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이후 연봉제로 바뀌기 이전,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김지영(현재 덴마크 왕립발레단)은 러시아 바가노바발레학교를 나오고 프랑스 파리 콩쿠르에서 1등을 했는데도 당시 월급은 고졸에 맞춰서 지급됐다. 국내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턱도 없는 월급을 수령하게 된 그는 결국 이대에 편입해 국내 학연을 만들어야 했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인 김주원과 이원철도 각각 러시아와 미국에서 발레학교를 나온 재원으로,국내 최고의 기량을 가졌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예술종합학교에 뒤늦게 입학했다.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은 경력상 유수 대학의 교수 자격이 충분한데도 대학원을 졸업하지 않았고 학위논문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시간강사를 하고있다.
요즘 들어 무용계의 대학간 혹은 교수별 파벌은 점차 엷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모계씨족사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특정 대학의 특정 교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이대파,세종대파,조선대파 등 파벌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교수들은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무용단에 들어가도 심하게 간섭한다.
학벌 위주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미술계도 마찬가지.
지난 연말 하종현 전 홍익대 교수가 서울시립미술관장에 임명되자 미술계는 크게 술렁였다. 지난 40년간,주로 서울대 미대 출신으로 채워졌던 공공미술관의 수장에 홍익대 출신이 낙점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술계의 학벌주의를 타파하는 신선한 파격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물론 미술계의 서울대-홍익대 학맥의 양강 지배구조는 아직도 만만치 않다. 다만 최근들어 경원대와 한성대 등 서울대,홍대가 아닌 다른 대학 출신의 비주류 작가군이 각종 공모전과 대안공간 전시 등에서 두각을 보이면서 다양한 구도를 갖기 시작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최근들어 이른바 ‘경원대 스타일’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경원대 미대 출신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술계의 학벌주의는 또 다른 형태로 변신하면서 문제점을 낳고 있다.
올 1월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0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선거는 홍익대와 비홍익대의 대결 구도 속에서 과열과 혼탁으로 얼룩졌다. 하철경(52.호남대 동양화과 교수),차대영(48.수원대 동양화과 교수),신제남(53.서양화가)씨 등 세 후보는 한달여 전부터 인사동에 선거본부를 차리고 표밭 다지기에 나섰던 것. 인사동 골목에는 마치 총선을 방불케 하는 미협 이사장 후보들의 선거 벽보가 붙었고,수억원대의 선거자금을 썼다는 설이 나돌 정도로 혼탁조짐이 감지됐다. 당시 미협 사이트 게시판에는 ‘술과 식사 기본에 버스대절 관광,회비 대납’ 등 과열 선거운동을 꼬집는 글들이 올라왔다.
지난해 7월 서예대전 심사부정시비는 예술계의 부패 고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금품을 받고 입상을 시켜주거나 작품을 수정하는 등 ‘뒷돈’과 ‘대필’을 통해 입상작을 만드는 고질적인 부정이 다시 재현된 것. 이처럼 문화예술 분야의 인맥·학맥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고 관행화된 만큼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문단에서도 명문대학의 학벌은 그대로 적용된다. 예전 서라벌예대와 같이 소설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지 않는 교육과정 속에서도 서울대는 저명한 소설가를 배출해 왔다.
시인들의 대다수도 명문대학 출신자다. 이들 뛰어난 학벌의 문인들은 학벌 프리미엄에다 자신들의 강력한 인맥과 혼맥을 형성하여 각종 문예심사위원을 크게 점유하고 있다. 그 결과는 문단의 학벌 풍토화다. 심사 과정에서 예술성과 독자성 등의 객관적 평가 기준보다 출신 대학이 중시되는 이상 건전한 예술성의 경쟁은 기대할 수 없다.
이같은 예술계의 학벌주의를 비웃듯 독자적인 방향성을 추구하는 요즘 영화계의 흐름은 어느면 매우 고무적이다. 관 주도의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전환한 이후 영화계가 파벌과 학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자유로운 영상 창작 활동의 분위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이러한 분위기는 영화계가 스크린쿼터 철폐?축소 움직임에 맞서 힘의 결집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스스로 벽을 허물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최근 영화인들이 시국 상황이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특정 정당 지지에 나서는 것도 파벌 및 학벌 파괴에서 비롯된 긍정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영화마케팅 관계자는 “다른 집단에 비해 지연 학연 혈연으로 무임 승차하지 않는 곳이 영화계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며 “서울대 간판으로 절대 안되는 곳이 영화계라는 얘기의 농담이 결코 의미없는 얘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장화,홍련’의 김지운,‘피도 눈물도 없이’의 류승완 등은 고교 졸업후에 감독이 됐고 김기덕 감독 역시 한국에서 정식 영화수업을 받지 않고도 국제영화제의 상을 거머쥐었다.
최근들어 영화진흥위 산하 영화아카데미 출신과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출신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추세지만,이는 파벌이라기 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더디기는 하지만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도 학벌주의 타파를 위해선 바람직한 현상이다. 정치권력이나 공권력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성역’으로 간주되어 온 ‘보이지 않는 추상성의 권력’,그것은 없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을 뿐 실상 한 시대의 ‘정신’을 담보하고 있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크다.
한 학계인사는 “특히 문화예술계의 학벌주의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정신을 병들게 하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비해 더 무섭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예술계의 학벌주의는 더욱더 조속히 타파되어야 할 악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