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스님의 천수경 강의(51-53) /btn]
연기설의 변천: 부파불교 - 유식 - 여래장 - 화엄 ('나무상주시방불'= 만물이 삼보라는 뜻)
▶부파불교의 연기설 = 업감연기 (業感緣起, 업이 연기의 중심)
불교이전 인도의 고전적 업설은 '이미 정해져 있다(숙명론)' -> 부처님: '아니다, 변한다'
"내 삶의 미래는 현재 행위(업의 증감)에 의해서 결정된다"
12연기는 '삼도연기': 혹(미혹)-업(악업)-고(고통)
▶유식불교의 연기설 = 뢰야연기 (賴耶緣起, 뢰야가 연기의 중심)
요즘 빅데이터에 엄청난 정보 저장.. 그러나 사실 원래 모든 정보는 모두 저장돼 왔다
그러나 그 정보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열람불가 (청정심 회복한 사람만 가능 = 신통)
업이 고를 만드는데.. 그 경험(업)이 저장 안 되면 어떻게 미래(고)를 만들겠는가?
행위는 업력으로 저장된다: 습관
엽감연기에서는 그 저장장소를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그냥 '업력이 마음에 저장된다'고 했는데
'그럼 우리 의식이 끊어진 상태에선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 남아
육의식 말고 자아의식(제7 말라식), 업력이 저장되는 마음(제8 아뢰야식) (7,8식은 무의식에 해당)
범어 알라야식, 한문 아뢰야식 장식, 한글번역 저장식
[업감연기] 중생의 '행위'→ [뢰야연기] 중생의 '마음'에 의해서 경험(삶)이 결정
*여래장불교의 연기설 = 진여연기 (진여가 연기의 중심)
*화엄학의 연기설 = 법계연기 (법계가 연기의 중심)
부처님은 우리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것은 말씀 안 하셨지만
불멸이후 다른 종교나 철학들이 모두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므로 불교도 안 할 수 없었다
- 초기불교 연기는 내 마음의 괴로움 설명 ==>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내용확장
왜? 다른 종교와 철학에서 세상을 설명하는데 불교가 못 하면 사상경쟁에서 뒤처져
내가 한 행동이 타인에게도 영향 = 공업(共業) / 나 자신에게 영향 = 불공업(不共業)
(불공업은 내 삶을 만들고.. 공업은 세상만물을 만든다)
만약 세상에 만물이 100개밖에 없다면.. 어느 특정 찰나에 각자가 행위를 하고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공업, 밖으로 방사되는 것은 공업인데
호수에 돌 100개를 동시에 던진 것과 같다.. 그 파동들이 끊임없이 중첩되어 진행.. 법계의 모양이 달라져
다음에 또다른 행위를 하면 파동의 중첩모양이 또 달라질 것.. 다른 우주가 형성
만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공업을 내뿜고 있어.. 그 영향으로 주관 말고 객관세계가 형성된다는 것
이 법계를 창조, 진화, 변화시키고 끝내버리는 원동력이자 주체가 공업
그런데 공업은 결국 업이고, 업은 아뢰야식(마음)에 저장
===> '세상은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 유식불교의 '일체유심조'
* 그런데 문제는.. 내 공업이 내 삶, 일상, 눈 앞의 물건에 영향? 납득이 가지만
내 공업이 미국 돌멩이에 영향? 그 돌 앞에 있는 사람이 영향 미친다면 모를까.. 납득 안 가
그래서 유식의 일체유심조 논리(唯心)는 반쪽짜리
이것을 완전하게 밝히기 위해 통장주인이 아니라 은행으로 들어가야
만물이 각자 개인통장 있고.. 그 모든 통장은 한 은행 소속이라는 논리
내 마음(통장)이 미국 돌멩이에 영향? 애매
그 돌 앞에 있는 사람 마음(통장)이 돌에 영향? 그래도 좀 납득 할만
그런데 그 통장 모두가 한 은행 소속이라면..
"사과씨에 의해서 사과 나왔다"(0) "사과씨에 의해서 배 나왔다"(X)
그러나 씨앗들이 있는 곳을 '마음'이라고 하면 "마음에 의해서 사과도 나오고 배도 나왔다"(0)
▶진여연기 (眞如緣起)
각자의 아뢰야식, 아뢰야식, 아뢰야식.. 있는데,
이것들을 관리하는.. 은행역할을 할 수 있는 근본이 무엇인가?
