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靑鶴)2동 99번지 / 예경진
추석날이 전에 없이 쓸쓸했다. 오가는 발길도 오갈 데도 막혀버린 집안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일가붙이들을 살뜰하게 챙기던 부모님이 계실 적엔 명절날이 언제나 북적북적했건만 불과 몇 년 만에 집이 쇠락해가는 절간처럼 되었다. 옛 동네에서 나를 기억해주는 몇 분 어른들께 문안 전화를 하며 한가위 적막감을 달랬다.
아직도 나와 가족을 기억하여 덕담을 하는 이들이 있다. 전화 속 목소리들이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곳으로 나를 불러들인다. 비탈진 골목길로 올라서면 나지막한 돌담길, 탱자꽃과 편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기와지붕이 나온다. 푸릇한 푸성귀와 수박과 참외가 자라는 텃밭이 보이고, 아이들의 함성이 피어오르는 양지 바른 모퉁이에 다다른다. 옥이, 순희, 금숙이, 혜란이, 봉순이, 그리고 진이가 선머슴들과 어울려 놀았다. 청학(靑鶴)2동 99번지, 영도가 학이 양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면 청학동은 학의 중심 몸통에 해당한다. 네 살 때부터 결혼 전까지 살던 곳, 그곳이 이렇게 그리움으로 떠오를 줄이야.
부모님과 살던 장소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데가 고향이라면 나는 고향이 진정 무엇인지 모른다. 어릴 적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늘 살아왔고, 부모님 곁을 떠나본 적이 없기에 특별히 향수를 느낄 여지가 없었다. 향수는 상실에서 시작한다더니 원초적인 향수의 대상인 고향도 그런가 보다.
고향은 한 인간을 길러낸 자궁이다. 개인의 자아가 만들어지고 그 자아의 본성대로 오롯이 성장시켜주는 곳이다. 밝고 착하고 꾸밈없는 자연이 그곳 사람들을 심성 좋은 인간으로 만든다. 작은 도랑을 건너면 사시사철 빛이 달라지는 산, 올챙이 꼬물거리는 논물에 발을 담그던 시간도 오래오래 대문 없이 오가는 소박한 이웃들을 만든다. 이들 속에서 각자가 태어나고 자란다.
우리 동네는 버스길에서 한참 올라와야 한다. 바닷가에서 산기슭까지 봉래산 한 면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큰 동네이지만 기억 속의 동네는 공터에 앉은 공동 수도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앉은 몇 집이다. 전쟁 이후에 떠돌던 피란민들이 어느 한 시기에 모여 들었지 싶다. 우리 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 네 칸이 마주 보고 있었고 넓은 밭과 꽃밭이 있었는데 다른 집들도 크기와 모양이 고만고만했다.
큰고모네와 한 집에서 살았다. 큰고모는 청상과부로 교사인 딸과 같이 지냈다. 저녁을 먹은 후 간식거리라도 있는 날엔 대청마루에 둘러앉았다. 아버지와 고모의 만주 이야기가 단골메뉴였다. 할아버지 형제들의 독립운동과 무장 괴한들의 습격으로 집이 불타고 돌아가시던 날의 비애, 중국인들이 지극한 예우로 지낸 장례식에 다다르면 모두 눈을 적셨다. 중국인들의 인심을 잃지 않으려 조심했으나 때때로 뙤놈들을 곯려 준 대목에서 웃고 삼팔선 부근의 강을 건널 때 칭얼거리던 아기들도 숨을 죽인다는 대목에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도 노력한 만큼 밥은 먹고 살았으니 해방 후에 돌아온 고향 경북 청도의 생활보다는 나았다 한다. 아버지와 고모는 이야기로써 어린 나와 동생들에게 보지 못한 조상에 대한 자긍심을 뿌리 내려주었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성당에 줄서서 옥수수와 우유 가루를 배급 받았다. 지금은 별식이지만 그때는 주식이었다. 아버지는 퇴근 후에 밭에 온갖 농사를 지었다. 밭에서 참외와 수박과 감자를 캘 즈음 금잔화 황금빛 향기가 마루까지 퍼져 올랐다. 올망졸망 매달린 감자를 찌고 국수를 삶아 평상에 차려 놓으면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아침수돗가에서 물동이 놓고 서로 아웅다웅하던 사람들은 저녁 뒷집 마당에 모여 함께 본 TV 드라마 ‘여로’를 자기만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침에 싸우고 저녁에 속을 푸는 동네가 청학동이었다.
