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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성도(成道; 정각 이룸)와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 (2022.10.8. 재수정)
오늘날 변질되지 않은 붓다의 가르침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Gautama Buddha, BC 624 ~ 544)를 바르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신화나 전설로서의 붓다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와 붓다의 변질되지 않은 바른 가르침(正法)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들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필, 윤색, 각색된 경전과 위경(위작 경전), 특히 붓다 사후 500년이 지난 AD 1세기 이후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작자 미상의 수많은 위경(위작 경전)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法, 담마, 다르마; 설법, 경전)에 대한 왜곡, 변질이 포함된, 정각(正覺; 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저술한 수많은 논장(아비담마, 아비다르마, 아비달마, 주해서, 주석서, 복주서 등의 해설서) 등과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여러 나라의 수많은 불전문학(佛傳文學)에 기록된 것들을 붓다의 가르침이나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당신 사후에 ‘당신(붓다)에 대한 우상화’(형상의 우상화, 붓다/부처의 신격화)와 ‘당신(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우상화’(관념의 우상화, 가르침의 절대화)를 통해서 종교(Religion), 종파 따위를 만들고 그것에 집착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경계했다. 붓다는 종교(Religion)의 창시지가 되기를 거부하는 의사를 누누이 밝히고 강조했다. 종교(Religion)[註1]로서의 여러 불교 그리고 여러 종파는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사실 붓다는 종교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과학자에 가깝다.
<각주 : 종교(宗敎) vs. 종교(Religion)[註1]
종교(宗敎)는 '(산)마루 또는 근본 종(宗) + 가르칠 교(敎)'의 합성어로, '산 정상(마루, 宗)에서 바라보듯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근본(宗)이 되는 훌륭한 가르침(敎)'이라는 뜻이다. '종교(宗敎)'라는 용어는 5세기경에 중국에서 '붓다(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동양 문화권에서는 신(神)과는 무관하게 '근본이 되는 훌륭한 가르침'이란 의미로 쓰여져 왔다.
19세기 말에 서양의 종교학(신학, Religious studies or Studies of Religion)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Religion'을 번역할 때, 같은 의미의 동양 문화권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이,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지칭하던 용어인 '종교(宗敎)'를 'Religion'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사용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Religion'의 어원은 ‘re(다시)+lig(신과 잇는, 결합하는)+ion(것)’이다. 이러한 'Religion'(다시 신과 결합하는 것)을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지칭하던 용어인 '종교(宗敎)'라고 번역한 것은 번역의 오류다.
국어사전에서는 Religion의 번역어인 종교를 ‘신(神)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그런 힘에 대한 믿음(신앙)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종교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과학자(물리학자)가 관찰 경험을 통해서 우주자연의 물질세계의 보편적 이치/법칙에 대한 '경험적+합리적'(=과학적)인 지식체계를 세우는 학문인 과학(물리학)이 종교(Religion)가 아니듯이, 붓다가 수행의 깊은 관찰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고 설(설명)한 우주자연의 물질-정신세계의 실상(실제 상태/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에 대한 '경험적+합리적'인 가르침인 불교(佛敎; 붓다佛의 가르침敎)는 종교(Religion)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신격화된 부처와 신격화된 보살에 대한 믿음(신앙)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는 기복불교는 종교(Religion)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Religion'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종교(宗敎)'가 아니라 '신교(神敎; 신神의 가르침敎)'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용어가 주는 혼란과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자신은 법(法; 실상과 진리), 즉 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만든 자(신神)가 아니라, 과학자가 관찰 경험을 통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듯이, 수행(팔정도 바와나bhāvanā[註2],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에 의한 통찰(깊은 관찰) 경험을 통해서 우주자연(유정과 무정, 삼라만상)의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발견하여 깨달은 자일 뿐이고, 그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이며, 자신의 가르침은 그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 또는 강 건너 깨달음의 언덕(해탈의 언덕, 피안; 완전한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을 향해 가는데 필요한 뗏목일 뿐이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부처)에 대한 우상화(신격화)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우상화가 붓다 사후에 2500년 동안, 여러 가지 형태(위작된 경전, 왜곡된 논장/아비담마/아비달마, 불상, 탱화,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불전문학 등)로 계속되어 왔고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각주 : 팔정도 바와나bhāvanā[註2]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팔정도八正道(정각에 이르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를 '수행(바와나bhāvanā; 닦는/계발하는 수행)'의 관점에서 계戒(실라sīla; 정어·정업·정명), 정定(사마디samādhi; 정정진·정념·정정), 혜慧(빤냐paññā;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고, 설법 시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였다. '실라(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는 그냥 실라.
