금은 거의 듣지 않는 락앨범은 녀석에게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Rock을 들어서 다행이다. 먹지 못하는 것 보다 먹을 줄 아는 것이 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빛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질감은 언제나 경이로운 광경이다. 동해에서 특히 그러하다.

아이를 촬영하는 설정의 모델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색감은 환상적이지만 막상 칼바람 모서리 방파제에 서 있자니 심히 춥다. 조금만 참아라. 세상에 공짜는 없단다.
"아빠 친구들은 왜 그런데?" "왜?" "지난번에 @@삼촌이 메일로 에릭 클랩튼하고 스티브 윈우든가 하는 사람 공연실황 보내줬는데 시험 기간이라 지금은 못 본다고 하니까, 공연실황 보고 시험 공부하라고 하데. 어른들이 왜 그런데?" "내가 그런거도 아닌데 왜 나한테 따지냐."

"랜디 로즈는 어떤데." "좀 확대 포장된 면이 있지. 내가 보기엔. 그런데 Mr Crowley 실황은 괘안아. 들어 봐. 왜 그 굿바이 투 로맨슨가 하는거 실황하고 같이 들어 있는 앨범 있어." "롤링 스톤즈는 싫지는 않은데 딱히 뭐가 특별하게 좋다는 곡도 없더라. 아빠는 갸들꺼 뭐 좋아하는거 있나?" "롤링 스톤즈꺼는 Waiting on a Friend란 곡을 제일 좋아했지." "학교에서 내가 쓴 독후감 방송되었다." "뭔 독후감?" "에릭 클랩튼 자서전." "에릭 클랩튼이 뭐라 했는데." "ㅎㅎ 섹스, 마약, 섹스, 마약 맨날 그래."
실루엣으로 보자면 뭘 찍는 듯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피부가 드러난 곳은 얼음바늘로 찌르는 통증이 왔다.
"아 그만하자! 얼어 죽겄다." "자자, 한 번만 더 하구요. 쫌만 더..."

그리고 날은 밝았다.

이제 아침 먹어야지. 나 먹잔거 안 먹으면 촬영 보이콧이다!

사전 섭외가 왔을 때 나는 '은정횟집 복국 먹어야 간다이'라고 말했다. 은정횟집은 감포항에 있으니 경주다. 포항 아이템은 아닌 것이다. 그런 것은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이곳을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침 활복탕을 먹지 않고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침밥 값으로 좀 부담스러운 15,000원이지만 '어젯 저녁밥 값 내 친구가 냈자나!'라고 제압하면서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를 꼭 찾은 이유는 복국을 좋아하는 아들과 후배에게 복맑은탕의 최강자라 할만한 은정횟집 복국을 맛보이고 싶었다.

복국을 처음 먹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돌아와서 알았지만 유괴를 당한 것이었다. 먼 친척보다 더 먼 그 아저씨는 밤을 세워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뭔가 괴로워보였다. 나는 잠이 왔고 남포동의 어느 여관에서 잠이 든 듯 하다. 그리고 새벽에 영주동 복국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 그 맛은 여전히 혀가 기억하고 있다. 마음 약한 유괴범의 변심으로 유괴는 1박 2일로 끝이 났지만 그는 나의 식객史에 '복지리'라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여기까지 썰을 풀고 나니 맞은편의 포토'한'이 마무리를 한다.
"저도 유괴 당했는데 설렁탕을 그때 처음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는데..."

구룡포로 돌아왔다. 구룡포 장날이다. 그래서 일정이 목, 금으로 잡힌 것이다.
"아줌니, 야 이름이 김호귭니까?" "아니, 선주 이름이지."

구룡포장의 대세도 과메기였다. 구룡포장은 포구 바로 뒤 골목길 100m 정도로 이어졌다. 시골장으로 보자면 내 경험으로는 큰 편이다. 이곳에서 말린 가자미를 샀다. 늘어 놓은 것이 2만원이었는데,
"아줌니 오만 원어치 담아 주시는데, 두 개는 선물용으로 큰놈으로 해 주시고요, 제가 들고갈 것은 손바닥만한 놈으로 만 원어친데 꼭 이만 원인 것처럼 양을 주세요."
아주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정말 2만 원짜리 접시를 모두 쓸어 담아 주셨다.

