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0. 주일예배설교
시편 77편 1~20절
불안한 나, 변함없으신 하나님
■ 우리가 삶에서 기대하는 것은 ‘요지부동(搖之不動)’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믿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좌불안석(坐不安席)’입니다. 적은 바람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섭니다. <불안>을 원치 않지만, <불안>이 일상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운명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불안의 이유입니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내 죽음이 언제 어떻게 올지에 대한 두려움이 불안의 이유입니다. 자기관리를 잘해도 갑자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 이에 불안이 일상에 있습니다.
또 하나의 불안의 이유는, ‘공허함과 무의미함’입니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예측한 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불안입니다. 그리고 정작 목표를 달성하고 보니 별거 아니라는 허무함/공허함이 가져오는 의지 상실/무의미함의 불안입니다. 이것이 일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불안의 이유는, ‘죄의식과 정죄’입니다. 결심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의식과 바르지 않아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정죄가 불안의 이유입니다. 결국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역시 한계 안에 갇힌 자신을 탓하게 되는 불안입니다. 일상이 불안입니다.
이렇게 ‘운명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허함과 무의미함’, 그리고 ‘죄의식과 정죄’가 불안의 이유입니다. 과연 불안은 이처럼 일상이기에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요? 불안은 신앙으로도 해결 안 되는 문제일까요? 혹시 하나님도 해결 못하시는 것인가요?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도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어떤 답을 찾았을까요? 오늘의 궁금함입니다.
■ 본문의 시편 기자도 <불안>에 사로잡혔는데, 그 이유가 ‘운명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예측하고 계획했던 모든 것이 뒤틀어졌습니다. 결국, 원치 않는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계획을 기도하며 믿음 안에서 세웠던 사람이기에,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2절입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그런데 시편 기자의 기도는 표면적으로는 간절한 기도이지만, 속은 추슬러지지 않는 불평으로 가득한 기도였습니다. 맞잡은 손을 쥐어짜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는 있지만, ‘잘될 거야’라는 친구들의 말이 오히려 짜증 날 뿐이었습니다.
이 짜증 속에 수많은 의심의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7~9절입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그리고는 매우 충격적인 폭탄을 터트리고 맙니다. 10절에 “이는 나의 잘못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회개일까요? 반성일까요? 아닙니다. 한탄이고, 푸념입니다. 말로는 자신이 못나서 지존하신 분께서 그 오른손을 거두셨기에 이 모든 고난이 왔다는 것인데, 실은 푸념이고 한탄이고 원망입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운도 없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내가 필요로 할 때면 어김없이 일을 쉬시는구나!”
그런데 시편 기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푸념과 한탄과 원망을 다 쏟아놓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경험’입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행적들을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13~15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무엇보다도, 극심한 곤경 중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속량/구원하셨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실이 감격스러웠던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답을 찾아냈습니다. 16~19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16~18절은 주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에 대한 찬양입니다. 그러나 19절은 찬양 중에 찾은 답입니다. 그 답은, 하나님은 한결같으셨다는 것입니다. 결코 변함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다를 밟고 다니셨고, 대해를 건너질러 달리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건에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라봤던 것입니다. 그러니 “운도 없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내가 필요로 할 때면 어김없이 일을 쉬시는구나!”라는 불평을 내뱉을 수밖에!
이제 사실을 깨달은 시편 기자는 회개와 함께 확신에 찬 20절의 고백을 합니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맞잡은 손을 쥐어짜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잘될 거야’라는 친구들의 말에 짜증 냈던 자신을 회개하며 고백한 것이 20절입니다. “양 떼처럼 당신 백성을 모세와 아론의 손을 빌려 인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불평했던 모든 것,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불안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내 불안의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 있었다면, 이 이유를 제거하면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불안의 이유를 제거하면, 분명 불안에서 해방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정리해 보죠.
1. 우리가 인간이라는 한계 안에 있는 한, 불안은 불가피하고, 일상이라는 실존은 불안의 요소로 가득하기에 불안을 느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인도 실존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니 불안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불안의 실존을 인정하는 것이 불안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 됩니다. 역설적입니다만, 사실입니다. 이로써 불가피한 불안은 넘어설 수 있는 실존이 됩니다.
이렇게 한계를 인정하고 나면, 불안을 가져오고, 불안을 가중시키는 부정성을 직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는 시편 기자가 고백한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와 같은 확신입니다. 이로써 불안을 넘어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확신은 ‘용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긍정을 끄집어내는 것이니 ‘용기’입니다. 자신을 긍정하려는 것을 방해받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내는 것이니 용기입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맞선 것은 거대한 조직과 엄청난 물량이었습니다. 맞서 보면, 숨이 멎을 만큼 어마어마한 조직과 물량이었으니, 그 누구도 감히 맞서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마치 골리앗을 대하는 소년 다윗처럼 그것들과 맞섰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확신한 가운데 맞섰습니다. 이 확신은 용기였습니다.
물론 이 투쟁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 용기를 갖고 이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온갖 방해와 부정적 시비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부정성에 맞섰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주는 긍정의 힘 때문이었고, 이를 끌어낸 것은 용기였습니다.
3. 우리는 이러한 용기를 ‘존재의 용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존재의 용기는 존재의 시작이신 하나님 안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할 때도, 여전히 내 삶의 길에서 흔적을 남기시며 일하시는 하나님 안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용기를 회복한 사람의 확신입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그리고 20절은 확신에 찬 삶을 산 사람의 간증입니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참으로 이러한 확신과 간증은 용기가 주는 결과입니다.
■ 우리는 원치 않는 결과를 만날 때마다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는 불안을 가중시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려는 애씀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늘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불안과의 투쟁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을 바라봄으로 얻는 용기입니다. 늘 한결같으신 하나님, 결코 변함없으신 하나님, 바다를 밟고 다니시는 하나님, 대해를 건너질러 달리시는 하나님, 모든 사건에 흔적을 남기시는 하나님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는 용기가 불안을 이기는 힘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시길 소망합니다. 이를 통해 불안 가득한 세상에서 불안을 넘어서는 평안을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참으로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계시는 주님의 흔적을 매번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십니다. 여러분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