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왕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박씨의 시조이며 일명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
비는 사량(沙梁) 출신인 알영부인(閼英夫人)이다.
고조선의 멸망과 잇따른 북방의 정치적 격변 등에 따른 유이민의 파동으로 남부지역에는 많은
소국이 형성되었는데, 경주평야를중심으로 급량(及梁)·모량(牟梁:혹은漸梁)·사량(沙梁)·본피(本彼)·
한지(漢祗:혹은 漢岐)·습비(習比) 등 6족의 후예들이 사로국(斯盧國)을 형성, 양산촌(楊山村)·고허촌(高墟村)·
진지촌(珍支村)·대수촌(大樹村)·가리촌(加利村)·고야촌(高耶村) 등 6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삼국유사〉·〈삼국사기〉에 의하면,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 나정(蘿井)
곁 숲속에서 큰 알을 발견했는데, 알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와 이 아이를 길렀다.
그의 나이 13세가 되던 해 6촌의 촌장들은 그의 출생이 신이(神異)하다고 하여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나라이름은 서라벌(徐羅伐:徐伐·徐那伐)이라 하고 즉위와 동시에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알영은 사량촌의 알영정 가에 출현한 계룡(谿龍)이 그 왼쪽 갈비에서 탄생시킨 용녀라고 한다.
즉위 후 왕비와 함께 6부를 돌며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으며, 서울을 금성(金城)으로 정하고 성을쌓았다.
죽은 뒤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는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다.
박[瓠]과같이 생긴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朴)이라는 성을 붙였으며, 혁거세(赫居世)는 이름이 아닌
존호(尊號)로, 불구내라고 한다.
이는 '혁'(赫)을 뜻으로읽고 거'(居)를 음으로 읽은 '불구'와, '세'(世)를 뜻으로 읽은 '내'를 합한 것으로,
즉 '밝은 세상'의 뜻이다.
문무왕
삼국을 통일시킨 신라의 문무왕은 무열왕과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문무왕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법민이고
비는 파진찬 선품의 딸 자의왕후입니다.
신라의 제 30대 왕인 문무왕은 외모가 빼어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고 합니다.
문무왕은 650년 진덕여왕의 명으로 당에가 외교활동을 하며
대부경을 받았고 654년 파진찬으로 병부령을 역임했으며
655년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신라의 문무왕은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큰 공을 세웠습니다.
문무왕은 661년 무열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으며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
복신,도침등의 백제 부흥 운동을 저지하였습니다.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여
당나라군과 함께 평양성을 함락하며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당나라가 고구려,백제,신라의 영토를 모두 자기들 영토로 삼으로려 하자
신라의 문무왕은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원조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전개해 나갔고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며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
문무왕의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하며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고
당나 문화를 수입하는데도 힘을 기울여 664년 부인들의 의복을
당제에 따르게 하였고 당악을 수입하였으며 674년 당나라의 역술을 본떠
신력을 제정하여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라의 문무왕은 삼국통일 후 군사 조직인 9서당 편제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672년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주제의하나인 5주서를 설치하는등
문무왕의 체제 정비 작업은 675년 백사와 주구의 동인을 제작 반포한데서
잘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문무왕은 의상으로 하여금 부석사를 창건하게 하였으며
681년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이 죽자
경주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안장하였고 시호를 문무라 하였습니다.
경덕왕
경덕왕은 신라 제 35대 왕으로써 강대해진 귀족 세력을 누르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자 통치 제도를 확충하고 중국식으로 개혁 하였으며
신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답니다!!
경덕왕은 성덕왕의 아들이며 효성왕의 동생 입니다.
745년에는 소년감전 등을 설치 하였고 747년에는 중시를 시중으로 바꾸고
이를 중심으로 제도를 개혁해 나갔답니다.
우선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을 연구하도록 하였고
과학 기술과 법률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749년에 천문학사와 누각박사를 두었습니다.
경덕왕 떄에는 일본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으나
사신을 파견 할 정도로 규류가 활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