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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조선시대 전기에 제작된 통형병은 어떠할까. 그동안 이 시기에 제작된 통형병에 대한 문헌이나 유물이 출현되지 않아서 막연한 추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조선전기에는 통형병을 생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왕조가 바뀌면서 문화의
변화에 의한 통형병의 단절로 봤던 것이다. 전래된 유물이 없으니 틀린 이론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려웠다. 아울러 같은 시기의 중국 명나라
백자를 살펴봐도 우리나라 통형병 형태의 도자기는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백자는 명나라 백자의 기형을 모방해 제작한 사례가
많았다. 때문에 당시 통형병은 중국에서 제작하지 않았던 기형이라 자연스럽게 조선 전기에는 통형병을 제작하지 않았던 것으로 단정 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발견한 (사진⑨)의 조선 전기에 제작된 백자 통형병의 출현은 그동안의 많은 궁금증을 일시에 풀어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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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⑨)의 白磁筒形甁은 최근에 필자가 직접 조사한 유물로 조선 초기에 경기도 지방의 왕실관요에서 제작된 통형병이다. 그동안 조선 초기
관요에서 제작된 통형병의 사례가 없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實見한 유물이다.
도자기의 입구는 조선 전기 병의 입구 모양으로 약간 외반돼
있으며 바닥 굽은 단면이 역삼각형이고 굽의 중심이 약간 올라온 조선전기 병이나 대접의 바닥 굽과 동일하다. 굽에는 작은 석영질의 모래알이
붙어있으며 갑발을 사용해 고운 모래받침으로 번조한 上品 白磁임에 틀림없다(사진⑩ ⑪).
도자기의 중심이 되는 몸통은 원통형으로
배흘림기둥처럼 약간 유선형이며 어깨와 몸통은 거의 직각을 이룬다. 병의 높이는 14.3cm, 입지름 4.3cm, 굽지름 6.5cm로 안정적인
기형이고 세련됐으며 조형미도 뛰어나다. 맑고 투명한 釉藥을 몸통에 두껍게 골고루 시유해 온 몸에서 설백색의 광채가 난다. 어깨부분에는 일부
흙물이 붙어있고 단단한 경질백자로 고화도의 소성을 했으며 빙렬은 없다. 왕실에서 특별히 주문받아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며 祭禮用으로 사용된 후에
副葬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안정된 기형으로 몸통에 물레질 흔적을 다듬었으며 바닥굽과 구연부의 처리도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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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자통형병은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조선 초기 통형병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통형병이 공백기 없이 꾸준히
제작돼 온 것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유물로서 의미가 있다.
삼국시대에 陶器로 제작돼 남북국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청자와
백자로 약 1천500년의 기간 동안 단절되지 않고 한결같은 모양의 도자기로 만들어져 온 것은 끊임없이 이어져온 우리 민족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유물 속에 내포된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형태의 甁이 이렇게 긴 세월동안 지속적으로 만들어진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문화는 시대에 따라 주변국과 교류하면서 변화한다. 조선 초기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왕조가 중국의 문물을 도입하고 백자
제작의 일부를 모방했지만, 그러한 모방 속에서도 전통적인 우리민족고유의 통형병을 새롭게 탄생시키고 발전시키는 지혜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