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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위기?
삶의 여정, 기쁨
놓아버림으로 부정적 정서의 구름만 거두어내면 밝은 태양, 밝은 에너지가 찬란히 비춘다.
데이비드 호킨스 스승님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누구나 한두번 삶의 주요한 위기들에 포위된다.
그런데
죽음이나 이혼, 결별, 상처, 부상, 사고, 파국처럼
정서적으로 압도하는 심각한 사건들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이런 경험들에 대처할때는 어떤 기법을 이용해야 할까?
문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나의 기준으로
의식지도를 다시 설명한다.
의식지도는
인간의 에고,
작은 나의 상태를 보여주는
수학적 모델이다.
이 지도안에는 수치심이나 죄책감, 무감정, 슬픔, 두려움, 욕망, 분노, 자부심, 용기, 자발성, 수용, 이성, 사랑, 기쁨처럼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들에 따라 이름을 붙인 의식의 다양한 단계들이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진실에 더 가까워지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진실에서 점점 멀어진다.
이 지도에서 숫자는 의식의 다양한 단계들이 지닌 상대적인 힘 또는 에너지를 나타낸다. 예를들어 무감정의 단계는 두려움보다 에너지가 훨씬 약하고 두려움의 단계는 용기보다, 중립의 단계는 사랑보다 에너지가 훨씬 약하다. 이런 다양한 단계들의 상대적인 힘은 서로 다른 관점들을 반영한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용기아래 단계에서는 화살표가 아래를 향한다. 이것은 이 의식단계들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생명을 지지해주고 진실을 거스르는 것이다.
용기의 단계로 표시되어 있는 진실의 단계에서는 화살표의 방향이 중립적이다. 여기서부터는 사랑하기의 영역으로 들어가면서 화살표가 위를 향한다. 이것은 에너지 장들이 생명을 보살피고 지지해주며 진리와 조응한다는 의미다.
엄청난 파국을 경험하면
삶이 순식간에 악몽처럼 느껴지면서
분출하는 감정들에
돌연 압도당한다.
그러나
이런 심각한 사건들을 다루고
그 지속기간을 단축하며
고통과 아픔을 달래고
스트레스를 최소로 줄이는 기법들이 있다.
삶의 이 주요한 경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경험들이
생존의 위협감과
극도의 비정상적인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또
주요한 변화를 암시하고
변경 불가능한 최종성과 영속성 탓에
공통적으로 무력감을 낳기도 한다.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렸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원히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과 사건을
변화시킬수 없다는 무력감은
극심한 혼란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런 혼란을 이겨내는 방식은
문제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의식의 전체 장에 대한 지식에 달려있다.
이런 모든 경험들은
충격이나 불신, 부정, 분노, 죄책감, 긴장감, 자기비난, 억울함,
망가지거나 버려진 존재라는 느낌,
신과 자신을 향한 분노, 자기연민,
세상과 가족을 향한 분노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분출을 촉발시킨다.
그러면
이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갑자기 표면위로 떠오른다.
때로는
순서대로 한가지씩 분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경험들이
공통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분리감과 상실감,
긴장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우리를 엄청난 기세로 짓누른다.
먼저
충격에 이어 억울한 마음과 불신,
분노가 연달아 일어난다.
이런 감정들이 일어나는 순서는
경험과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정확한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의식지도 밑바닥에 있던 것이
전부 분출된다는 것이다.
지도 아랫부분의 에너지 장이 강해지면 200아래의 다른 장들까지 아래로 끌어내리는 경향이 있다.
상실에 대한 슬픔은
죄책감과 가망없음,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건의 전말을 바꾸고 싶은 욕망,
분노까지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무시무시한 위기상황속에서
부정적인 에너지 장 전체가
폭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의 거대한 분출 탓에
혼란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야 말로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다음은
이성으로
이런 에너지들을 다루려 애쓴다.
딜레마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내기 위해 애쓰며
변명과 이유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에너지 장이
너무나 무겁게 압도하고 있어서
생각이 이 에너지 장의 부정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자체도
부정적으로 변한다.
이 모든 경험들의
또 다른 공통특징은
생활스트레스 평가척도에서
맨 꼭대기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생활 스트레스 평가척도는 특정한 삶의 사건들이 주는 스트레스 정도를 0에서 100까지의 수치로 나타낸 것이다. 배우자나 아이, 가족 구성원의 죽음, 이혼같은 경험들은 이 척도의 상위에 위치하기 때문에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모든 경험들 중에서 최대의 재앙에 속한다.
우리가 탐구해야 할 문제는
이런 경험들을
철저히 배움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방법이다.
이 배움을
극대화시켜서
의식의 중요한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자체를 되살펴보고,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관계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이며, 주요한 위기들을 다루는 법을 터득하는데 이런 본질은 어떻게 도움이 될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몸은 스스로를 경험하지 못한다. 몸은 그저 존재할뿐이고 실제로는 지각력이 없다. 우리가 몸이 어디 있는지 알수있는 것은 오감덕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몸의 오감인 것이다. 그러나 오감자체도 스스로 경험할 수 없으며, 오감보다 더욱 큰 어떤 것, 즉 마음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우리가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할수 있는 이유는
몸의 현상들이 마음속에서 보고되고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도 스스로를 경험할 능력이 없다. 충격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기억은 자신이 기억임을 경험하지 못하고, 생각은 자신이 생각임을, 느낌은 자신이 느낌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마음보다 더욱 큰 것 즉
의식속에서 경험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이 의식덕분이다.
요컨대 마음은 오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해주고 오감은 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은 몸자체에서 몇단계 떨어져 있다.
이와 비슷하게 의식자체도 사실은 스스로를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가 의식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는 것은 자각의 에너지장 덕분이다. 또 마음은 오감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고 오감은 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들을 경험하는 자리는
신체적인 몸자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이처럼
경험이 의식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식의 장안에서
인간 문제의 해결책을
직접 구할 수 있다.
고통과 아픔의 양을
효과적으로 줄이거나 완화시킬 수 있으며,
훨씬 좋은 결과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기법과 접근법의 효과는
이미 몸의 통증이나 아픔, 고통, 우울, 불안,
두려움 등의 치료에서 증명되었다.
