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전,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대관령 인근 배수로에서 희한한 생물을 봤다. 가락국수마냥 얇지만 30
Cm에 이르는 긴 몸을 고인 물속에서 꿈틀대던 것이 하도 신기해 같이 산행하던 이들을 불러 무슨 종인지 물어 봤기에 기억이 선명하다. 나중에 이 종이 곤충에게 기생하다 산란기가 되면 숙주를 조정해 물속으로 자살하게 만드는 연가시란 것을 알게 됐다.
지난 4월 강원도 태백 구문소의 물이 고여 있는 바위틈에서도 도롱뇽 알주머니 사이에서 죽은 듯 유영하고 있는 연가시를 봤다. 10여년이 넘게 현장 활동을 하면서 웬만한 생물들은 직접 만져도 봤지만, 연가시는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함께 연가시를 본 이도 그저 주변의 나뭇가지로 살짝 들어 관찰 했을 뿐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지난해 개봉된 영화 <연가시>의 탓이 컸을 것이다.
영화 <연가시>는 곤충이 아닌 포유류에게 기생할 수 있는 변종 연가시를 주요 모티브로 하고 있다. 도심 하천으로 새벽 운동을 나간 젊은 부부는 물속에서 가죽과 뼈만 남아 있는 시체를 발견하곤 기겁한다. 국과수에는 비슷한 시체가 이미 여러 보고된 상태. 다음 날 서울 마포구인근 홍제천에서 집단으로 시체가 발견되고,
강원도 계곡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급박해 진다.
화학분야 박사 출신이나 경찰인 동생 재필(김동완 분)의
주식 투자에 휘말려 제약회사 영업사업으로 생활하고 있는 재혁(김명민 분)은
골프 접대 중 구갈 증상을 보이던 병원 원장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혹해 한다. 같은 사건이 전국 하천에서 발생하면서 정부 차원의 비상대책본부가 꾸려진다. 이번 증상의 특징이 수개월 동안 폭식을 하지만 체중은 변하지 않고, 극심한 구갈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언론 보도를 보면서 재혁은 자신의 아내 경순(문정희 분)과 아이들이 밤늦도록 폭식을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불안해한다.
비상대책본부는 이런 증상이 사람에게 기생하는 변종 연가시라는 것과 모든 원인이 강원도 계곡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당장 특효약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 사이 산란기에 접어든 변종 연가시는 곤충을 조정하듯 사람들을 물로 유도한다. 도시 하천은 삽시간에 시체들로 넘쳐나고, 하천을 찾지 못한 이들은 수족관과 심지어
화장실 변기에 빠져 죽게 된다.
급기야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전국적으로 10만 명이 확증 판정을 받았고, 최소 100만 명이 의심 상태라는 것이다. 변종 연가시 감염자들은 격리 수용되는데, 재혁의 아내와 아이들도 포함된다. 재혁은 가족들과 영영 이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재혁이 특효약을 구하는 고난과 제약 회사 대표의 탐욕스런 음모를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연가시에 감염돼 수족관에 빠져 사망한 사망자(영화 '연가시' 중)ⓒ영화 '연가시' 중 한 장면
인간에게 생명이자 죽음인 물 영화 <연가시>는 인간의 탐욕으로 재난 상황이 극대화 되는 장르적 규칙을 따르고 있다. 또한 연가시에 감염된 시체가 바다에 떠다니는 모습을 통해 속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규칙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재난 영화에서 사람들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코드는 쓰나미, 화산 폭발, 행성 충돌, 돌연변이 괴수에서부터 벌과 개미 등과 같은 곤충 등 다종다양하다. 영화 <연가시>의 공포 코드는 단연 변종 연가시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영화 <연가시>에서 보다 근원적인 공포는 바로 ‘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뜨거운 한 여름
물놀이 갔던 계곡에서 사람들은 변종 연가시에 감염되고, 연가시의 산란을 위해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심한 갈증에 물을 많이 마시게 되면 곧 바로 죽음에 이르는 신호다. 영화 <연가시>에서 격리 수용소에 갇혀 있던 이들을 물을 갈구하다 못해 화재 경보를 작동시키려 한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영화와 함께 공개된 웹툰 <연가시>는 물에 대한 공포를 보다 직설적으로 풀고 있다. 변종 연가시가 산란을 위해 수분이 70%인 인체로 기어들어간다는 설정이니 말이다. 생명 활동의 필수적인 물이 죽음의 물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는 ‘아직도 내가 니 엄마로 보이냐’라는 괴담에서처럼 익숙한 것의 반란
과도 같은 것이다. ‘물이 생명’이라는 의미는 물이 생명을 부여할 수도 있지만, 또한 생명을 앗아 갈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악어>, <섬> 등에도 물은 생명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이다.
영화 연가시, 실생활서도 일어날 수 있다
물의 공포를 전해주는 영화 '연가시'ⓒ연가시 영화포스터
실생활에서도 물이 순식간에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1991년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발생했다. 페놀이 유출되자 수돗물에서는 참기 힘든
악취가 나서 시민들은 커다란 고통을 받았다. 당시 환경처는
수출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한 달도 안 돼 페놀 유출 당사자인 두산전자의 조업 재개를 허가해 줬으나, 또다시 페놀 유출 사건이 발생하는 일이 벌어졌다.
“페놀 사건이 발생하자 TV,
라디오, 신문 등은 물론이고, 행정기관에서 차량으로 동네 곳곳을 돌면서 수돗물을 먹지 말라고 계속 방송을 했었어요. 어른들은 갈증이 나도 어떻게든 참아 냈지만, 아이들은 잠시만 한눈을 팔면 바로 수도꼭지를 틀어서 물을 마셨어요. 말려도 어느 틈에 달려가서 물을 마시는 통해 울면서 수돗가를 밤새 지켰었어요”
그때 당시 대구 지역의 한 고아원에서 자원 활동을 했었다는 환경운동연합 한 선배의 이야기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2005년 인도 구자라트 주를 방문했을 때도, 끔직한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도의 구자라트 주와 뭄바이 사이에는 화학공장, 피혁공장 등 산업공단이 집중돼, 자금이 흐른다는 의미로 ‘Golden corridor(황금의 회랑)’로 불린다. 그러나 공단에서
지하수를 무분별하게 뽑아 쓰다 보니 지하수 고갈과 수질 오염 문제가 심각해 졌다.
이 지역에서는 농작물 재배를 공장 폐수를 이용해 하고 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식수로 사용되는 지하수의 색이 폐수에 오염돼 노란색과 붉은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이는 당장 마실 물이 없는 상황에서 차마 “이 물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이 물이 오염된 것을 알면서도 마시라고 주민들에게 말한다고 한다.
최근 낙동강에서 또다시 짙은 녹조라테가 확인됐다. 정수과정을 통해 웬만한 물질을 걸러 낼 수 있기 때문에 수돗물 이용에는 큰 지장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정수 과정에서 소독제 과다 투입 등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소독 부산물이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수돗물 악취를 유발하는 지오스민 등은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수 과정의 단계를 많이 거친 다는 것은 그만큼 세금을 더 많이 쓴다는 이야기가 된다.
4대강 사업으로 수질이 개선된다고 떠들던 그 많던 입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지 궁금하다. 혹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