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
(제암리교회 사건)
계절품 탓이기도 하지만 매년 3,4월만 되면 화성군에는 강한 바람이 분다. 편서풍에 실려 중국 대륙에서 날아오는 먼지로 하루 종일 뿌옇다. 화성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바람과 함께 봄을 시작한다. 80년 전 봄 제암리 마을에도 그런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제암리 3,1운동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천도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시위를 주도한 점이 특징이다. 토박이말로 '두렁바위'라 불렸던 제암리 마을은 발안에서 수촌리로 가는 중간에 야트막한 산을 끼고 조성된 농촌 마을이었다. 50여 호 되는 집에 70%가 정도가 순흥 안씨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집성촌이었다. 한말 거의 같은 무렵에 감리교와 천도교가 이 마을에 들어왔다. 천도교 수원지방 전교사를 지낸 안정옥, 안종관, 안종린 등은 서울의 손병희와 교분을 나눌 정도로 천도교 중심인물이었다. 1905년 자기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감리교를 처음 받아들인 안종후 권사나 1914년 이곳 제암리로 이주한 홍원식 권사 역시 마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특히 수원 출신 홍원식 권사는 구한국부대 출신으로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충남 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제암리로 들어온 후에는 서재를 세워 아이들에게 민족 계몽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안종관, 안종후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꾸준히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암리 사람들의 3,1운동 참여와 그로 인한 희생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3월 16일 수원에서 시작된 수원지방 3,1운동은 화성군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3월 21일 오산 시위, 3월 23일 사강 시위, 3월 29일 오산 2차 시위, 3월 31일 발안 시위로 이어졌고, 4월 3일에는 장안면 수촌리와 우정면 화수리 사람들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장을 끌어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처럼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의 진압도 점차 격화되었다. 양측 간에 무력 충돌이 빚어질 것은 당연했다. 3월 31일 발안 시위 때 일본군 헌병들의 발포로 부상자가 나자 흥분한 군중은 주재소와 면사무소,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놓았다. 4월 3일 화수리 시위 때도 발포하자 군중이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때려 죽였다.
상황이 이처럼 격화되자 일제는 헌병, 순사 혼합부대를 편성하여 화성 지역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진압 작전은 4월 2일부터 6일까지, 4월 9일부터 16일까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오산, 사강, 남양, 팔탄, 발안, 수촌, 화수 등 시위가 일어난 지역을 돌면서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하였다. 검거 작전은 주로 밤중에 실시되었는데 한 마을을 포위하고 초가집에 불을 놓아 피신해 나오는 남자들은 무조건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무자비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런식으로 화수리와 수촌리 마을 전체가 불탔고 그때 예배당도 함께 사라졌다. 이와 같은 일본군 진압작전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 제암리 사건이다.
홍원식 권사를 중심으로 구국동지회 활동을 하고 있전 제암리 사람들은 3월 31일 발안 장날 시위를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그 후 밤마다 산에 올라 야간 봉홧불 시위를 벌였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사사카란 일본인이 일본군 진압 부대를 끌고 제암리로 들어온 것이 4월 15일 한낮이었다. 사사카는 발안에 살면서 서해안 간척 사업을 하던 사업가였다. 그는 발안 시위 때문에 입은 피해를 보상받기 원했다. 사사카의 안내로 제암리에 들어온 아리타 중위의 '보병 79연대' 헌병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열다섯 살 이상 된 남자들은 예배당으로 모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스물 두 명이 모였다. 그 다음부터는 잘 아는 대로, 문을 잠그고 창문으로 총을 난사한 후 예배당에 불을 질렀다. 북새통에 두 명이 탈출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은 도망치다 사살되었고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밭에서 일하다가 예배당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왔던 부인 두 명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그렇게 해서 예배당 안에서 20명, 예배당 밖에서 3명, 모두 23명이 희생되었다. 군인들이 지른 불은 편서풍 바람을 타고 제암리 초가 마을 전체를 살라 버렸다.
제암리 희생자들은 홍원식 권사, 안종후 권사, 안진순 속장 등 감리교인 12명과 안정옥, 안종환, 안종린 등 천도교인 11명으로 이루어졌다. 안씨 집안에서만 15명 희생자가 나왔다. 희생자 중에 제일 연장자였던(57세) 안정옥의 경우엔 두 아들과 두 손자까지 합쳐 3대에 걸쳐 다섯 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씨를 말리는 살육이었다.
사건 이튿날,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영사 커티스가 제암리에 들어왔다. 본래 이들은 닷새 전에 일어난 수촌리 방화 소식을 듣고 사건 현장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중간에 불타는 마을을 보고 들어왔다가 잔혹한 살육 현장을 목격하였고 이들을 통해 제암리 사건은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 제암리 '남은 자'들은 불탄 예배당 잿더미를 헤치고 시신을 수습했다. 서로 엉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도 없는 시체 덩어리를 대충 싸서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 후 세월과 함께 제암리 희생자들은 잊혀졌다. 사건 60년이 지난 1982년에야 생존자 전동례 장로의 안내로 공동묘지를 찾아 거기 묻혔던 유골들이 제암리 뒷동산 합장묘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암리는 매년 수만여 명이 다녀가는 3,1운동 순례 성지로 바뀌었다. 그 순례자 속엔 뒤늕게 자기 조상들이 한반도에 와서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심정으로 찾아오는 '양심있는' 일본인들도 끼어 있었다.
제암리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있다. 무엇보다 제암리는 민족을 대신한 수난 현장에서 피를 흘린 기독교 민족운동의 현장이다. 그곳에서 기독교 신아잉 민족 상황과 ㅂ녈개일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나라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믿어 천국 가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신앙인은 제암리를 찾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제암리는 감리교인과 천도교인이 함께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희생도 함께 하였다.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파와 교리를 초월하여 연대하였던 종교 평화운동의 현장이었다. 지금도 제암리 뒷동산 묘에는 80년 전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한 덩어리로 엉켜 최후의 순간을 맞았던 천도교인과 감리교인들의 유골이 합장 되어 있다. 따라서 제암리에서는 '네 뼈, 내 뼈 가리지 않는' 사후 평화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교리와 신조를 따져가며 편을 가르는 교파주의자들은 제암리를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런 면에서 매년 제암리교회 앞마당에서 치러지는 3,1 독립운동 기념예배는 제암리 주민들과 타종교인들에게 좀 더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