'팔정도 바와나bhāvanā, 즉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빤냐(혜慧; 정견·정사유)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한문 번역경전식 표현으로 말하면 '계행戒行-정행定行-혜행慧行'(계戒-정定-혜慧를 닦는 행行)이고, 고대인도어로 말하면 '실라-사마타-위빠사나'(실라-사마디-빤냐 바와나)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붓다의 생애 속에는 신화적, 전설적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AD 1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작자 미상의 수많은 위작 경전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붓다의 말씀(가르침, 설법)을 기록했다는 이른바 초기 경전들(니까야, 아가마, 아함경집) 속에조차도 후세 사람들에 의해 가필(加筆), 윤색(潤色), 각색(脚色)된 부분이 일부 있다. 이렇게 후대에 변질, 변형된 부분을 되도록 배제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서의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 가능한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깨달음의 언덕(해탈의 언덕; 완전한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을 향해가는 데 매우 필요하고 중요하다.
붓다의 성도(成道; 정각 이룸)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고대인도의 소수 지배계층인 브라만계급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붓다가 활동했던 갠지스강(항하恒河) 유역을 포함한 인도대륙 중북부지역에서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던 고대인도 민중어인 마가다(Magadha)어로 설법을 했다(마가다어는 인도대륙 중북부지역에서 당시에 가장 큰 국가였던 마가다국의 민중어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가다국의 패망과 함께 마가다어는 사장되었고 마가다어와 가장 유사한 고대인도 민중어가 빠알리(Pāli)어인데, 이 빠알리어가 후대 제자들이 붓다의 말씀(가르침, 설법;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경에서 부터 마지막 설법인 대반열반경에 이르기까지)을 기록하여 모아 놓은 것이 빠알리어 경장(經藏; 경전 모음집, 니까야Nikāya)이다. (빠알리어는 붓다의 말씀/가르침/설법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던 고대인도 민중어였기도 하다. 참고로 2001년 기준으로 인도에는 총 3,372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이 중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 중인 언어는 216개, 헌법이 인정한 공영 지정 언어는 22개이다)
붓다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 줄임말로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후의 과정, 이른바 붓다의 성도(成道; 정각 이룸) 과정은 빠알리어로 기록된 맛지마니까야(中部)의 36번째 경(MN36)인 《삿짜까 경(Saccaka Sutta), MN36; 이 경은 자이나교 교주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가 질문한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에 관한 질문에 붓다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짐. 이 질의응답 중에 붓다(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정각을 이루게 된 전후 과정을 삿짜까에게 설(설명)한 것이 있음》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 경전 《삿짜까 경(Saccaka Sutta), MN36》에 있는 붓다의 성도 과정에 관한 내용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단계별 길들임 경(Dantabhūmi Sutta), MN125; 이 경은 '비구를 아라한으로 만드는 단계별 교육과정'을 설(설명)한 경전으로, 초선정부터 제4선정을 닦는/계발하는 사마타를 하고 정신작용과 물질작용을 식별한 후에 12연기와 신수심법을 관찰하는 위빠사나를 하여 숙명명과 천안명을 이룬 후, 누진(멸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여 누진명(멸진명)을 이룸으로써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단계별 교육과정을 설(설명)한 붓다의 설법을 기록한 경전》의 내용을 반영해서 (마왕 파순이 세 딸을 보내어 고타마 보살을 유혹하고 성도를 방해하는 등의 가필, 윤색된 부분을 걷어내고)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나는 우유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모든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마음의 탐색적 작용(위딱까)과 회귀반성적 작용(위짜라)이 아직 있는 상태(마음의 미세한 진동 또는 동요가 아직 있는 상태)에서, 신체 감각(오감각)을 멀리 떠난 삼매에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를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를 가라앉힌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비교적 거친) 희열(삐띠)을 가라앉힌 삼매에서 생겨나는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괴로움(둑카)도 즐거움(숙카)도 뛰어넘은 깊은 삼매에서 생겨나는 깊은 고요함(평정심; 우빽카)과 깊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이와 같은 선정에 들었다 나옴으로써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상기하여 관찰했다. 한 생, 두 생, 열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우주)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여러 겁의 여러 삶들을 관찰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용모, 신체)을 가졌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행복과 어떤 고통을 경험했고 어떤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는 어떤 이름과 어떤 모습을 가졌고..... 