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PLO 평화협정(오슬로 협정) 서명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땅에 나라를 세움으로써 시작된 아랍권과의 분쟁은 1973년까지 모두
4차례의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던 전쟁도 1979년 이집트가 아랍권에서는 처음
으로 이스라엘과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평화협정을 1979년 3월 29일 맺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가장 큰 이슈는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에서의 철수와 팔레스타인 자치계획의
수립이었다. 이스라엘의 철수는 1982년에 마무리되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의 계속적인 무력투쟁으로 진척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1991년 10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미국, 소련,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함께 모여 중동평화
를 위한 국제회의를 가졌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분쟁 당사자인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와
이스라엘이 직접 대화하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1992년 집권한 이스라엘의 온건파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영토와 평화의 교환(land-for-peace)'이라는 구상을 추진하면서 평화를 위한 양측의 대화는 급물살을 탔다.
1993년 8월 20일 워런 크리스토퍼 당시 미 국무장관 등의 중재로 PLO와 이스라엘 양측이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수 차례 비밀 협상을 가졌고 곧이어 9월 13일 워싱턴에서 양측이 합의안에 서명함으로써 두
민족간의 평화와 공존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좌로부터 야세르 아라파트, 시몬 페레스, 이츠하크 라빈
이날 백악관 잔디밭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클린턴 미 대통령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 등 관련 당사자 수뇌와 각국 외무장관, 외교사절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PLO의 아부 마젠 아랍-국제담당 국장이 양측을 대표해 서명했다
. 조인식은 전세계 1백여 나라에 생중계됐다.
이날 양측이 서명한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시와 가자지구에 대한 제한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협정, 이스라엘과 PLO의 상호 실체 승인 등을 주요골자로 하고 있다.
체결의 주역인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1994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하지만 라빈 총리가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에서 자국
극우파 청년 이갈 아미르에게 암살되고, 이스라엘 강경파 집권 후 팔레스타인과의 무력 충돌이 확대되는
등 평화협정은 깨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