촬영팀은 계속 구룡포장을 스케치하고 우리는 자유시간을 얻었다. 호미곶이 가깝길래 차를 몰았다. 나도 처음 가는 곳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내가 미대를 간 것은 호미곶과 연관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자마자 옮겨야했다. 지난 밤에 찾아와 준 친구도 연관이 있는 사건이었다. 행정구를 옮겨 전학을 했고 나는 아주 힘든 고등학교 생활을 해야했다. 내가 2학년 봄이 되도록 학교에서 한 일이라곤 결석 40여일과 하루 한 권의 소설을 읽은 것이었다. 보다 못한 집에서 '너 그림 잘 그리는데 미술을 해 보는게 어떠냐' 라는 제안을 했다. 보통 그림그리겠다고 하면 집안에서 반대하는 것이 당시의 분위긴데 반대로 흘러갔다. 지도를 펴고 포항 부근에서 동해로 튀어 나와 있는 호미곶에 등대 표시가 있는 것을 보았다. 한반도 지도의 토끼꼬리 끝에 있는 등대 인근에서 미술선생하면서 평생 소설이나 읽는다면 흐뭇한 인생일 듯 했다. 그래서 그림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범대학미술학과가 없어졌지만. 그 호미곶에 막상 처음 왔다.

이것은 어떤 컨셉일까. '살려 줘!' 아니면 'I will be 뻯'인가.

구룡포항에서 호미곶 새천년광장인가까지 오는 시간은 15분 정도였지만 해변 풍경이 좋았다. 그러나 차를 세우기는 난감한 도로 상황이었다. 중간에 디스이즈동해작은포구의 전형적인 마을들이 스쳐지나갔다. 스쳐지나가면 그것으로 사진은 끝이다.

그리고 사진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방파제에서 포토'김'에게 내 카메라를 넘겨 주고 '우리부자'를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뭔가 설정을 달리 조정한 모양이다. 문제는 내가 다시 원상태로 돌릴 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정해진 자동모드 이외의 그 어떤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화이트 부분이 대략 날아갔다.

바다는 좋았다. 바다 사진 찍기에 좋은 날이었다. 또는 오래간만의 동해라 무조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전화가 왔다. 돌아오란다. 마지막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

구룡포항에는 고래골목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는 두 개의 고개고기 식당이 마주하고 있다. 물론 다른 집들도 있겠지만 이 골목 초입의 두 집이 대세인 모양이다. 구룡포에서 고래고기를 먹은 적은 없다. 주로는 부산에서였고 큰마음 먹은 날은 장생포를 찾곤했다.

삼오식당 고래수육 상차림이다. 스타일이 다르다. 아랫 동네에서는 그냥 짙은 고동색의 멸치젓장에 아주 매운 고추를 썰어서 내어 놓은 장에 수육을 찍어먹었다. 또는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집도 젓장이지만 젓갈 냄새를 많이 약화시켰다. 이 역시 대부분의 외지손님들 입맛 때문일 것이다. 촬영이라고 내세우고 가능하면 다양한 부위별로 주문을 했다. 아주머니는 접시를 내려 놓으며 '고래는 원래 열두 가지 맛이 난다고 했자나예' 라고 말했다. 고래는 먹을 줄 아는 사람과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 고래향 때문이다. '비린네 때문에 못 먹겠어요!' 라는 말하면 나는 입이 하나 줄어드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젓가락 비행을 하며 한 마디 지적을 한다.
"고래는 비린내가 아니라 향이라니깐. 포유류니까."
내어 놓은 고래는 밍크고래라고 했다. 이제까지 먹었던 고래수육과 질감과 향이 달랐다. 향이 달랐다기 보다 고래 특유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먹지 못하는 그 향이 대단히 약했다. 이제까지 내가 싼것만 먹은 것인지 이 구룡포 스타일은 어느 정도 향을 억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또는 고래의 종류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가격으로 보자면 싼편이다. 大자가 육만 원이었다. 장생포 '할매집'에 가면 접시에 10만 원이다. 부산에서도 3만 원부터 10만 원까지 다양하지만 그것은 양의 차이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부위를 올리느냐에 따른 가격 차이다.

제일 위에 보이는 하얀 부위는 꼬리지느러미 부위일 것이다. 귀한 부위다. 그 아래 깔려 있는 순대처럼 동그란 부위는 아마 소장일 것이다. 이 역시 귀한 장면이다. 소장에서 고래 특유의 향이 짙어야는데 역시 약하다. 이제까지 먹었던 것 중 가장 부드러운 스타일이다. 그것이 불만이다. 좀 쎈놈을 원했다. 기름도 좀 더 뺀 꼬들한 상태가 더 좋다. 주로 나와 아이, 포토'한'이 먹었다. 주변의 나머지 세 사람도 먹는 시늉을 했지만 소비량에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도 고래인지라 맛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니 그 깊은 고래향이 그립기도 하다.
우리가 먹는 고래고기는 어떤 경로로 잡혀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원칙적으로 포경은 여전히 금지다. 우연히 그물에 잡힌 고래는 허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전처럼 바다를 가르며 작살을 쏘아서 고래를 잡을 수는 없다. 또는 고래과에 속하는 고래 비슷한 것들을 수입해서 지난 20여 년간 먹은 것이란 이야기도 들었다. 바다 기후도 변하면서 종종 동해안을 질주하는 고래떼 영상을 보곤했다. 요즘은 서해에서도 보이는 모양이다. 내가 본 인상적인 영상광고도 고래 남획과 관련한 영상이었다. 포경업자들의 회의에서 다시 고래잡이를 허용하는 서류에 사인하고 마지막 점을 찍는 순간, 서류의 그 포인터에서 붉은 고래피가, 고래가 숨 쉴 때 뿜어 내는 물보라처럼 튀어 오르는 영상이었다. 내가 먹어 본 최고의 고기는 고래고기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도 고래다. 살아 있는 상태를 한번도 실견한 적 없는 동물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은 우스운 소리지만 사실이다. 작업팀이기도 했던 '4dr' 이란 아이디는 사업자등록증 상의 상호인데 다른 이름을 두고 고민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정하고 싶었던 디자인팀 이름은 '고래의 꼬리'였다. 심볼은 뻔한 것이고. 나는 개인적으로 고래를 다시 잡는 것을 격하게 반대한다.