이처럼 한량없는 인과 연기적인 전생의 삶들을 상기하여 '있는 그대로'(여실히, 사실 그대로) 깊이 관찰했다. … 그리고 이렇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 이것이 내가 초경(初更)에 도달한 첫 번째 지혜(이른바 숙명명宿命明)이다."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이러한 지혜(숙명명)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 삶(중생; 생명의 무리)과 (법계/우주자연의) 모든 존재(유정과 무정)들의 생기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한 눈으로 인간을 뛰어넘어 뭇 삶과 (법계/우주자연의) 모든 존재(유정과 무정, 삼라만상)들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의 삼사라(saṃsāra; 순환, 윤회)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사실 그대로) 보았다. … 그리고 이렇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 이것이 내가 이경(二更)에 도달한 두 번째 지혜(이른바 천안명天眼明)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에 대한 관찰과 사유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것이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의 실존 양상(실상)인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삼사라(saṃsāra; 순환, 윤회)다'[고성제苦聖諦]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여실히, 사실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중생의 실존 양상(고苦의 순환)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이다'[집성제集聖諦]라고 나는 여실히(있는 그대로) 알았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이른바 아라한도의 혜慧 해탈),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했다(이른바 아라한과의 심心 해탈). 그리하여 모든 갈망(탐貪)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혐오(진瞋)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치痴)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다(이른바 아라한과의 혜慧 해탈).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이제 더 이상 생사 순환(삼사라saṃsāra;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나는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 삼사라(순환; 윤회)의 소멸이다'[멸성제滅聖諦]라고 나는 여실히(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 삼사라(순환; 윤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도성제道聖諦]라고 나는 여실히(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내가 삼경(三更)에 도달한 세 번째 지혜(이른바 누진명漏盡明 또는 멸진명滅盡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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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나는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
붓다는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 즉 숙명명, 천안명, 누진명(또는 멸진명)으로 정각(正覺; 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또는 증득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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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고타마 보살은 첫 번째 선정(초선정), 두 번째 선정, 세 번째 선정을 거쳐서 가장 깊은 선정 삼매인 네 번째 선정에 들었다 나와서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고, 맑고, 밝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타마 보살은 인과 연기적인 과거 생들을 추적 상기하여 '있는 그대로'(여실히, 사실 그대로) 깊이 관찰하고, 뭇 삶(중생; 생명의 무리)과 우주자연(법계)의 모든 존재(유정과 무정, 삼라만상)들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 삼사라(순환, 윤회)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사실 그대로) 깊이 관찰하고,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 삼사라(순환, 윤회)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사실 그대로) 깊이 관찰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과 세상(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상)을 여실히(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달리 표현하면, 고타마 보살은 먼저 사선정(四禪定)의 가장 깊은 삼매인 네 번째 선정 삼매에서 극대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 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정한 마음상태)를 이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 또는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거친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 ‘현재에서부터 과거’(달리 표현하면 12연기 순관), ‘현재에서부터 미래’(12연기 역관), ‘안과 밖’,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 ‘저열한 것과 수승한 것’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했다. 그리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정사유(바르게 사유)했다.