폐병쟁이 순이 엄마는 잘 삐쳐서 한 번씩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날엔 담벼락에 귀를 바싹 붙이고 웃음소리를 들었다 한다. 어린 남매를 남겨둔 채 순이 엄마가 죽자 순이 아버지는 신작로 상여 앞에 퍼질러 앉아 목 놓아 울었다. 아이들도 따라 엉엉 울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순이 새 엄마가 왔다는 소식이 날아 들었다. 이상했다. 순이 아버지의 울음은 가짜였을까. 대성통곡도 하고 새장가도 가는 게 삶이란 걸 어이 알았으랴. 할머니 손에 컸던 순이 남매는 나중에 신문기자가 되고 소설가가 되었다.
내 친구 옥이는 칠공주의 막내였다. 동네에서 옥이네에게 싫은 소리를 할 사람은 없었다. 칠공주가 엄마 편을 들면 아무도 그 드센 기운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하나 뿐인 오빠가 당시 최고라던 고대 법대에 합격하자 목소리에 더 힘이 들었다. ‘오빠가 사법고시만 되면….’ 가난한 집의 무지개였다. 그런 오빠가 착해 보이는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부엌에서만 잠시 지내더니 사라졌다. 가족들의 날선 기대를 어찌 감당했으랴. 나중에 다시 괜찮은 여자를 만나 사법고시는 접고 회사원으로 산다 했다. 옥이 집안도 그냥 평범한 학집이었다.
햇볕 따스한 날, 친척집에 얹혀 살던 혜란이는 무릎에 옷을 올려놓고 이를 잡았다. 아이들도 그대로 따라했다. 한 살 더 많은 금숙이는 심심한 겨울날이면 아이들을 불러 모아 화투치기를 했다. 셈이 빠른 금숙이가 늘 이겼는데 한편일 때는 좋은 화투장을 무릎 밑에 슬쩍 숨기곤 했다.
나무 울타리 아래서 이슬로 발을 적시며 공부를 하면 머리에 쏙쏙 잘 들어왔다. 중학교 첫 시험에서 우등상을 받았을 때 동네 어른들이 모두 칭찬해 주었다. 6원짜리 입석 버스를 타고 올 때 상장이 구겨질까봐 조심조심했다. 학기 초 담임선생님 가정 방문이 있던 때였다. 청학동 아이들을 위해 가정 방문을 오는 선생님은 없었다. 그래도 행여 선생님이 집을 못 찾을까 어두워질 때까지 버스정류장에서 서성거리곤 했다.
퉁퉁한 얼굴이 덕성스러워 맏며느리감이라던 덕이 엄마, 아이들을 잘 윽박지르던 봉순이 할매, 의대 공부가 힘든 지 머리가 살짝 이상해져는 실실 웃고 다니던 뒷집 오빠도 청학의 날갯짓으로 세상 한복판에 날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다.
6,70년대 가난한 나라, 가난한 동네에서 삶을 우직하게 살아내던 사람들. 밝고 선한 동네, 청학이란 이름으로 아침부터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 어디에 꾸밈과 계산이 있었으랴.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에게 꿈을 전해 주려던 어른들이 아이들의 날갯짓에 무게중심을 잡아주었으리라.
오늘따라 그이들이 그립다. 아마도 그땐 청학이 늘 푸른 울음을 울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