엄청난 정서적 파국을 불러오는
위기상황에 직면할때도
이와 똑같은 기법이 효과를 발할 것이다.
우리는
사실 경험에 대한
자신의 경험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글쎄요 저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세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록되는 것은 경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다. 이 정확한 중심점을 다루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을 경험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면
상황이나 일을
정확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몇주나 몇달, 몇년,
실제로 평생이 걸릴 수 있는 문제들도
몇초나 몇분만에 해결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평생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단 한시간 안에 고칠 수 있다.
큰 파국과 같은 사건들을
어린시절에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들었을때
그들을 만나보면
여전히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 사건들이 불러일으킨
부정적인 감정들과
이로 인한 주요 결정들, 분노, 환멸, 고통,
원망 등을 안고 산다.
마치
그 사건을 어제 경험한 것처럼
여전히 치유되지도
자유로워지지도 못한 상태다.
짓눌림에서 벗어날 방법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사건을 경험하는 차원에서
짓눌림을 해결할 방법을
이야기해보자.
엄청난 파국을 불러오는
뼈아픈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다루어야할 것은
놀랍게도 감정 자체의 에너지다.
파국의 경험을 잘 살펴보면,
일어났거나
우리가 세계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해 느끼는 방식이
문제임을 알게 된다.
사실에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사실 자체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사실을 둘러싼
정서적 반응이
중요한 것이다.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삶의 사건들과 관련해서
우리가 정말로 다루어야 할 것은
사실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방식이다
느낌은
우리의 태도나 믿음,
사건들을 대하는 방식,
세계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사건들을 대하는 감정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압도당한 상태에서는
정서적 에너지 자체를 다루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감정은 다룰 필요도 없다.
그저 감정들의 에너지만 다루면 된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좋아요. 그럼 저기 저 사건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돈이 한푼도 없는데,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등등 그러나 놀랍게도 사건들은 다루기가 아주 쉽다.
엄청난 파국같은 것은 없다.
일단 느낌들을 제쳐두고 나면,
사건자체는
사실 기계적인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
약간의 반항심이나 분개,
후회같은 마음이 생길수도 있지만,
이것들은 사소한 문제다.
현상계와
매일의 삶에서
실제 문제들을 다루는 일은
생각과는 달리 훨씬 쉽다.
이것들은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들이
문제라는 생각은
부정적인 감정들의 에너지 장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부정적인 감정들의 에너지 장에서는
이 문제들이 비극적이고 절망적이며
견딜 수 없고
극복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일단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서 빠져나오면
삶은 스스로 풀려간다.
다른 무언가가 빈자리를 채워 제대로 굴러간다. 감정들을 치워버리면 문제들은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삶은 어떤 문제든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므로
삶에 어떤 딜레마가 등장하든 전부 해결되고
삶의 에너지도 회복된다.
대재앙이 당시에는
더 없이 큰 일처럼 여겨지겠지만
삶은 계속 흘러간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저기 외부의 사건이나
삶의 환경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알아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사건으로 피폐해진 사람을 위해 보통은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상황을 수습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일어난 에너지를 다스리는 일이다.
주요한
부정적 에너지 장들 가운데 하나가 폭발하면,
이 장은 나머지 장들까지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로지 슬픔만 경험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을 탓하는 사이,
슬픔과 더불어
죄책감도 거의 언제나 일어난다.
이때
죄책감은
모퉁이를 돌때
왜 잘 살피지 않았을까?
왜
체인을 장착하지
않았을까?
왜
그녀를
얼른 의사에게 데려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녀의 암이 나을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 말에 판돈을 걸었을까?
와 같은 의문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의문은
일종의 회고적인
자기질책이다.
또
무감정이나 가망없음의 감정도
일어난다.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고,
행복의 원천이
삶에서 사라진 것만 같다.
상실에 대한 슬픔도 당연히 일어나고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도
뒤이어 생겨난다.
끊임없이
집요하게 일어나는 욕망은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어 못견디게 만든다.
어떻게 해야되지? 합의나 조종을 하려들고 신과 논쟁을 벌이거나 거래를 한다. ''오 신이시여 그만 살게 해준다면 이런저런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삶과 삶의 본질에 분개하거나 화를 낸다.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이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들은
보통 한꺼번에 불쑥 일어나거나
그중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다.
이와 동시에
마음은
이유를 찾아내 이해하기 위해 애쓰면서
미친듯 몸부림친다.
그러나
넘치는 부정적인 에너지로
수렁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처럼
마음이 처리하기에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마음은
혼란에 빠지고
아드레날린이 치솟으며,
스트레스 호르몬이 몸을 휩쓸어 버린다.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는
의식안에서
우리를 심각한 위기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문제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차원이 아닌
더 높은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더 높은 에너지는
더욱 큰 힘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더 높은 차원의 에너지에서 다루면
문제들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더욱 낮은차원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정서적 압도의 에너지다.
정신과 의사가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놀랍게 여겨지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정신과 의사라면 환자와 사건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상징적 의미들 같은 심리학적 구성 요인들을 이야기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요인들을 건너뛰고
감정들이 분출해내는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심리가 어떻든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엄청나게 분출되고 있으므로
이런 감정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때
아주 효과적이 기법은
생각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음이
능력의 결여로 인해
생각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저 무겁게
압도당해 있을 뿐이다.
또 몹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들이
경험의 전체적인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심리적 자아의 모든 차원에서 완전하게 이해하려 한다면
문제들을 푸는데 평생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낫기도 하다.
그저 느낌 자체속으로
들어가보기만 하면 된다.
먼저 알아차려야 할 것은
우리가 일반적인 방식으로 느끼는 이 느낌의 저변에
에너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의식이 작용하고
이름은 없지만
널리 퍼지는 성질을 지닌
에너지체가 있는 것 같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감정의 에너지,
느낌 이면의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확신성의
이름없는 에너지는
시간이 조금만 주어져도
슬픔이나 분노, 두려움, 격분, 자기연민,
질투같은 감정으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형태없이 산만하게 퍼져있던 감정의 창이
이제는 슬픔의 형태를 닮는 것이다.