이런 과정으로 고타마 보살은 자신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여실히(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통찰지(통찰지혜)를 계발했다(닦았다). 그리하여 고타마 보살은 초경에 첫 번째 명지(明知; 밝은 지혜)인 숙명명을, 이경에 두 번째 명지인 천안명을 이루었다.
그럼으로써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여 삼경에는 마침내 지고(至高)의 밝은 지혜인 누진(멸진)명을 이루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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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으로 정각을 증득한 후 반조에 들어가서 4주(또는 7주) 동안, 모든 고(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지고(至高)의 행복, 완전한 행복, 열반락 속에서 좌선과 경행을 반복하며 반조하고,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의 성취를 반복하며 정각의 증득을 반조했다. 이렇게 고타마 보살은 고타마 붓다가 되셨던 것이다.
붓다의 성도(정각 이룸)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 완전한 자유)의 완성이며 현세에서 열반(닙바나Nibbana, 니르바나Nirvana; 완전한 행복)을 실현한 것이다. 성도하기 이전의 고타마를 보살이라고 하고, 붓다(Buddha, 불타佛陀, 부처; 깨달은 자)가 되신 후에는 세존(世尊; 바가와Bhagavā, 바가바트Bhagavat)이라고 존칭(尊稱)되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이다. 보리살타(菩提薩埵)는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보디삿따(Bodhisatta,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한문으로 음사한 것이다. 보디삿따(보디사트바; 보리살타, 보살)는 '깨달은 자(붓다, 불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자'를 지칭하는 고대인도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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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
삼명(三明)을 이루면 정각(正覺; 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한 자(붓다, 부처, 아라한)가 된다.
삼명(三明)이란 정각(또는 아라한과)을 성취한 사람이 갖게 되는 세 가지 밝은 지혜를 지칭하는데, 이 세 가지 밝은 지혜를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숙명명(宿命明), 천안명(天眼明), 누진명((漏盡明 또는 멸진명滅盡明)이라고 한역한다.
(1) 숙명명(宿命明) : 고타마 보살은 과거 생들, 달리 표현하면 ‘현재에서부터 과거’(12연기)를 여실히(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함으로써 갖게 된 숙명명으로 인과 연기적인 업(業; 깜마Kamma, 카르마Karma)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숙명명은 지나온 과거 생들을 추적 상기하여 있는 그대로(사실 그대로, 여실히)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한 것을 깊이 정사유(바르게 사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밝은 지혜인데, 인과 연기적인 업(業)에 대해 완전히 바르게 아는 밝은 지혜를 말한다. 과거의 전생들을 한문으로 숙세(宿世)라고 한다. 즉 숙명명(宿命明)은 켜켜이 쌓인 과거 전생들의 인과 연기적인 업을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하고 깊이 정사유하여 완전히 바르게 아는 밝은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의 다른 표현이기도한 인과응보의 이치/법칙 또는 업의 인과(원인 결과)의 이치/법칙을 여실히(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꿰뚫어(통찰하여) 보고 완전히 바르게 아는 것이다.
깊은 선정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으로 바왕가(존재 지속심; 마음의 기저에 흐르는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정신작용)를 추적해 올라가면 -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퇴행기법과 유사함, 그러나 퇴행기법처럼 타인에 의해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발한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사용해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바왕가를 추적해 올라가면 - 전생의 죽는 순간의 마음(사몰심; 전생의 업의 표상 또는 재생의 표상 또는 재생연결식이라 부르기도 함)을 포착할 수 있고, 그것이 무엇인가 식별하고, 그 원인으로 금생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즉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사몰심(또는 재생연결식)은 인과 연기적으로 상응하는 장소(태어나는 곳 또는 세상)에서 인과 연기적으로 상응하는 물질토대(몸)와 연기(인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여 다음 생인 금생이 계속된다.
