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가 지키는 존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운동을 불러 일으킨 사람이 바로 존 웨슬리였습니다.
존 웨슬리가 태어난 18세기에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사조가 전 유럽을 풍미하고 있었습니다.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그 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합리성을 더 신뢰하였고,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물질중심의 가치관이 퍼져나가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던 종교개혁의 신앙은 힘을 잃었습니다.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수많은 일반 백성들은 빈곤과 무지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런던 거리의 가게들 가운데 4분의 1이 술집이었고, 도박과 매춘이 성행하였습니다. 폭도들이 횡행하여 날이 어두워지면 밖에 다닐 수 없었고 감옥은 사형수와 죄수들로 넘쳐났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너무나도 무기력하였습니다. 합리주의와 인간의 이성을 더 신뢰하는 시대 풍조 속에서, 교회는 오직 낡은 전통과 형식적인 신앙에 매여 있을 뿐, 타락한 신앙이나 사회 윤리를 바로잡을 능력이 교회에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웨슬리는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고,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경건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쳐치 컬리지에 진학했고, 22세 때 성직자가 되기를 결심하였습니다. 내 생명을 과연 무엇을 위해 헌신할 것인가?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나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곧 마귀에게 헌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오직 내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평생을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소원하며 성결의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1725년 목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컬리지의 fellow로 선발되어,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소수의 학생들과 함께 Holy Club을 조직하여 엄격하고 규칙적인 경건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병자들을 방문하고 감옥을 찾아가서 전도하였습니다. 너무나도 규칙적이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그들을 일러 다른 학생들은 Methodist(규칙주의자)라고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에 감리교인을 뜻하는 자랑스런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735년 존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직하고, 신대륙 개척지인 조지아에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그는 미국의 야만인들인 인디언들을 영혼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구령 열정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그의 선교사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옥스포드 출신으로 촉망받는 젊은 학자요 사제로서, 자신의 학식과 의지와 능력을 확신하였습니다. 설교만 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오게 되리라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아직 미혼이었던 웨슬리는 한 여성과의 스캔들에 휘말렸습니다. 2년 만인 1738년 초에 쫓기듯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착 후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미국인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스스로 생각해볼 때, 자신은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였습니다.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고 나니, 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 영적인 자신감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 그의 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1738년 5월 24일이었습니다. 그의 일기에 보면, 이날 저녁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한 집회에 참석했는데 한 젊은이가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인간은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고 하는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구원을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나의 공로나 업적, 내가 도적적으로 완전한 삶을 살아가기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온전히 없이 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하여 주셨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우리는 ‘웨슬리의 회심’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웨슬리의 생애는 바로 이 체험 이전과 이후로 확실하게 나누어집니다. 이전에 그의 삶은 물론 영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성실하였지만, 자기 의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경건에 힘쓰고 전도와 구령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에게 찾아온 것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열등감이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올더스게잍 체험 이후에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그는, 자신의 힘이나 의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기 의를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만을 의지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더욱 하나님의 구원받는 자녀로 헌신하며 나아갈 때, 확신에 찬 그의 설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거듭남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부흥 운동을 통하여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무력했던 영국 교회와 사회가 변화되고 개혁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언자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때는 유다 왕 웃시야가 죽던 해라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웃시야왕은 16세 때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처음에는 이 왕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졌고 안정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나라가 강성해지니까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어기고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직접 향단에 분향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하면서 고통 속에 나병환자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의 고문 역할도 하고 정치적인 식견도 있고 국제 정세도 밝았습니다. 당시는 유다왕국의 북쪽에서 앗수르 제국이 강력하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웃시야 왕이 죽고 그 아들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도 있었겠지만, 격랑이 예상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조국의 장래에 대한 우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그 놀라운 체험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체험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어느 날 성전에서 환상을 보았는데,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주를 모셔 서있는데 그 천사들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어서,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었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었고, 두 날개로는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그 노래 소리로 인하여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연기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 신비함에 이사야는 놀랐습니다. 어쩌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곳 성전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이렇게 직접 체험하고 느낀 것이 처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 민족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신을 섬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 단어로 말한다면, ‘풍요’와 ‘다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버리고 자꾸만 바알을 섬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알신은 백성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약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풍요와 다산이 목적인 바알 신앙에는 신앙적인 윤리나 도덕이 존재할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의 바알신이나 이방의 다른 신들에 비하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날 성전에서 이사야가 체험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둘째로, 이사야는 이 체험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것을 경험하고 난 이사야의 처음 반응은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비로소 자기 자신의 실존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중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짓는 죄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행동으로 짓는 죄도 있고 마음으로 짓는 죄도 있습니다. 입술로 짓는 죄도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따라서 겉 다르고 속 다른 말을 쉽게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도 있고, 자기를 변명하고 상대방을 기만하는 말도 합니다. ‘말’로 짓는 죄가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라고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곧 그 인격이 부정하다는 것이고,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중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죄 가운데에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세상에 살다보니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체험하고 난 후에 비로소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과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부정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니 자신이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타락한 이성입니다. 처음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우리의 이성은 타락한 이성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마치도 자신이 하나님인 듯 착각하고, 자기 변명과 자기 합리화에 능숙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것이 마치 원죄와 같이, 우리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죄의 본성이 사회화되고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런 가운데 아무리 우리가 나를 알고자 하여도 진정한 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속이고, 스스로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자기 유익만 구하고 자기 의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마주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소망은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데 있습니다. 자기를 보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운 줄 착각하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셋째로, 이사야의 하나님 체험은 속죄의 체험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중에 살아가고 있구나”.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절망한 것입니다. 스스로 부정한 존재이며, 내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 또한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랍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불 하나를 화저로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죄로 인한 수치와 절망을 제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삼으셔서 십자가에 못박으셨고, 그 희생의 공로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셔서, 죄와 수치심을 떨쳐버리고, 죄책감을 씻어버리고,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체험한 이사야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나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행할 것인가?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그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 평생을 두고 헌신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걸 일러서 소명이라 말하고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을 우리는 ‘소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패배주의’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한다 한들, 세상이 변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미래를 바라볼 때도 희망도 없다고 체념합니다. 물질중심의 가치관과 문화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가 꿈꾸는 것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인생의 가치와 의미와 소명을 찾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의 안정된 생활이나 자아 성취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나의 사명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러한 부르심과 응답은 선교사나 목사와 같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또한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오는 부르심이요 또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그 삶의 자리는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그곳은 곧 예배의 자리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보낼 자를 찾으십니다. 구원의 온총을 체험한 존 웨슬리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체험한 이사야처럼, 단순한 자아실현이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담아내며,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거룩한 소명을 감당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고, 오늘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삶의 자리임을 고백하며, 나를 여기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을 위해 살아가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