그리고
이 슬픔안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분노도 들어있다.
감정의 에너지는 대체로 이와같다.
시간이 짧게라도 더 주어지면
감정의 에너지는
더욱 커다란 형태를 취한다.
돈도 없는데 이제 어떻게 살지?와 같은 구체적인 두려움이 그 예다.
두려움이
이렇게 형태를 취하면,
두려움이라는
이 구체적인 감정에서
생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치 억압되어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가
사건들을 계기로
연달아 일어나는 것 같다.
이제 이 억압된 에너지를 풀어버리는 방법을 알아보겠다.
도화선을 끊고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모든 경험에서 풀려나
내면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외부의 사건들에
무언가 조처를 취하거나
이해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생각들을 살펴본다 해도
앞으로 전혀 나아갈 수 없다.
생각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감정들을 살펴봐도
문제해결에 별 진전이 없다.
하지만
혼란 밑에 깔려 있는
에너지에 초점을 맞추면
대단한 효과를 얻을 것이다.
그럴 경우
경험을 더욱 일찍 알아차리면서
그 에너지가 산만하게 퍼져있고
이름도 없음을 알 수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출을 기다리는
가압가스 저장고와 같아.
평생 에너지가 쌓여 왔기 때문에
이제는 분출할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수문이, 대문이, 출입구가 열리면
통속에 꾹꾹 눌려있던 감정 에너지가
이 틈에 탈출을 시도한다.
헛간 문이 열리는 순간
온갖 동물들이
밖으로 뛰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통은
사실 경험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그저 앉아서 저항을 내려놓고
함께하기를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
되도록 빨리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수록
억눌렸던 에너지도 빠르게 빠져나가고
경험도 신속하게 끝을 맺는다.
몇시간이고 며칠이고
몇주, 몇달, 몇년
심지어는 평생토록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우리를 끌어내리도록 허용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풀어버리는 것이다.
손에 화상과 같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그가 모든 것을 멈추고
저항을 내려놓는 방법을 이용한다면
문을 열어 젖히고 이 경험을 반기면서
사실 나는 부상의 경험을 더 많이 원해라고 말한다면,
이 경험의 에너지를 더욱 많이 원한다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무시하고
이 에너지 장을 경험한다면
마음은 "음 난 슬픔을 경험하고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딱지에 불과하다.
모든 생각은
딱지에 불과하고
실체가 없다.
사실 이런 생각들 중
실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마음은 자동적으로 슬픔을 말하겠지만
이것 역시 딱지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에는
감정을 지배할 힘이 없고
감정들에 형태를 부여할 능력도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잃으면
슬픔이 일어난다는 믿음은
감정에 형태를 부여해준다.
감정들의 에너지 장은
사실 형태가 없지만
누군가 그것이 슬픔이라고 주장하면
바로 슬픔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다가도
누군가 우리의 머리에 총을 겨누면
이런 일이
두려움을 불러오리라는
확신이 자연스럽게 든다.
똑같은 에너지가
이제는 두려움이라는
약간 다른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너지 장의 형태를 줄이고
어떤 식으로든
이것을 명령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
난 지금 슬픔을 겪는 중이야.
난 두려움을 겪고 있어.
난 혼란을 통과하고 있어 하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혼란은 사실에 가까운 말이다. 극심한 혼란속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말하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쓴다. 처음에는 보통 충격파 무감각에 빠지고 벌어진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때가 바로
이런 수행을 시작할 순간이다.
기법을 이미 배워두었다면 준비는 충분하다.
몇해전 나도 이런 혼란을 경험했다.
나는 즉각 이 경험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생각들을
끊임없이 지워버렸다.
내가 경험한 상실이
평생동안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평생토록 지속되는 상실이 아니라
이 상실로 인한 감정 에너지다.
일단
상실에 대한 감정 에너지가
흩어져 버리면,
이런 상실도
그래서 뭐?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는
극심한 파국으로 인한
감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도 그저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
방법은
감정을 경험하도록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것이다.
사실
감정을 극복하려고 서두르면
감정을 더욱 많이 불러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올테면 와봐.
더 와봐라고 말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면
드디어 이런 경험이
오히려 주요한 기회임을 깨닫게 된다.
모든 아픔과 고통의 원인은
압착된 에너지 장에 누적에 있으며,
삶의 사건들은
이런 에너지가 분출할 빌미를
제공해준다.
또 문이 열리면서
우리 스스로
이 에너지의 일부를 느끼게 된다.
예를들어 누군가 내 자동차 범퍼를 들이받았다고 하자. 그 순간 평생토록 꾹꾹 눌러 두었던 화가 핑계거리를 발견하고 밖으로 튀어 나온다. 움푹 들어간 범퍼에 분노하고 짜증을 내가다 자기연민과 질책속으로 빠져든다. 이처럼 삶의 사건들은 억압된 에너지를 풀어버릴 빌미를 제공해준다.
마음이
억압된 에너지를 견딜 수 없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에너지를 풀어버릴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잘 아는 사람은
억압된 에너지를 느끼면
그 즉시 풀어버리려 할 것이다.
마음이
에너지의 분출을 정
당화할 구실을 만들어 낼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외부의 사건이 없어도
자신의 화를 풀어버릴 줄 안다.
모종의 억압된 화가
쌓여가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말한다.
이걸 들여다보는게 좋겠어. 그러고는 마음이 화를 덜어내기 위해 분주하게 배회하면서 저기 바깥에서 무언가 사건을 만들어 내기 전에 화의 에너지를 내려놓기 시작한다.
이처럼
삶의 사건들은
대부분 안전밸브나 분출밸브와 같아서
에너지 탱크의 압력을 줄일
기회를 제공해 준다.
압력을 줄이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다.
어떤 경험을 할때
그 저변의 에너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이
특정한 사건을 둘러싸고
만들어낸 문제나 생각들을
다룰 필요는 없다.
삶의 모든 경험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경험에 대한
자신의 느낌속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의 사건자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재앙처럼 보였던 일도
정오가 되면
재밌게 여겨질 수 있다.