요컨대, 과거 생들을 추적 상기하여 관찰하는 것은 심층의식(잠재의식/무의식/아뢰아식/바왕가)의 영역을 관찰하는 것이다. 즉 사마타의 '바른 삼매', 특히 가장 깊은 선정 삼매인 제4선정 삼매 상태에서 극대로 계발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사용해서 자신의 식識(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아식/바왕가)을 '거친' 수준의 표면의식에서부터 점점 더 '미세한(깊은)' 수준의 과거 생들의 심층의식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사실 그대로) 깊이 관찰하는(통찰하는, 꿰뚫어 보는) 것이다.
(2) 천안명(天眼明) : 고타마 보살은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함으로써 갖게 된 천안명으로 우주자연(우주법계)의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 자연의 이치/법칙)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천안명(天眼明)은 거리의 ‘가깝고 멀고’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의 모든 고락(苦樂)의 실상(實相; 실제實 모습相)과, 우주자연의 모든 유정(有情; 정신작용/마음이 있는 존재; 생명, 생물, 생명체)과 무정(無情; 정신작용/마음이 없는 존재; 물질, 무생물, 물체), 또는 물질작용(色; 루빠rupa)과 정신작용(名; 나마nama)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 변화를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하고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밝은 지혜로, 우주자연(우주법계)의 연기법(연기의 실상과 진리)을 완전히 바르게 아는 밝은 지혜를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천안명(天眼明)은 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여실히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한다. 즉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유정과 무정, 삼라만상)은 연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른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으며, 미시(찰나), 일상, 거시(성주괴공-일겁, 생로병사-일생)적으로 매 순간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의 순환(삼사라samsara; 윤회輪廻-바퀴처럼 돌고 돎)을 계속한다’는 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여실히(사실그대로, 있는 그대로) 꿰뚫어(통찰하여) 보고 완전히 바르게 아는 것이다.
요컨대, 숙명명과 천안명은 자신을 포함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 생물)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 물질, 무생물)의 실존 양상과 업의 인과(원인 결과)의 이치/법칙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사실 그대로)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한다.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그래서 세간(감각적 욕망의 세계, 욕계)의 조건 지어진(conditioned, saṅkhāra) 부질없는 것들에 집착한다. 중생은 그런 집착과 무명(실상과 진리를 여실히 모르는 무지; 인식의 착각, 전도된 생각)으로 인해 끊임없이 생사의 순환(삼사라, 윤회)을 계속하며 근원적 괴로움(둑카dukkha)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3) 누진명(漏盡明) : 고타마 보살은 누진(멸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여 갖게 된 누진(멸진)명으로 사성제(四聖諦; ‘고집멸도苦集滅道’ 성제聖諦) 전체를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마침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한 자(붓다, 부처)가 되셨다. (‘https://bolee591.tistory.com/16156243’ 도 한번 참조해 보세요)
이른바 숙명명으로 숙세의 연기적 인과관계(업)를 꿰뚫어 보고, 천안명으로 모든 무정(무생물)과 생로병사우비고뇌라는 근원적 괴로움을 품고 있는 모든 유정(생물)의 연기적 실상(실존 양상)을 꿰뚫어 보게 되면[고성제苦聖諦],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상;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완전히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존재의 연기적 인과관계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왜 그런 실존 양상(생로병사우비고뇌라는 근원적 괴로움; 결과)을 갖게 되는지 그 근본 원인을 완전히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다[집성제集聖諦].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알기 때문에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갈애)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게 된다[멸성제滅聖諦].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괴로움(고통, 번뇌)을 근원적으로 다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중생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그 길(방법)을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완전히 바르게 아시게 되었던 것이다[도성제道聖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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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o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really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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