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젤(Giselle)을 보며
아무런 말이 없다. 아무런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하얀 옷을 곱게 입은 이가 사뿐히 다가온다. 그녀는 발끝을 곧추세우고 손을 살포시 가슴에 대었다가 천천히 앞으로 내밀며 객석을 향한다. 그러더니 어두운 불빛 사이로 사라져 버린다. 몸짓, 손짓, 표정, 동작뿐이다. 지인이 지젤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하여 따라왔는데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눈만 멍하니 뜨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아직 공연장 조명이 꺼지기 전이다.
“눈으로 보되 가슴으로 느끼십시오.”
바로 마이크를 잡은 감독의 목소리가 객석을 가득 채운다. 지젤을 처음 보는 이를 위한 짧은 안내다. 그 짧은 말은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밝혀주는 손전등 같다. 감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대가 캄캄해진다. 잠시 후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희미한 불빛이 들어온다. 독일의 라인 강변을 따라 펼쳐진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 무대 배경으로 흐릿하게 물결친다.
무대에 발레리나가 나타난다.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 손짓, 표정을 보며 감독의 말 한마디가 가슴에서 맴돈다. 알브레히트는 귀족 신분을 숨긴 채 마을 처녀 지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두 사람은 이내 사랑하는 연인이 된다. 오랜 시간 지젤을 흠모해 왔던 사냥꾼 힐라리온은 이 모습에 질투를 느끼고,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의심한다. 연인끼리 사랑을 고백하는 손짓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가슴에 손을 대고 천천히 앞으로 내밀며 상대에게 말없이 사랑이 전해진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손으로 사랑에 마음을 전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포도 수확을 마친 마을 처녀들과 지젤은 흥겨운 춤을 춘다. 춤을 좋아하지만, 평소 심장이 약했던 지젤은 이내 비틀거리며 모두를 긴장시킨다. 때마침 사냥을 나온 귀족 일행이 마을을 방문하고, 그들 중 알브레히트의 약혼녀 바틸드도 자리에 함께있다. 잔뜩 벼르고 있던 사냥꾼 힐라리온은 지젤을 불러 세워 알브레히트가 귀족임을 알려주며 귀족의 검을 증거로 보여주나 알브레히트는 이를 아니라고 우긴다. 이에 격분한 힐라리온은 귀족들을 소집하는 뿔피리를 불고, 다시 나타난 바틸드는 만인 앞에 알브레히트가 자신의 약혼자임을 몸짓과 손짓으로 알린다. 알브레히트의 거짓말과 신분 차이에 충격을 받은 지젤은 정신 줄을 놓아버리고, 행복했던 나날을 회상하며 비통함 속에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는다.
사랑의 끝은 비극의 시작이다. 배신을 알게 된 건 순간이다. 연인이나 약혼자나 눈이 휘둥그레지고, 손이 본능적으로 몸을 감싸며 뒤로 물러난다. 슬픔은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라 손끝에서 먼저 떨려 온다. 광기 어린 동작은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듯 어딘가를 잡으려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음이 부서질 때면 말보다 손이 먼저 길을 잃는다.
스산함이 가득한 밤의 숲속이다. 지젤의 무덤가, 갈대 사이로 희미한 그림자처럼 윌리의 여왕 미르티가 나타난다. 이때 비탄에 잠긴 알브레히트가 지젤의 무덤을 찾아와 한 아름의 백합을 내려놓는다. 그가 무덤 앞에 앉자 한 줄기의 빛과 함께 지젤의 영혼이 나타나고 두 사람은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또 지젤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힐라리온도 지젤의 무덤을 찾는다. 이에 윌리들이 그를 용서하지 않고 저주를 걸어 계속 춤추게 만들고, 마침내 연못가에 빠져 죽임을 당한다. 죽음도 사랑을 갈라놓지 못한다. 가볍고 부유하는 손, 땅에서 멀어지는 듯한 동작과 함께 손이 바람을 타는 듯 흐르듯 움직인다. 지젤의 손끝에서 바람이 분다. 그것은 용서의 바람이다.
여왕 미르티는 윌리가 된 지젤에게 알브레히트를 유혹해 그가 지쳐 죽을 때까지 함께 춤추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죽어서도 알브레히트를 사랑하는 지젤은 끝까지 그를 지키려 애쓴다. 지젤의 춤에 매혹된 알브레히트는 함께 춤추기 시작하고, 지젤은 사랑의 힘으로 춤추다 지쳐 쓰러진 알브레히트를 끝까지 지켜낸다. 새벽 종소리와 함께 여왕과 윌리들은 홀연히 사라지고, 지젤 역시 자신의 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지젤의 숭고한 사랑을 깨달은 알브레히트는 그녀의 무덤가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절규한다. 아픔도 삶의 한 부분이다. 이를 수용할 수 있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들은 두 팔로 감싸며 천천히 손이 내려온다. 그는 그녀를 보호하려 감싸안으며 마지막 사랑을 전한다. 손은 미움도, 사랑도 담을 수 있다. 지젤의 마지막 손짓은 안녕이었다.
지젤을 보며 내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말보다 몸짓, 손짓, 표정, 동작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말로는 표현하거나 형언할 수 없는 사랑과 배신, 용서와 구원의 이야기를 무언으로 풀어냈다. 윌리라는 처녀 귀신이 된 지젤이 알브레히트를 용서하고 그를 지켜주는 숭고한 사랑,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몸짓과 손짓으로 전해와서 얼어붙은 내 가슴에 전율을 일으켰다.
나는 어쭙잖게 소통해 왔다. 인간이 소통하는 언어가 말이나 글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말이나 글로 내 마음을 전하려고 애면글면 해왔다. 산더미 같은 책을 읽고 수만 장에 글을 써 보았다. 아니다. 다른 이를 설득하고 감동 주려고 애태웠으나 진정 그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지젤처럼 가슴 깊이 소통하려면 달변이나 달필보다 몸짓 손짓 표정이나 동작을 세련되게 단련하여야겠다.
앞으로 마주하는 이에게 부드럽고 훈훈한 봄바람같은 몸짓 손짓 표정이나 동작으로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첫댓글 유수필가님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자주 방문하시고 좋은 작품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