사건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움푹꺼진 범퍼도
그 일이 일어난 순간에는
분노를 일으키는 충격적인 일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이 일을 생각하는 순간
죄책감이 들기 시작한다.
자신이 다소
거칠게 차를 돌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시간쯤 지나면 상대편 운전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의 보험처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의 잘못이 아님을 깨닫고 그에게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런 심정탓에 다시 죄책감과 자책감속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사건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고 다시 분노에 휩싸인다.
이제 우리가 무엇과 더불어 살아가는지 알것이다.
우리는
움푹꺼진 범퍼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저
범퍼에 대한 우리 내면의
경험을 살아낼 뿐이다.
그리고
움푹 꺼진 범퍼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우리 경험은 달라진다.
이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결코 움푹 꺼진 범퍼가 아니라
찌그러진 범퍼에 대한
자신들의 감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압도적인 경험도 좋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그 똑같은 에너지,
그 미묘한 내면의 느낌뿐이다.
이것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고 순응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이 에너지는 풀어진다.
그렇게
몇분 혹은 한시간 정도 지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때
얼마나 능숙한가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즉각 풀어버리는 반면,
약간의 훈련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더이상 이런 감정들을 다루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두려움으로 여겼던 감정도
흩어지고 나면
더이상 두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화는
화로 느껴지지 않고
죄책감도 죄책감 자체로
느껴지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쇄도하는
부정적 에너지 흐름으로
감정을 경험하며,
이 에너지는 사실상 포괄적이고 이름도 없다.
이 에너지에
어떤 이름이나 딱지,
명칭을 붙이는 일을 멈추면
더이상 이것을 해결할 필요도 없어진다.
분석이나 해석을 가하는 일을 그만두면
이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으면,
사건이나 질책하는 일을 그만두면,
이 모든 것을 건너뛰면,
이 에너지를 그저 느끼게 된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룰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 에너지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나 생각도
다룰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다가오는
똑같은 에너지를 다루는 것 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내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위해 애쓰면서
미친듯 생각속을 헤집거나
자신의 느낌속을 헤매고 다니면서
끔찍한 감정들을 다루기 위해 분투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에너지 장을 내려놓는 작업도
어떤 식으로든
이미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각하며
혼란을 뚫고
이 효과적인 방법의 핵심에
곧장 닿을 수 있어야 한다.
온갖 추론과 논리로
사건과 생각들을 다루고
온갖 고민과 추측으로 이해하려 애쓰고
온갖 철저한 탐색으로
심리적 의미를 찾아내려 분투하는 것은
재미있을지언정
효과는 전혀 없다.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회복을
지연시키기만 한다.
고통스런 손 화상을 치유하는데
몇초면 된다.
엄지손가락을 배였다면
출혈을 멈추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사실 몇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무심코
엄지손가락을 베는 순간
나는 이 기법을 즉시 적용했다.
피가 정확히 여덟방울 흘렀다. 끔찍한 사고로 압도당한 감정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고 고통을 즉시 풀어버린 덕분에 출혈이 이내 멈춘 것이다.
이런 기법을 실천한 사람들은
몸의 차원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이 기법이
진실임을 입증해주는 점이다.
그러면
일어나는
포괄적인 에너지와
접촉할 수 있다.
이 에너지는
명치를 통해
곧바로 올라오는 것처럼
또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쨌든 우리는
경험을 경험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약간의 수행력을 발휘해서
마음이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예를들어 마음은 '음 나는 저기 바깥에서 저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경험은 저기 바깥이 아니라 "여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곳이 어디일까?
언제나
경험하는 똑같은 자리 경험을 느끼는
자기 안에 있는 자리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느낌뿐이다.
진짜 문제는
사실 저기 바깥에 있는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다.
내 느낌의 에너지,
즉 내 느낌의 압도적인 에너지에
저항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주의를 돌려
이 느낌의 에너지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면
길어질 수도 있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이 끊어진다.
경험이
불현듯
끝나는 것이다.
이 에너지를 계속해서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이 경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든 것을 풀어버릴 기회야라고
자신에게 말한다면
그러면 이 경험은 어떻게 될까?
보통의 의식상태로
이 경험을 대했을 때에 비해
경험이 훨씬 빨리 끝날 것이다.
에너지 장이
갑자기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고압실의 압력계가
일정 수준에 달해
범람이 멈추면
평화로운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극심한 파국에서
깊은 평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경험해본 사람은
에너지에 깊이 순응하는 것이야 말로
고통을 제거하는 핵심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순응하면
갑자기 모든 고통이 멈추고
침묵과 무한한 현존, 평화의 상태가 찾아온다.
이전에 겪었던
그 어떤 경험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가 찾아드는 것이다.
이렇게 힘든 경험을 겪어 낸 사람은
더이상 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다.
이때부터는
자신의 정서적 경험에서
더 가볍고 자유로워지며
고통에도 덜 휘둘린다.
임상적으로 볼때
이런 순간에는
보통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삶은 어떻게든 지속될 것이며
스스로 삶을 살아낼 힘이
있음을 깨닫는다.
상황이
아무리 암울하게 보여도
어쨌든 살아남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기간은 다양하지만
이렇게 평화가 지속되다가도
다시 감정의 물결이 휩싸인다.
사이사이에
안도의 기간이 있지만
파도가 다시 휘몰아치는 것이다.
파도가 몰려오면
이것을 다시 반갑게 맞이하고
밸브가 닫히기 전에
되도록 많이 풀어낸다.
그리고
이것을 아주 귀중한 기회로
받아들인다.
삶에서
이런 기회가 여러차례 주어지지는 않으므로
당연히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는
경험을 완전히 겪어낸 후
그 사이에 얻은 지혜로
경험을 돌아보면서
마음이 실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확인할때
비로소 깨닫는다.
마음은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면서
"저기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기분이 좋아질텐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임상적으로 이것을 입증해주는 몇몇 좋은 예들이 있다.
