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보리꽃 다향에 감겨
톡쏘는 물갓김치에 입맛 돌아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은 새벽빛이다. 아직도 때묻지 않은 순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창에서 곡성 구례를 거쳐 지리산과 백운산 자락을 휘돌아 가는 강줄기는 마치 간이역에서 자식을 떠나 보내는 시골 아낙의 눈매처럼 젖어 있다.
개여울처럼 수줍기만 하던 강의 풍경이 도도한 물길을 보여주는 곳은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난다는 화개나루다. 5백리 길을 소곤소곤 흘러온 강물이 동편소리 한 대목처럼 유장하게 살아나 지리산의 그림자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곳에 <토지>의 무대가 되는 평사리 최참판댁이 자리잡고 있다.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부처가 되었다는 칠불사가 있고 선종과 범패의 발상지인 쌍계사가 자리잡고 있다.
쌍계사는 눈 쌓인 산에 칡꽃이 피는 자리다. 삼법화상이 중국 선종의 중흥조 혜능선사로부터 자신의 머리뼈를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裡葛花處)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고 지은 절이다. 이로 하여 꽃피는 마을 화개라는 지명이 만들어졌고 쌍계사는 십리 벚꽃 길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벚꽃이 피는 날 화개동은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꽃이 지면 천년 그대로의 한적한 산골로 변한다. 꽃잎보다 예쁘게 찻잎이 돋아나 싱그러운 봄의 향연을 펼친다. 화개동 골짜기엔 원래 야생 차밭이 많았으나 최근에 차 기업들이 찻잎 대량수거를 위해 일부 차밭에 비료를 주게 했고 또 일부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어서 야생으로서의 순수성이 예보다 못하다.
곡우가 지나고 봄비가 잦아지는 날이면 화개동 아낙들의 손길은 분주해진다. 산비탈에 총총히 들어앉아 찻잎을 따거나 가마솥에 찻잎을 덖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는 곡우 전에 따는 우전차를 으뜸으로 쳐서 무척 비싸게 받지만 이는 중국이나 일본 남부지방 기후에 따른 것이고 한국의 차는 입하를 전후해 따는 중작(가는 잎인 ‘세작’보다는 더 자란 중간 잎) 가까워져야 제맛이 난다.
곡우를 지나 입하를 앞둔 5월의 초순이면 향기로운 다향이 그리워 나는 다시 화개동에 든다. 신록이 피어나 매화꽃, 벚꽃을 찾던 때와는 몰라보게 성숙해진 봄날의 여수가 좋아서다. 재첩을 잡는 섬진강의 풍경은 낭만적인 강촌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보리꽃이 일렁이는 들녘은 아늑한 고향마을로 가는 듯하다.
이 즈음 하동 포구에서 화개를 지나 쌍계사로 이어지는 여로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는 화개장터의 재첩국과 녹차 수제비가 있다. 하지만 나는 쌍계수석원(055-883-1716)의 영양돌솥밥을 찾는다. 이 집의 돌솥밥은 밥이 보약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장수 곱돌에 찹쌀, 멥쌀, 차조, 검은 콩, 흰콩, 파란콩, 대추, 쑥쌀 등 잡곡을 넣고 지리산 약수로 밥을 짓는다. 서울 새댁이었던 안주인 유남숙씨가 29년 전 남편을 따라 이 산중에 들어온 후 정착하여 13년째 돌솥밥을 지어 오고 있다. 반찬은 지리산 깊은 산기슭에서 채취한 취나물과 도라지 고사리 등 산나물이 주를 이루는데 이 집의 최고 가는 별미는 물갓김치다. 갓김치로는 양념과 젓갈맛이 감치는 여수의 돌산갓김치가 유명하지만, 일본 개량종인 돌산갓보다 이곳 토종 물갓김치는 시원하고 담백하면서도 톡 쏘는 갓김치 고유의 맛이 은은하게 살아 있어 매력적이다. 비결은 찹쌀 풀을 쑤어서 맵지 않은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항아리에서 보름 정도를 숙성해 내놓는 것이다. 갓 지은 돌솥에서 밥을 덜어 산채나물과 비벼 먹고 구수한 숭늉을 만들어 먹는 맛도 좋다.
가는 길은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접어들어 하동 나들목으로 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화개에서 쌍계사 입구로 올라간다. 호남고속도로에서 전주 남원 구례를 거쳐가는 길도 있다.
시인·여행작가 이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