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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21 | ||||||||||||||
‘정통야당’의 비극적 침몰!
한때 여론조사 1위까지 올랐던 민주당은 어떻게 이토록 철저한 괴멸 직전까지 오게 됐는가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cspcsp@hani.co.kr
민주당이 침몰 위기에 빠졌다. 후보 등록 마감 직전까지 실시된 각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지역구에서 상대 후보를 앞서거나 접전을 벌이는 곳은 한화갑(무안·신안), 이낙연(영광·함평), 김효석(담양·곡성·장성) 등 전남 세곳 정도이다. 총선에서 비례대표를 합쳐 10석을 넘기느냐 여부가 궁금하다는 비관적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분당 이후로도 현역 의원 61명을 보유해온 정당이 이토록 철저하게 괴멸한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더욱이 민주당이 해방 이래 한국민주당과 1970년대 신민당, 1980~90년대의 평화민주당, 국민회의의 맥을 계승한 ‘정통 야당’임을 자임해왔기에 최근의 사태는 한층 의미심장하다.
조순형, 정통모임의 등에 엎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침몰을 초래한 본질적 이유는 무엇일까? 정범구 의원(민주당)은 이를 두고 “국민의 정부 시절에 구여권에서 영입해온 인사들과 당내 기득권 세력이 전면에 나서 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비극의 씨앗”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민주당을 장악한 이른바 ‘정통모임’(민주당의 정통성을 지키는 모임의 줄임말로, 민주당 내 신·구주류 갈등이 한창이던 2002년 5월에 박상천·정균환·유용태·최명헌 의원 등 구주류 인사들을 주축으로 결성)은 민주당의 본래 정체성인 ‘중산층과 서민’ 노선과 거리가 먼 수구집단이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박상천 대표 시절인 2003년 11월11일 민주당이 첫 ‘한-민 공조’로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안을 국회에서 의결하자 “‘부패 동맹’에 가담할 수 없다”며 탈당했다. 그 뒤 “민주당을 되살려보겠다”며 복당했다가 쇄신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분당 이래 민주당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이러한 진단에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민주당은 분당 직후 박상천 대표 중심의 집행부와 조순형 위원장을 필두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의 쌍두마차 꼴로 체제를 정비한다. 개혁파 리더로 꼽힌 추미애 의원은 비상대책위의 한 분과인 정치개혁위원장을 맡았다. 박 대표 중심의 구주류 또는 정통모임이 당의 이미지 쇄신에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지목됨에 따라 스스로 몸을 낮춘 결과였다. 민주당은 다음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구성할 때까지 비상대책위에 전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비상대책위는 △정치자금 신용카드 사용 의무화 △여성전용 선거구제 도입 등 개혁적 콘텐츠들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비대위에는 설훈·정범구·조성준·조한천 등 개혁파 의원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이들은 분당 이후 민주당의 노선으로 ‘열린우리당과의 개혁 경쟁’을 주장했다. 즉,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버렸다며 배신자로 비판하는 점에선 구주류와 다를 게 없되, 앞으로 누가 더 개혁을 잘할 것이냐를 두고 열린우리당과 경쟁해 유권자의 심판을 받자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민주당은 이 무렵 나름대로 잘나갔다. 각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이어 2위를 유지했다. 열린우리당은 잇달아 열린 텔레비전토론회 등에서 분당의 명분을 정당화하는 데 실패하고 분열주의자로 몰렸다. 민주당 의원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피어났으며, 뛰쳐나간 열린우리당 의원들 사이에선 “이러다 다 죽는 거 아니냐”라는 불안이 감돌았다. 그러나 민주당의 상대적 호조가 이어지자 한동안 납작 엎드렸던 정통모임쪽이 서서히 롤백을 시도한다. 비대위에서 마련한 당개혁안에 박상천 대표가 좌장인 최고위원회가 제동을 거는 일이 잇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애초 당개혁파의 한 사람이었던 조순형 비대위원장은 이 무렵부터 정통모임의 등에 엎히는 기류가 차츰 나타났다.
노 측근비리 특검 의결 과정의 파열음
이에 따른 첫 번째 파열음이 지난해 11월10일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국회 의결 과정에서 나타난다. 박 대표를 비롯한 당지도부는 두 차례의 의원총회를 거쳐 특검 찬성당론을 만들어낸다. 설훈·정범구 의원 등은 의총에서 “첫째, 검찰수사가 진행 중인데 특검을 실시하는 것은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의 당론과도 어긋난다. 둘째, 한나라당과 공조하는 것으로 비쳐 곤란하다. 세째, 반노 감정에만 치우칠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본회의 표결 당일 두 번째 의원총회에서 거수표결을 실시한 결과 40 대 15로 다수 찬성을 끌어냈다. 민주당 침몰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한-민 공조’의 첫 테이프를 끊은 셈이다.