미션을 완료하고 나서려는데 고래국을 끓여서 나온다. 나가다가 선 자리에서 촬영을 하고 시식을 했다. 고래국은 처음이다. 고래로 끓인 육개장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한 맛이다. 끓이니 향은 좀 올라온다. 홍어회보다 홍어애국이 더 지독하듯이.
앞서 이야기한 그대로 아주 어린시절에는 고래가 흔했고 자라서는 고래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물론 동해안에서 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체로 구경도 힘든 고기였을 것이다. 대학을 다닐 무렵에는 부산 민락동, 지금의 매립지 자리에 고래고기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가장 싼 부위만 썰어서 나왔지만 간혹 맛보는 그 맛이 새록하다. 80년대 후반에 3만 원이란 가격은 대학생들에겐 무리한 가격이었다. 지금 영월에서 이 글을 보고 있을 어느 선배는 이 대목에서 격하게 침을 삼킬 듯 하다. 양미리라도 구워 드세요.

미션은 끝이 났다. 食客여행도 종착역이다. 그러나 다시 이동한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매섭다.

구룡포초등학교 부근의 분식집이다. 원래 염두에 둔 집이 있었는데 문을 닫았다. 찐빵을 잘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풍기의 정아분식 생강도넛같은 아이템이다. 여섯 사람이 들어가니 가게가 만석이다.

찐빵이 맛있었다. 뭐랄까, 옛날 찐빵맛이었다. 라면을 시켰다. 食客여행의 마무리는 분식집 라면이다. 배가 부르다. 만두를 남겼다. 이제 끝인가?

딱 한 컷만 더 찍자고 했다. 바닷가 덕장에서 과메기를 과도하게 많이 말리고 있는 장면을 메인사진으로 사용하고 싶어했다. 좀 돌아다녔지만 원하는 그림의 덕장은 나오지 않았다.

가까운 언덕에 과메기 덕장이 보였다. 아쉽지만 저곳이라도 한번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갔다.

"웃어라 영후야, 마지막이다. 이왕하는 일이니 광대가 될 때는 광대에 충실해얀다.ㅎㅎㅎㅎㅎ"
웃음이 부족한 부자는 최대한 소리내어 웃으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포토'한'은 공장의 지게차까지 동원해서 마지막 장면을 쥐어 짜내려고 했다. 상황은 여의치 않은데 일단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자세. 두번 째 만났지만 작업을 하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올 일이 아니기에 현장에서 최대한 만들어내는 것이 맞다.

그러나 덕장 바닥은 꽁치기름으로 여름날 아스팔트 위 같이 신발이 쩍쩍 달라붙는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기름기 섞인 냄새가 진동한다. 그렇게 끝이 났다. 오후 3시였다. 예정보다 두어 시간 더 지연되었다. 경주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오후에 잠시 들렸다가 가기로 했는데 힘들겠다.
겨울 동해를 바라보며 계속 먹는 여행이니 호강한 것이지만 이 짓도 일로 정하고 하다보니 마음 편하게 딱 한 가지 음식 먹는 것 보다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읽고 너무 심드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겠다. 후배가 영후에게 물었다.
"다음에 또 할래?" "계절에 한번씩 해 줘요!"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이, 공, 한, 김 모두 수고가 많았다.
아래로 금요일 새벽에 혼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20분 동안의 바다 사진을 내려둔다. 구례를 떠나기 하루 전에 배추를 뽑았다. 돌아가면 이미 너무 늦어진 김장을 해야 한다. 다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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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하장용 사진 많습니다. 혹 이걸로 새해 연하장을 대신해도 좋을런지...ㅎㅎ 회원님들 모두에게 새해의 벅찬 희망을 빌어드리겠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꾸벅
ㅎㅎㅎ벌써 새해! 움,,,엘튼이아자씨(이래야나이안먹어보일거,,,쩝)목쉴정도루다가 열씨미 간만에 눈청소하구 달필에 흠뻑갓네요,,,새해복만이받으세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