이걸 밝혀내면 "이것에 의해서 만물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초점의 변화: <업(중생의 행위)> → <아뢰야식(그 행위가 저장되는 마음)>
그런데 아뢰야식은 개인적인 "내 마음".. 여기에서 '내'자 빼버려..
각자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마음'의 근본= <진여식>
진여식은 깨달은 마음.. 자아가 사라진 상태('내 마음'에서 '내'자 빠져)
더 이상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비개인적, '은행'의 차원
진여연기: "진여식이 우주의 근원이다" (진여식=불성)
* 그런데 진여식(眞識)에서 어떻게 우리 윤회(妄識)가 시작?
여기에서 무명(無明)이라는 개념 나와 (기독교의 선악과)
진여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무명 없으면 안 되었을 것.. 그럼 진여연기가 아니고 무명연기 아닌가?
▶이것을 설명한 것이 화엄의 연기설, 법계연기 (法界緣起)
화엄에서는 연기설이 아니라 성기설(性起說)이라고 명칭을 바꾼다
연기설: "인연에 의해 일어난다" / 성기설: "본성에 의해 일어난다" (무명은 진여로부터 나왔다는 입장)
법계연기: "그 (만물의 본성인) 진여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 각 중생들. 그래서 우주의 창조자는 중생이다"
초점변화: 업 → (그 저장소) 아뢰야식 → (그 근본) 진여식 → (그것을 가지고 있는) 중생 (그 본성의 주체)
처음엔 '중생의 행위'였다가 돌고 돌아서.. '개개인 모두가 창조자' === 중중무진연기
진여연기설에선 아직도 진식과 망식(무명) 두 개의 개념으로 되어 있고,
무명에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 경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법계연기설에 오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진리가 드러나 있는 것'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입장 == 부처님 눈으로 바라보이는 세상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이미 성불한 부처님"이라는 관점
[행위를 바꾸어야 성불] → [진여심으로 돌아가야 성불] → [이미 성불한 부처] = 부처의 눈
'나무상주시방불'을 보고 보통 해석 "아, (나 말고) 성불한 부처님이 많고, 거기에 귀의하나 보다'
그러나 부처님 눈으로 볼 때는.. 그냥 모두가 다 부처
이렇게 '부처의 관점'을 엿보았으니까 만물을 부처님으로 섬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수행을 하겠다는 의미.
원래 천수경은 여기에서 끝.. 정삼업진언 등 4가지 진언은 원래 천수경에 포함 안 돼
스님들이 사시마지에서 삼보통청 의식을 할 때 하는 부분이다
(천수경 단독으로 독송할 땐 안 하고, 다른 어떤 의식의 전부분으로 천수경을 독송할 때만 하는 부분)
여기까지는 중생이 부처 되는 수행을 하였지만
여기서부턴 부처의 관점 엿본 뒤에.. 부처에 걸맞지 않는 것을 버리는 수행을 한다
*팔정도: [정견..정정] = 법륜(순환구조)
순환구조 아니라면 [정견..정정,정견] 구정도가 될 것이다
(앞 정견=정견의 이해 / 뒤 정견=정견의 체득)
*육바라밀도 이와 같은 순환구조 [보시..지혜,보시]
'무주상보시'의 무주상(無住相)은 반야 -- 반야를 기반으로 한 보시
*인도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순환적 세계관(바퀴)
첫 번째 바퀴와 두 번째 바퀴는 다르다
"천수경 읽기 전과 후가 똑같다면 공부 안 한 것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끝나자마자 결계(사방찬) 있는 것처럼
천수경 전체가 끝났을 때 그 불안(佛眼)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한 결계를 하는 의식이
'나무상주시방승' 이후의 네 가지 진언 (천수경 독송으로 높아진 자기 자화상, 자존감 유지에 필요)
- 무엇을 하든, 소원이 있을 때도 자존감 높은 상태에서 해야 잘 성취되지
낮은 자존감으로 하면 잘 안 된다 (브레이크 풀지 않고 운전하는 격)
따라서 소원성취 기도를 하더라도 자존감 높이는 것이 우선
* 탄허스님 가르침은 연기가 아니라 성기(性起)이다. 연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세계는 법성(法性)의 세계이다. <문광스님 소개>
▶다시 정리한 자료 http://cafe.daum.net/santam/IQZL/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