정범구 의원은 다음날인 11일 “노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안은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며 “민주당은 이로써 ‘부패동맹’의 길에 들어섰다”고 비판하며 민주당을 탈당했다. 한-민 공조가 가져올 민주당의 정체성 상실 위험성을 행동으로 경고한 셈이다. 민주당은 이어 11월28일 전당대회를 열어 ‘미스터 클린’ 별명을 갖고 있던 조순형 의원을 새 대표로 선출했다. 그 직후 민주당은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을 제치고 지지율 1위에 오르는 등 한때나마 절정기를 만끽한다. 그러나 조순형 대표는 이미 과거의 ‘클린 조순형’이 아니었다. 그는 전당대회 출마를 망설이다가 구주류, 즉 정통모임쪽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나서야 출마를 결심한다. 출마 선언 이후에도 그는 국회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오후 6시면 귀가하는 등 당내 경선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1위 득표로 대표에 당선됐으니 정통모임이 만들어준 꽃가마에 무임승차한 셈이었다. 그러나 빚을 지면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그는 대표가 되면서 종전의 소신을 바꿔, 정통모임이 주장하는 책임총리제와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 등을 수용하게 된다. 책임총리제는 총선 뒤에 다수당 또는 다수파 연합에게 총리 자리와 내각 인선권을 넘기라는 이야기다.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는 대통령이 외교·국방만 맡고 내정은 총리에게 넘기는 것으로 대통령제라기보다는 ‘변형 내각제’에 가까왔다. 당 부설 국가전략연구소장이며 ‘민주당의 지도교수’로 꼽혀온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이 무렵 “사상 최초로 동서통합형 전국 정권을 만들 수 있는 제도”라며 분권형 대통령제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합세해 다수 의석을 만든 뒤 한-민 연합정권을 세운다는 ‘비전’도 정통모임의 일부 관계자들은 거론했다. 노 대통령은 이 경우 명목상 대통령으로 권한이 축소된다. “국민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는 대통령은 끌어내려야 한다”는 전여옥(뒷날 한나라당 대변인이 됨)씨의 당시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빼앗긴 정권 되찾기론’으로, 2004년 3·12 탄핵의 토대도 여기서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는 정통모임의 실체를 분석해보자. 민주당 내 신·구 주류 갈등이 한창이던 2003년 5월21일 ‘신당 대세론’에 밀려 숨죽이고 있던 구주류 인사들은 서울 강남 팔레스호텔에서 회동하고 정통모임을 결성한다. 신주류쪽으로부터 ‘신당 배제 5인방’으로 지목됐던 박상천 의원이 회장을 맡았으며, 정균환·최명헌·이윤수·유용태·장성원·최선영 의원 등 대선 당시 후단협(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출신자가 주축을 형성했으며, 김옥두·윤철상·김경천 의원 등 동교동계와 장재식·김충조 의원을 포함해 38명이 참여했다.
유용태 대표 체제, 반노 정체성의 완성!
참여자들의 면면을 보면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후보를 지지하다가 경선 이후에는 후보교체론을 바탕에 깔고 후단협 활동을 했던 인사들이 주력임을 알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98년 국민의 정부 첫해에 신한국당에서 영입한 구여권 인사들이 여기에 대거 참여했다. 크게 봐서 이들 그룹의 일원인 안동선 의원(대선 때 반노 깃발을 들고 탈당해 정몽준 후보의 국민통합21을 거쳐 자민련에 갔다가 2004년 1월 민주당에 복당)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급진좌파이기 때문에 중산층과 보수층의 심각한 우려를 사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안 의원의 말은 이들 그룹이 ‘반노무현’, 그것도 한나라당을 방불케 하는 색깔론 등을 공동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대선 당시 후단협 활동을 벌였지만 뒷날 열린우리당에 참여한 김덕배 의원은 “후단협이 반이회창이라는 순수한 명분에서 출발했지만 정작 내부 구성원 가운데는 순수성을 의심받을 인사들이 꽤 있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2003년 12월11일 유용태 의원을 원내대표로 선출함으로써 ‘반노 정체성’을 형식상으로도 완성하게 된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정통모임에 엎힌 조순형 대표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내무관료 출신으로 당 정체성과 거리가 있었던 강운태 사무총장, 신한국당 출신인 유용태 원내대표의 3각 체제가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민주당 지도부는 12월30일 비리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처리 △정치관계법 개정 △2004년 2월10일 대선자금 청문회 △3·12 탄핵 등 일련의 한-민 공조 행보를 한층 가속화하게 된다. 서청원 의원 석방결의안 상정 때도 신한국당 시절 서 의원과 원내총무-부총무로 손발을 맞췄으며, 중앙대 선후배 관계인 유용태 원내대표가 한나라당과 물밑 공조를 한 것으로 민주당 관계자들은 전했다. 심지어 올 들어 김경재 의원은 한-민 합당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무렵 민주당이 텃밭으로 여겨왔던 호남 민심은 급속히 민주당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광주 북을에서 민주당 당내경선에 참여하느라 유권자들을 폭넓게 접촉했던 고재방 전 교육부 차관보는 민심의 흐름을 이렇게 전했다. “분당 직후만 해도 ‘노무현 배신론’이 먹혔다. 그러나 한-민 공조가 시작되면서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 ‘왜 한나라당과 손잡냐’ ‘한나라당의 뿌리는 민정당이며 5·6공 아니냐’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우리를 총칼로 찌른 세력 아니냐’ ‘민주화운동 주체로서의 자부심은 어디로 가는 거냐’라는 의문들이 쏟아져나왔다. ‘민주주의와 인권 중시’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DJ 노선이 깡그리 사라진 데 따른 의구심이 커진 것이다.”
때늦은 속죄에 어떤 메아리가 올까
지난 3월31일 한화갑·김옥두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전남지역 공천자와 당직자 50여명은 광주 5·18 묘역을 찾아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눈물을 흘리면서 “탄핵 정국을 겪으면서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대가가 얼마나 무섭고 가혹한지 뼈저리게 느꼈다”며 “속죄하는 심정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으니 민주당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의 때늦은 속죄에 옛 민주당 지지자들이 어떤 응답을 보낼지를 지켜보는 것도 4·15 총선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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