아들이 베트남에서 전사했다는 전보를 받은 엄마가 있었다. 전보를 받자마자 엄마는 입을 닫고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밖을 멍하니 응시하며 의자를 앞뒤로 흔들기만 했다. 에너지를 완전히 상실한채 무감정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녀에게 세상은 희망이 없어 보였고 신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앞뒤로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가족들의 말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제대로 자지도 않았으며 완전한 무감정 상태에서 창밖만 멍하지 바라보았다.
이 때문에 두뇌의 화학작용도 달라졌다. 신경전달물질들이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가족들은 어찌해야 할바를 몰라 극심한 불안에 휩싸였다.
그런데 열흘쯤 지나 다시 전보가 왔다. 전부 실수였다는 것이다. 전사한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군번 숫자 하나가 다른 동명의 다른 병사인데 컴퓨터상의 착오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가족들은 얼른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엄마, 엄마, 걔가 죽은 게 아니래" 그러나 부인은 계속 의자를 흔들면서 멍하니 창밖멘 바라보았다. 가족들의 외침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처럼
외부의 환경이 달라진다해도
혼란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혼란은
이미 그 작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이 작용이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밖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에서
이미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바로 지금 이 상황과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순응해야 한다.
예를들어 곰을 잡는 덫에 다리가 걸렸는데 빼낼 길이 없다면 경험자체에 순응할 필요가 있다. 끝까지 앉아 버티며 이 경험을 직면하고 이미 제시한 기법들을 이용해서 이 사건들에 대한 경험에 순응하는 것이다.
효과를 얻으려면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는
사실 문제의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마 "이 외부적 상황을 바꿀 수 있으면 좋을텐데"라고
말할 것이다.
이럴때
사람들은
흔히 기도를 한다.
그러나
정말로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고배를 마시고
기도를 그만둔다.
기도의 방향이 애초에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그것을 원래대로 돌려주세요. 삶의 기쁨을 돌려주세요. 제 엄지손가락을 둘려주세요. 제발 저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변화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이런 형태의 기도는 아무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행태의 기도는 "신이시여, 제발 한쪽 발을 더 크게 만들어주세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신이 문제일까?
아니면 기도의 방법에 대한 이해의 부족일까?
이 시점에서는
부디 저와 함께 해주소서.
이 경험에 순응하고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하고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신의 현존을
의식적으로 자각할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를 대신해서
이 경험을 떠안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저항과 딱지붙이기를 계속해서 내려놓으면
점차 이 경험에 순응하게 된다.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상황을 바꾸기 위해
저기 바깥에서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면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마음이 일어나,
감정 에너지에 딱지를 붙여서
형태를 취하지 못하도록
만들지 않게 된다.
계속해서
더욱 깊은 순응 속으로 들어가
감정에너지 자체를 받아들이면
우리를 위해
무언가가 경험을 해주고
이 경험을 다루어 주는 것 같은
내면상태로 인도된다.
마치
개인적인 내가 물러나고
무언가가 우리의 감정 에너지를
다루는 것같다.
이런 방향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경험을 다루어 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안다.
경험에 대한 순응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경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에너지 장이
어떤 무한한 존재양식이,
존재의 어떤 측면이 경험을 다루고 있지 않았으며
모종의 환영으로 인해 경험에 자신을 투사하고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고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해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또
개인적인 나의 모든 측면들이
경험을 다루어야 한다는 고집이
누군가를 고소하거나 집을 고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식으로
저기 바깥의 경험에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고집과 저항이,
고통을 불러온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과 더불어
고집과 저항을 내려놓는다.
통제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렇게
내면의 경험에 순응하면
드디어 이 경험이
소중한 선물임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 경험을 잘 견뎌야만
그럴 수 있다.
삶에서 의식적으로
영적인 작업을
어떤 것으로 생각할까?
영적인 것이나
의식이라 불리는 것의 본질은
무엇일까?
자신의 무의식이나 초의식을 다룬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여러분은
이런 작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해 동안
영적인 작업을 해온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무릎을 꿄고 기도하는 사람이나
교회에 있는 사람이 생각난다고 했다.
모임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옴" 소리를 내는 광경을
떠올리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한가운데에서는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책을 들고 앉아
자정이나 새벽 1시까지 공부를 하는 모습을
그린 이들도 있었다.
또는
유명한 영적 스승의 오디오 테이프를 듣거나
"몸과 마음, 영혼"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거나
치유를 받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우리가
영적인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이런 풍경들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삶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런 풍경은
전혀 영적인 적업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작업은
교재를 공부하거나
구루의 사진을 바라보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극심한 파국이 닥치면
이런 영적인 작업을
건너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런 저런 위기상황들과 책무들을 해결하고 난 후에
다시 이런 작업을 시작한다.
요컨대
사람들은
영적인 작업의 본질을 제대로 모른다.
영적인 작업이
이런 심각한 위기들을 불러오고
우리를 위기속으로 몰아넣지만,
이런 위기들이 사실은 기회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위기야 말로
진정한 영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때다.
다른 것들은
사실 준비를 하고,
정보와 경험을 끌어 모으고 방향을 정하고
영적인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끝에 불현듯
진실의 순간이
영적인 작업을 해야 할때가
주어지는 것이다.
여러해 동안
영적인 작업을 하고
형이상학적인 서클에 참여했는데도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같은 병과 같은 문제에 시달리며 똑같이 생활한다.
내면의 진실도 듣기만 할뿐
전혀 체험하지 못한다.
이유가 뭘까?
삶이
황금같은 기회를 부여해주었다면
이런 기회에 영적인 지식을 체계화시켜야 한다.
이런 기회를 살려
변화를,
의식의 도약을
이루어내야 한다.
아주 귀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파국의 시기는
곧 중요한 도약을 이루어야 할때다.
위기를 직시하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난 영적인 작업을
외면하지 않을거야"
그러면
이제 진정한
영적인 작업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영적인 작업은
책에서 기분좋게 들리는 구절을 읽거나
멋진 사진을 보는게 아니다.
위기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위기를 똑바로 마주보는 것이다.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위기와 직면했을 때
비로소 영적인 작업의 위력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직면은 의식의 도약을 원한다.
위기와 함께 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갖고
'좋아"라고 말하면,
위기는 황금과 같은 귀중한 기회가 되어 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위기와 함께 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면
의식의 커다란 도약을 경험하고
지혜와 인식, 자각에서도 진정한 진보를 체험한다.
책에서 읽은 내용이 내적인 경험으로 내재화된다.
정서상의 저변에는
우리를 위해 이 에너지를
경험해주는 어떤 것이 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위대한 어떤 것이
정말로 이 에너지를 다루어주고 있다.
작고 개인적인 나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아마 이런 경험들 중에 생겨나는
에너지에 완전히 뒤덮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런 경험들을 딛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나보다 훨씬 위대하고
이 경험들을 더 잘 다룰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혼란에 빠져서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대신에
저기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꾸고 싶어 하고
생각을 통해 파악하려 한다.
그러다가
지력에 기대지만
지력도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커다란 떡갈나무 통나무를 발위에 떨어뜨려
발등 뼈가 전부 부러졌다고 하자.
이런 순간에 필요한 것은
삶이 부여한 상황을 기꺼이 다룰 수 있는 준비와
자발적인 의지다.
이럴때
도구와 의지가 있으면
아주 신속하게 치유될 수 있다.
극심한 압도 상태에서도
자신이 정말로
경험을 다룰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다.
극심한 공포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즉 무력하고 제한된 자기는
이 경험의 위력에 상대가 안된다는 인식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된다.
제한적이고 개인적이며 사적인 나는
이 압도적인 경험을
다룰 수 없다.
압도적인 경험에 마주했을때는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이런 경험의 영적인 가치가 있다.
경험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로 바꾸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바꾸고 싶은 것은
우리가 경험을 느끼는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이 느낌이 왔다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감정상태가 지나가면
사건은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해 내야 하는 것은
감정의 격심한 분출과
그 에너지다.
그러고 나면
사건은 스스로 해결된다.
일어난 일과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방식을 바꾸고 싶은 욕망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직면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이혼, 결별, 위기 극심한 상황, 부상 등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을 끝까지 겪어내리라 마음먹는 것이다.
물론
혼란을 불러오는 사건이 어떤 것이든
모든 사건은 똑같이 충격을 불러온다.
의지가 벽에 부딪혔다는 사실이
벽이 막아서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개인의 의지로는
이런 상황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충격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압도적인 경험은
이 모든 사실에 대한 인식과
충격을 가져다 준다.
더불어 이런 상황이
영속적이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마치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벽에 부딪히는 일이
삶에서 벌어질때마다
똑같은 에너지 장이 분출되는 것 같다.
삶에서 이런 일을
한번 이상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돌아보면
벽에 부딛힐때마다
그 충격의 상태가
똑같았음을 깨달을 것이다.
사건으로 경험하는
일련의 느낌들이
항상 같았다.
충격으로
갑자기 마비가 되었다가
불신 상태에 이르고
그 다음에는 온갖 부정적 느낌들을
쏟아낸다.
과거의 몇몇 경험들과
이런 부정적 느낌들을
엄밀히 살펴보면
이 모든 것들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부정적 에너지 장 전체를
겪어낸 것이다.
아침에도, 오후에도
변함없이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
있었을 것이다.
사실 1분 사이에도 감정이 앞뒤로 요동쳤다. 마치 번득이는 에너지 장안에서 감정의 형태들이 언짢음에서 분노로 자기연민으로, 질투로, 앙갚음으로, 분개로, 증오로, 신과 자신을 향한 저주로, 가족과 사회, 정부,법에 대한 원망으로 요동치는 듯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에너지 장안에서 마음은 미칫듯이 분주하게 뛰어다녔을 것이다.
이 에너지 장은
산만하게 퍼져있으며
형태도 없다.
마치
부정적인 에너지들로 가득한
바구니와 같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이 바구니지
이 안에서 흔들리는
작은 감정들이 아니다.
이것이
바구니 전체의 압력을 줄이면
이 감정들을 신속하게 겪어 내고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다.
이처럼
심각한 파국의 경험을
피할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금 마쳐야 하는 작업에
순응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다.
그럼
작업을 마쳤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작업이 끝나면
불현듯 혼란속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내면상태로 들어간다.
몇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분노를 품은 채
부정적인 에너지 장의 어떤 모습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사건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좌하고 앉아서
작업을 마칠때까지
이 사건을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이 작업에
고통이 뒤따르고
어떤 기법을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건에 부딪힐 때마다
사건을 변화시키고
생각들을 다루려고 애쓴다.
지력과 생각으로
사건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똑같이
막다른 골목에 봉착하고 만다.
사건들을 다룰 효과적인 도구가 없기 때문에
작업을 완전히 마치지 못한다.
풀어버리지 못한 감정들과
미완의 작업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
풀리지 않은 감정들은
정서적 태도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다가
몸에서 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여러해 전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과 관련해
아직 내려놓지 못한 무의식적 죄책감은
자율신경계와 경혈 에너지체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마음의 어떤 것과 연결된다.
생각을 담당하는
지적능력의 에너지 장은
점수가 400대다.
죄책감과 두려움, 화의 에너지 장은
특정한 병에 대한
믿음체계와 결합해
실제로 몸에 질병을 만들어낸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병을 "심신증"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 병의 심리학적인 요인은 표면에 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처럼
비극적인 경험을
정서적으로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면
흔히 몇년 후에 병으로 나타난다.
예를들어
20년전 가족 구성원의 죽음앞에서
미처 다 풀어버리지 못한 슬픔은
심근경색같은 병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을 충분히 다루면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그 사건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사건이
더이상 생각나지 않으며,
생각이 나도 고통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평온하다.
이런 일을 겪어 내야만 했다는 점이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면
모종의 평화가 찾아들고
이로써 이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깨닫는다.
비극적인 경험들은
궁극적인 영적 체험의
씨앗이자 진수다.
경험속으로 들어가
중앙의 핵에 이르면
완전한 내려놓음을 통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즉
경험에 완전히 순응하면
영적인 구도자들이 언제나 구하는
바로 그 씨앗을, 핵심을 만난다.
평범한 삶의
많은 비극적인 상황들속에서
불완전하게 해결된 경험들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더불어
사건들 속에 숨어 있는
보석같은 기회들을
자각하지 못하기도 한다.
사건들의 표면적인 본질에 압도당해서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은 또
집착이나 자기연민같은
부정적인 감정들과 환상에서
은밀히 뇌물을 받고
순교자적 고통같은 것을
제멋대로 탐닉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약물을 투입하는 바람에
의식의 변성상태가 일어나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결정적인
영적 발견을 이룰 수 있었던 기회가
미봉책에 덮여 버리고
가족들은
영적작업에서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려놓으려 애쓴다.
영적 발견의 본질적인 측면은 경험에 직접적으로 달려들때 주어진다. 선불교에도 이런 말이 있다. "무슨 일이 있든 곧장 앞으로 걸어가라" 그러므로 비극적인 경험이 다가와도 중심을 잡고 경험의 핵심으로 곧장 들어가 힘차게 겪어 내야 한다.
나의 삶에도
비극적인 경험들이 있었다.
미봉책을 쓸수도 있었지만
나는 거부했다.
그때 이미
이런 경험을 끝까지 겪어 내는 것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봉책은
사실 바닥을 치는 일을
겪어내지 못하게 한다.
바닥을 친다는 것은
알콜중독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다룰때
잘 알려져 있는 개념으로
완전한 내려놓음을 의미한다.
극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마음은 익숙한 것을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직접 직면해서
뚫고 나가기보다는
현실도피와 오락거리, 진정제, 약물, 술 등
다양한 수단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엄청난 파국과 같은 상황의 핵심은
완전한 내려놓음을 통해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위대한
어떤 것을 발견하는데 있다.
파국을 완전하게 겪어내면
당면한 위험이
아무리 비극적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 안에는
견뎌낼 힘을 지닌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고
이것과 연결된다.
이로 인해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것을 뚫고 지나가도록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을 지닌
어떤 것, 어떤 현존이나 품성,
내적이 삶의 어떤 모습이 있음을 자각하고
더욱 위대한 사람이 되어
비극적인 경험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나
비극적인 경험을
충분히 완전하게 겪어내지 않으면
찌거기가 남는다.
벼랑에서
반만 떨어졌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벼랑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이들은
은밀하게 손가락을 뻗어내
튀어나온 바위나 구멍밧줄에 매달렸다.
신을 향한 내맡김이
사실은 완전하지 못해서 의심이 남고
이 의심에서 경험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이
찌꺼기처럼 남은 것이다.
경험을 통과할때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큰 어떤 것을 체험하지 못하면,
결국은 제한과 어떤 장애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특정한 지점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참여의 의지도 제한된다. 이런 사람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경험에 다시 직면하느니
차라리 그냥 제한된 삶을 살아갈래.
사랑했다가 잃어버리는 편이
아예 사랑을 안하는 것보다 낫다.
사랑의 경험은
우리안의 제한적이고
작은 나보다 더욱 위대한 큰나와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완전한 해결은
이처럼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큰 어떤 것과
의식적으로 접촉하게 해준다.
이를 위해 노력해본
많은 사람들도
자신보다 더욱 큰 어떤 것에
작은 나를 완전히 맡기는 순간,
실재하는 무언가와 접촉하게 되었음을 증언한다.
이렇게
영적인 실재를
내적으로 체험하면
책에서 읽은 내용들을
깊이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확신에서
다시 삶속으로 들어가 참여하고
삶의 위험과 기회를 받아들이겠다는
자발적인 의지가 생겨난다.
바닥을 치는
내적경험이란 어떤 것일까?
이런 경험은
가망없다는 느낌과
절망에서 생겨난다.
작은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힘으로
이 일을 다룰 수 없어.
그러나
가망없다는 이런 느낌에서
내맡김이 시작되며
이런 내맡김에서
자신보다 더욱 큰 무언가에 순응하고
내려놓겠다는 자발성이 생겨난다.
밑바닥에서
구덩이 속에서
내려놓겠다는
자발성이 생겨난다.
밑바닥에서
구덩이 속에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나"
즉 에고는
이 일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승리와 성공은
바로 이런 패배에서 비롯된다.
불사조는
절망과 가망없음의 잿더미에서
날아오르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절망이나
가망없음이 아니라
작은 나의 한계를 깨닫고
내려놓는 것이다.
대파국의 한가운데에서 "포기했어, 난 이 문제를 다룰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에게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와 의식의 본질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기꺼이 도와주려는 위대한 존재들은 우리가 그래라고 말하기만을 기다린다.
우리보다 더욱 위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구덩이의 밑바닥에서
기꺼이 받아들이는
갑작스러운 전환의 순간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신이 계신다면 절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전환의 순간에
거대한 변화의 경험들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은
인류의 시초부터
줄곧 역사에 기록되어 왔다.
세계적인 단체인 그 훌륭한 익면의 알콜 중독자협회도 이런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 단체의 창립자인 빌 윌슨 역시 바닥을 친적이 있었다. 그는 완전한 절망과 가망없음 속에서 개인적인 나를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비록 신자는 아니었지만 "신이 계시다면 도와달라고 부탁해야겠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엄청난 변화의 경험이 찾아왔다. 이런 경험의 영적인 힘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입증하고 있다. 이들은 빌 윌슨이 그의 영적인 경험을 나누면서 세상을 향해 뿜어낸 에너지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내려놓음과
바닥을 치는 일은
분명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한적이고 무력한 자기는
일이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자각의 순간,
우주속에서
힘을 지닌 존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각의 순간,
그 힘이 밀려 들어와
경험을 다루어준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날때는
깊은 평화의 상태가 찾아온다.
고통이 있었던
그 자리에
무한한 평화가 깃들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현존을 느낀다.
역사적으로 진실에 대한 깨달음은 특별한 때에 일어났다. 하지만 반드시 특별한 때가 되어야만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경험의 한가지 유형일 뿐이다.
사실
영적인 작업의 본질은
언제나 같다.
즉
영적인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언제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하고
이 일을 스승으로 삼아
자신에게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건은
벌어지고 있는 일을 대변해주므로
극심한 파국도
어쨌든 진행중인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서
열심히
영적인 작업에 몰두중인 사람은
파국도 황금같은 기회로 받아들인다.
고통과 후회가 밀려오는 일도
커다란 이득을 안겨주는
기회로 인식한다.
영적인 작업의 핵심적인 본질은
일어나는 일들에
매 순간 초점을 맞추고
경험하는 그것과
경험이 이루어지는 자리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불러오는데 사용할 수 있는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기법이 있다.
이 기법은 바로
경험자체는 물론이고
경험하는 것까지 통제하려는 욕구를
끊임없이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의 어떤 무한한 측면(큰나)이
자각을 다뤄주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일어난다.
전에도
이런 일을 짐작은 했겠지만
실제로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이 주어진 후에는
현존에 대한 자각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런 경험을 계기로
작은 나에 대한 의존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내면의 현존에 기대려는 자발성은
더욱 커진다.
그러면
삶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작은 나에게 의지하는 일이 줄어들고
점차 고차원적인 큰 나에게
자발적으로 순응한다.
이렇게
작은 나와의 동일시를 버리고
현존과의 동일시를 점진적으로 늘려가면서
삶과 삶의 모든 측면들을
신의 의지에 자발적으로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수행과 체험의 핵심이다.
이처럼
극심한 비극적인 경험은
중요한 배움의 기회가 된다.
이런 기회는
경험의 본질속으로
그것의 진정한 핵심속으로 들어가
경험의 실제를 직시하게 해준다.
그리고 의식자체의 에너지 장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차원에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도 가르쳐 준다.
이런 기회가 찾아오면
'저기 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바꾸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순응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생각으로
이 비극적인 경험을 통제하려는 욕망이나
지력과 감정으로
이것을 다루려는
몸부림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떤 명칭이나 이름, 딱지를 붙이지 않고,
경험의 본질에 순응하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자발적인 의지로
이 비극적인 에너지 장을 다루고
내적인 경험속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내적인 경험에 순응해야
작고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큰 어떤 것을 체험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개개의 비극적인 사건들은
이러한 중요한 영적 배움을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의 반복이자
재현이다.
그래서
커다란 비극적 경험들을 통과한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흔히 이렇게 말한다.
"다시 그일을 겪고 싶지 않지만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것에
정말 감사해요"
세상에서
끔찍한 재앙이나
진행형의 무서운 병으로 치부하는 일에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재앙으로
우리는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 존재의 핵심적인 본질과
다시 연결된다.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것을
이런 재앙에서
배우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배움이 깊어질 수록
이 내적인 경험에 직면하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갖는데 필요한 것은
적어진다.
"구덩이 속의 바닥"이
점차 높아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굳이 고통스런 아픔을 겪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순응하게 된다.
내려놓고 순응하려는
자발적인 의지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크게 일어나서
이제 삶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이와 더불어
자신이 상황이나 일을
어떤 식으로 통제하려고 애쓰는지를,
개인의 의지를 어떻게 바꾸려고 몸부림치는 지를,
신을 어떻게 통제하고 바꾸려하는지를
끊임없이 주시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깊은 차원에서 완전히 순응하려는
자발적인 의지가 더 자주 일어나고
다양한 깊이에서
순응하게 됨을 느낀다.
또
일상의 삶에서도
조금이나마 순응을 한다.
그러다
커다란 압박을 받으면
기꺼운 마음으로
더욱 깊이 순응하며
파국이 불러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깊은 차원에서
기꺼이 순응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인격의 변화와
영적인 위치의 전체적인 이동은
전통적으로 이런 깊은 차원의
순응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깊은 차원에서 순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끔찍한 정서적 파국을 겪지 않고도
깊은 차원의 순응을 통해
똑같은 영적 작업을 이루어낼 방법은 무엇일까?
이 과정의 본질을 이해하면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위치가 변하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달라진다.
생명의 모든 표현들 속에서
생명과 기꺼이 함께 하고
자발적인 의지도
내면의 이런 생기에서
생겨난다.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큰 어떤 것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것은
개인적인 나가 아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무한한 현존이
인간의 의지와 에고보다
더욱 강력하다.
개인적인 나는
고통과 아픔을 불러오지만,
큰 나는
치유와 평화의 기운을
발산한다.
첫댓글 치유와 회복 책 자료를 더 올려 주실 수 있나요?
종이 책으로 읽는 것 보다
더 편리하게 읽을 수 있어 좋네요ㅋ
감사합니다_()_
아껴서
읽고 있어요
천천히
조금씩 올리려 했는데
사랑차크라님을 위해
속도를 내볼까요
치유와 회복 읽고 마음이 젊어지고 몸이 더욱 건강해졌어요ㅋ
날마다 생명의 기쁨 가운데 머무릅니다
감사해요_()_
응원합니다 ... 요
즘 암에 대해 탐구하느라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ㅎㅎㅎ
또 일상의 삶에서도 조금이나마 순응을 한다. 그러다 커다란 압박을 받으면 기꺼운 마음으로 더욱 깊이 순응하며 파국이 불러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깊은 차원에서 기꺼이 순응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인격의 변화와 영적인 위치의 전체적인 이동은 전통적으로 이런 깊은 차원의 순응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깊은 차원에서 순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끔찍한 정서적 파국을 겪지 않고도 깊은 차원의 순응을 통해 똑같은 영적 작업을 이루어낼 방법은 무엇일까?
ㅎㅎㅎ
다시 읽고 있어요 ㅎㅎㅎ
문원장님이 왜이리 사랑스러워 지는지 ....^^
끔찍한 정서적 파국을 겪지 않고도 깊은 차원의 순응을 통해 똑같은 영적 작업을 이루어낼 방법은 무엇일까?
이 과정의 본질을 이해하면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위치가 변하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달라진다. 생명의 모든 표현들 속에서 생명과 기꺼이 함께 하고 자발적인 의지도 내면의 이런 생기에서 생겨난다.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큰 어떤 것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것은 개인적인 나가 아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무한한 현존이 인간의 의지와 에고보다 더욱 강력하다. 개인적인 나는 고통과 아픔을 불러오지만, 큰 나는 치유와 평화의 기운을 발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